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1화
한번 해볼래?
관엽은 고차기(庫車伎)에 도착하자마자 붉은 천을 입구에 드리우고 문을 닫아걸었다.
“지존. 이제 귀찮게 하는 자는 없을 겁니다.”
“그게 휴무 표시야?”
“……접근하면 죽인다는 의미입니다.”
“저런. 장사를 그렇게 해서야 쓰나.”
“……죄송합니다.”
“어쨌든 수고했어. 근데 목이 왜 이리 칼칼하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흑서가 재빨리 입을 놀렸다.
“교주, 목을 깔끔히 풀어드릴 술을 준비하겠습니다. 점심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안줏거리는 간단하게 올리는 게 낫겠지요?”
“흑서가 일머리를 좀 아네.”
“과찬이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흑서는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인 뒤 관엽에게 명했다.
“뭐 하느냐? 어서 가져오지 않고.”
관엽의 눈에서 검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검은 쥐새끼라고 했던가?
생전 처음 듣는 별호를 지닌 자가 하대해서 화난 게 아니었다.
아무리 지존의 수하라 해도 그렇지, 내 객잔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데 어찌 속이 뒤틀리지 않겠는가?
“알아서 할 테니 입 다무시오.”
“그래, 서둘러…… 무어라?”
흑서의 눈동자가 급속도로 작아지며 번들거렸다.
이깟 변두리에서 구르는 마졸(魔卒) 따위가 감히 말대꾸를 할 줄이야.
이걸 넘어가면 앞으로도 계속 기어오를 터.
본때를 보여줘야 했다.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러는 것이냐?”
“그런 건 알 바 없소. 여긴 내 객잔이오.”
흑서가 한 걸음 다가갔다.
“흐흐.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뽑아서 씹어 삼켜줘야겠어.”
관엽은 세 걸음 물러났다.
위축돼서가 아니었다.
주방 앞에 있는 선반 밑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그의 손엔 정광이 우그러뜨렸다가 녹여 버린 기형도와 똑같은 도가 들려 있었다.
“그럴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
그에 반해 흑서는 즐겨 쓰는 쌍철괴(雙鐵拐)를 꺼내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짓뭉개진 왼뺨을 씰룩거리며 투명암혼마공(透明暗魂魔功)을 운용했다.
그의 늙은 육신이 어두워지더니 투명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햇빛이 투과하는 묘한 어두움 속에서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오냐. 지금 바로 죽여…….”
흑서는 살기를 폭발시키려다가 말꼬리를 흐리며 간신히 참았다.
극심히 분노한 와중에도 자신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 자각한 것이다.
신형을 돌려 정광을 바라보며 공손히 물었다.
“교주. 이놈, 죽여도 됩니까?”
“네가 요리할 거면.”
“그 정도야…….”
“먹고 화나지 않을 수준으로.”
“…….”
정광의 기준은 높았다.
사람을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흑서에게 그 기준을 맞출 재주가 있을 리 있나.
어깨가 축 늘어질 수밖에.
정광은 관엽에게도 주의를 줬다.
“뭐 해? 어서 내오지 않고.”
“존명!”
관엽은 무척 튼튼했다.
정광에게 엄청난 구타를 당했는데도 신음 한번 흘리지 않고 안주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탁자가 안주와 술로 가득 차자 정광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반성 좀 했냐?”
정광이 객잔에 들어왔을 때부터 묵묵히 부복하고 있던 상노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네, 지존. 지존께서 살려주신 쿠차를 제대로 관리해야 하나, 소인의 능력이 부족해 대죄를 저질…….”
“그런 거 말고. 만세 어쩌고 하지 말라고.”
“……네, 지존.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만 일어나. 먹자.”
“존명!”
정광은 먼저 자신의 잔을 채운 뒤 흑서, 상노, 관엽 순으로 술을 따라줬다.
“감사합니다, 교주.”
흑서의 어깨가 잔뜩 올라갔다.
이는 교주를 직접 접해보거나 풍문으로라도 들은 자라면 모두 아는 의미.
수하들의 서열을 정리한 것 아닌가?
정광은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줬다.
“흑서는 북천호가(北天扈家)의 후인이야. 수전노, 너는 알지?”
“네, 지존. 오래전에 귀동냥으로 들었습니다.”
“그럼 백정 꼬마는 당연히 모르겠구나. 출신을 대접하라는 게 아니라 그만한 실력이 있으니 최소한의 예는 갖춰.”
관엽이 건조한 음성으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존.”
“좋아. 대충 정리가 됐네. 이번 일이 끝나면 서로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고.”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관엽을 지그시 응시하며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던 흑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흐흐. 감사합니다.”
관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래대로 무심해졌던 눈에 다시 검은 불씨가 붙었다.
“내려주신 기회, 소중히 쓰겠습니다.”
“무어라?”
흑서가 눈을 부라리고 관엽이 고개를 빳빳이 세운 그때.
상노는 다른 점에 집중했다.
지존이 어떻게 다시 살아난 건지, 정말 죽긴 죽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의문을 표하진 않았다.
‘이분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가능하실지도…….’
하지만 이것만큼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존, 속하가 한 말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응.”
“이번 일이란 건 어떤 것입니까?”
정광의 답은 간결했다.
“내 행세를 하고 있는 놈을 죽이려고.”
“……!”
흑서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응을 안 했으나 상노와 관엽은 달랐다.
‘새 교주가 거슬려서 직접 오신 것인가!’
‘바꾸러 오셨다는 의미가 이런 것이었구나!’
지존이 정말 그자를 죽이면 천마신교는 물론이오, 신강에 엄청난 변혁이 일어날 터.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상노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천천히 열었다.
“누가 교주가 됐는지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물론.”
“그가 지존을 계승했다고 자부하고, 교도들 역시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아시는지요?”
정광이 피식 웃었다.
“그놈이 중원으로 보낸 수하한테 들었지.”
명교주를 말함이었다.
“웃기지도 않더라. 계승은 무슨, 반쪽짜리인 주제에.”
“지존의 말씀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의 힘을 두려워해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지는 못하는 실정입니다.”
정광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걔, 많이 세졌어?”
“…….”
상노는 망설이다가 솔직히 답했다.
“원래부터 뛰어났으나 지존의 성취를 이은 이후부터는 무적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정광은 입맛을 다셨다.
“그걸 괜히 남겨서 일이 번거로워지네. 제대로 쓸 수 있는 놈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그놈, 나름 애먹고 있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너와 백정 꼬마가 아직 살아 있으니까. 여기가 이러면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겠지.”
정광은 기억 속에 있는 ‘그놈’을 떠올렸다.
그 욕심 많은 놈이 교를 완전히 삼켰으면 짭짤한 소도시들을 가만히 내버려 뒀을 리 있나.
제 놈이 먹거나 다른 가문에 던져줬을 게 분명했다.
상노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정했다.
“지존의 말씀대로입니다.”
“너희가 애쓴 공도 있겠지. 수전노 네가 그러는 건 더 전에 봤고, 아까 오면서 둘러봤는데 백정 꼬마와 아무도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더라. 애들을 확실히 움켜쥐고 있다는 얘기지.”
가만히 듣고 있던 관엽이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존. 그걸 확인하시려고 저와 천천히 걸어오신 겁니까?”
“응. 네가 외지인과 나란히 걷는 걸 보고 그 이유를 탐색하려는 녀석들이 있으면 여기를 아예 지워 버리려고 했거든.”
“……!”
관엽과 상노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지켜온 고향이 피에 잠길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정광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걸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고했어. 외부에 쿠차를 팔아먹는 놈이 없도록 관리하라고 말했었는데 잘해온 것 같네.”
“가, 감사합니다.”
“너희들 좋으라고 권유했던 건데 그럴 것까지야.”
그리고 이젠 정광이 부려먹을 생각이었다.
‘다른 소도시들의 사정도 여기와 비슷하면 써먹을 수 있겠어. 무력은 약하지만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니 없는 것보단 낫겠지.’
소도시에서 구르는 마인이라고 전부 하수는 아니었다.
총단이나 큰 가문에서 사고를 치고 쫓겨난 인재도 있었고 상노나 관엽처럼 쓸 만한 고수도 심심찮게 있었다.
정광이 두 사람의 합격을 순식간에 깨뜨렸던 건 자신이 강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병기와 무공이 그에게서 나온 탓도 컸던 것이다.
‘역시 소도시 애들을 규합해서 곳곳을 찔러보다가 기회를 노려 머리를 치는 게 나으려나.’
일단 이건 후보로 두고.
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다고 좋은 상황은 아니지? 총단 정리가 얼추 끝났으면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기 마련인데.”
안 그래도 딱딱한 상노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맞습니다. 곤륜을 치고 공을 세운 자와 가문에게 소도시들을 포상으로 나눠줄 거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논공행상하겠다? 쌀도 아직 안 익었는데 밥부터 푸려고 하네.”
상노가 조심스레 설명했다.
“곤륜에 정파무림이 모이고 있다 합니다. 사기를 끌어 올리기엔 나쁘지 않은 계책이지요. 무엇보다 사마련주를 죽이고 명성을 드높인…….”
상노가 말끝을 흐리자 정광이 씩 웃었다.
“나도 있지. 편하게 말해.”
“……역시 지존께서 진옥룡이셨군요. 아까 도호를 외우시는 걸 보고 짐작했습니다.”
“백정 꼬마도 그러더라. 앞으로 주의해야겠어. 도를 너무 가까이했나, 도호가 입에 붙어버렸다니까.”
진천마와 도(道)라…….
도저히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관계였으나 상노는 내색하지 않았다.
“새 교주는 야망이 큽니다. 곤륜을 시작으로 자신의 이름을 천하에 새기려 합니다.”
“다른 놈들도 잔뜩 신이 나서 날뛰겠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몇 달 전에 멸혼생사투(滅魂生死鬪)를 열어 후계를 정하겠노라 천명했습니다.”
“하하.”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 시점에 멸혼생사투라니.
천마신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강자존(强者尊).
교주 직위는 핏줄로 세습되는 게 아니었다.
정광 역시 아비가 교주였는데도 멸혼생사투라는 아수라장에 뛰어들어 힘으로 소교주 자리를 쟁취하지 않았던가?
“가지가지 하네.”
정광은 명교주가 토설했던 얘기들을 떠올렸다.
“열두 살 이하의 아이들만 참가할 수 있으니 그놈 핏줄 중에선 팔푼이 셋째 손자가 출전하겠네.”
“맞습니다.”
“내가 들은 대로라면 그 녀석으론 어림도 없지.”
“그럴 거라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멸혼생사투는 코피가 터지면 승부가 갈리는 애들 싸움이 아니었다.
이름 그대로 상대의 혼을 멸할 각오로 죽고 죽이는 생사투였다.
“칠대가문에게 너희들 중 한 가문의 아이가 다음 교주가 되게 해줄 테니 제 놈이 살아 있을 동안엔 입 다물고 따르라고 꼬리를 살랑대는 거잖아.”
상노가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어찌 보면 현명한 판단이지요.”
자신의 후손 중 더 뛰어난 인재가 나오길 기다리며 억지로 시간을 끌다가 원성을 사느니, 자신의 대에서만 더 큰 권위를 얻는 걸 택한 것이었다.
“그놈답네. 언제 시작하지?”
“이레 뒤입니다.”
“지역에서 예선을 치르고 본선은 총단에서 하는 방식으로? 그놈 앞에서?”
“맞습니다. 그건 불변이지요.”
“좋아. 아주 좋아.”
정광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상황이 딱딱 들어맞아 귀찮게 빙빙 돌아가지 않고 목표물까지 쭉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가만. 그러려면 똘똘한 꼬마가 필요한데…….’
바로 떠오르는 아이가 있었다.
‘근데 너무 어리잖아.’
잘 봐줘야 일고여덟 살이나 됐으려나.
어린아이는 한 살만 더 먹어도 신체 능력이 확연히 달라지지 않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 아쉬운 부분이었다.
‘더 지켜보고 싶을 만큼 괜찮은 녀석이지만 다른 아이를 찾아보는 게 나을지도…….’
그때, 그 녀석을 지켜보라고 보냈던 자오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정광은 손가락을 하나 세워 마인들을 침묵시킨 뒤, 닫아걸었던 문을 열고 자오를 맞이했다.
“일찍 오셨네요.”
“죄송합니다, 단주. 그렇게 됐습니다.”
“왜요?”
자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섬랑이 또 사고를 쳤습니다.”
* * *
정광은 자오와 함께 섬랑이 있다는 곳으로 달렸다.
정 인재가 없으면 그 녀석이라도 써야 하거늘, 곧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데 어쩌겠는가?
쿠차를 관리하는 상노도 함께 갔는데…….
이미 결판이 난 상황이었다.
‘이놈이 감히!’
상노는 살기를 일으키며 천천히 걸었다.
빼곡히 들어차 있던 구경꾼들이 양쪽으로 썰물처럼 물러나 길을 열었다.
길 끝에는 피부가 푸르딩딩하게 물들고 양 발목이 잘린 고깃덩어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아침에 단단히 경고했던 꼽추 노인이었다.
상노는 그 앞에 서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섬랑에게 다가갔다.
섬랑은 살기를 느끼자마자 비수를 곧추세우며 빙글 돌았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셨어요?”
“…….”
섬랑의 상태도 엉망이었다.
상처투성이 몸으로 피를 줄줄 흘리는 꼴이라니.
“꼽추가 먼저 쳤느냐?”
“아뇨. 제가요.”
꼽추의 손에 죽게 된 것을 살려줬더니, 반나절도 안 되어 암습으로 보복한 것인가.
이래서야 율법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상노는 섬랑의 코앞에 서서 오른손을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엄지를 접었다.
“하나. 쿠차 사람들끼리는 살인을 금한다.”
“안 죽었어요. 독을 써서 빈틈을 만들었는데 제게 이 새끼를 죽일 만큼 강한 독을 살 돈은 없거든요. 안 보이세요? 발목만 썰었는데.”
그 말을 증명하듯 꼽추가 간헐적으로 움찔거렸다.
하지만 상노는 검지를 접었다.
“둘. 남의 일을 침범하지 않는다.”
“저는 침범하지 않았는데. 이 새끼가 침범했던 것에 대한 교훈을 내렸을 뿐인데요.”
“…….”
“어쩔 수 없었다니까요.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몰라 불안해 죽겠는데 어쩌라고.”
상노는 중지를 접지 않았다.
두려움 때문에 벌벌 떨면서도 천천히 조여오고 있는 아이들 때문은 아니었다.
섬랑의 말에서 논리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없어서였다.
‘그래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복을 하다니. 언젠가는 병신이 되겠군.’
잠재적인 적을 누가 가만히 둘까.
누가 됐든 반드시 나서리라.
하지만 그래선 곤란했다.
상노는 섬랑을 부탁한 이에게 빚이 있었다.
‘적당한 징벌을 내려 다른 놈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게 낫겠지.’
어깨를 하나 꺾으려고 하는 순간.
정광의 전음이 들렸다.
-쟤만 빼고 다 쫓아내.
상노는 바로 명을 따랐다.
잠시 뒤.
정광은 텅 빈 거리를 여유 있게 걸어가 섬랑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합격.”
“……네?”
정광은 식사를 권했을 때처럼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너, 소교주 한번 해볼래? 나중에 운 좋으면 겸사겸사 교주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