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18화
마도도시(魔道都市)
태연한 정광과 달리 자오는 어쩔 줄을 몰랐다.
“대체 여긴 뭐 하는 곳이길래 이런…….”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죠.”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 그렇게 세게 때리셔도 되는 겁니까?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정광은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기 애들은 조숙한 데다 하도 맞으면서 커서 머리가 무척 단단하거든요.”
“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사제 부친께서 주신 책자에 자세히 쓰여 있었죠.”
“아! 그랬군요. 정보가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거짓말이었다.
백진환이 복원한 길은 탑극랍마간을 관통하는 서역남도(西域南道).
사막 위쪽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모두 정광이 전생에 경험했던 일들이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자오는 사파 출신이잖아요.”
자오가 황당해했다.
“단주. 사파가 비록 거칠고 음험한 면이 있긴 하나, 이 지경은 아닙니다. 마교, 마교 하더니 정말 대단하군요.”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긴 아직 천마신교라 할 수 없는 곳인데.’
뭐 중요한 건 아니니 대충 넘어가도 상관없으리라.
그보다 오랜만에 사람 사는 곳에 왔겠다, 불쌍한 배를 꽉꽉 채워줘야 했다.
“자오. 괜찮은 객잔을 찾아주…… 아니지.”
자오가 능력을 발휘하려면 말이 제대로 통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이곳 사람들이 한어를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곳이지만 교역로 근처의 도시인데 그럴 리 있나.
아까의 꼬마도 벽안(碧眼)이었는데 훌륭한 한어를 구사하지 않았던가.
‘마침 쓸 만한 녀석이 있네.’
정광은 걸음을 멈추고 신형을 돌렸다.
뒤에서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쫓아오고 있던 아이가 화들짝 놀랐다.
“비, 비수 사세요. 정말 좋은 비수가 왔습…….”
“얼마면 돼?”
“……네?”
“너를 고용하려고 하는데. 얼마면 되냐고.”
아이의 파란 눈이 요사하게 빛났다.
“저는 보기보다 많이 비싼 편…… 엄마야.”
애초에 있지도 않은 엄마를 찾을 만했다.
조막만 한 손에 어느새 놓여 있는 찬란한 금원보는 그만한 가치가 있고도 남았다.
“흐읍.”
아이는 눈부신 속도로 금원보를 품속에 넣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안 놓인 걸까?
몸을 살짝 낮추고 혹시 본 사람은 없는지 주위를 날카롭게 둘러봤다.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던 정광이 입을 열었다.
“아무도 못 봤으니까 적당히 해.”
아이가 기민하게 한 걸음 물러났다.
“대인과 대인의 수하가 봤잖아요. 이건 이제 제 거예요.”
“다른 것도 빼앗아줄까? 나를 암습한 값까지 쳐서?”
“암습했던 게 제 잘못이에요? 뜨내기인 줄 알았잖아요.”
“표식을 달 생각은 없어. 힘이 있으면 그런 건 필요 없거든.”
아이가 목을 움츠렸다.
“진짜 처음 오신 게 아니었네. 제가 뭘 하면 되죠?”
“이름부터.”
아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거 없는데. 그냥 섬랑(閃郞)이라고 불러주세요.”
정광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저런. 사내는 너무 빠르면 못 쓰는데.”
“다, 단주.”
자오가 급히 나섰다.
“어린애한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정광이 아니라 오히려 섬랑이 반박했다.
“애도 애 나름이죠.”
“……뭐?”
“알 거 다 아는데 왜 애 취급하세요? 그리고 제가 빠른 건 머리와 손만…….”
“그만!”
자오는 두 손을 들며 물러났다.
“혼란하구나. 혼란해. 저는 가만히 있겠습니다, 단주.”
“그게 좋겠네요.”
정광은 동의하고 섬랑에게 명했다.
“요리가 괜찮은 객잔으로 안내해.”
“그 정도야. 이쪽으로 가시죠.”
“귀찮으니까 장난치지 않는 곳으로.”
걸음을 떼려던 섬랑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민했다.
“쿠차에 그런 데가 있었나? 없는데. 그나마 제일 덜한 데로 모시죠. 그런데 표식 정말 안 사실 거예요?”
“알뜰하네. 수수료도 챙기려고?”
“수수료라뇨. 정당한 대가를 받는 거죠. 자신이 있어도 사시는 게 나을 텐데. 다시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가만히 있겠다던 자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조금 전에도 얘기하더니. 그 표식이란 건 무엇이냐?”
섬랑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 주인은 아는데 수하가 모르네.”
정광이 빙그레 웃으며 정정했다.
“너. 아까부터 자꾸 그러는데 우린 그런 관계가 아니라 벗이야. 그리고 정보를 더 캐내려고 하지 마. 귀엽게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자오와 섬랑이 몸을 떨었다.
자오는 감격해서, 섬랑은 두려워서였다.
‘단주. 외인에게도 저를 벗이라 말씀해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뭐, 뭐야 이놈은? 살기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그냥 웃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오싹하지?’
돈도 좋지만 목숨은 훨씬 더 소중한 법.
섬랑은 뜨내기처럼 보이면서도 쿠차 사정에 정통한 미청년에게서 개인적인 관심을 끊기로 했다.
“빨리 가시죠. 제가 이래 봬도 바쁜 몸이거든요.”
정광은 알겠다고 하려다가 기억 속에 있는 자가 아직 살아 있는지 확인부터 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낙타들부터 파는 게 낫겠네. 팔만한 곳이 어디지?”
섬랑은 자오가 고삐를 쥐고 있는 낙타들을 쓰윽 훑어보고 대충 답했다.
“꽤 많네요. 아무 사람이나 잡고 파세요. 어차피 제값은 못 받을 테니까.”
“판매 금액의 일할은 네 것이야.”
“저쪽입니다. 그나마 양심 있는 상인이 있어요.”
섬랑은 전장으로 떠나는 장수처럼 성큼성큼 걸었다.
자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정광과 함께 따라가다가 눈을 빛냈다.
‘우리 같은 외지인이구나.’
무척 먼 길을 온 듯 온몸에 모래 먼지가 수북한 사내들이 낙타를 끌며 지나가고 있었다.
생김새나 기세나 딱 봐도 사파인.
켕기는 것도 꽤 많은지 쉴 새 없이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라니.
‘저건?’
다들 왼팔에 황색 천을 감고 있었는데, 그 천에는 흑색으로 ‘كۇچار’라는 문자가 쓰여 있었다.
‘그 표식이란 것인가? 무슨 뜻이고 어떤 의미가 있길래…….’
얼마 안 가 정광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넓은 공간에 볼품없는 울타리를 쳐놓은 곳이었는데 음침한 인상의 노인이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정광은 노인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아직 살아 있네. 일이 조금이나마 쉬워지겠어.’
섬랑은 노인과 마주 앉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흥정하기 시작했다.
“낙타들 때깔을 보세요. 최상이죠? 최대한 양보해도 여섯 개는 받아야…….”
허나 아무리 떠들어봐도 소용없었다.
노인은 오른손 손가락 세 개를 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이상은 안 된다.”
“아니…….”
“싫으면 다른 곳으로 가.”
“아 진짜.”
섬랑이 투덜거렸다.
“손가락이 세 개밖에 없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요?”
노인의 오른손에는 약지(藥指)와 소지(小指)가 없었다.
“상노(商奴). 장사 하루 이틀 하나요? 제 체면을 봐서라도 조금만 더 쳐주시죠.”
“…….”
상노라 불린 노인은 섬랑이 아니라 정광을 힐긋 본 뒤 왼손가락 하나를 더 폈다.
“이게 싫으면 꺼져라.”
“감사합니다!”
섬랑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정광에게 수락하라고 채근했다.
“대인, 어딜 가도 이만큼은 못 받으실 거예요. 이렇게 가시죠.”
“그래.”
거래 성립.
상노는 낡은 궤짝에서 큰 금원보를 네 개 꺼내 정광에게 내밀었다.
정광은 받지 않고 자오에게 손짓했다.
“혈조(血鳥). 챙기세요.”
이곳에 온 이래로 낯선 환경 때문에 어리바리했었지만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먹고 자라다가 때맞춰 도망치기까지 한 자오 아닌가?
‘혈조’가 자신의 새로운 별호란 걸 알아차리고 바로 대답했다.
“네. 단주.”
자오는 금원보를 향해 손을 뻗다가 상노와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리만치 탁한 두 눈에서 희미한 마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내공을 끌어 올린 건가? 왜?’
짚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를 경계하고 있구나!’
자신을 가볍게 보지 말라고 시위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어떤 수법을 써서 출신 내력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아까 봤던 사파인들이 떠올랐다.
‘그자들처럼 하면 되지.’
상노를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같은 사내와 손을 대는 취미는 없소. 탁자에 놓으시오. 어서.”
상노는 자오를 물끄러미 보다가 금원보들을 내려놓았다.
자오는 조심스레 그것들을 챙긴 뒤 정광에게 고개를 숙였다.
“단주. 받았습니다.”
“좋네요. 가죠. 섬랑, 뭐 해? 안내해야지.”
섬랑은 재깍 일어나 앞서 걸었다.
자오는 정광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의심하는 건가? 뒤통수가 근질근질하군.’
노인의 시선이 느껴졌다.
‘신경 쓰지 말자. 내가 실수를 했으면 단주께서 벌써 주의를 주셨을 거야.’
자오의 믿음대로였다.
정광은 그의 일 처리에 만족하고 있었다.
‘아예 의심을 안 사면 더 의심받기 마련이지. 딱 적당했어. 어떻게 나오려나?’
마지막으로 들렸던 게 벌써 수십 년 전이라 쿠차는 많은 게 변해 있었지만 여전한 것도 많았다.
정광은 추억을 되새기며 걷다가 섬랑이 가리키는 낡은 객잔의 현판을 보고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대인. 여기예요. 이름부터 끝내주죠?”
“운치 있긴 하네.”
[고차기(庫車伎)]
아주 오래전 탑극랍마간 북쪽에 있던 나라의 무곡(舞曲) 아닌가?
세상에 많이 알려지진 않았으나 전생의 정광과 연이 있는 이름이기도 했다.
‘설마 그 녀석도 살아 있는 건가?’
실소가 절로 나왔다.
섬랑도 웃었다.
“음주가무를 즐길 것처럼 생기셔서 이것도 아실 것 같더라니. 잠깐, 뭐 캐보려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면 더 의심스럽지.”
“아니, 이렇게 나오시면…….”
“그래도 약조는 지켜. 혈조, 보수를 주세요.”
“네, 단주.”
자오는 아까 받았던 금원보들에서 일할 가치에 해당하는 양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떼어줬다.
섬랑은 그것을 재빨리 낚아챈 뒤 자오에게 사과했다.
“아까 놀려서 죄송해요. 아저씨도 고수셨네요. 그럼 이만.”
정광이 섬랑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소개를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벌써 어둑어둑해지네. 이왕 온 거, 같이 저녁이나 먹자.”
“괘, 괜찮은데…….”
“나는 안 괜찮거든.”
섬랑은 울상을 짓다가 객잔 안으로 먼저 뛰어 들어갔다.
“관 숙수! 빨리 나와봐요!”
오른팔이 없는 호리호리한 중늙은이가 주방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냐?”
섬랑은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금 전 자오에게 받은 금덩이를 건넸다.
“표식이 없는 손님들을 모셔왔는데 보통 분들이 아니니 장난치시면 안 돼요. 여기 수고료요.”
바로 뒤따라온 자오가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설마 인육만두를 파는 흑점?”
관 숙수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런 맛없는 걸 만들면 누가 먹는다고. 단지…….”
섬랑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원로에 지친 손님들이 푹 주무실 수 있도록 요리와 술에 몽혼약을 조금 탈 뿐이죠. 하지만 대인과 아저씨는 팔팔하시니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어이없어하는 자오와 달리, 정광은 관 숙수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탁자 앞에 앉았다.
“친절한 곳이네. 맛도 그랬으면.”
“…….”
관 숙수는 잠시 정광을 주시하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요리를 내왔다.
면의 모양과 굵기가 들쑥날쑥했으나 진한 고기향과 다채로운 채소향을 풍기는 국수였다.
정광은 한 젓가락 맛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요.”
지켜보고 있던 관 숙수가 대꾸했다.
“더 먹을 거면 지금 말하시오.”
“주세요.”
관 숙수는 아예 큰 솥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고 왼손을 내밀었다.
돈을 내라는 의미.
자오가 봇짐을 만지며 물었다.
“얼마요?”
“식사만 할 것이오?”
정광이 대신 답했다.
“잠도 잘 건데요.”
“흠. 그럼…….”
관 숙수가 부른 가격에 자오가 입을 떡 벌렸다.
‘어떻게 된 게 중원보다 몇 배나 비싸?’
펄펄 끓는 무거운 솥을 한 손으로 가뿐히 들고 온 고수가 이런 사기를 칠 줄이야.
하지만 정광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주라 했고 관 숙수 역시 당연하다는 듯 받아갔다.
이 층에서 아무 방이나 골라잡으라는 말을 남기며.
‘궁금해서 못 참겠다. 단주에게 물어봐야겠어.’
섬랑은 국수를 몇 그릇이나 퍼먹고 재빨리 사라졌다.
“우리도 가죠.”
“네, 단주.”
자오는 정광과 함께 이 층에 올라갔다.
생각 외로 방들이 깔끔했기에 고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자오는 수평이 안 맞는 의자에 앉아 인상을 쓰는 정광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단주. 여기는 대체 뭐 하는 곳입니까?”
“서역과 교역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며 먹고사는 곳이요.”
“그렇다기엔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상노라는 자도 그렇고 관 숙수라는 자도 그렇고. 상당한 수준의 마인으로 보입니다만.”
“신강이잖아요. 굳이 십만대산(十萬大山)까지 안 가도 마인들이 발에 챌 정도로 많은 게 당연하죠. 잠시만요.”
정광은 각자 길이가 다른 의자 다리를 손날로 베어 똑같이 만들고 편히 앉았다.
“이제 좀 낫네. 이곳 사람들은 서역을 드나드는 상인들에게 물자와 편의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아요. 그런데 그 상인들이 여느 상인들과는 좀 다르죠. 아까 황색 천을 팔에 두른 사람들 보셨죠?”
“네, 단주.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쓰여 있더군요.”
“이 도시 이름, ‘쿠차’라는 뜻이에요. 쿠차에서 돈을 받고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거죠.”
“아! 섬랑이 우리보고 뜨내기인 줄 알았다고 한 게 그 표식을 안 해서였군요. 그래서 암습을 했던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죠.”
자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살벌한 곳에서 묵는 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도시가 여기만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여기밖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네?”
정광은 어리둥절해 하는 자오에게 찬찬히 설명했다.
“서역과 교역하는 제일 편한 길은 천산북로(天山北路)와 천산남로(天山南路)예요. 하지만 그곳들을 지나려면 천마신교 칠대가문 중 몇몇 가문에 통행세를 내야 하죠.”
그 금액이 무척 컸기에 규모가 큰 상단이 아니면 지급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백가상단주 백진환도 너무 부담스러워 오래전 사장된 서역남도(西域南道)를 다시 뚫지 않았던가.
“하지만 한탕을 노리거나 뒤가 구린 사람들은 비용을 최소화하려고 하죠. 그런 사람들이 탑극랍마간을 통해 이동하다가 잠시 들러 쉬는 게 여기예요.”
“허어. 그런 것이었군요.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뭔데요?”
“이쪽으로 상인들이 빠지면 마교 칠대가문이 손해를 보는 거 아닙니까?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용인해 주는 게 신기해서 그럽니다.”
“아아. 부자들만 잘살 수 있나요. 없는 사람들도 최소한의 벌이는 하게 해줘야지. 뭐 막아봤자 어떻게든 편법을 쓰는 자들이 생길 게 뻔하니 그러는 것도 있을 거고요.”
정광은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그렇게 하자고 했더니 이권을 쥔 놈들이 어찌나 땍땍거리던지.
결국 손에 피를 묻혀가며 뜻을 이루긴 했지만 짜증 나는 기억이었다.
“오늘은 푹 자고 내일 얘기하죠.”
“알겠습니다, 단주. 내일 뵙겠습니다.”
정광은 자오가 자신의 방으로 가자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잠시 뒤.
방 한쪽 구석에 희미한 어둠이 맺히더니 사람의 형태로 굳었다.
자오의 수다에 치를 떨며 은신하다가 정광의 전음을 받고 상노를 감시하던 흑서였다.
“교주, 다녀왔습니다.”
“응. 상노 그놈, 뭐 하고 있어?”
“세월 탓인지 예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그 말은?”
“총단에 서신을 쓰려다가 구겨 버렸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당장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여전한 것도 있지. 눈곱만 한 양심은 아직도 남았는지 낙타 가격을 후려치진 않더라고.”
“원래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녀석이었지요.”
“네가 보기엔 어때? 망설이는 걸 보면 내 행세를 하는 놈이 잘해주지는 않는 것 같은데.”
“속하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정광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중얼거렸다.
“좋아. 써먹을 만하겠어. 내일 아침 먹고 찾아갈 테니까 그때까지 계속 감시해.”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