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0화
다시 거두러 오신 겁니까?
상노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인 것마냥 오연히 서 있는 청년을 노려보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오장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상대의 마기에 휘둘려 기혈이 제멋대로 들끓다니.
어떻게든 심신을 가라앉히려고 발버둥 치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보통내기가 아닐 것이라 짐작했기에 이렇게 함정까지 팠거늘, ‘그’가 연상되는 엄청난 마기를 표출할 줄이야!
게다가 내 땅과 내 종이라고?
대체 누구기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을 지껄인단 말인가!
‘그는 절대 아니다! 그는 이십여 년 전에 이미 죽었어!’
그렇다면 대체 누구길래 이런 마기를?
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청년의 후방을 차단하고 있던 관 숙수가 항상 무뚝뚝하던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쿠차 제이고수 독비귀도(獨臂鬼刀) 관엽이 상노보다 빠르게 과거의 상념을 깨뜨리고 나와 분노를 토한 것이다.
“감히 그분을 흉내 내다니! 죽인다!”
관엽의 건조한 눈에서 검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극심한 분노가 끌어낸, 불꽃보다 시린 마기였다.
그 마기가 관엽을 순식간에 잠식했다.
검은 화마(火魔)는 그를 오롯이 집어삼킨 뒤 그의 손에 들린 기형도마저 검게 불살랐다.
관엽은 이를 드러내며 저주하듯 외쳤다.
“능지처참(陵遲處斬) 해주마!”
“안 돼! 멈춰!”
상노가 다급히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막대한 분노에 이지가 짓밟혀 버린 관엽은 검은 불덩이가 되어 청년에게 돌진했다.
상노의 마음속에서 살기가 솟구쳤다.
‘저런 멍청한!’
오래전에 죽은 ‘그’의 흉내를 내는 미친놈을 보고 분노한 게 저 혼자인가?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상대를 봐가며 싸워야지!
산불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미련한 짓거리를 하다니!
‘이미 늦었어!’
무릎을 꿇고 실수였다고 빌어봐야 저런 극악한 마기를 품은 자가 받아줄 리 있나.
이쪽에서 먼저 손을 쓴 이상 어떻게든 죽여야 했다.
‘안 된다 해도 길이 없다!’
즉시 진기를 끌어 올려 진득한 마기를 뒤집어썼다.
거기에 살기를 더해 날카롭게 벼리며 청년에게 쇄도했다.
소매 속에서 꺼내 든 철주판(鐵籌板)이 청년의 목을 향해 매섭게 짓쳐 들었다.
후방에선 기형도가, 전방에선 철주판이 거의 동시에 목숨을 노리는 치밀한 합격!
하지만 청년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매가 약이야.”
그때, 관엽의 기형도가 기괴한 곡선을 그리며 청년의 옆구리에 박혔다.
상노의 철주판이 악독한 기세로 청년의 목을 때렸다.
허나 청년은 몸이 양단되어 내장을 줄줄 흘리지도, 목뼈가 부러져 머리통이 찢겨 날아가지도 않았다.
그렇게 되기 직전,
후우웅-
두 손을 기이하게 움직였다.
손목을 구부려 손등으로 기형도와 철주판을 가볍게 쳐냈다.
쩌엉-
“……!”
이 가벼운 한 수에 어찌나 대단한 힘이 실렸는지.
관엽과 상노의 손아귀가 찢어지며 핏물이 흘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청년이 양손의 검지를 폈다. 음험한 기운이 가득한 지풍(指風)을 날려 두 사람의 심장을 노렸다.
지풍이 가슴에 닿지도 않았는데 벌써 심장이 터진 듯한 고통이 느껴지다니!
관엽과 상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암영지(暗影指)!’
‘총단의 기본공(基本功)을 이토록 위력 있게 펼칠 수 있나!’
실로 절체절명의 순간!
“큭!”
관엽은 철판교의 수법으로 재빨리 허리를 젖혔다.
지풍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며 핏방울이 튀었다.
상노는 조금 더 기민하게 반응했다.
“흡!”
오른발을 비스듬히 옆으로 옮기며 허리를 틀었다. 암영지를 간신히 흘림과 동시에 청년의 측면을 점했다.
마지막으로 철주판을 바로 세워 진기를 쏟아 넣었다.
‘파(破)!’
콰앙!
주판에 달려 있던 수많은 주판알들이 폭발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청년에게 쏘아졌다.
지근거리에서 펼친 비장의 암수!
상노의 음침한 얼굴이 괴이하게 뒤틀렸다.
미소를 머금은 것이다.
‘방심한 대가다!’
무공이 아무리 강하면 뭐할까.
마인이라면 누구나 지닌 최후의 한 수를 이리 쉽게 허용하는 애송이 아닌가?
잘난 얼굴은 물론이오, 전신에 주판알들이 가득 박혀 붉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쓰러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비록 정체는 모르지만 어쨌든 죽였으니…… 헉!’
방심한 건 자신이었는지도.
어느새 청년의 손이 작은 원을 그리며 칠흑같이 어두운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흉악한 기세로 날아가던 주판알들이 검은 기류에 휩쓸려 매끈한 손바닥에 얌전히 갇혔다.
청년의 다른 손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관엽이 상체를 일으키며 펼친 비장의 절초(絶招)를 무시하고 기형도를 움켜잡는 것 아닌가!
마기에 휩싸인 양손으로 쿠차에서 제일 강한 두 고수의 병기를 무력화시킨 상황!
상노와 관엽은 얼음처럼 굳은 채 자신들도 모르게 외쳤다.
“암영지에 이어 선풍마수(旋風魔手)라니!”
“이런 기본공으로 우리를 막는 자가 있을 줄이야!”
두 사람을 제압한 청년, 정광도 속으로 탄식했다.
‘하북성에서 돼지 잡을 때 한번 썼었는데도 영 어색하네. 손바닥이 까졌잖아.’
마혼(魔魂)만큼은 전생과 다를 바 없었지만, 초식과 진기 운용 숙련도에서 큰 차이가 났다.
그냥 새로운 삶을 사는 데에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였으나 총단까지 가기로 마음먹은 상황이니 그럴 수도 없고.
‘앞으로 신경 좀 써야겠어.’
뭐 그건 차차 할 일이고.
당장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가르침부터 줘야지.’
양손에 힘을 줬다.
꽈드득!
시커먼 가루가 되어버린 주판알들이 주먹 틈새로 삐져나와 바람에 흩날렸다.
콰지직!
형편없이 우그러진 기형도가 거센 마화(魔火)에 휩싸여 검은 피를 흘리며 녹아내렸다.
“이제야 대화를 할 준비가 됐네.”
정광은 양손의 힘을 풀고 자신을 검은 마기로 불태웠다.
지옥의 겁화(劫火)처럼 어둡게 일렁이던 불덩어리가 살짝 갈라지며 가느다란 하얀 선이 빛났다.
정광의 이빨들이었다.
그 틈새로 무저갱에서 새어 나온 듯한 소름 끼치는 울림이 전해졌다.
“야. 수전노. 예나 지금이나 쓸데없이 과묵한 꼴 하고는. 내 앞에 엎드려 빌며 손가락 두 개를 잘라 바친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던져 준 생사주판(生死籌板)으로 나를 암습해?”
“……!”
“콧물을 찔찔 짜던 백정 꼬마. 그래, 너 인마. 여기에 꼬마가 너밖에 더 있어? 한쪽 팔을 날린 게 불쌍해서 밥벌이라도 하라고 좌수도(左手刀)를 하나 만들어서 가르쳐줬건만. 그걸로 나를 썰려고 들어? 미쳤냐?”
“……!”
상노와 관엽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저자가 누구기에 ‘그’가 붙였던 호칭으로 자신들을 부르며 오래전에 있었던 비사를 정확히 얘기한단 말인가!
흑염(黑焰)으로 화한 정광이 못마땅한 어조로 이죽거렸다.
“이것들이 아직도 간을 보네. 하라는 무공 수련은 안 하고 정치질만 부단히 익혔나.”
듣는 사람의 속을 홀랑 뒤집어 버리는 말투와 만마(萬魔)를 압도할 만한 거대한 위엄.
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이가 또 있으랴.
‘서, 설마…….’
‘……그분?’
경악한 두 사람을 검은 불꽃이 집어삼켰다.
“거기까지. 기억나기 전에 기억을 되살려주마.”
* * *
상노는 끝없는 암흑 속에서 부유하다가 꿈을 꿨다.
이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천마신교 총단에서 신강 전역으로 순백의 비단을 두른 전서구가 날았고, 그 전서구가 가져온 서신을 통해 ‘그’가 귀천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상노는 만사를 제쳐두고 총단으로 달려갔다.
그가 범부처럼 수명이 다해 죽었다는 소식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였다.
허나 그를 직접 만나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마도칠대가문을 비롯한 모든 교도에게 경외의 대상으로 추앙받고 있으면 뭐 하는가?
극진한 예를 받으며 마중마(魔中魔)다운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눈을 감은 채 호흡도 못 하는 시신인 상태로 상노를 맞이한 것이다.
상노는 그의 앞에 엎드려 온종일 통곡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손가락을 잘라 올리진 않았으나 진심으로 슬퍼하며 앞으로의 각오를 바쳤다.
그리고 미련 없이 쿠차로 돌아왔다.
그가 이렇게 가버렸으니 여러 소도시가 위험해질 터.
그가 살려준 곳들이었다.
한동안이나마 지켜준 터전이었다.
칠대가문이 머리 위에 짙게 드리워져 있던 그의 그림자를 떨쳐내면 그냥 놔둘 리 있나.
다행히 시간은 있었다.
칠대가문은 꽤 오랫동안 굵직굵직한 것들을 가지고 아귀다툼을 벌일 게 분명했다.
판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새로운 교주가 등극해 모든 것을 바꿔 버리기 전에 어떻게든 힘을 길러야 했다.
‘하지만 실패했지.’
또다시 다가온 깊은 좌절감과 형언할 수 없는 분노 때문일까.
상노는 꿈속에서 눈을 떴다.
마치 미래를 예견하듯 쿠차를 비롯한 소도시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 이유를 떠올리자 그의 흉내를 낸 놈이 더 가증스러워졌다.
상노는 꿈을 깨고 나왔다.
눈을 번쩍 뜨며 자신과 관엽에게 외쳤다.
“정신 차려! 이놈은 지존(至尊)이 아니라 지존인 척하는 귀신…….”
따악!
“커헉!”
빠악! 뻐억!
“어흑! 카악!”
정광은 죽도록 두들겨 맞다가 몇 번이나 기절해서 차가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상노가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지르자 마적(魔笛)으로 두들겨 팼다.
“귀신? 내가? 나머지 여덟 손가락도 잘라주랴?”
“악! 윽!”
“이놈이 웃긴 게 맞을 때만큼은 과묵하지 않아요. 누구처럼 쉼 없이 떠들 수 있게 때려줄까? 응?”
“크흑! 제, 제발 그만…….”
“그래, 너는 잠깐 쉬자. 이놈은 죽었나, 왜 눈을 안 떠?”
정광은 상노 옆에 쓰러져 있는 관엽의 머리통을 마적으로 시원하게 후려쳤다.
까앙!
“크헉! 지, 지존의 원수! 반드시 죽인다!”
“이건 또 무슨 꿈을 꾼 거야? 네가 죽어라!”
빠악! 뻐억!
“억! 크악!”
“이놈도 또 말이 많아졌네. 남은 한쪽 팔도 잘라야겠어.”
손을 쓰려던 정광의 눈이 자비심으로 물들었다.
“무량수불. 그건 안 되지. 방을 청소하고 요리를 할 놈이 없어지잖아.”
정광은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마적을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담담한 어조로 꾸짖었다.
“수전노. 쿠차에 기회를 달라고, 기회만 주면 미력하게나마 힘이 되어드릴 자신이 있다고 주절대던 녀석이 판단력이 이렇게 흐려져서야 어떡해?”
“……!”
“백정 꼬마. 네가 쿠차를 쥐어짜던 놈에게 대들다가 오른팔이 날아갔을 때 살려주면서 경고했었지. 실력이 형편없으면 상대를 봐가면서 싸우라고.”
초점 없이 풀려 있던 관엽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정광의 정체를 확신한 것이다.
“크흑…….”
상체를 벌떡 일으키려다가 무너지길 몇 차례, 간신히 일어나 공손히 부복했다.
그의 입에서 원래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존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상대를 봐가며 싸우시지 않고 어떻게든 죽이셨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었을 뿐입니다.”
정광은 마적을 다시 뽑아 관엽의 머리를 내려쳤다.
까앙!
“그건 나니까 그런 거고.”
“죄송합니다.”
“이젠 아프지 않은가 보다?”
“지존이시라면, 저를 산 채로 찢어 죽이셔도 웃으며 죽을 수 있습니다.”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부탁인데, 제발 웃지는 마라. 보기 영 그렇거든.”
“알겠습니다, 지존.”
“그래. 꼭 그래야 해.”
정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노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노 역시 관엽처럼 억지로 몸을 일으켜 부복한 상태.
정광은 마적을 빙글빙글 돌리며 협박했다.
“또 헛소리하면 그냥 죽인다.”
“…….”
상노가 고개를 들었다.
“어? 우냐?”
“……아닙니다.”
“우는데?”
상노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입을 열었다.
듣기 거북한 쇳소리가 정광의 귀를 울렸다.
“만세만세만만세(萬歲萬歲萬萬歲)! 위대한 천마신교의 통치자이신 교주이자 천하마도의 지존이신 진천마를 뵙습…….”
까아앙-
“크헉!”
마적에 뒤통수를 강타당한 상노가 엎어졌다.
“그래. 옛 버릇을 쉽게 바꾸긴 힘들겠지. 내가 도관밥을 많이 먹긴 했나 보네. 진짜 대자대비해졌다니까. 흑서, 잠깐 나와봐.”
상노의 그림자에서 흑서가 솟아났다.
“네, 교주. 명을 받듭니다.”
“너는 그래도 빨리 고쳤네. 담백하게 필요한 말만 하니 얼마나 좋아.”
“감사합니다!”
“오냐. 수전노 데리고 은밀하게 객잔으로 돌아가. 나는 백정 꼬마와 천천히 걸어갈게.”
“존명!”
흑서가 상노를 들쳐 메고 허공 속으로 녹아들었다.
정광은 관엽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살이 베이는 것처럼 매서운 찬바람이 두 사람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정광은 황량한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하여간 날씨하고는. 이런 데서 잘도 살고 있네.”
묵묵히 걷기만 하던 관엽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존. 진옥룡이라 불리는 마협(魔俠)이 지존이십니까?”
“맞긴 한데 마협은 또 뭐야? 간지럽게. 도호를 외우는 걸 듣고 추측한 거지?”
“그렇습니다.”
“그나마 눈치는 생겼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길을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관엽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존. 지존의 땅과 종들을 다시 거두러 오신 겁니까?”
정광이 피식 웃었다.
“거둬서 뭐 해.”
“…….”
관엽의 눈에 맺혔던 실망감이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뜨거운 의지로 바뀌었다.
“바꾸러 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