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16화
기 싸움
청양삼웅(靑羊三雄)의 원래 별호는 구가삼설(丘家三舌), 구 씨 집안의 세 혀였다.
천마신교의 어엿한 무인이라면 살(殺), 마(魔), 혈(血), 악(惡) 같은 글자가 별호에 포함되어야 마땅하건만, 그들의 별호가 그따위였던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자오처럼 말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면 차라리 낫지, 줄을 한 번 타보려고 쉼 없이 아첨을 일삼는데 누가 그걸 곱게 볼까?
윗사람 앞에서만 혀를 놀리는 게 아니었다.
상대를 속이려면 자신부터 속이라고 했던가.
신실한 교도가 교리를 외우는 것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으니 수하들조차 가끔 짜증을 낼 정도.
지금도 그랬다.
“적당히 좀 하쇼!”
대웅 바로 뒤에서 달리던 성질 더러운 수하 하나가 참다못해 일침을 놓았다.
“그만 떠들고 적이나 죽이…….”
대웅이 손목을 돌리자 쇠침이 박힌 도리깨가 빙글 회전하는가 싶더니 사내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빠각!
머리가 박살 난 사내는 낙타에서 떨어진 뒤, 뒤따르던 낙타들에게 짓밟혀 곤죽이 됐다.
꽈직! 꽈드득-
대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광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조금만 기다려라! 네놈의 뼈란 뼈는 모조리 부숴주마!”
불손한 수하를 즉결처분하는 잔인한 손속.
그걸 빤히 봤으면서도 별다른 동요가 없는 다른 교도들.
정광 일행의 눈이 흔들렸지만 그들이 경악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지, 진천마가 가호한다고?’
‘그의 권능을 빌어 힘을 받겠다니. 대체 무슨 말이지?’
적들이 천인공노할 마공을 썼어도 이렇게 당황하지는 않았으리라.
이 와중에 이십여 년 전에 죽은 자를 입에 담을 줄이야.
독존과 검후도 놀랐다.
“저 미친놈들이 뭐라는 거야?”
“사악한 술법을 부리는 주문 아닐까요?”
정광만 진실을 알았다.
그냥 입버릇이지 주문은 무슨.
그보다 이럴 때가 아니지.
적을 떼어내고 보급품을 불사르는 연습을 해야 할 것 아닌가?
“동방장님. 풀이 죽어 계실 때가 아니에요.”
“……이상해. 제대로 했는데. 왜 안 됐지?”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 천마신교 낙타들을 오른쪽으로 보내세요. 그건 됐었잖아요. 아까의 환호를 다시 받으셔야죠.”
동방장이 기운을 차렸다.
“그래! 과는 다른 공으로 덮으면 되지! 간다!”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모래바람을 뚫고 퍼져 나갔다.
삐이익- 휘익- 휙-
동방장은 적들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먹혔다!”
마교도들이 탄 낙타들이 일제히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까처럼 불회당이 열광하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된 게 어딘가?
덕분에 양측의 거리가 다시 멀어지려고 하는데…….
“빌어먹을 축생 같으니! 죽기 싫으면 말 들어!”
대웅이 고삐를 거칠게 잡아당기자 낙타가 울부짖으며 원래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다른 낙타들도 마찬가지.
힘으로 다루니 시간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기수의 의지를 따랐다.
대웅이 음산하게 웃었다.
“크크크. 시간 좀 벌었다고 의기양양하지 말아라! 금방 포위해서 찢어발겨 주마!”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조금 전에 좌측 구릉에서 나타났다가 동방장이 떨쳐냈던 무리도 불회당을 쫓고 있었고, 신법을 펼쳐서 덮쳐왔던 이들도 계속 다가오고 있는 상황.
“쏴라!”
슈슈슉-
“던져!”
터더덕-
황웅의 독려하에 계속 화살을 쏘고 철질려를 뿌려 숫자를 착실하게 줄여 나가고 있었으나 슬슬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낙타들이 지친 것이다.
앞날을 위해서도 낙타들을 혹사시키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이쯤 되자 군사 서도한은 때가 됐음을 인정했다.
“독존 어르신! 죄송하지만 부탁드립니다!”
“흥. 생각 외로 오래 버텼군.”
독존은 기다렸다는 듯 후미로 쳐지며 눈을 번뜩였다.
지금 같은 순간을 위해 짐을 잔뜩 짊어지고 곤륜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던가.
사슴 가죽 장갑 따위는 필요 없었다.
포대 속에 쭈글쭈글한 손을 집어넣어 고운 가루를 한 움큼 움켜쥐고 뒤쪽으로 뿌렸다.
화아악-
선두에서 추격하던 대웅의 시야가 하얀색으로 채워졌다.
“치졸하게 독을!”
대웅은 즉시 호흡을 멈추며 도리깨를 회전시켰다.
부아아앙-
독분이 세찬 바람에 휘말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대웅의 뒤에서 달리던 마교도들도 독분을 밀어내며 광소를 터뜨렸다.
“와하하! 정파라고 거들먹거리던 놈들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곧 살을 발라내 줄 테니 비명을 지를 준비나 해라! 흐흐흐.”
“사천당가인가? 별것 아니잖아!”
독을 뿌린 독존은 내심 코웃음 쳤다.
‘멍청한 놈들. 네깟 놈들을 상대로 귀한 독을 쓰겠느냐?’
그러기엔 아깝기도 하거니와 독이란 적재적소에 써야 그 위력이 극대화되는 법.
‘네놈들은 이미 끝났어.’
사람이 독분을 모조리 피해 봐야 뭐 할까.
그것을 조금이라도 들이마신 낙타는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여섯 호흡이면 충분했다.
사천당가 후기지수들 중 은근히 싹수를 보이다가 정광의 독 품평을 통해 일취월장했던 순한 인상의 청년 당오건.
그가 조제하고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육흡취상(六吸就床)이 꽤 많은 낙타들의 근육을 잠시나마 마비시켰다.
뭬에에엑!
“어억!”
“이놈들이 왜 이래?”
낙타들이 연이어 괴성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마인들은 재빨리 신형을 날려 모랫바닥에 착지했으나, 쓰러진 낙타에 깔리고 멀쩡한 낙타의 발굽에 짓이겨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더 이상 추격해 봐야 손해만 쌓일 상황!
누가 봐도 퇴각해야 할 형국이었는데.
대웅의 선택은 달랐다.
“어떻게든 따라잡아서 죽여! 이대로 돌아가면 진천마께서 우리의 온몸을 갈가리 찢어내시고 혼까지 집어삼키실 것이다!”
마교도들의 기세가 변했다.
마기를 미친 듯이 끌어 올리며 신법을 펼쳐 달렸다.
독존이 크게 웃으며 대웅을 놀렸다.
“으하하! 진천마가 가호할 거라느니, 놈의 권능을 빌릴 거라느니 나불대더니 뭐가 어째? 역시 그 악적은 죽어서도 만악의 근원이구나!”
대웅이 질풍처럼 달리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 지금의 진천마님을 말하는 것이다!”
독존은 물론이오, 불회당원들도 흠칫했다.
“무어라? 진천마가 또 있어?”
“전대를 계승한 새로운 진천마시다! 과거의 망령인 구(舊) 진천마보다 훨씬 더 뛰어나신 진정한 진천마!”
“……!”
구 진천마?
새로운 진천마가 나타났다 쳐도 그렇지, 진천마의 진이 참 진인데 ‘진정한’이란 수식어를 또 붙인다고?
아연해서 입만 뻐끔거리는 사람들에게 대웅이 호통쳤다.
“네놈들도 당장 무릎을 꿇고 그분을 경배…… 억!”
쩌엉!
대웅은 유성처럼 날아온 화살을 도리깨로 막아냈으나 그 대가로 손아귀가 찢어졌다.
“이 망할 놈의 새끼가!”
둘째 아우를 죽였던 놈이 검붉은 활을 들고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감히 나를 또 노려? 죽지도 살지도 못 하게 만들…….”
순간, 대웅의 눈이 커졌다.
천으로 칭칭 감은 원수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두 개의 눈!
그 눈들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익숙한 어둠이 대웅의 혼을 움켜쥐었다.
찢어져라 커져 있던 대웅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서, 설마 진…….”
퍼퍼퍽!
허공을 격하고 날아온 화살들이 대웅의 두 눈과 입을 뚫고 들어가 뒤통수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응축된 내공이 실린 마지막 한 발에 그의 머리가 폭발하듯 터졌다.
정광은 비룡을 등에 메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진옥룡이죠.”
하도 짜증이 나 마혼(魔魂)을 살짝 개방했으나 손목에 차고 있는 항마주가 마기를 감춰줬다.
‘손을 댈 가치도 없는 놈이 말이 많아.’
불회당을 훈련시키기 위해 살려놨지만 정도가 있지.
저따위 놈이 나를 과거의 망령으로 취급해?
‘아부가 몸에 익은 놈이라 ‘그놈’을 더 높였겠지. 그래도 ‘그놈’이 아랫것들을 제법 휘어잡긴 했나 보네.’
마교도들은 대웅이 모랫바닥에 나뒹굴자 발작했다.
수장까지 죽어버렸으니 교주에게 다 죽게 생겼다며 미친 듯이 달려왔다.
불회당이야 당연했고 독존과 검후도 바빠졌다.
“쏴라!”
황웅의 명이 떨어질 때마다 화살비가 내렸다.
“하루살이 같은 놈들이 감히!”
독존이 양손을 휘젓자 독과 암기가 허공을 날았다.
“아미타불.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리오.”
검후는 말과 다르게 자신이 아닌 마인들을 지옥으로 보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정광은 낙타 안장에 편하게 기대앉아 모두를 응원했고.
“끄아아아! 이 새끼들이!”
마인들은 물샐틈없이 펼쳐지는 치밀한 공격에 내공이 급격히 소모되어 쓰러져 갔다.
정광은 전황을 살피다가 사람들에게 제안했다.
“이번만큼은 섬멸하는 쪽으로 가죠. 최초 보급을 아예 막아버리는 거예요.”
모두 찬성했다.
기호지세의 형국이었고 자신도 있어서였다.
그들은 내공이 바닥난 마교도들을 전부 사살하고 낙타들은 회수했다.
낙타들을 적당히 쉬게 한 뒤 청양당과 처음 만났던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천마신교의 보급품과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남은 청양당 삼대가 있었다.
삼대를 지휘하는 삼웅이 상황을 깨닫고 포효했다.
“크아아아! 죽여라!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어! 그 길뿐이다!”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불회당은 낙타를 능숙하게 갈아타 가며 뛰어난 기동력과 궁술로 마인들을 괴롭혔다.
독존은 독과 암기를 아끼기 위해 필요할 때만 손을 썼지만 다수와 싸우게 되자 절대적인 위력을 떨쳤다.
동방장도 휘파람으로 밥값을 했다.
우측으로밖에 못 움직인다 해도 그게 어딘가? 따라잡힐 때마다 불어주니 시간을 쏠쏠하게 벌 수 있었다.
한편, 검후는…….
앞으로를 대비해 청양삼웅 중 홀로 남은 삼웅을 상대했다.
천마신교에서 고수라 할 수 있는 자들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무척 탁월한 판단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검후의 얼굴이 굳어졌다.
‘생각보다 더 대단하구나. 이게 진짜 마인인가.’
둘이면 십존 중 하나와 호각이고 셋이면 필승이라 했던가.
무공도 무공이었지만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쏟아내는 포악한 공격에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였다.
‘둘이었으면 정말 결과를 장담할 수 없을 뻔했어.’
허나 지금은 혼자인 상황.
검후는 보타문의 최고수였다.
보타문이 자리한 곳은 그 유명한 사대불교명산 중 보타산(普陀山).
보타산에 머문다는 관세음보살의 광휘처럼 자애로운 검기가 검후의 검에 맺혔다.
그녀는 그것으로 보타문의 비전 검법을 펼쳤다.
해적을 잡을 때처럼 악한 이를 죽여 훗날 선한 이가 살 수 있게 하는 활검(活劍)이었다.
삼웅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용맹하게 맞섰다.
전진, 또 전진, 오직 전진의 연속.
왼팔이 어깨부터 날아가도, 오른쪽 허벅지에 구멍이 뻥 뚫려도, 심지어 옆구리가 쩍 갈라져 내장이 삐져나와도 멈추지 않았다.
“크아아아아!”
마기가 끝없이 솟아났다.
쇠침이 빽빽이 박힌 도리깨를 폭풍처럼 휘두르며 동귀어진을 노렸다.
그리고 결국 몸통에서 분리된 머리통이 허공으로 솟구치고 나서야 쓰러졌다.
이번 전투를 마무리 짓는 마지막 죽음이었다.
검후는 검을 가볍게 내려쳐 핏물을 털어낸 후, 검을 쥔 채로 합장했다.
“아미타불…….”
“제기랄. 아주 엉망인 놈들은 아니잖아.”
독존은 나직이 욕설을 뱉은 뒤 불회당원에게서 단창을 하나 받아 삼웅의 심장에 박았다.
콰직-
목 없는 시신이 발작하듯 경련하다가 축 처졌다.
꿰뚫린 심장에서 터져 나온 피가 누런 모래를 다른 색으로 물들였다.
마인의 피도 보통 이와 다를 바 없는 붉은색이었다.
독존은 그 피를 향해 침을 뱉었다.
“퉤. 그나마 머리 없이 날뛰는 놈들은 없어서 다행인가.”
정광이 씩 웃었다.
“어르신, 적사님 말씀대로 약하지 않은 분들이었죠? 이제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적사님을 너무 의심하지 마세요.”
적사가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었다.
“니, 님이라니요. 제발 편하게 부르십시…… 허억!”
모랫바닥에 우두커니 놓여 있던 삼웅의 머리통이 적사를 노려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적사? 혈사풍? 너 이 새끼! 본교에서 이번 성전을 안배하며 써먹으려고 근 몇 년간 숫자 정리를 안 했거늘. 감히 이런 식으로 돌려줘?”
“히, 히이익!”
“네 이놈! 천하마도(天下魔道)의 종주(宗主)이자 만마(萬魔)의 지존(至尊)이신 진천마께서 네놈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실…….”
뻐엉!
정광은 경쾌하게 몇 걸음 걸은 뒤 삼웅의 머리를 힘껏 걷어찼다.
그것은 마치 별이라도 될 기세로 높디높은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솟구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치료할 분은 치료하시고 쉴 분은 쉬시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독존이 신형을 돌리는 정광에게 물었다.
“제자야. 너는 어디 가려고?”
“보급품을 살펴봐야죠. 혹시 모르니 조금 떨어져 계세요.”
정광은 여러 낙타에 실려 있는 짐들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일단 독은 없고. 다른 수상한 낌새도 없네.’
시험 삼아 몇 개 풀어봤다.
‘어?’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의외인데.’
내친김에 몇 개 더 확인해 봤다.
‘이것 봐라?’
천으로 가려져 있는 정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여간 의심 많은 놈이라니까. 나를 절반쯤은 계승했다고 인정하려 했는데. 이따위 장난질을 부려?’
짐들의 반은 비어 있은 것 아닌가?
멀리서 지켜보던 검후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함정?”
“아뇨. 그런 것까지는 아니고요. 만에 하나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니 이래 본 것 같아요.”
독존이 끼어들었다.
“삼웅이란 놈들은 너무 시끄러워서 나라도 사석으로 놨을 거다. 그럼 물자를 아끼려고 그런 것이겠군.”
정광이 고개를 저었다.
“앞은 저도 동의하지만 뒤는 글쎄요. 천마신교가 그렇게 가난할 리가.”
“그럼 왜 그런 것 같으냐?”
정광은 천마신교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하.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와 기 싸움을 하는 거겠죠. 자신을 가볍게 보지 말라고.”
하지만 그 상대는 정광이었다.
천 사이로 빼꼼히 드러난 두 눈이 둥글게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