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97화 (396/569)

2부 126화

저마다 다른 기준

쿠차에서 쿠얼러까지는 대략 칠백오십리.

정광 일행은 그 거리를 이틀 만에 주파해야 했다.

일찍 가서 하루쯤은 푹 쉬고 멸혼생사투 예선에 참가해야 할 것 아닌가?

예비마를 계속 갈아타며 말달렸다.

섬랑은 그 와중에도 쉼 없이 수련해야 했다.

“끄윽…….”

기절해서 쓰러지거나 탈진해서 잠드는 일이 반복됐다.

그때마다 정광이 추궁과혈로 몸 상태를 회복시켰다.

“고마워요, 대인.”

“고마우면 다시 해야지?”

“물론이죠.”

시간이 없었다.

섬랑은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했다.

정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나쁘지 않아.’

소모한 시간에 비하면 괜찮은 성취였다.

‘칠대가문 애들에 비하면 형편없겠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실력을 쌓아온 아이들과 비교하면 그럴 수밖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나머지는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했다.

‘오랜만이네.’

정광은 정면을 주시하며 싱긋 웃었다.

마도칠대가문 중 단가(段家)가 다스리는 고이륵(庫爾勒), 그곳 말로 쿠얼러라 불리는 대도시가 눈앞에 있었다.

정광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관 숙수. 잘 부탁해요.”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걷던 관엽이 무겁게 답했다.

“알겠네.”

“흥분하지 마시고요.”

“……명심하지.”

검은 불씨가 맺혀 있던 관엽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모두 하마(下馬)하게.”

“네.”

관엽이 선두에서 말을 끌며 걸었다.

백색 경장을 입고 성문 앞에 서 있던 무인들 중 한 중년인이 관엽에게 포권했다.

“쿠얼러에 오신 걸 환영하오. 무슨 용무로 오셨소?”

마인답지 않게 우아한 인사.

관엽도 한 손을 가슴 앞에 세웠다.

“멸혼생사투에 참가하러 왔소.”

“그렇다면 몇 가지 기록할 게 있소이다.”

중년인이 손짓하자 한 무인이 붓을 들고 글을 쓸 준비를 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성실히 대답해 주시오. 어디에서 오셨소?”

“쿠차.”

“귀하가 수장인 것 같은데 별호와 성명을 말하시오.”

“독비귀도(獨臂鬼刀) 관엽이오.”

“……독비귀도?”

중년인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그는 세찬 바람에 제멋대로 휘날리는 관엽의 오른팔 소매를 보며 미소 지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조소였다.

“누군가 했더니. 본가에 대항하고도 살아남은 대협이셨구려.”

“다 지난 일이오.”

“팔이 잘리자 그 자리에서 씹어 먹었다고 들었소만. 먹을 만했소?”

“사람 고기 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 아까워서 먹었을 뿐이오.”

관엽이 도발에 넘어가지 않자 중년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람 백정이라 들었는데. 수양이 대단하오.”

“할 일이 있으니까.”

중년인의 시선이 섬랑에게 꽂혔다가 다시 관엽에게 돌아왔다.

“멸혼생사투에 참가할 저 아이의 이름과 가문은?”

“이름은 없소. 별호는 섬랑. 묵영권가(黙影權家) 출신이오.”

중년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점입가경이군. 멸문하다시피 한 묵영가(黙影家)의 후손이라니.”

“더 써야 할 게 있소?”

“출전 접수도 됐으니 그만 가도 좋소.”

중년인은 손바닥만 한 목패(木牌)를 내밀었고, 관엽은 그것을 확인한 뒤 챙겼다.

“고맙소.”

중년인은 천천히 두 손을 모았다.

처음 인사했을 때처럼 정중한 포권이었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빌겠소.”

끼이이이익-

성문이 열렸다.

정광 일행은 성안으로 들어갔다.

정광은 발걸음을 옮기며 전음으로 관엽을 칭찬했다.

-잘했어.

-별것 아닙니다, 지존.

-네 팔을 자른 가문의 녀석이 깐죽거리는데 참았잖아.

-……정말 별것 아닙니다.

-그럼 그렇다 치고.

정광은 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쿠얼러는 중원과 서역을 잇는 천산남로(天山南路)의 요충지 중 하나답게 무척 번화한 도시였다.

여러 민족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신강 대부분이 그렇듯 제일 많은 건 유오이족(維吾爾族)이었다.

허나 이곳을 지배하는 건 백족(白族)인 고이륵단가.

그들 특유의 백색 경장을 입은 무인들이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하여간 흰색을 지나치게 좋아한다니까.’

하지만 속은 시커먼 녀석들이었다.

성문을 지키는 자들로부터 벌써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차가운 눈초리로 관엽을 노려보고 있었다.

‘속 좁기는. 쿠차를 쥐어짜던 단가 놈들은 내가 죽였는데 왜 피해자인 백정 꼬마한테 저래?’

그래도 뭐, 시선이 다른 녀석에게 집중되니 편하긴 했다.

애초에 이걸 노리고 관엽을 데려오지 않았는가.

‘어디 보자. 좋은 객잔부터 잡아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자오는 신강에서만큼은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사파 밥을 오래 먹었으면 뭐 하나.

정파 물을 마시며 희석된 심성으로 음험한 마교도들을 상대했다간 보나 마나 사기를 당할 터.

‘가봤던 곳으로 가는 게 낫겠네. 아직 있으려나.’

생각을 접고 저쪽으로 가자고 말하려 하는데.

소란이 일어났다.

서걱-

“윽. 이 새끼가!”

옆구리가 쩍 벌어진 적의인(赤衣人)이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도를 세차게 그어 올렸다.

그를 암습했던 흑의인(黑衣人)은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물러나 손에 쥔 곡도(曲刀)의 칼날을 핥았다.

붉은 혀가 붉은 피를 머금고 요사스럽게 번들거렸다.

“그래. 이 맛이었지.”

적의인이 분노를 토했다.

“일 년 전에 패주했던 놈이 기습을 해?”

“퉤. 그땐 네놈이 암습했었잖아.”

흑의인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인상을 쓰고 있는 단가 무인을 힐끔 봤다.

“단가에 폐를 끼칠 생각은 없소!”

적의인도 바로 외쳤다.

“마찬가지외다!”

단가 무인은 짧게 답했다.

“빨리 끝내시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이 격돌했다.

탐색 따위는 없었다.

마기와 살기가 뒤엉켰다. 도와 곡도가 부딪히며 요란한 소음을 내고 뜨거운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백중세의 대결이었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암습을 당했던 적의인이 쓰러졌다.

그의 옆구리와 배에서 내장이 흘러나와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올렸다.

피투성이가 된 흑의인이 괴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잘난 척하더니 꼴좋다! 그러게 왜 나한테 원한을 사서…… 커헉!”

흑의인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군중 속에서 구경하던 회의인(灰衣人)이 튀어나와 뒤에서 목을 친 것이다.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다가 멈췄다.

거기에 박힌 두 눈이 회의인을 노려봤다.

“이 쥐새끼 같은…….”

회의인은 흑의인의 머리통을 강하게 밟았다.

콰직!

“예나 지금이나 말이 많군.”

회의인은 피와 뇌수로 더럽혀진 가죽신을 닦을 생각도 안 하고 단가 무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품속에서 금원보를 한 개 꺼내 조심스레 내밀었다.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소.”

단가 무인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시신 두 개를 처리해야 하는데 한 개 처리비만 줄 셈이오?”

회의인은 시선을 돌려 시체 숫자를 확인하고 금원보를 하나 더 꺼냈다.

“실수를 인정하오. 내가 죽인 놈만 셌소이다.”

그제야 단가 무인은 금원보를 받았다.

“외지인 같으신데. 무공을 모르는 자와 상인은 건드리지 마시오. 본가 사람은 더더욱.”

“알고 있소. 단가의 영역에서 감히 죄를 지을 담량은 없소이다.”

회의인은 금세 사라졌다.

단가 무인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눈치를 보고 있는 허름한 행색의 꼬마들을 불렀다.

그리고 금원보를 조금 떼어줬다.

“치워라.”

“네!”

꼬마들은 신이 나서 바닥에 널린 시신들을 치우고 핏자국까지 열심히 닦았다.

사람들은 구경거리가 없어지자 저마다 하던 일을 계속했다.

서로 눈을 부라리며 병기를 만지작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활기차네.’

다른 이들도 태연한 얼굴로 정광을 따랐다.

오직 자오만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정광 옆에서 걸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이 몇이나 죽었는데도 돈만 내면 된다니. 쿠차보다 더 악랄한 곳이군요.”

정광이 부정했다.

“그래도 무공을 모르는 사람은 보호하잖아요.”

“그건 왜 그런 겁니까?”

“그런 사람들은 지식을 쌓고 기술을 배워 일을 하죠. 그들이 일을 해야 단가가 세금을 빨아먹으며 편하게 먹고 살 수 있고요.”

“상인을 건드리지 말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까?”

“네. 서역을 오가는 상인들이 묵는 지역은 따로 분리돼 있어요. 비싼 통행세를 받는 만큼 보호해 주는 것이죠.”

자오가 혀를 내둘렀다.

“여기에선 단가가 왕이나 다름없는가 봅니다.”

“왕 놀이를 좋아하긴 하죠. 오래전 멸망한 운남성 대리국(大理國)에서 건국 초기에 왕권을 두고 다투다가 쫓겨난 애들이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겉치레도 심한 편이고.”

“아! 왕족 출신입니까?”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왕년에 황족이나 왕족 아니었던 가문이 있나요. 오, 다 왔네.”

다행히 사라지지 않고 원래 자리에 있었다.

[향리객잔(香梨客棧)]

정광은 고풍스러운 현판을 올려다보며 기억 속의 모습과 비교해 봤다.

‘일단 겉모습은 그대로고.’

안에 들어서자 건장한 점소이가 재빨리 다가왔다.

그는 일행의 용모를 슬쩍 확인하고 공손히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인. 어떻게 모실까요?”

“이틀 동안 좋은 방 네 개와 매끼 맛있는 식사.”

점소이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식사야 문제없지만 멸혼생사투 때문에 빈방이 없습니다.”

“저런.”

정광은 품속에서 금원보를 몇 개 꺼냈다.

점소이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마침 빈방이 나왔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정광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금원보들을 두 손으로 지그시 감쌌다.

그것들은 아무런 소음도 없이 하나의 금색 구(球)로 합쳐졌다.

점소이의 언행이 더 정중해졌다.

“본 향리객잔은 대인 일행과 소지하신 물품에 손을 안 댈 것을 맹세합니다.”

정광은 씩 웃으며 금덩어리를 내밀었다.

‘구관이 명관이라더니. 친절한 것도 그대로네. 잘 왔어.’

점소이가 정광 일행을 삼 층으로 안내했다.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들다마다.

관엽의 객잔과는 천지 차이였다.

“나쁘지 않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식사는 어떻게 준비할까요?”

“목욕물부터. 씻고 바로 일 층에서 먹을게.”

“네, 대인.”

정광은 점소이가 계단을 내려가자 일행에게 손짓했다.

“따뜻한 물로 씻고 일 층에서 봐요.”

자오가 급히 물었다.

“단주, 방이 네 개인데 어떻게 나눕니까?”

“섬랑을 혼자 둘 순 없죠. 저, 흑조, 혈조가 한방씩 쓰고 관 숙수와 섬랑이 한방을 써야 해요.”

섬랑이 급히 반박했다.

“혼자 있어도 괜찮…….”

“위험해.”

“그럼 다른 분으로 바꿔…….”

“길바닥에서 잘래?”

섬랑은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그리고 반 시진 뒤.

정광 일행은 뽀송뽀송한 얼굴로 일 층에 모여 탁자 앞에 둘러앉았다.

아까의 점소이가 다가왔다.

“무엇으로 올릴까요?”

정광의 주문은 간결했다.

“자신 있는 것으로 알아서.”

“네, 대인.”

점소이가 주방으로 갔다.

자오는 의아한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혈조, 왜요?”

“신기해서 그럽니다.”

“뭐가요?”

“신강에 오신 이래로 평소와 달리 존대가 아닌 하대를 가끔 하시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

정광의 땅 아닌가?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야 있나.

대충 둘러댔다.

“그동안 위엄이 쌓여서…….”

그때, 이 층에서 한 무리가 왁자지껄 떠들며 내려왔다.

모두 백의를 입고 있었는데 눈처럼 하얀 단가 사람들 것보다는 탁한 백색이었다.

“급하게 오느라 배가 등가죽에 들러붙었다니까.”

“하하. 나도 마찬가질세. 어서 먹으세나.”

그들은 정광 일행을 흘깃 보고 조금 떨어진 탁자에 둘러앉았다.

정광은 그들의 복색을 확인하고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탁한 백의면 단가 방계 애들이네.’

멸혼생사투에 참가하러 왔거나 본가에 세금을 바치러 왔을 터.

설령 다른 용무로 왔다 해도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광 일행을 신경 쓰고 있었다.

정확히는 관엽을.

아주 대놓고 떠들었다.

“성문에서 들었을 땐 농인 줄 알았는데 진짜 있군.”

“독비귀도는 무슨. 저 정신 나간 외팔이가 치병에 걸린 건가? 무슨 배짱으로 여기에 왔지?”

“아까 들었잖은가.”

“아하. 멸혼생사투?”

백의인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아주 끼리끼리 노는구먼. 멸문한 권가의 꼬마라니.”

“그런데 이름도 없다며? 친자식이 아닌가 봐.”

“그야 모르는 일이지. 어디서 구르던 고아 놈이 사칭하는 것일지도. 사칭해도 하필 권가 따위를…… 쯧쯧.”

관엽은 눈에서 검은 불씨를 피어 올리면서도 잘 참았다.

허나 섬랑은 아니었다.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 삿대질하며 외쳤다.

“이 빌어…… 읍!”

정광이 손을 들어 섬랑의 입을 틀어막고 앉혔다.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던 섬랑은 정광의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과 따끔한 훈계를 듣고 나서야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 정도 모욕도 못 참아서 어떡하려고 그래? 멀리 봐야 할 거 아냐.”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앞으로 조심해.”

“……네, 대인.”

정광은 점소이가 내준 따뜻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섬랑은 이를 지그시 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게 더 만만하게 보인 걸까?

비열하게 생긴 백의인이 모두 똑똑히 들으라는 것처럼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저 재수 없을 정도로 곱상하게 생긴 놈은 또 뭐야? 꼭 기생오라비처럼 생겨 처먹어서…….”

후우웅-

바람이 불고,

콰콰앙!

중년인이 날아가 벽을 뚫고 사라졌다.

“……!”

경악한 백의인들이 병기를 빼 들며 일어섰다.

“뭐, 뭐야! 암습인가!”

“허연 게 희끗거렸어! 어떤 놈이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정광이 손을 들며 점소이를 부르고 있었다.

“여기 따뜻한 물수건 하나만 더!”

“…….”

백의인들의 눈이 커졌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무, 물수건?

설마 아까 희끗거렸던 게 물수건이고, 사람이 그걸 맞고 날아가 벽을 뚫고 사라졌다고?

정광이 싸늘히 웃었다.

“사람한테 그렇게 심한 모욕을 주면 어떡해? 당연히 그에 걸맞는 대가를 받아야지.”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리고 섬랑은 억울한 얼굴로 항의했다.

“저한테는 이 정도 모욕도 못 참아서 어떡하냐고, 멀리 봐야 할 거 아니냐고 나무라셨잖아요!”

정광은 당연하다는 듯 반박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 걸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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