소설리스트

곤륜마협-398화 (397/569)

2부 127화

우아한 표현

자고로 사람이란 멀리 내다보고 살아야 하는 법.

정광 역시 그랬다.

큰 그림을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걸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계획대로 풀릴 만큼 세상살이가 호락호락할 리 있나.

변수는 생기기 마련.

그에 맞춰 계획을 수정하거나 완전히 뒤엎고 새로 짜야 한다.

그리고 또 그 방향으로 꿋꿋이 발걸음을 떼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게 인생이다.

“이해했지?”

정광의 친절한 설명을 들은 섬랑은 한숨부터 쉬었다.

“후우. 그러니까 그때그때 바꾸고 행할 능력이 있으면 범인(凡人)과 다르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말씀이죠?”

“제멋대로라니. 자유롭게.”

“그게 그거잖아요.

“어쨌든 넌 멀리 보면서 살아. 나는 코앞만 보고 살아도 알아서 이어갈 수 있으니까.”

“…….”

섬랑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그렇다고 하는데 뭐라 하겠는가?

백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곱상한 흉수는 물수건을 던져 무인을 날려 버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벽까지 뚫고 사라지게 만든 엄청난 고수였다.

성질 같아선 당장 도륙을 내고 싶었으나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반대로 그래서 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광같이 무서운 고수가 주문을 했는데 무슨 배짱으로 모르는 척할까.

점소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왔다.

혹시 또 시킬까 두려워 여러 개를.

“대인. 여기 있습니다.”

“응. 잘 쓸게.”

“…….”

“왜? 할 말 있어?”

점소이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대인께서 벽에 큰 구멍을 내주신 덕분에 통풍이 무척 잘되어 객잔이 한결 쾌적해졌습니다만, 하필이면 겨울이라…….”

“주인 의식이 충만한 점소이네.”

“곧 제가 물려받을 거라서 말입니다.”

“아. 주인 아들이었어? 어쩐지. 충분히 보상할 테니 걱정하지 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금액은 대략…….”

“한꺼번에 계산할게.”

“……네?”

정광은 여러 개의 물수건 중 한 개로 양손을 꼼꼼히 닦은 뒤 위로 던져 올렸다가 받기를 반복했다.

“물수건도 많이 생겼겠다, 객잔 벽에 구멍을 더 뚫어야 할 것 같거든.”

“헉!”

놀란 건 점소이뿐만이 아니었다.

백의인들은 더했다.

“타앗!”

병기로 전면을 엄밀히 방어하며 마기를 쏟아냈다.

수장인 중년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말아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데.”

“이놈이 진짜!”

“안 싸울 거야? 겁나면 관 숙수와 섬랑에게 사과해. 내게는 몇십 배 더 많이 하고.”

“…….”

백의인들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먼저 시비를 걸어놓고 꼬리를 내렸다가는 앞으로 고개를 들고 살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칼을 입에 물고 엎어지는 게 낫지.’

‘아까 것은 암습이었어. 합공하면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을 거다.’

‘우습게 보이면 끝이야. 다른 길이 없어.’

중년인이 명했다.

“쳐라!”

정광도 명했다.

“내 거예요.”

후우웅-

탁자 위에 있던 물수건들이 하얀 유성이 되어 쏘아졌다.

콰콰콰쾅!

백의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객잔 밖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었다.

몇몇은 정광에게 쇄도해 살기와 마기를 가득 담은 병기를 내려쳤다.

“뒈져라!”

정광은 손에 쥔 물수건으로 화답했다.

하얀 물수건이 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아무런 파공음도 내지 않고 기묘한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매섭게 찔러오는 검신을 감았다.

휘릭-

검신을 잡고 회전했다.

빙글.

검이 그 힘에 휘둘려 옆에서 베어오던 도와 부딪혔다.

쩌엉!

물수건이 물고 있던 검을 놓은 뒤 검과 도를 쥔 사내들의 가슴을 때렸다.

퍼펑!

그게 시작이었다.

물수건은 형체 없는 그림자로 화했다.

은밀하게 후려치고 찌르며 사방을 휩쓸었다.

백의인들의 수장인 중년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설마…… 묵영편(黙影鞭)?”

콰쾅!

정광은 백의인 둘을 더 날려 버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걸 알아봐?”

중년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묵영권가(黙影權家)가 자랑하는 비전 편법, 묵영편이 정말 맞는가 보군.”

“뭘 또 자랑씩이나.”

“네가 그걸 어떻게 익혔지? 권 씨 일족은 모두 죽었…… 아!”

중년인은 섬랑을 힐끔 쳐다봤다.

“저 녀석의 아비가 있었지. 이름이 권오였나? 그가 네 사부냐?”

“아니.”

“그럼 어떻게…….”

“거래를 했어. 그에게 무공을 배우는 대가로 섬랑을 키워주기로.”

중년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권오는 술독에 빠진 폐인이 되어 골골대다가 죽었을 텐데.”

“결과만 말하면 쓰나. 처음 십여 년 동안은 열심히 수련했어. 그러다가 자신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걸 겨우 인정하고 술꾼이 됐는데…….”

정광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마침 대단한 인재를 발견한 거지. 사람들 이목을 피해 배우는 건 할 만했는데, 가끔 횡설수설해서 곤욕스러웠다니까.”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정광이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쿠차에서 살아봤어? 흘러나오는 소문 몇 개 주워들은 주제에 뭘 안다고 확신을 해?”

“…….”

중년인은 할 말이 없었다.

전대 진천마가 고이륵단가(庫爾勒段家)로부터 떼어내 독립성을 부여해준 이래로 쿠차는 쿠차만의 삶을 살았다.

그가 죽은 지 벌써 이십 년이 넘었지만, 그의 거대한 그림자는 아직도 교도들의 머리 위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어떤 마인도 쿠차에 가는 것을 꺼리는 실정 아닌가?

그런 찜찜한 마음을 억누르고 가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도 아니었고.

중년인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구나. 만약 이놈의 말이 정녕 사실이면…….’

교주가 좋아할 리 있나.

반기를 들었던 가문의 생존자가 고수를 길러냈는데.

하지만 함부로 손을 쓰진 못할 것이다.

과거 많은 교도들 앞에서 묵영권가의 죄를 더 이상 따지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네 이름은? 별호라도 말해라.”

정광은 물기가 완전히 빠져 웬만한 사람의 피부보다 더 뽀송뽀송해진 수건으로 탁자에 튄 핏방울들을 닦았다.

“진혼(眞魂).”

“나는…….”

“바쁜데 자꾸 귀찮게 하네. 기억할만한 가치도 없는 놈이 무슨.”

“…….”

중년인은 분노하지 않았다.

상대는 스스로 자격을 증명한 강자. 아니, 마귀였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해서 본가에 알려야 해.’

그러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했다.

다른 이들이 막는 사이 몸을 빼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밖에 없어?’

등 뒤쪽에서 아무런 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돌아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정광에게 바로 당할까 두려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정광이 그의 심정을 눈치채고 웃었다.

“눈알 굴리기는. 다 해치웠어.”

“……!”

희망이 사라지고 오기가 솟구쳤다.

중년인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쑥 솟았다.

“쿠얼러에서 단가 사람을 죽이고도 네놈이 무사할 것 같으냐!”

“안 죽였는데.”

“……무어라?”

“기감을 최대한 키워봐. 안 느껴져?”

중년인은 정광에게 쏟고 있던 대부분의 감각을 조심스레 돌려 뒤쪽을 살폈다.

얼마 안 가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우리를 두려워하는구나.”

“시체 처리비 때문에 안 죽인 건데. 다 죽이면 금원보가 몇 개야. 아까워서 그걸 다 어떻게 내?”

중년인이 발작하듯 외쳤다.

“허세 부리기는!”

“그리고 너희들은 방계잖아. 언제부터 본가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그래? 쿠얼러에서 해치면 안 되는 건 단가 본가 사람들뿐인 거 아니었어?”

중년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픈 곳을 찔려서였다.

“네, 네놈이 우리를 이렇게 무시하고도 살 수 있을 것…….”

“혈조. 멀었어요?”

어느새 사라졌던 자오가 금원보와 은자를 한 아름 안고 나타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부유하지 않아서 탈탈 터느라 그만.”

“이런. 재촉해서 미안해요. 잘하셨어요.”

정광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창백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점소이를 불렀다.

“이거면 되지? 탁자에 묻은 피는 내가 닦았으니 참작해 줘.”

금원보 한 개였다.

“……대인. 구멍을 세 개나 더 내셨습니다.”

“최대한 줄인 건데.”

“밖의 사람들이 놀라지 않게 후원 쪽으로 구멍을 내주신 건 감사드리나, 찬바람이 들이치면 식사하실 때 불편하시지 않겠습니까.”

“음. 설득력이 있어. 요리가 식으면 곤란하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아, 원하는 만큼 가져가. 아주 양심적으로.”

점소이는 금원보를 몇 개 더 챙긴 뒤 어린 점소이를 불러 벽을 고칠 사람을 부르게 했다.

그리고 주방에서 요리를 가져와 탁자를 빽빽하게 채웠다.

정광은 코를 몇 번 킁킁거려 음식의 향을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네. 자, 다들 드시죠.”

모두 젓가락을 들었다.

관엽은 꽉 막혔던 속이 시원하게 뻥 뚫렸는지 항상 퉁명스럽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섬랑은 싱글벙글 웃으며 생선 뼈를 세심히 발라 정광이 먹기 편하게 시중을 들었다.

흑서는 손을 쓸 기회를 놓쳐 아쉬워하면서도 요리가 마음에 들어 열심히 먹었다.

자오는 수금한 것들을 전부 챙긴 뒤, 자꾸 고개를 들려고 하는 의혹들을 모조리 지워 버리며 식사를 즐겼다.

이렇게 무척 화기애애한 풍경이었으나.

백의인들의 우두머리, 홀로 멍하니 서 있는 중년인의 눈에는 악귀와 이매망량들이 사람을 뜯어먹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이런 무시를 당하다니…….’

점소이가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다가왔다.

“대인. 후원에 계신 분들을 빨리 의원(醫院)으로 모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중년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무시를 당한 건 당한 거고, 다친 이들부터 치료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들 호흡이 가늘고 기도 희미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중년인의 눈동자에 초점이 맺히자 점소이의 말이 빨라졌다.

“창문에 두꺼운 차양이 드리워진 마차들을 가져오고, 다른 점소이들을 시켜 일행분들을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의원에 도착하실 때까지 다른 이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으음…….”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훌륭한 제안이었다.

“점소이들의 입단속은?”

“진짜 고객분들에 대해서는 입을 놀리지 않습니다. 저희가 신강 곳곳에 뿌리를 내린 비결 중 하나지요.”

사실이었기에 중년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하는 게 제일 확실하지만, 향리객잔은 총단의 높은 분과 줄이 닿아 있는 집단이기에 조금 찝찝하더라도 이러는 게 맞았다.

“그렇게 부탁하마.”

“저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에 필요한 비용은 지급하셨던 숙박비와 식사 요금으로 대체하면 되겠는지요?”

“…….”

냈던 돈은 그대로 두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 의미.

중년인을 제외한 모든 식솔이 탈탈 털린 데다 정광이 있는 이곳에 묵을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으니 따라야 했다.

“그렇게 해라.”

점소이가 부드럽게 웃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 * *

점소이가 정광에게 다가와 공손히 물었다.

“대인. 필요하신 게 더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어? 벌써 문 닫을 시간이야?”

“그렇습니다.”

“흠. 어쩐다.”

“소인이 알아서 내와도 되겠습니까?”

“응. 그게 낫겠네. 부탁해.”

점소이는 손님들이 배를 잔뜩 채운 것을 고려해 간단한 안줏거리와 향기롭지만 독하지 않은 술을 가져와 탁자에 늘어놨다.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응. 너도.”

정광은 옛 기억을 끄집어냈다.

‘여기 애들은 대대로 일 처리가 매끄럽다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번창하겠어.’

벽에 났던 구멍들도 그랬다.

목장(木匠)들이 달려와 잠시 뚝딱거렸을 뿐인데도 워낙 제대로 막아 바람 한 점 스며들지 않았다.

‘귀찮게 구는 놈이 있으면 몇 개 더 내도 되겠는데.’

정광은 점소이들이 떠나고 주방 등불도 꺼지자 일행에게 술을 한 잔씩 따라주며 치하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오늘은 그만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죠.”

섬랑이 술을 재빨리 홀짝이고 손을 번쩍 들었다.

“대인.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

“묵영편요. 제 가문…… 아니, 권가의 비전 절기를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정광은 피식 웃었다.

어떻게 알긴.

내가 창안한 거니까 그렇지.

그냥 간단히 답했다.

“그냥.”

“……맞다. 그런 거 안 묻기로 했었지. 그럼 다른 거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으니 대답해 주세요.”

“들어보고.”

“혀가 더러운 녀석들을 두들겨 패시고 재물도 갈취하신 데다 거짓말을 잔뜩 늘어놓으셨잖아요.”

“훈계, 수금, 농담.”

“……우아한 표현이네요. 어쨌든 아무리 방계라 해도 방귀깨나 뀌는 놈들인데 귀찮아지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겠지.”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저와 관 숙수를 위해서?”

“오. 그걸로 하면 되겠네.”

섬랑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냥 지르신 거예요? 능력이 되시니까?”

“그것도 그렇고.”

정광은 일행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쳤다.

“어차피 우리는 섬랑이 이기면 이길수록 견제를 받고 위협을 당할 수밖에 없어요.”

사실이었다.

비공식적인 일이지만 멸혼생사투는 비무대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섬랑이 묵영권가의 유일한 생존자고 제가 무공을 이은 후인인 것을 드러내면 교주의 체면이 있으니 그 누구도 대놓고 없애려 들지는 못할 거예요. 괜히 손을 썼다가 교주가 시켜서 그랬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교주가 화낼 게 뻔하니까요.”

이제야 이해한 사람들이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정광은 술잔에 들어있는 술을 단숨에 삼키고 덧붙였다.

“이로써 우리는 운신의 폭이 넓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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