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84화 (383/569)

2부 113화

전초전(前哨戰)

독존과 검후는 눈앞의 거대한 괴물을 멍하니 바라봤다.

누구에게 잘렸는지 뿔이 하나도 없었지만, 전설의 쌍각사룡이 분명하거늘 그냥 도마뱀이라니?

‘문헌에 따르면 사람을 뼈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는 흉포한 영물이라 했는데…….’

‘흉포하긴커녕,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를 부려?’

이제는 무각사룡이 된 괴물이 정광의 손바닥에 제 머리를 열심히 비비고 있었다.

스윽- 스윽-

정광의 기분이 좋을 리 있나.

눈살을 찌푸리며 녀석의 머리를 찰지게 내려쳤다.

짝!

“소름 돋는다. 그만해.”

크르르-

“어쭈. 불만이냐?”

흉악하게 변했던 무각사룡의 눈빛이 고승의 것처럼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을 옆으로 굴려 배를 드러낸 채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이라니.

독존이 기가 찬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건 뭐 개도 아니고. 내가 술주정뱅이가 썼던 고서를 읽은 건가? 뭐가 이렇게 달라? 꼬리도 뭉툭하잖아.”

정광도 무각사룡의 꼬리를 살폈다.

“아. 아직 다 자라지 않았구나.”

“무슨 말이냐?”

“이 녀석이 전에 직접 잘라서 바쳤거든요. 그것도 두 번이나. 금방 자랄 줄 알았는데 덩치가 있어서 시간이 걸리나 보네요.”

무각사룡은 어이가 없었다.

처음 한 번은 내가 알아서 잘라 바쳤지만, 두 번째는 네놈이 너무 짧다고 해서 그랬던 건데 무슨!

허나 무각사룡은 말을 하지 못했기에 독존은 정광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감탄했다.

“그래서 도마뱀이라 부르는 것이었군. 그래도 비늘만큼은 적혀 있던 대로 무척 단단해 보이는데.”

정광도 동의했다.

“용모와 성품은 좀 그래도 껍질부터 내단까지 버릴 게 하나도 없는 녀석이죠.”

독존의 눈이 빛났다.

“네 철혈무쌍용갑이 이놈 비늘로 만든 것이냐?”

“네.”

“어쩐지. 이런 기물로 만들었으면 무쌍(無雙)이라 불릴 만하지.”

당기황이 신기한 얼굴로 비늘을 어루만지자 무각사룡의 눈이 시뻘게졌다.

하찮은 종자가 감히!

이 몸을 진짜 개 취급하면서 쓰다듬어?

속이 진천마인 저 녀석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이런 푸르딩딩한 늙은이가 함부로 구는 것까지 참으면 탑극랍마간의 지배자가 아니지!

한입에 집어삼켜 주마!

크롸롸롸뢋!

“헉! 이, 이놈이!”

무각사룡이 입을 쩍 벌리자 당기황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동시에 독을 꺼내 뿌리려 했으나 정광의 입이 더 빨랐다.

“시끄러워.”

……뀨웅.

“그건 더 싫고.”

…….

“그래. 입을 꾹 다문 게 제일 낫네.”

정광은 무각사룡을 침묵시키고 사람들을 둘러봤다.

“뭐 하세요? 그만 가시죠.”

“…….”

진심이냐?

검후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 물었다.

“설마 무각사룡을 끌고 가려고?”

“그럴 리가요.”

하얗게 질렸던 사람들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어도 저런 괴물을 왜 데려가겠는가?

허나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타야죠. 이 녀석, 꽤 빠르거든요.”

“……!”

무각사룡은 정말 빨랐다.

사막이라는 하늘을 꿈틀거리며 날아가는 용 같은 모습이라니.

전력을 다해 기어가는 것도 아닌데 낙타들이 못 따라갈 정도.

떠도는 짐승은 물론이오, 하늘을 나는 날짐승도 없는 텅 빈 사막을 무각사룡이 낙타들을 이끌고 질주했다.

탑극랍마간이 넓어봐야 얼마나 넓으랴!

내가 이곳의 지배자니라!

무각사룡은 치밀어 오르는 호기를 참지 못하고 포효했다.

크롸롸롸랏!

“시끄러워.”

딱!

뀨웅.

* * *

뭐, 여기까진 좋은데.

적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판국에 죽어라 달려봐야 의미가 있나.

정광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이만큼 뒤졌으면 한 무리쯤은 걸려야 했는데. 아직 출발하지 않은 건가?’

서로 엇갈렸을지도.

길이 한두 개여야 말이지.

사막이라고 길이 없는 건 아니었고, 그곳으로 움직이는 게 정상이었다.

그 길이란 것은 눈에 보이게 닦아 놓은 것이 아니었다.

드넓은 탑극랍마간에 산재한 수십 개 씨족의 터전을 잇는 직선들이었다.

정광은 가만히 머리를 굴렸다.

‘소문이 퍼질까 봐 씨족들이 사는 곳에는 안 들렀었는데. 가봐야겠어.’

오히려 이쪽이 소문을 듣고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이왕 가는 거, 식수도 미리 보충해야 했고.

탑극랍마간에서 여러 개의 씨족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샘이 솟고 식물이 자라는 천지(泉地)가 드물게라도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회당 여러분! 몸 상태는 어떠세요? 괜찮으시죠?”

“……!”

불회당원들의 눈에서 독기가 피어올랐다.

뭐가 어째?

얼어 뒈질 판에 괜찮냐니?

탑극랍마간의 겨울은 혹독했다.

쪄 죽을 정도로 더운 여름보다는 훨씬 낫다고 들었건만, 해가 중천에 떴을 때를 제외하면 어찌 그리 추운지.

사막에 익숙한 상인들의 조언대로 두꺼운 천막과 의복을 챙겨왔으나 추위를 완전히 막을 순 없었다.

“왜 대답이 없으세요? 무언의 긍정인가?”

정광의 망언에 불회당원들은 격분했다.

허나 한 마디도 쏘아붙이지 못하고 기침을 토하며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쿨럭. 쿨럭. 으으으…….”

정광은 만족했다.

“다행히 기침할 힘은 있으시네요. 그래도 감기에 걸리면 곤란하니 조금이나마 쉬기 좋은 곳으로 가죠.”

먼저 낙타로 갈아탄 뒤, 무각사룡에게 땅속에서 따라오라고 명했다.

다음은 방향을 잡을 차례.

‘어디가 좋을까. 그냥 가까운 곳으로 가자.’

기존 지식에 백가상단주 백진환이 헤어질 때 은밀히 건네준 서책의 내용, 청해성주가 파견한 상인들에게 배운 요령을 이용하여 현 위치를 파악하고 가까운 씨족의 거처로 일행을 이끌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뿌연 모래 먼지에 가려진 아담한 촌락 하나가 나타났다.

‘제대로 왔네.’

정광 일행을 발견한 촌락 사람들도 제대로 행동했다.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늙은 촌장이 홀로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와 사지(死地)를 걷는 여행객들을 맞이했다.

“버려진 땅에 들어오신 벗들을 환영합니다. 무사히 다시 나가실 수 있기를.”

정광이 화답했다.

“벗의 호의로 그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시 돌아왔을 때도 무탈하게 이곳에 서 계시길. 이렇게 말하는 거 맞죠?”

“…….”

맞긴 맞는데.

이렇게 많은 무인을 이끌고 온 자가 이런 실없는 소리를 할 줄이야.

촌장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대인. 소인이 이곳의 촌장이니 필요한 게 있으시면 주저하지 말고 말해주십시오.”

정광은 정말 주저하지 않았다.

“최근에 천마신교분들 못 보셨어요?”

“……!”

“나름 열심히 찾았는데 전혀 안 보이셔서요.”

촌장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시야에 보이는 수많은 무인들은 모두 눈만 빼놓고 얼굴 전체를 천으로 둘둘 감고 있었으나 복색이며 말투며 중원인이 분명했다.

이렇게 많은 중원 무인들이 불쑥 나타나 천마신교를 찾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탑극랍마간이라는 지옥 같은 땅에서 태어나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과 사건을 겪으며 길러온 침착함이 무너졌다.

‘아아. 모래가 붉게 물들려는 것인가…….’

촌장은 새어 나오려는 탄식을 억지로 누르며 입을 열었다.

“소인은 모릅니다.”

“정말요?”

“대인. 제발 믿어주십시오. 설령 안다 해도 말씀드릴 수 없는 건 사실이오나 정말 몰라서 이럽니다.”

보복이 두렵다는 의미.

정광은 촌장의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서 숨기는 것이면 굳이 사족을 붙이진 않았겠지. 말할 때 눈동자도 흔들리지 않았고. 거짓말은 아니야.’

천마신교의 동태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그럼 다른 조직에 대해 물어보면 되지.

“그럼 믿을 수밖에 없네요. 하루 정도 묵고 가는 건 괜찮죠?”

촌장은 전혀 괜찮지 않았으나 거절할 순 없었다.

율법에 따라 찾아오는 객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했다.

양손을 촌락 쪽으로 뻗으며 공손히 권했다.

“들어오시지요. 사막의 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정광은 공짜로 묵지 않았다.

관례에 따라 면포(綿布)와 같은 생필품들을 선물하고 쉴 공간과 식수를 제공받았다.

인원이 너무 많아 천막을 따닥따닥 붙여야 했지만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담장과 불을 지필 잔가지가 있는 게 어딘가?

땅을 파서 돌을 묻은 뒤 마른 짚과 잔가지를 덮고 불을 붙였다.

돌이 달아오르자 천막마다 넣어 온기를 불어넣었다.

불회당원들은 그제야 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크으으. 뼈마디가 살살 녹네.”

“후우우. 생각보다 더 가혹한 곳이야. 몸을 제대로 추스르세나.”

정광은 불회당원들의 상태를 점검한 뒤, 수뇌부만 데리고 촌장의 집으로 갔다.

촌장의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대인. 많은 걸 베풀어주셨는데도 별다른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못 박으실 필요 없어요. 다른 걸 여쭐 거거든요.”

촌장의 목울대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무엇이 궁금하신지요?”

“별것 아니니 긴장하지 마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혈사풍(血沙風)요. 그분들은 근래에 뵌 적 있으세요?”

촌장은 아연한 표정을 짓다가 두 눈을 감았다.

확실히 천마신교에 비하면 별것 아닌 자들이지만, 자신 같은 촌로에겐 사신보다 두려운 악명 높은 마적단 아닌가!

다시 뜬 촌장의 눈엔 원망의 빛이 맺혀 있었다.

“대인. 저희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 이러시는 겁니까?”

“원한이라뇨. 아, 갑갑해.”

정광은 얼굴에 감고 있던 천을 풀었다.

“무량수불. 이제야 살 것 같네.”

촌장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이, 이런 미남이 있다니! 게다가 도호를 외웠어?’

천하가 아무리 넓다 해도 그런 조건에 맞는 이가 또 있을 수 있나.

“……지, 진옥룡?”

“어? 어떻게 아셨죠?”

“……!”

너무 놀라면 비명조차 안 나온다고 했던가.

촌장은 혼이 나가 버린 얼굴로 가늘게 떨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음. 표정이 별로 안 좋으시네요. 안 좋은 헛소문을 들으신 것 같은데.”

“저, 절대 아닙니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넘어가죠.”

정광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혈사풍은 두려워하실 필요 없어요.”

“……네?”

“몇 년 전엔 바빠서 예순여덟 분만 귀천시켜 드렸는데 이번엔 전부 보내 드릴 거예요. 그러니 저를 믿고 말씀해 주시죠.”

촌장이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때의 대마…… 협객이 진옥룡이셨습니까?”

“대마 뭐요?”

정광이 고개를 갸웃하자 촌장의 말이 빨라졌다.

“혈사풍 마적들의 시신이 칠십구 가깝게 발견됐었습니다. 분노한 혈사풍이 여러 촌락에 들이닥쳐 수상한 자를 봤는지 캐물었으나 누가 그랬는지 결국 알아낼 수 없었지요.”

“그때 피해 보신 분은 없으시죠?”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혈사풍이 아무리 잔인해도 촌락 사람들을 멋대로 해치지는 않았다.

촌락들이 있기에 상인들이 탑극랍마간을 지나갈 수 있고, 혈사풍은 그런 상인들을 털어먹고 사는 처지인데 어찌 그럴까?

더구나 시신마다 남아 있던 엄청난 고수의 흔적을 봤기에 체면상 찾는 시늉만 했을 뿐 얼마 안 가 넘어갔다.

정광은 그 점을 지적했다.

“다시 말씀드리죠. 그때보다 더 안전하게 전부 귀천시켜 드릴 거라 약조할게요. 제 소문 중에 산적, 수적, 마적단과 관계된 게 있었죠? 그 결과가 어땠나요?”

“…….”

전부 쓸어버렸다.

근방 민초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고.

‘천마신교야 천외천의 존재지만, 혈사풍 그 악랄한 놈들은…….’

정광의 약조와 오랫동안 쌓였던 원한이 촌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말씀드리겠습니다.”

* * *

정광 일행은 촌장의 거처에서 나와 천막으로 향했다.

독존은 내일부터 벌어질 싸움을 떠올리며 히죽거리다가 정광에게 물었다.

“제자야. 혈사풍인가 뭔가 하는 그 쓰레기들은 왜 잡으려고 하는 거냐?”

“그분들은 천마신교의 주구나 마찬가지니까요.”

“응? 한낱 마적단이? 그런 건 어떻게 아는데?”

“예전에 사조님께 보약 좀 챙겨드리려고 왔다가 혈사풍 분들에게 들었죠.”

“크흠. 어쩐지 운후 그 양반 얼굴에 기름기가 자르르하더라니. 이 사부는 안 주냐?”

검후가 독존을 나무랐다.

“그 나이에 욕심을 부려서 뭐 하려고 그럽니까?”

“아, 아니. 나는…….”

“정광아. 계속 말하려무나. 혈사풍이 마교와 이어져 있다고?”

“네. 천마신교가 혈사풍을 내버려 두는 건 없애봤자 또 다른 무리가 들어올 게 뻔해서라고 했어요. 그래서 숫자만 적당히 조절하면서 가끔 더러운 일을 시킨다고 하더군요.”

“이해했다. 혈사풍을 잡아 마교의 동태를 알아내려는 것이구나.”

“네. 천마신교와 제대로 싸우기 위한 전초전(前哨戰)도 할 겸.”

정광이 씩 웃었다.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편하게 잔 정광 일행은 촌장이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체력을 안배하며 세 시진쯤 달렸을까?

저 멀리 혈사풍이 임시 주둔지로 쓰고 있다는 천지(泉地)가 보였다.

“당주님. 시작하시죠.”

정광의 말에 황웅이 앞으로 나섰다.

“네, 은공. 불회당! 돌격 준비!”

“하아!”

우렁찬 함성이 천지를 울렸다.

쉬고 있던 혈사풍이 그 소리를 듣고 다급히 싸울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황웅과 불회당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 광경을 주시했다.

‘맞서 싸워도, 도주해도 좋다.’

‘은공에게 못 푼 원한, 네놈들에게 몽땅 쏟아주마!’

황웅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돌격!”

“와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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