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5화
헛되지 않은 시간
섬랑은 정신을 잃은 채 침상에 누워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갑자기 밝아진 환경 때문에 눈을 깜빡이길 몇 차례, 암청색 눈동자가 서서히 원래의 벽안(碧眼)으로 돌아왔다.
섬랑의 푸른 눈동자에 낯선 천장이 또렷이 맺혔다.
‘……빌어먹을. 기절했다가 깨어난 건가.’
정신을 잃고 허물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여기가 어딘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푹신한 침상과 깨끗한 천장이 쿠차에 많을 리 있나.
객잔에서 쓰러졌으니 객잔에 있는 다른 방일 터.
섬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일어나기가 겁나네.’
등불이 켜져 있는 걸 보면 저녁이거나 새벽이리라.
아까도 온몸이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었는데, 몇 시진이 됐든 간에 기절했다가 깨어났으니 근육통이 얼마나 심할까?
‘아, 몰라. 아프면 아픈 거지.’
손끝부터 조심스레 움직여 보는 게 아니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 뭐야, 이거?’
긴장해서 경직됐던 표정이 흐물흐물하게 풀렸다.
각오를 다지고 이를 악물며 일어났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니.
‘설마 그가 손을 써서 나를 치료해 준 건가?’
섬랑은 상체만 세운 채 멍하니 있다가 왼쪽 탁자 위에서 미세하게 일렁이는 등잔불을 바라봤다.
‘심지가 거의 다 탔어.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얘기인데…… 응?’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뒤에 뭔가 있었다.
‘살기!’
느끼는 순간 가슴 중앙이 쿡 쑤시며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나를 치려고 해?
상대가 누구든 간에 당장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것도 한 수, 한 수 정성 들여서 최대한 고통스럽게…….
‘망할! 한가하게 이런 생각이나 할 시간이 어딨어! 내려가, 새꺄!’
너무 과할 정도로 심한 분노를 억누르며 해야 할 일을 했다.
쿠차에서 나고 자라 수많은 싸움을 보고 경험도 한 섬랑이었다.
당연히 수없이 살기를 접해봤기에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차원이 다른 살기!
이런 살기를 가진 자로부터 도주할 생각은 버려야 한다.
더 못난 모습으로 죽을 뿐!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데까진 해야지!’
재빨리 침상에서 몸을 굴려 등잔 쪽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바닥에 그대로 처박히며 눈에서 불똥이 튀었으나 그깟 아픔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품속에서 비수부터 꺼내 들었다.
침상에 몸을 가린 채 손만 머리 위로 올려 비수를 연달아 던졌다.
퍽- 퍼억-
기대했던 소리가 아니었다.
‘육신이 아니야! 벽에 꽂혔어!’
엎드린 채 던져서 비수에 힘이 실리지도 않았다.
최소한의 안전을 지키며 제대로 보면서 강하게 던지고 싶었다.
머리가 기민하게 움직여 그 방법을 찾았다.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침상 바닥을 잡았다.
‘될까?’
쓸데없는 걱정.
어차피 선택지는 하나였다.
‘흐읍!’
하체를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오, 상체 힘까지 더해 침상 한쪽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허나 내공 한 톨 없는 어린아이의 힘으로 그런 게 될 리가.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또다시 화가 솟구쳤다.
‘죽인다! 반드시 죽일 거야!’
살의가 들끓어 올라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만큼 시야가 어두워지더니 결국엔 사방이 새카맣게 변했다.
그제야 섬랑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왜 또 이래? 아! 이건!’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둠을 네 의지 아래에 놓아. 그따위 것에 매몰되지 말고 혼(魂)으로 품어.”
“집어삼켜! 전부 먹어치우고 그 힘으로 네가 죽이고 싶은 놈만 죽여! 그게 마를 이용하는 방식이고 진짜 마인(魔人)이 되는 길이다!”
그래! 까짓것 전부 삼켜 버리면 되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해야 할 순간에 화만 내는 마음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세상 모든 것을 향한 분노가 방향을 틀어 그 분노를 부추기는 자신의 마음으로 향했다.
‘내 마음을 갖고 놀지 마! 내꺼야!’
섬랑의 순수한 악의가 마음속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악의를 물어뜯었다.
콰직-
새카맣게 물들었던 눈동자가 암청색으로 변했다.
‘아!’
단 한 점 베어 물었을 뿐인데도 어찌나 달콤한지.
순식간에 전부 먹어치웠다.
온몸에서 뜨거운 기운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화르륵-
그 화염이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을 가능케 해줬다.
끼이익-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던 침상이 비스듬히 일어섰다.
‘……!’
욕심이 솟았다.
엄폐물로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적을 상대하고 싶었다.
‘하앗!’
무공은 못 익혔어도 보고 들은 건 많았다.
쿵-
섬랑은 힘차게 반보 내디디며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침상을 오른쪽 어깨와 등으로 들이받았다.
쿠당탕-
침상이 그대로 쓰러지며 앞으로 한 바퀴 굴렀다.
자연히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
허나 그것은 먼지가 아니라 그렇게 보이길 바라며 은밀히 뿌린 독분(毒粉)이었다.
섬랑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해독단(解毒丹)을 입속에 넣어 정신없이 씹으며 비수를 두 개 더 던졌다.
퍼퍽-
아까처럼 비수가 벽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으나 실망하지 않았다.
‘이게 최선인데 어쩌라고.’
걸쭉해진 해약을 꿀꺽 삼키며 양손에 또 다른 비수를 하나씩 꼬나쥐고 몸을 날렸다.
‘뒈져!’
침상을 뛰어넘으며 앞을 향해 비수를 내지르는데…….
섬랑의 눈이 커졌다.
‘아무도 없어?’
그렇다고 방심하진 않았다.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몸을 빙글 돌려 사방을 확인했다.
“……진짜 없네.”
딱 하나 있긴 했다.
자신의 왜소한 체구에 비해 기이할 정도로 큰 그림자가 낡은 벽면 위에서 으스스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섬랑의 얼굴이 구겨졌다.
“쪽팔리게 진짜. 내 그림자에 놀라 이런 소란을 벌이다니.”
얼마나 부끄러운지.
고개뿐만 아니라 허리까지 푹 숙이며 한탄했다.
하지만 이것은 속임수.
숙였던 몸을 순간적으로 일으켰다.
그 탄력으로 벽을 향해 도약했다.
어느새 암청색으로 변한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그만큼 날카로운 비수로 그림자를 몇 번이나 찔렀다.
퍼퍼퍼퍽-
벽에 구멍들이 패였다.
섬랑은 바로 물러나 침상 뒤로 넘어갔다.
두 자루의 비수를 십자로 엇갈려 정면을 방어했다.
그림자를 뚫어져라 주시하며 살기를 유지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섬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착각이었나. 혼자 있어서 다행이네.’
그림자는 그냥 그림자였다.
오줌싸개 꼬마도 아니고, 혼자 겁먹어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원.
그래도 이상하긴 했다.
‘쯧. 모양새하고는.’
말로만 듣던 마귀가 이럴까?
몸을 어떻게 움직여 봐도 그림자는 괴이한 형상을 그려냈다.
‘기분 더럽네. 가만. 이 느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건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혼(魂)에 마(魔)부터 심을 거라 했지.’
마음은 혼에 속하고 가슴 중앙 옥당(玉堂)이란 곳에 있다고 했는데, 조금 전의 밑도 끝도 없는 분노는 분명히 거기에서 솟아났었다.
‘혼을 스스로 단련해 마를 품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그 씨앗을 심어주겠다는 의미 같았는데…….’
섬랑의 미간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골이 생겼다.
귀동냥으로 쌓은 지식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런 기이한 일이 가능하다는 얘기는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를 믿기로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래, 백번 양보한다 치자.
그 유명한 진짜 진천마가 살아 돌아오면 모를까,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
‘아니야.’
섬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비수 손잡이 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믿어야 해.’
그는 능력을 보였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더러워지는 환각을 경험하게 했다.
그의 도움으로 그것을 집어삼키고 마음속에 뭉쳐 있던 응어리 중 하나를 풀었다.
‘그리고 침상을 세우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굴릴 수도 있었고.’
믿음을 굳혀서 그런 걸까?
조금 전보다 뚜렷이 느껴졌다.
섬랑은 손가락으로 가슴 중앙을 슬며시 눌렀다.
만져지는 감촉은 없었으나 확실히 뭔가 있었다.
눈이 다시 벽안으로 돌아오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라도 얻었으면 된 거야. 그보다 이제 슬슬 다음으로 넘어갈 거라 했는데…….”
그때, 벽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먹히지 않았고 대응도 나쁘지 않았어. 게다가 팔팔하니 시작해도 되겠네.”
“……!”
“손목 뽑아버리기 전에 비수 도로 집어넣어.”
섬랑은 비수를 엉거주춤하게 내민 채로 굳었다가 급히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그림자의 말에 담긴 힘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익숙한 사람의 음성이어서였다.
“대, 대인?”
아니나 다를까.
그림자가 훤칠한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벽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정광이었다.
“창문 좀 열어. 환기 좀 하게. 싸구려 독을 잔뜩 뿌려서 냄새가 너무 역겹다.”
“그, 금방 할게요.”
섬랑은 급히 창문을 열었다.
뼈가 시릴 정도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방으로 들이닥쳤다.
“……!”
홑옷만 입고 있어 어찌나 추운지.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으나 약한 소리는 하지 않았다.
정광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화아아악-
손가락 사이에서 불똥이 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화려한 불길로 변했다.
그 불길은 허공을 부유하는 독분을 덮친 뒤 바닥에 깔린 독분까지 집어삼켰다.
“타는 냄새가 더 심하네.”
정광은 인상을 찡그리며 손바닥을 슬쩍 돌렸다가 밀었다.
불길이 한데 모여 빙글빙글 돌더니 창문 밖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어둠에 녹아 사라졌다.
“잘 잤지? 아픈 데도 없고.”
“아!”
넋이 나간 얼굴로 창밖을 주시하던 섬랑이 정신을 차렸다.
“네, 대인. 아무 이상 없어요. 감사합니다.”
“그 마음 영원히 변치 말고.”
섬랑은 정광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힘주어 답했다.
“네. 근데 제가 정확히 뭘 얻은 거죠?”
“내 혼의 극히 일부.”
“……네?”
“시간 없어. 가부좌 틀고 앉아. 자세 기억하지?”
기억하다마다.
섬랑은 완벽한 자세를 취했다.
허나 긴장이 조금 풀려서일까.
배 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올라와 방 안을 울렸다.
해가 질 때까지 측간에서 살며 온몸의 수분을 다 빼낸 섬랑 아닌가?
다음 날 새벽이 되었는데 사람인 이상 얼마나 배고플까.
정광도 사람이었다.
섬랑을 따뜻하게 위로했다.
“딱 좋은 상태네. 힘내. 천축(天竺) 중들이나 서장(西藏) 라마들도 틈만 나면 단식을 하거든.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고 행하는 수련법이야.”
“……본교에선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마(魔)라고 하지 말란 법 있어? 차용할 만한 건 차용해야지. 그 상태로 들어.”
섬랑은 자세를 유지하며 귀를 활짝 열었다.
“이제 숨쉬기, 토납(吐納)을 시작할 거야. 마와 정의 호흡법에 대해 설명했었지? 마에서는 안전성이나 정순함은 일단 치우고 어떻게든 많이 쌓는 게 최고라고.”
“네. 그러다가 심마(心魔)에 빠질지도 모른다고 하셨죠.”
“정확히 말하면 무조건 빠져. 생명이 무한하다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거든.”
섬랑은 바로 이해했다.
“마공을 익히면 짊어지게 되는 천형 같은 건가 보네요.”
“그렇지. 상위 심법을 익힌다고 달라지진 않아. 오히려 내공을 더 빨리 쌓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더 위험한 경우도 있어.”
“그 말씀은…….”
“천마신교에서 고수라 불릴 만한 이들은 심마와 싸워오면서 미치지 않고 살아남은 승자들이란 의미지.”
“……좋은 말씀도 좀 해주시죠.”
“심마는 보통 분노로 표출돼. 분노가 마음을 잠식한 뒤 머리로 치고 올라가 이성까지 먹어치우게 되지. 그리고 마침내 혼까지. 그다음은 뻔하고.”
“…….”
좋은 점 좀 말해달라고 했는데 겁을 주다니.
섬랑이 어이없어하자 정광이 녀석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넌 운이 아주 좋아. 심마 따위보다 훨씬 더 진득한 걸 경험해 봤잖아.”
“아! 아까 그거요?”
“응. 하지만 이건 꼭 명심해. 내가 도와줘서 먹히지 않고 삼킬 수 있었던 거야.”
맞는 말이기에 할 말이 없었다.
“원래부터 안 좋은 성격인데 자극을 받으니까 훨씬 더 더러워지지? 조금 전에도 아슬아슬했어. 네가 홀로 마공을 쓰며 누군가와 싸운다? 내가 심어준 마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약한 심마에도 휘청휘청할걸.”
이 역시 마찬가지.
다소 의기소침해진 섬랑이 눈을 내리깔자 정광이 작은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딱!
“풀 죽을 시간 없어.”
“으윽. 네.”
“네 마음에 자리한 마 한 톨을 끝없이 마주 대해야 해. 그것을 패든 물어뜯든 해서 갈고닦아 더 큰 마를 받아들여 굴복시켜. 그것을 바탕으로 마공을 수련해서 닥치는 대로 깨부수고 나아가. 그럼 언젠가 심마 따위는 얼씬도 못 하게 될 거야.”
“……!”
섬랑의 벽안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 눈으로 정광을 똑바로 바라보며 뜨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면 저도 대인처럼 될 수 있나요?”
“그건 불가능하지.”
“……아.”
“헛된 꿈은 버리고 차근차근 나아가. 자, 이번엔 기를 느낄 차례다. 뭐가 제일 중요할까?”
뭐 이런 당연한 질문을.
“재능이겠죠.”
“그건 기본이고. 간절함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거야.”
정광은 풀어서 설명해 줬다.
“어떤 고급 내공심법이든 간에 대단찮은 숨쉬기에서 출발해. 세상에 토납법이 얼마나 많이 널려 있는지 알아? 익힌 사람도 그만큼 많아. 그런데 그중에서 몇이나 기를 느낄까?”
올바른 호흡을 익혀 건강해지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얼마 못 가 포기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어쨌든 극소수라도 있긴 있지. 재능이 있으면 빨리 느낄 수도 있고.”
“그렇겠죠.”
“하지만 너는 ‘아주 빨리’ 느껴야 하잖아.”
“아!”
“그러니 간절해져. 최선을 다해. 내가 지켜보다가 인정할 만큼.”
“…….”
섬랑이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제가 최선을 다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알아보시는데요?”
“뻔한 얘기를 하네. 아까 내가 흘린 살기를 느꼈으면서도 왜 도망치지 않고 덤볐지?”
섬랑이 툴툴거렸다.
“그러면 뭐 해요. 그런 살기를 뿜어내는 실력자면 어차피 잡힐 건데. 운 좋으면 한칼이라도 먹이고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렇게 했죠.”
“도주할 기회가 있었으면?”
“당연히 했겠죠. 혹시 제가 잘못 대응한 건가요?”
정광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니.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어. 상대가 네게 흥미를 느낄 만하잖아.”
“흥미라뇨?”
“네가 재밌게 나오니 바로 죽이지 않고 가지고 놀다가 죽일지 누가 알아?”
섬랑이 인상을 썼다.
“결국엔 죽게 될 거란 말씀이잖아요.”
“무슨 소리. 한 번이라도 더 발버둥 쳐볼 기회조차 없이 죽는 것보단 백배 낫지.”
“그래도…….”
“토 달지 마. 나도 몇 번이나 경험해 본 거야.”
“……네?”
정광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면 어때? 마지막에 숨통을 끊어버리는 쪽이 이기는 건데.”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너는 분명 아까 최선을 다했어. 나는 그걸 봤고. 그러니 앞으로 네가 전심전력을 다 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정광은 말을 잠시 끊었다가 무겁게 이었다.
“그러니 절대로 나를 실망시키지 마.”
섬랑의 두 눈에서 뜨거운 열의와 오기가 파랗게 타올랐다.
음성 또한 그랬다.
“네, 대인.”
* * *
시간은 미친 듯이 몰아치는 겨울바람처럼, 정광의 변덕만큼 빠르게 흘렀다.
“하아. 기를 빨리 느낀 게 기특해서 귀엽게 봐줬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쳐?”
“아니, 권각술 하나 가르쳐 주셔놓고 다짜고짜 혈조(血鳥)의 옷깃이라도 스치라고 하시면 어떡해요? 안 그래요, 혈조?”
“…….”
“혀, 혈조! 혈조님! 그렇게 먼 산을 쳐다보시면…….”
따악!
“억!”
“왜 혈조 탓을 해? 내공도 안 쓰고 상대해 주고 있는데. 보법을 알려줄 테니 무조건 해봐.”
“진작 가르쳐 주시지! 어억!”
섬랑은 확실히 자질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발전했다.
“아하하하! 스쳤어! 스쳤다고! 대인! 똑똑히 보셨죠?”
“혈조. 그런 식으로 봐주시는 건 얘한테 도움이 안 돼요. 왜 그러셨어요?”
“죄송합니다, 단주. 힘이라도 조금 나게 해주려고 그랬습니다.”
“하여간 정파 물을 너무 많이 드셨다니까.”
“네? 혈조가 정파 사람이었어요? 사파도 아니고?”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원래 성품대로 가시죠. 방어 그만하시고 슬슬 공격하세요.”
“알겠습니다, 단주.”
“헉! 이, 이렇게 갑자기 바꾸시면 어떡해요? 지금껏 공격만 했는데 어떻게 피하라고!”
“원래 공격은 급작스럽게 오는 거야. 혈조.”
“네, 단주.”
“아아악!”
비명이 반복되는 만큼 실력도 쌓였다.
상노는 그답지 않게 감개무량한 눈으로 섬랑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눈부시게 빨리 성장하는군. 구천에 있는 권가 사람들이 이제야 눈을 감겠어.”
관엽은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혈조에게 죽지만 않으면 그럴 것 같소.”
당연히 자오는 섬랑을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수련을 시작한 지 사흘째가 된 늦은 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섬랑을 따뜻하게 안아줬다.
“잘 참아줬다. 아주 잘했어.”
섬랑은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자오의 어깨 위에 올린 채 암청색 눈을 희번덕거렸다.
“정말 고마워요, 혈조.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죽더라도, 그 어떤 일이 생겨도요.”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정광의 신묘한 의술 덕분에 멀쩡해진 섬랑은 자신이 이끌어온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최대한 빨리 놀러올 테니 열심히 수련하고 있어.”
아이들은 상노를 힐끔거리며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였다.
“그, 그래. 상노께서 우리를 거둬주셨으니 최선을 다할게.”
“대, 대장도 조심히 다녀와.”
“대장. 그런데 꼭 그래야 했어? 우리가 입단속 잘한 상으로 부탁할 거면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하필이면 상노한테…… 읍!”
그간 수련한 시간이 헛되지 않은 걸까.
섬랑은 아이의 입을 눈부신 속도로 틀어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이 녀석은 분에 넘치는 기연을 얻어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한 거예요. 상노도 아시죠?”
“시끄럽다. 네 일이나 똑바로 해.”
“흥. 제가 할 소리네요.”
섬랑은 냉랭하게 신형을 돌렸다.
관엽이 코앞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관 숙수. 객잔은 어쩌고 같이 가시는 거죠?”
“그래야 하니까.”
“헉!”
관엽은 섬랑의 뒷덜미를 잡고 말에 올랐다.
그의 수련도 헛되지 않았다.
정광에게 자연스럽게 하대한 것이다.
“진혼(眞魂). 섬랑은 내 뒤에 태웠네.”
“그럼 가죠.”
정광, 흑서, 자오, 관엽, 섬랑.
쿠차를 관리하기 위해 남은 상노를 제외하고 정광은 연이 있는 이들과 함께 말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멸혼생사투(滅魂生死鬪) 첫 번째 예선이 열리는 곳이자 마도칠대가문 중 고이륵단가(庫爾勒段家)의 본거지.
쿠얼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