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4화
굳이 말할 필요 없어
“가부좌를 틀어. 아니, 틀어주마.”
섬랑은 입을 움직일 힘조차 없었기에 정광이 직접 손을 썼다.
두 다리를 접어 좌우로 교차시키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턱을 당기고 양손을 배꼽 앞에 모으니 그럴듯한 자세가 됐다.
섬랑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꼽추를 죽이느라 안간힘을 쓰고, 무거운 철편을 몸에 두른 채 마보를 하다가 손상된 신체가 타의로 움직이게 되자 비명을 지른 것이다.
“……!”
하지만 그 비명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약한 모습은 죽어도 보이기 싫었다.
섬랑은 두 눈을 부릅뜨고 필사적으로 참았다.
정광은 핏발 선 벽안(碧眼)을 보며 칭찬했다.
“나쁘지 않아.”
그리고 혀를 찼다.
“눈에 눈물이 고인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뭐 어쩔 수 없지.”
검지를 곧게 펴서 섬랑의 미간을 짚었다.
“통상적인 용어로 말해주마. 이게 인당(印堂)이다. 흔히 상단전(上丹田)이라 하지. 무공의 효율을 정한다.”
“…….”
섬랑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격통을 억누르며 정신을 집중했다.
어중이떠중이들에게서 귀동냥해 온 것들은 지워야 했다.
진짜 고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흡수해야 했다.
마음을 굳게 정해서 그런지 정광의 목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와 머릿속에 깊게 새겨졌다.
“상단전을 완전히 열면 하늘과 영(靈)이 통해 심기체(心氣體)가 합일되며 자연과 하나가 된다고 한다. 무인들이 추구하는 신화경(神化境)의 경지요, 도인들이 간절히 원하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의미하는 것이지. 무인이나 도인이나 죽어라 수련해서 꿈을 이루려고 하는데…….”
정광이 피식 웃었다.
“전부 헛짓거리야.”
“……!”
“내 지인은 작은 깨달음만으로도 우화등선할 뻔했다.”
정광의 사조 운후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상단전을 극도로 단련했었지만 완전히 열리진 않았고.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봐.”
섬랑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으나 전혀 알 수 없었다.
정광은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가 힘있게 단언했다.
“내가 못하면 아무도 못 해. 상단전을 활짝 여는 건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하늘이 장난질을 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얘기지.”
“……!”
“표정이 왜 이래? 못 믿겠냐? 믿게 해줄까?”
“…….”
“그래. 서로 피곤하지 않게 그런 얼굴로 들어. 상단전은 천지만물(天地萬物)의 본체를 보는 능력을 길러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거다. 단련하면 할수록 집중력이 늘고 심지도 바로 서게 되지. 경지에 오르면 특별한 심공(心功)을 통해 타인의 의지를 어느 정도 조종할 수도 있고. 딱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면 돼.”
“…….”
어떻게 수련하는 걸까?
마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정광이 설명했다.
“체조로 몸을 풀어 정신을 맑게 하거나 명상을 통해 무언가를 궁리하는 것도 꽤 도움이 돼. 멋진 풍경과 시서(詩書)를 감상하고 주색잡기를 적당히 즐기며 안목과 지식을 키우는 것도 그렇고.”
“…….”
“살면서 접하는 모든 걸 허투루 넘기지 마. 제대로 된 심법이 있으면 그걸 익히며 다른 것들도 병행하는 게 좋겠지. 상단전은 여기까지만 하고…….”
정광은 손가락으로 섬랑의 가슴 중앙을 짚었다.
“다음은 옥당(玉堂), 중단전(中丹田)이다. 무공의 성질을 정하는 곳이지.”
섬랑은 정광의 말을 머릿속에서 되뇌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정광이 손가락으로 강하게 찔러서였다.
“아프냐?”
“…….”
“나도 마음이 아프다.”
“……!”
“진짜야, 인마. 슬플 땐 가슴이 아프다고 하고 흐뭇할 땐 가슴이 따뜻해진다고 표현하지? 그 마음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면 돼. 마음은 혼(魂)에 속하니 혼 일부도 이곳에 있다고 보면 되고.”
정광은 두 손을 들어 가슴 앞에 모았다.
“중이 합장하고 무인이 포권할 때 왜 이렇게 하는지 생각해 봐.”
“…….”
“기다리기 귀찮네. 중이 그러는 건 흩어진 마음을 다시 원래 자리로 모으는 거야. 무인이야 뻔하지.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인사를 그냥 해? 상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숨기고 암습을 대비해 심장이 있는 가슴을 가려서 보호해야 할 거 아냐.”
“……!”
“녀석, 감탄하기는.”
“…….”
“어쨌든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 그것에 따라 무공 성질이 달라지는 거야.”
정광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말을 이었다.
“그 성질은 마(魔), 정(正), 사(邪) 크게 세 가지로 갈라지는데 사(邪)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놈이니 일단 제쳐두고 마(魔)와 정(正)의 차이만 알면 돼. 흠. 하단전도 같이 설명하는 게 나으려나.”
정광은 검지로 섬랑의 배꼽 밑을 짚었다.
“석문(石門), 하단전(下丹田)이다. 무인이 내공심법을 이용해 자연지기를 받아들여 쌓아놓는 곳이지. 왜 석문이라고 할까?”
“…….”
정광은 섬랑의 머리통을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지. 네 머리처럼 단단한 돌로 만든 문이라서 그래. 그 무거운 문을 여는 게 쉬울 리 있나. 두 가지가 필요한데 그중 하나가 적절한 호흡, 토납(吐納)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섬랑의 배꼽 밑을 짚고 있던 정광의 손가락이 그대로 쭉 올라가 가슴 중앙, 옥당을 눌렀다.
“마음이지. 오직 호흡과 마음만이 석문을 열 수 있어.”
정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아까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무공 성질이 달라진다고 했지? 내공심법을 생각해 보자고. 호흡을 고르게 하면 마음이 가라앉아. 거칠게 하면 뜨게 되고. 한번 직접 해봐.”
“…….”
숨 쉬는 것 정도야.
섬랑은 서로 다른 두 개의 호흡을 번갈아 해봤다.
정광의 말대로였다.
호흡에 따라 마음이 움직였다.
“이해한 것 같네. 거기서 한 걸음 더 가자. 호흡이 마음을 움직였으면 그 역도 성립할 수밖에 없어. 마음에 따라 호흡이 변하는 거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중요한 게 아니야. 둘이 같이 맞물려 돌아간다는 걸 알아야 해. 여기에서 마와 정의 차이가 뚜렷이 드러나지.”
섬랑은 정광의 말에 점점 몰입했다.
“정은 세밀하면서 안정적이고, 마는 간결하며 폭발적이야. 정의 일정한 운율이 있는 부드러운 호흡법과는 다르게 마의 호흡법은 변칙적이고 과격한 면이 있어.”
정광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뙤약볕 아래에서 성실하게 밭 가는 농부와 밤마다 남의 집 담을 넘어 재물을 훔치는 도적으로 비유하면 얼추 맞으려나.”
“……?”
“일정한 소출을 안정적으로 내며 쌓아가는 농부와 푼돈과 천금을 오락가락하며 버는 도적. 대충 그렇게 보면 되긴 하겠네. 너는 어느 쪽을 택하고 싶어?”
“……!”
섬랑의 눈이 빛났다.
당연히 후자 아닌가!
정광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너 같은 녀석들이 모인 게 바로 천마신교지.”
섬랑도 웃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똑같아졌다.
정광의 어조에 힘이 실렸다.
“안전성과 정순함이 떨어지면 어때? 가끔이라도 크게 쌓는 게 장땡이지. 시간이 흐를수록 발출과 회수, 세밀한 조정이 정체돼서 언젠가는 심마(心魔)에 빠질지도 모르지만 어쩌라고?”
내 말이!
“그 전에 혼을 스스로 단련해 마(魔)를 품고, 그것을 바탕으로 마공을 수련해서 닥치는 대로 깨부수고 나아가면 돼!”
그렇지!
“혼을 단련하다가 정신이 나가서 광인이 되어버리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안 그래?”
아니, 그건 좀…….
섬랑은 어이없는 눈빛을 흘렸다.
정광은 그런 섬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온화하게 충고했다.
“네 생각이 맞아. 어떤 일이 있어도 마에 먹혀선 안 돼. 힘을 얻으려고 하는 건데 주객이 전도되는 거잖아. 온몸이 아프고 힘이 하나도 없지? 속도 허전해 죽을 것 같고. 명심해, 마에 먹히면 지금보다 더 심한 꼴을 겪게 될 거야.”
“…….”
섬랑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정광의 염려가 마음에 깊이 와닿아서였다.
‘이 충고를 하려고 나를 이렇게 몰아붙인 거였구나. 덕분에 완전히 이해했어.’
아니었다.
마에 잡아먹히기 딱 좋게 요리한 것이었다.
섬랑의 눈이 커졌다.
‘헉! 뭐, 뭐야!’
정광의 얼굴에 소름 끼치는 광기가 서렸다.
엄청난 마기가 실린 의념(意念)이 섬랑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먹히지 말고 집어삼켜.
그 순간.
섬랑의 마음속에 있는 혼탁한 우물에 세상의 모든 빛을 흡수할 만큼 완벽하게 검은 어둠이 한 방울 떨어졌다.
똑-
‘……!’
그 충격에 수면이 살짝 흔들리며 동심원이 퍼졌다.
정광이 마혼(魔魂)을 열고 눈곱만큼 떼어내 심은 마(魔)가 우물물을 순식간에 검게 물들였다.
검게 변한 우물물이 갑자기 세차게 솟구쳤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죽인다!’
그 대상은 명확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눈앞에 있는 정광이 아니었다.
그를 인지할 수조차 없는 상태인데 무슨 살의를 품겠는가.
가문을 박살 내고 지워버리다시피 한 교주 또한 아니었다.
권가는 총력을 다해 그와 싸웠고 그보다 힘이 약해 망했을 뿐이었다.
대신 다른 누군가가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오래전부터 살심을 품었던 대상.
섬랑의 아비였다.
정확히는 아비가 평생 짊어지고 있던 무력감이었다.
‘당신이 노력한 건 알아! 할 만큼 했다는 건 안다고!’
거기서 그쳐야 했다.
자식에게까지 족쇄를 채운 건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내 삶은 내가 정해야지, 왜 당신이 건드려? 나를 살려서 뭐 하려고! 본인 힘에 부치면 내게 이어달라고 부탁이나 하던가!’
지긋지긋했다.
당장 비수를 뽑아 아비가 등에 지고 있는 저 더러운 덩어리를 난자하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풀고, 지옥에서 한창 구르고 있을 아비의 구부정한 허리를 펴주고 싶었다.
‘하면 되지.’
오른손을 몇 번 접었다가 폈다.
살의가 손바닥에 모여 비수로 화했다.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이제 내지르기만 하면 됐다.
그때.
섬랑의 벽안이 흑색으로 물들었다.
분노가 마음을 잠식한 뒤 어느새 머리로 올라가 이성까지 먹어치운 것이다.
세상이 새카맣게 변했다.
‘……다 죽인다.’
무력감을 없애는 것만으론 화를 가라앉힐 수 없을 게 뻔했다.
그것을 짊어진 아비도.
아비의 유언을 지킨답시고 팔다리를 묶었던 상노와 관엽도.
가문을 멸문시킨 교주도.
이런 살의를 느끼게 한 미친놈까지도 몽땅 죽여 버려야 피를 갈구하게 하는 이 더러운 갈증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역시 하면 되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방이 칠흑보다 어두워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 죽일 거, 보이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크게 웃으며 비수를 휘두르려고 하는데.
아까 뇌리에 파고들었던 의념이 속삭였다.
-먹히지 말고 집어삼켜.
‘……!’
-죽이고 싶으면 죽이면 돼. 네 확실한 의지로 죽이고 싶은 놈만.
‘……확실한 의지?’
-어둠을 네 의지 아래에 놓아. 그따위 것에 매몰되지 말고 혼(魂)으로 품어.
‘……품으라니?’
의념이 웃음 섞인 소리로 쾌활하게 명했다.
-집어삼켜! 전부 먹어치우고 그 힘으로 네가 죽이고 싶은 놈만 죽여! 그게 마를 이용하는 방식이고 진짜 마인(魔人)이 되는 길이다!
‘……!’
진짜 마인.
섬랑은 거역할 수 없었다.
단 몇 마디 말에 무릎 꿇는 건 자존심 상했으나 살의에 휘둘려 못난 꼴을 보이는 건 더 싫었다.
의지가 확실히 서자 마음도 변했다.
갈증이 폭발적으로 심해졌다.
피가 아닌, 마(魔)를 갈구하는 갈증이었다.
‘모조리 먹어주마!’
살의로 똘똘 뭉친 비수를 쥐고 있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힘을 받은 비수가 어둠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비수는 어둠을 품으면 품을수록 검게 변해갔다.
그러다가 결국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을 때.
비수는 완전한 어둠이 되어버려 조용히 일렁였다.
섬랑의 마음속 우물에 떨어졌던 검은 어둠 한 방울, 그것을 모두 삼킨 것이다.
‘단 한 모금이면 채워질 갈증만 남은 건가.’
섬랑은 아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 앞에 우뚝 서 비수를 내질렀다.
화아아-
아비가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이 단 한 수에 완전히 소멸됐다.
‘……이제야 시원해졌네.’
정말 오래 걸렸다.
섬랑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항상 술에 절어있던 아비가 허리를 어색하게 펴고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머뭇거리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굳이 말할 필요 없어.’
이제 와서 뭐 어쩌라고.
섬랑은 감았던 눈을 떴다.
벽안이 아닌, 암청색으로 변해버린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눈동자에 한 사람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대인.”
정광이 웃고 있었다.
섬랑을 항상 오싹하게 했던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까지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맑은 웃음이었다.
“생각보다 재밌는 녀석이네.”
“…….”
“기대에 훌륭히 부응했어. 믿고 있었다니까.”
섬랑의 암청색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제 뭘 하면 되죠?”
“슬슬 다음으로 넘어가야지. 네가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말이야.”
근력도 체력도 수분도 바닥이 난 몸으로 마혼의 파편에 시달리다가 간신히 삼킨 상황.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유지되던 정신의 끈이 ‘기절’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끊겨 버렸다.
정광은 정신을 잃고 허물어지는 섬랑의 작은 몸을 기다렸다는 듯 받았다.
그리고 바닥에 대충 내려놓은 뒤 문을 보며 말했다.
“수전노, 백정 꼬마. 들어와.”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노와 관엽이 들어왔다.
“지존, 부르셨습니까?”
“응. 얘 데려가서 추궁과혈(追宮過穴) 좀 해줘.”
“존명!”
관엽이 섬랑을 번쩍 들고 밖으로 나갔다.
“수전노, 넌 안 가?”
상노는 공손한 자세로 조심스레 청했다.
“노파심이 일어서 그만……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말해.”
“섬랑 저 아이, 어떻습니까?”
정광이 씩 웃었다.
“솔직히 한 번에 해낼 줄은 몰랐거든. 이 정도 자질이면 더 거칠게 굴려도 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