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8화
두 번째 합격
정광은 삼청전(三清殿) 외관을 훑어보며 피식 웃었다.
‘하긴. 여기라고 다를 리 없지. 여전하네.’
도교의 성지이자 구파일방 중 하나로 명성을 떨치는 곤륜파.
그런 곳에서 중대한 일을 논의하는 전각이 이렇게 낡고 소박하다니.
중원 곳곳을 돌아보고 자금성에서도 한동안 지내봐서 그런지 더 없어 보였다.
‘고풍스럽다고 치자.’
정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부도 소박하긴 마찬가지.
한 걸음 내딛기도 전에 수많은 시선이 집중됐다.
대부분 아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잘 계셨죠?”
정광이 곤륜 장문인 운적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하자 운적이 진중하게 답했다.
“풍찬노숙(風餐露宿)해 가며 천하를 위해 협행을 한 너에 비하면 아주 편하게 지냈지.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줘서 기쁘구나.”
운적은 정광에게 말을 걸고 싶어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는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오랫동안 타지에서 고생하다가 급히 돌아왔으니 무척 피곤할 것이오. 얼굴은 봤겠다, 오늘은 이걸로 끝내고 내일 다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이 말은 운 자 배와 허 자 배에게만 한 게 아니었다.
회의에 참석한 각 문파와 가문의 수뇌부에게도 양해를 구한 것이다.
흠잡을 데가 없을 만큼 당연한 말이었지만, 몇몇 사람이 항의하려다가 함께 온 사람들에게 제지당했다.
“형님. 가주의 엄명을 잊으셨소? 장문인의 말에 틀린 점이 하나도 없거늘, 왜 날뛰려 하시는 게요?”
“……끄응. 아들놈이 상전이 되어버리다니. 말세로군, 말세야.”
“태상방주.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곤륜의 체면을 생각하셔야지요. 소란을 피우셨다가 밥이 부실하게 나오면 책임지실 겁니까?”
“……아직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무슨. 생사람 잡지 말아라, 이놈아.”
결국 아무도 반대하지 않자 운적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오늘도 고생하셨소. 내일 다시 봅시다.”
“수고하셨소이다, 장문인.”
사람들은 분분히 일어나 답례한 뒤 밖으로 나갔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정광을 계속 힐끔거리는 걸 보면 여간 아쉬운 게 아닌 듯싶었다.
곤륜의 운 자 배와 허 자 배도 그랬다.
얼른 나가지 않고 미적거리는 모습이라니.
그들과 마음은 같았으나 눈치가 빠른 운학은 장문인의 눈썹이 위로 솟는 걸 보고 사제들과 사질들을 재촉했다.
“그만 나가세나. 정광도 좀 쉬어야지.”
“그래도…….”
“어허. 장문인의 명을 어길 셈인가? 외부 사람들도 깎듯이 존중하는데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냐는 말일세.”
참으로 지당한 말씀.
오랜만에 정광을 만나 실수를 범한 그들은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운적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마음이 너무 들떠 실례를 범했습니다.”
운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핀잔을 줬다.
“사과한답시고 더 가까이 다가오면 어떡하오?”
“죄, 죄송합니다.”
“되었소. 그만 나가보시오.”
“네, 장문인.”
운적은 정광과 운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나가고 나서야 미소를 지었다.
“녀석. 내가 죽기 전에 다시 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와줬구나. 고맙다. 마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왔다는 소리는 하지 말고.”
“아, 네.”
“네가 우리를 많이 아끼기에 황제로부터 지원을 끌어내고 무림맹이 적극적으로 나서게 손을 썼다는 걸 몰라서 한 말이 아니다. 뭔가 허전하거나 심심해질 땐 들르거라. 곤륜은 언제나 여기에 있느니라.”
운적의 진심이 담긴 말에 정광은 희미하게 웃었다.
살면서 그런 감정이 몇 번이나 들지는 모르지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 아닌가?
“네. 그럴게요.”
“허어. 사형께서 네가 많이 변했다고 말씀하셔서 궁금했는데 정말 그렇구나. 이렇게 순순히 대답하고.”
운적은 운후와 마주 보며 웃었다.
“사형, 곤륜의 복입니다.”
“장문인, 천하의 복이기도 하오.”
“이제 정광의 얘기를 들어보지요.”
운적이 시선을 정광에게 돌렸다.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풀어보려무나.”
“네,”
정광은 운적이 배려해 준 대로 숨길 건 숨기고 드러낼 건 드러냈다.
자세한 자초지종을 들은 운적과 운후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대략적인 건 알고 있었으나 상세한 내용을 알게 되니 정광의 노고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새삼스레 느껴서였다.
‘정광이 모용세가를 정리하고 황실을 구한 데다 명교주와 토곤까지 징벌해 다행이지만, 명교주가 남긴 음모가 문제구나.’
‘그 흔적을 쫓기 전에 방해가 될 게 뻔한 본문부터 칠 예정이라니.’
운적이 찌푸리고 있던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위로했다.
“정말 고생이 많았다. 마교가 언제 올 것 같으냐?”
정광은 미리 계산해 뒀던 내용을 떠올렸다.
‘원래는 황제 암살에 성공해 조간왕이 황위에 오르면, 조간왕을 시켜 몽고와의 싸움을 길게 끌게 한 뒤 곤륜으로 향할 거라 했지만…….’
암살이 실패했으니 모든 계획이 뒤틀렸을 터.
‘흉수인 내게 분풀이하기 위해서라도 곤륜을 치긴 할 거야. 청해성에 세작이 없을 리는 없으니 정파무림이 곤륜으로 움직였다는 것도 알겠지. 방심하지 않고 제대로 꾸려서 올 게 뻔해.’
이미 준비가 끝났을 수도 있었다.
“언제 들이닥칠지는 알 수 없으나 당장 내일에라도 올 수 있다고 가정하고 준비해야 할 거예요.”
운적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 건가.”
“그게 최선이죠.”
“대비해 둔 것들을 말할 테니, 잘못되거나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말해다오.”
정광은 운적의 설명을 끝까지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석대로 하셨네요.”
“무림맹 제갈 군사가 직접 오지 못해 서신으로 전해준 방안이다. 그가 말하길, 이 정도만 해놓고 주위 지형에 해박한 네가 변화를 주면 최상의 방벽을 세울 수 있을 거라 했지.”
“그럼 편하게 말씀드릴게요.”
정광은 먼저 천마신교의 예상 경로를 언급했다.
“편하게 오려면 감숙성을 경유해 청해성으로 내려오는 게 제일이지만 관군이 지키는 옥문관(玉門關)이나 가욕관(嘉峪關)을 뚫어야 하니 그러지는 않겠죠.”
“제갈 군사의 예상처럼 탑극랍마간 사막을 지나 곤륜산맥을 우회해서 올 것이란 얘기군.”
“네. 웬만하면 무공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을 해치면서 이동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랬다가는 관군과도 싸워야 할 테니까요.”
“무림과 관군을 한꺼번에 상대하긴 싫겠지. 허나 그럴 수도 있다는 의미처럼 들린다만.”
“정신이 좀 이상한 분들이 있는 곳이니까요. 교주가 그러지 말라고 명을 내려도 미쳐서 날뛰는 분이 나올지도 모르죠.”
“나도 그게 걱정이다. 아무 죄 없는 이들이 다칠 수도 있어.”
“청해성주님이 관군을 요소마다 배치해 마인들이 허튼짓을 못 하도록 압박을 가하실 거예요. 그나마 좀 나아지겠죠.”
“그건 다행이구나.”
“그렇죠. 천마신교는 되도록 일반 백성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할 거예요. 그건 곧 보급품도 현지에서 조달하지 않고 직접 가져올 거란 얘기죠.”
정광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걸 털죠.”
“옳거니. 그걸 털…… 무어라?”
운적은 물론이오, 운후까지 입을 살짝 벌렸다.
털자니?
그것도 마교의 물품을?
하지만 정광은 당당했다.
“보급이 부실하면 제대로 싸울 수 없죠. 우리 쪽 피해를 줄이려면 그게 최선이에요.”
운적이 눈살을 찌푸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으음. 맞는 말이긴 하다만. 눈이 뒤집힌 마인들이 민가를 약탈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러니 청해성이 아니라 신강(新疆)에서 털어야죠.”
“……신강에서?”
“네. 탑극랍마간 사막에서요.”
청해성에서 빼앗으면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릴 수도 있으니 아예 신강에서 강탈해 이동을 늦추거나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장문인.”
가만히 듣고 있던 운후가 사손을 거들었다.
“정광이 제시한 방법이 다소 무리는 있으나 일리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오.”
“사형. 그건 알지만 그 일을 행할 이들은 큰 피해를 입을 겁니다. 누가 기꺼이 나서겠습니까?”
정광이 해결해 줬다.
“동방장과 불회당요.”
“……낭왕의 사방장 중 하나라는 동방장과 무림의용군이었던 불회당을 말하는 게 맞느냐?”
“네.”
“그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천마신교를 상대하진 못할 텐데.”
“사막이니까요.”
정광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사실 터는 것보다 태워 버리는 게 빠르고 안전하죠. 낙타를 타고 달려가 화시(火矢)를 쏘아 태우고 도주하면 돼요. 그분들이라면 어느 정도 잘하실 수 있을걸요.”
사막에서는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기에 경공술의 달인도 손해를 보기 마련.
허나 낙타는 모랫바닥에 발이 묻히지도 않는 데다 빠르고 오래 달리며 더위와 추위에도 강했다.
천마신교 마인들과 정면으로 싸우는 건 자살행위였으나 치고 빠지며 보급품을 소실시키는 건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운적은 그제야 수긍했다.
“고수를 몇 명 붙여야겠군. 무모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행하면 좋은 결과를 볼 수 있겠어.”
운후도 동의했다.
“좋은 생각이다. 밖은 그렇게 한다 치고. 안은 어떡할 것이냐?”
정광은 단호하게 말했다.
“제일 중요한 건, 제대로 된 지휘 계통을 갖추는 거죠. 대국을 볼 줄 아는 분을 군사로 삼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해요.”
운적과 운후는 서로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사형. 이건 아무 문제가 없군요.”
“그렇소, 장문인. 정광이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겠소?”
정광이 의아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네? 저는 신강으로 갈 건데요?”
“무어라!”
두 노도사는 목이 부러지진 않을까 걱정될 만큼 고개를 세차게 돌려 정광을 노려봤다.
“신강에 가겠다니!”
“그게 무슨 의미냐?”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탑극랍마간에 가서 실제로 할 만한지 처음 한두 번은 봐줘야죠. 괜찮으면 맡겨두고 천마신교를 찔러보려고요.”
“……!”
설마설마했거늘.
홀로 천마신교와 싸우겠다고?
운적과 운후의 얼굴이 바위처럼 굳었다.
‘정광 이 녀석이 마교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구나.’
‘본문을 침공했었던 마인들은 마교의 일부일 뿐이다. 그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몇 번이나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뻔했는데 본거지에 뛰어들겠다니.’
운적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앞엣것은 이해한다만 뒤엣것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홀몸으로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몇 분 데려갈 건데요.”
운후가 즉각 부정했다.
“몇 명으로 될 일이 아니야.”
정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아무리 열심히 보급품을 불살라봤자 일부일 거예요. 시간문제일 뿐 많은 인원이 곤륜에 쳐들어오겠죠. 멸문시킬 때까지 계속 넘어올 건데 언제까지 막을 수는 없잖아요.”
운적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적이 끝없이 늘어나는 걸 막으려면 천마신교를 들쑤셔야 한다는 뜻이군.”
“네. 그보다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바로 따를게요.”
“…….”
그런 게 있을 리 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광의 방안보다 나은 게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믿을 수밖에 없나.’
‘정광이라면 가능할지도…….’
노도사들은 억지로 평정을 되찾고 무겁게 부탁했다.
“제발 무리하지는 말거라.”
“항상 그랬듯이 너를 믿을 테니 너도 우리의 믿음에 부응해 다오.”
정광은 흔쾌히 답했다.
“물론이죠. 그렇게 할게요.”
“…….”
“눈빛이 왜 그러세요? 말씀에 따르겠다고 했는데요.”
“…….”
왜 그렇긴.
솔직히 믿음이 안 가서 그러지.
운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궁금한 점을 물었다.
“네가 말했던 대국을 볼 줄 아는 사람 말이다. 추천할 만한 인재가 있느냐?”
“제갈 군사께서 오셨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중원무림을 조율하기 위해 무림맹에 남으셨으니 떠오르는 분이 하나밖에 없네요.”
“그게 누구지?”
정광이 씩 웃었다.
“얼굴을 본 지 좀 돼서요. 맡길 만한지 한번 만나보고 말씀드릴게요.”
* * *
삼청전에서 나온 정광은 곤륜을 도우러 온 사람들이 묵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장문인이 말하길, 아까 삼청전에 모였던 각 문파와 가문의 수뇌부는 회의가 끝나면 자신들끼리 다시 논의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했지. 묵는 곳이 아니라 곤륜이 제공해 준 청양당(靑羊堂)에서.’
그들의 숙소가 모인 곳에 가도 크게 귀찮게 할 사람은 없다는 얘기.
작은 귀찮음도 싫은 건 마찬가지였기에 잠행술을 펼쳤다.
‘어디 보자. 이쪽이라 했는데…….’
곤륜은 가난했지만 땅은 많았다.
곤륜산이 좀 큰가?
놀고 있던 수많은 공터 중 하나에 도착해 보니 그럴듯한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정광은 그것들을 대충 훑어봤다.
‘급하게 만든 것치곤 괜찮네.’
집집마다 익숙한, 또는 낯선 기운들이 느껴졌다.
그것들 중에서 찾던 기운을 발견하자 바로 신형을 날려 그 집 지붕 위에 내려섰다.
‘기운이 전보다 안정돼 있어. 뭔가 깨달은 것 같더니. 그새 더 깊어졌나?’
정사대전이 끝나고 강호를 주유하다가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의 한 주루에서 언뜻 봤을 때보다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직접 시험해 보면 알겠지.’
잠마대법(潛魔大法)을 펼쳐 지붕에 스며들어 가 천장에 맺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방 중앙에 독특하다 못해 괴이한 학창의(鶴氅衣)를 입은 미소년이 눈을 감은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걸친 옷은 여전히 엉망이지만 자세 하나는 의젓하네.’
안휘성에서 남궁화운에게 납치된 걸 구해줬을 때,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모습과는 천양지차 아닌가?
하도 답답해 다시는 치욕을 안 당하게 고민하라고,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라 어쩔 수 없다는 핑계 따윈 대지 말고 차라리 말버릇이라도 고쳐 적이나 만들지 말라고 충고했었건만.
‘싫다고 했었지.’
다른 방법을 찾고야 말겠다고 당차게 선언했다.
그래놓곤 그걸 찾지 못해 계속 퀭한 얼굴로 웅크리고 앉아 있던 꼴이라니.
‘사마련이 동정호에 쇠기둥으로 펼쳐놓은 진법을 깼을 때부터 눈빛이 바뀌었는데. 뭘 깨닫고 얼마나 해냈는지 봐주마.’
방 안에 몰래 펼쳐놓은 진법이 전부라면 실망할 수밖에. 다른 적임자를 찾는 게 나으리라.
‘찾기 귀찮으니 실망시키지 마라.’
정광은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며 운룡을 검집째 내려쳤다.
운룡이 소년의 머리에 닿는 순간.
그 막대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소년이 펼쳐놓은 진법이 깨졌다.
파스스-
동시에 소년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방 한쪽 구석에 나타났다.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으나 진법으로 착시를 일으켜 중앙에 있던 것처럼 꾸민 것이다.
이미 이렇게 될 줄 알았던 정광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소년을 향해 운룡을 내질렀다.
‘응? 뭐야 이건?’
소년은 어느새 허리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이 활처럼 휘는 순간.
콰아아아아-
소년의 전신이 빛으로 물들며 강렬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정광이 내질렀던 운룡이 그 바람에 휩싸여 반원을 그리더니 주인의 목을 노렸다.
‘역시. 믿고 있었다니까!’
정광은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재빨리 숙였다.
운룡이 간발의 차이로 정광의 정수리를 스쳐 지나갔다.
깨끗이 잘린 머리털 몇 올이 허공에 흩날릴 때.
정광은 손목을 가볍게 뒤틀었다.
후우웅-
바람에 끌려가던 운룡이 기묘한 원을 몇 차례 그린 뒤 정광의 허리와 요대 사이에 들어갔다.
정광은 운룡의 검파(劍把)에서 손을 떼며 손뼉을 쳤다.
“이야. 방법을 찾고야 말겠다고 하시더니 해내셨네요. 상당히 좋았어요.”
“……이익!”
위진홍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토록 고심해서 준비했는데도 안 통하다니!”
“그것보다 왜 기습을 했냐고 따지는 게 먼저 아닌가요?”
“그 기습을 막기 위해 노력한 것들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따위가 무슨 소용이오?”
정광은 위진홍의 어깨를 토닥이며 진지하게 설명했다.
“상대가 저였잖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화낼 필요 없어요.”
“…….”
“그런데 어떻게 하신 거예요? 또 다른 진법을 펼쳐놓은 흔적은 없었는데.”
위진홍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떤 특정한 자세를 취하면 진이 발동되도록 내 몸에 문신을 새겼소.”
“저런. 아프셨겠다.”
“…….”
“어쨌든 발상의 전환이 좋네요. 그런고로 합격! 축하드려요.”
“……!”
위진홍의 눈이 커졌다.
과거 사천성에서 정광을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서였다.
“대답부터 해주시오. 투웅은 당신에게 사주를 받은 상태겠지. 맞소이까?”
“호오. 합격. 그새 또 나아지셨네.”
“……합격이라니. 무슨?”
“안 죽일게요. 대신 나를 따르세요.”
그때부터 인생이 바뀌었다.
지금도 왠지 그럴 것 같았고.
위진홍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합격이라……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정광이 빙긋 웃었다.
“평생 후회하시겠죠. 무림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싸움을 지휘할 기회를 놓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