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94화 (393/569)

2부 123화

그럼 하나씩 채우러 갈까

이레‘밖에’가 아니라 이레‘나’ 남았으나 허투루 보낼 만큼 많은 시간은 아니었다.

‘나름 똘똘한 녀석을 찾았으니 바로 시작해 볼까.’

다소 심약한 점이 마음에 걸리지만 어쩌겠는가. 이만한 꼬마를 또 찾을 거라 확신할 수 없는데.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관엽에게 물었다.

“관 숙수님. 연무장으로 쓰는 곳 있으시죠?”

관엽은 할 말을 신중하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가부를 정하기가 어려워 고민한 건 아니었다. 아까 지존이 명했던 대로 하대를 하기 위해서였다.

“있다.”

“거기 좀 쓰고 싶은데. 어디예요?”

“뒤뜰. 저쪽으로 나가거라.”

“감사합니다. 섬랑, 뭐 해? 가자.”

이레 만에 멸혼생사투 첫 예선을 통과하게 해주겠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섬랑은 얼결에 일어섰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배를 타기로 했다고 마냥 끌려갈 순 없어. 최소한의 것들은 알아야 해.’

가장 중요한 건 신상 정보였다.

“네, 대인. 그런데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시죠? 밝히기 좀 그러시면 별호라도…….”

정광은 이름이나 별호와 같이 사소한 것들은 떠오르는 대로 대충 짓는 성격이었다.

“진혼(眞魂). 어때, 그럴듯하지?”

“…….”

누가 들어도 급조한 별호라는 얘기 아닌가?

섬랑은 허탈한 얼굴로 맞장구쳐줬다.

“아마도요.”

“빨리 따라와. 혈조도 같이 가요.”

“네, 단주.”

정광은 섬랑, 자오와 함께 객잔 뒤뜰로 나갔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제법 넓은 공간이었다.

“쓸 만하네.”

“그러게요, 대인.”

섬랑은 정광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지나가듯 물었다.

“단주라고 불리시는데 어떤 단체의 수장이시죠?”

“상단.”

“…….”

섬랑의 미간에 골이 잡혔다.

‘아무리 뜯어봐도 장사치가 아닌데 무슨.’

그래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상단 이름이 뭔데요?”

“일확천금상단(一攫千金商團). 멋지지?”

“…….”

갈수록 가관이었다.

정체를 숨기는 건 그렇다 치자.

최소한 이름은 그럴듯하게 지어야지,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원.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입에서 나오는 대답도 곱지 않았다.

“비명횡사하거나 패가망신하기 딱 좋은 이름이네요.”

“하하.”

정광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모든 상인들의 꿈을 대변하는 이름인데. 여기도 그런 자들이 들르는 곳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 끝이 좋은 사람은 거의 없죠.”

“밖은 잘 보면서 안은 제대로 못 보는구나.”

정광은 섬랑을 내려다보며 진지하게 충고했다.

“남들보다 한참 늦게 시작하는 주제에 천하를 오연하게 굽어보겠다고 천명한 게 누구더라? 일확천금보다 훨씬 더 심한 걸 꿈꾸는 꼬마가 있었던 것 같은데.”

“……!”

진짜 말도 안 되는 걸 원하는 건 네 녀석이면서 누굴 깎아내리느냐는 의미.

섬랑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죄송합니다. 정신 차릴게요.”

“하나 더. 때가 되면 알아서 알려 줄 테니 내게서 뭘 캐내려고 하지 마. 그런 생각을 할 시간조차 아까우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자책은 깊고 짧게. 낭비할 시간이 없어.”

“네!”

섬랑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개의 벽안이 청량하게 빛났다.

뭐가 제일 중요한지 깨닫고 거기에 매진할 각오를 다진 것이다.

“대인! 뭐부터 하면 됩니까?”

“흐음. 그게 문제란 말이야.”

“……네?”

정광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그렇게 가볼까.”

“……‘가볼까’라니요. 대인, 정말 믿어도 되는 거예요?”

“물론이지. 잠깐만 기다려.”

정광은 객잔 처마 밑으로 가 그곳에 있는 선반에서 무쇠솥을 한 개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가져온 뒤, 섬랑의 몸을 대충 훑어보며 두 손으로 잡고 찢었다.

종이처럼 쭉쭉.

찌이익- 찌이익-

“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

“…….”

황당한 눈으로 보고 있던 섬랑은 강한 의문을 느꼈다.

‘뭐가?’

정광은 찢어낸 철편에서 날카로운 부분은 손가락으로 문질러 둥글게 만들었다.

“베이면 귀찮아지겠지. 안전하게 다듬어줄게.”

“…….”

섬랑은 불길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뭘 하려고 그러느냐고.’

행인지 불행인지.

곧 알 수 있었다.

“가만히 있어.”

끼익- 끼이익-

정광은 길게 찢은 철편을 섬랑의 몸에 칭칭 감았다.

“딱 맞네. 괜찮지?”

“…….”

섬랑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날릴 뻔했다.

양 손목, 양 발목, 허리에 쇠를 둘러놓고 뭐가 어째?

아무리 각오를 다졌다 해도 그렇지, 이건 정말 아니지 않은가!

“대인. 솥을 이렇게 쓰면 관 숙수가 싫어할 것 같은데요.”

“무척 상냥하신 분이라 개의치 않으실걸.”

“…….”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으면 귀신처럼 날뛰는 독비귀도(獨臂鬼刀)가 상냥하다니.

‘하긴. 이자에게만큼은 그러겠지. 존댓말까지 썼었으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따라야 했다.

그 사실을 다시 깨닫자 몸에 두른 철편의 무게가 제대로 느껴졌다.

‘빌어먹을. 뭐가 이렇게 무거워? 이것들을 차고 움직이게 해서 근력을 키우려는 건가?’

그럴 리가.

무림에서 널리 쓰이긴 하나,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공을 들여야 효과를 볼 수 있는 수련법이었다.

이레라는 짧은 시간이 주어진 섬랑에겐 아무런 쓸모도 없을뿐더러 몸이 상할 수도 있는 악수인 것이다.

하지만 정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익숙해졌지?”

“이, 이제 막 찼는데…….”

“마보(馬步) 반 시진만 해. 못 하겠으면 집에 가서 애들이랑 놀고.”

“……하겠습니다.”

섬랑은 이를 악물고 마보 자세를 취했다.

‘크윽. 뭐야, 이거.’

숨을 몇 번 쉬었을 뿐인데도 벌써 온몸이 아파질 줄이야.

‘내가 못할 것 같냐!’

상대가 누구든 간에 약조했던 일은 반드시 해냈다.

지금이라고 다를 리 있나.

오기가 치솟아 통증을 무너뜨렸다.

반 시진이 뭐!

채우는 게 아니라 훌쩍 넘겨서 코를 납작하게 해주마!

섬랑은 계속 다짐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정광은 그런 섬랑을 지그시 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그랬듯, 담담한 얼굴로 명을 기다리며 서 있는 이가 있었다.

-자오. 저한테 묻고 싶으신 거 없어요?

-아까 객잔에서 관 숙수와 수응 어르신이 단주께 존대를 했던 것 말씀이군요.

정광의 진정한 정체를 모르기도 하고, 명을 따라 섬랑을 몰래 지켜보느라 정광이 관엽과 상노를 손봐주는 걸 못 봤으니 당연히 의아할 수밖에.

-역시 궁금하셨구나.

-그분들이 갑자기 그러시는 이유를 몰라 당황하긴 했습니다만…….

자오는 잠시 침묵하다가 빙그레 웃었다.

맹목적이라고 할 정도로 강한 믿음이 담긴 웃음이었다.

-제가 단주를 모신 게 어디 하루이틀입니까. 조금 전에 섬랑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때가 되면 알아서 알려주실 것 아닙니까? 익숙해졌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정광도 씩 웃었다.

-믿어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제가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이제 일 얘기를 하죠.

-네, 단주.

-섬랑이 이끄는 애들 있죠? 걔들 집을 찾아서 입단속 잘하고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자오의 신형이 사라졌다.

정광은 섬랑을 홀로 남겨두고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흑서, 상노, 관엽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지존.”

“응. 앉아. 잠깐 얘기 좀 하자.”

정광은 세 사람이 명을 따르자 상노를 바라봤다.

“전에도 느꼈는데 섬랑 쟤, 가끔 내보이는 기질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거든. 내 생각이 맞아?”

상노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존을 호위했던 묵영대주(黙影隊主)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바로 말하는 걸 보니 맞나 보네.”

목표를 정하면 어떻게든 해냈던 수하. 그의 핏줄은 전부 강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섬랑은 지존을 네 번째로 모셨던 묵영대주 권필의 후손입니다.”

“권필은 어떻게 됐는데?”

“새로운 교주가 지존의 성취를 품으려 하자 극렬히 저항하다가 숙청당했습니다.”

“쯧. 그냥 넘겨주지 왜 그런 미련한 짓을.”

“그럴 사내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그다운 최후였습니다.”

정광은 눈살을 찌푸린 채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권필 아들은? 제법 몸이 날래고 똑똑했는데.”

“아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헛똑똑이 녀석 같으니. 권 씨 집안 여인들도 그랬어?”

“그 가문 사람들 성정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 함께 갔다가 다 같이 갔습니다. 무척 장렬한 죽음이었지요.”

정광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이것들이 진짜…… 손자는? 내가 죽을 때 열 살밖에 안 되는 꼬마였는데, 설마 걔까지 설치다가 죽은 건 아니겠지?”

“……!”

상노는 물론이오, 흑서와 관엽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지존께서 돌아가시긴 했었구나!’

‘지고한 마공으로 부활하신 건가?’

‘역시 지존이시군.’

감탄도 잠시.

상노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양손에 소도를 한 자루씩 꼬나쥐고 달려들었다가…….”

정광이 폭발했다.

“꼬마면 꼬마답게 빙당호로(冰糖葫蘆)나 쪽쪽 빨아먹으며 뒹굴뒹굴할 것이지, 애늙은이처럼 뭐 하는 짓이야!”

“크흑!”

엄청난 살기에 상노를 포함한 세 사람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닌데도 바닥에 부복하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지존!”

“다시 앉아. 그래서? 어떻게 죽었지? 비참하게 갔나?”

세 사람은 허둥지둥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상노는 순식간에 바싹 말라 버린 입술을 잽싸게 혀로 축이고 설명했다.

“다행히 다른 교도들이 말리다가 제압해서 살았습니다.”

“……장난하냐? 괜히 짜증 냈잖아.”

“죄, 죄송합니다!”

“어쭈. 누가 또 엎드리래. 일목요연하게 제대로 말해, 인마.”

“네, 지존!”

새 교주의 성정대로라면 참초제근(斬草除根) 하는 게 마땅했으나, 여전히 정광을 경외하는 교도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정광의 심복 가문으로 정평이 난 권가의 유일한 생존자를 죽여봐야 득보다 실이 훨씬 많을 터.

정광은 상노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변방으로 쫓아내는 것으로 그쳐야 했다 이거지? 그곳이 바로 여기고.”

“그렇습니다.”

권가에서 홀로 살아남은 열 살 꼬마 권오는 지독하리만치 무공을 연마하며 복수의 칼을 갈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걔는 근골이 별로였는데.”

“맞습니다. 십여 년이 넘게 갖은 애를 쓰다가, 아무리 해봐야 복수는 요원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사실 자질이 훨씬 뛰어났어도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술에 절어 사는 폐인이 되었는데, 우연히 정을 통한 여인이 낳은 자식이 바로 섬랑입니다.”

“그 여인은 어떻게 됐지?”

“다른 이와 시비가 붙어 싸우다가 같이 죽었습니다. 권오는 다시 술독에 빠졌고 말입니다.”

“섬랑이 토납술도 모르는 게 그래서였나.”

“네, 지존.”

권오는 섬랑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걸 넘어 남에게 배우는 것조차 금해 버렸다.

무공을 익혀봐야 뭐 하는가?

결국 맞이하는 건 비참한 죽음뿐인 것을.

상노는 그의 마지막 말을 전했다.

“권오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섬랑이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해달라고 저와 관엽에게 부탁했습니다. 저희는 그의 조부에게 빚이 있는지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나직이 덧붙였다.

“지존께서 섬랑을 어여삐 봐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구한 아이에게 큰 복이 내려져 정말 다행입니다.”

* * *

신외무물(身外無物)이라는 말이 있거늘.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깟 것을 지키려다가 가문이 쫄딱 망하고, 변방으로 쫓겨났으면서도 복수를 한답시고 설치다가 아비까지 폐인이 되어 죽어버렸는데 다행은 개뿔.

모든 일의 원흉.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새끼가 감히. 내 사람들을 가문째로 날려?’

그에 걸맞는 보답을 정성 들여 해줘야 했다.

정광은 객잔 문을 열고 나와 뒤뜰로 갔다.

팔짱을 끼고 잠시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딱 반 시진 됐어.”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면서도 정확한 마보 자세를 취하고 있던 섬랑이 눈을 하얗게 까뒤집으며 풀썩 쓰러졌다.

정광은 인상을 쓰며 다가갔다.

‘한 시진은 해낼 기세더니 뭐야?’

그래도 이게 어딘가?

가르칠 만한 녀석이었다.

제대로 가르치면 이미 죽어버린 녀석들처럼 미련하게 가버리진 않을지도…….

‘어디 보자.’

정광은 섬랑 앞에 쪼그리고 앉아 녀석의 상태를 살폈다.

‘딱 좋게 됐네.’

꼽추를 잡느라 젖 먹던 힘까지 썼겠다, 마보로 진까지 완전히 뺐으니 하나만 더 비우면 되리라.

“야. 야. 일어나. 죽었냐? 아닌데.”

몸에 감은 철편을 떼어내고 머리를 몇 대 쥐어박으니 효과가 있었다.

섬랑은 몇 차례 기침을 토한 뒤, 가까스로 눈을 떴다.

정광은 녀석의 눈을 무섭게 노려보며 경고했다.

“귓구멍 활짝 열고 똑똑히 들어.”

“크흑. 마, 말씀하세요.”

“네 멋대로 죽어버리면 부관참시(剖棺斬屍)해 버린다.”

“……네?”

정광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대답이나 해. 알았어, 몰랐어?”

섬랑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알겠으면 이것부터 먹어.”

“네, 대인.”

섬랑은 정광이 내민 단환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측간에서 살게 됐다.

정광은 섬랑의 안색을 보며 상태를 가늠하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다 비웠네.”

섬랑은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가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그럼 하나씩 채우러 갈까.”

정광은 섬랑을 어깨에 들쳐 메고 객잔으로 들어갔다.

이 층으로 올라가 녀석을 바닥에 내려놓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온몸이 끊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입을 움직일 힘조차 없지?”

“…….”

그걸 말이라고.

대체 뭘 하려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거야!

정광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지금부터 진짜 마인(魔人)이 될 수 있는 첫걸음을 떼게 해주마.”

섬랑은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정광이 너무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용기와 체력을 쥐어짜 간신히 물었다.

“어, 어떻게요?”

“네 혼(魂)에 마(魔)부터 심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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