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5화
정말 크고 넓은 사람
정광은 서녕성(西寧城)에서도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와 환호했다.
“소신선님! 무탈하게 돌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진옥룡! 그대는 우리 모두의 자랑이오!”
그렇다.
정광은 청해성의 자랑이었다.
비록 외진 곳에 있다지만 중원 소식을 못 들을 리 있나.
워낙 심심한 곳이다 보니 소문 퍼지는 속도가 웬만한 쾌검(快劍)보다 빨랐고, 근 이 년간 정광이 중원 곳곳에서 펼친 아름다운 선행들과 놀라운 위업들을 들으며 웃고 울어온 것이다.
사람들은 정광을 보며 가슴을 활짝 폈다.
‘청해성이 땅이 조금 척박할 뿐이지, 사람까지 없을까?’
‘중원 놈들아! 네놈들이 촌구석이라고 무시하던 이곳에서 진옥룡이라는 대영웅이 나왔다! 맛이 어떠냐?’
물론 안 좋은 소문도 많았지만 코웃음 치며 무시했다.
사람이 너무 잘나면 시기도 많이 받고 오해도 잔뜩 쌓이기 마련.
소인배들의 질시라고 치부한 청해성 사람들은 소문을 전하고 들을 때마다 안 좋은 부분들을 조금씩 희석했다.
결국에는 좋은 것들만 남게 되었고, 이런 소란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환호성이 점점 커졌다.
내성(內城)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통통한 중늙은이가 대소를 터뜨리자 그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으하하하! 조카, 고향에 돌아왔구나! 이 이숙(姨叔)이 환영한다!”
“와아아아아!”
번쩍번쩍.
휘황찬란.
중늙은이는 이런 표현으로도 모자란 값비싼 의복과 장신구로 온몸을 휘감고 있었으나, 지금 이 순간 그의 얼굴은 그것들보다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광은 청해성주의 악취미에 한숨을 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성주님. 잘 계셨죠?”
“어허. 성주님이라니. 이숙, 이숙.”
정광은 호칭을 정정하라고 연신 눈짓하는 청해성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황상께서 미리 알리셨을 텐데. 조용히 들어가서 친왕 전하들과 공주님을 먼저 챙기셔야죠.
-아니. 이러는 게 맞아.
성주가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반가운 마음은 이해하나, 다들 그만하시게.”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아주 멀리까지 퍼지는 울림이었다.
평소 덕과 위엄이 있어서였을까?
소란이 금세 진정됐다.
청해성주는 고요한 분위기를 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화려한 사두마차들 앞에 이르자 극진한 예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한왕 전하, 조간왕 전하, 영평공주님. 황상의 성은을 입고 청해성을 지키는 연제훈이 인사드립니다.”
“……!”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지켜보던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친왕들과 공주가 머나먼 청해성까지 오다니!
대체 왜?
사두마차에 타고 있던 당사자들도 놀라긴 마찬가지.
좋은 일로 온 것도 아니거늘, 중인환시 속에 그걸 밝힐 줄이야.
아직도 대가 센 편인 한왕이 마차 창문을 가린 천을 살짝 열며 나직이 질책했다.
“반겨주는 건 좋으나 때와 장소가 있는 것 아닌가? 조용히 지내고 싶네.”
청해성주는 예의 바르게 답했다.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잠시 뒤.
정광 일행에게 각각 머물 곳을 배정해준 청해성주는 자신의 집무실로 가 두툼한 요대를 풀었다.
제법 탄탄해 보였던 배가 불쑥 튀어나왔다.
“하아아. 정말 못 할 짓이군.”
끌려 들어온 정광이 그 배를 보며 중얼거렸다.
“성주님의 배가 할 말인 것 같은데요.”
“내 것이니까 내가 힘든 거지.”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한왕 전하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불쾌해하실 텐데요.”
청해성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 짐작하면서 무슨. 황상의 뜻을 따르려면 이럴 수밖에. 저분들이 이곳에 계심을 널리 알려놔야 마교가 헛된 욕심을 안 부릴 텐데 어쩌라고.”
“그래서 많은 분들 앞에서 저를 먼저 환영하시고 그분들께 인사드리신 거군요.”
“당연하지. 반대 순서로 했으면 조카한테 다 묻혔을 게 뻔하잖아. 이제 순리대로 흘러가겠지.”
황족들이 온 것을 직접 보고 들은 사람들은 엄청난 속도로 소문을 퍼 나를 터.
청해성에 들어와 있을 천마신교 세작의 귀에 금방 들어갈 것이고, 세작은 깜짝 놀라 신강(新疆)에 알릴 게 분명했다.
“역시 성주님.”
정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청해성주를 칭찬했다.
“이모가 배를 곯으실 일은 없겠네요.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어쩌긴. 하긴 싫지만 황상께서 힘을 실어주셨으니 휘둘러야지.”
청해성주는 권력다툼에서 실수해 밀려났으나 능력 있는 자였다.
금의위 지휘사와 같은 통주연가(通州燕家) 사람이라 가문도 믿을 만했고.
더구나 청해성 여인과 혼인한 뒤론 권력욕을 버린 행보를 보여왔기에 황제는 그를 밀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그럴 리가.
정광은 그 점을 지적했다.
“앞으로 주의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감시꾼을 말하는 것이냐?”
“네. 금의위 북진무사 천호죠. 꽤 깐깐할걸요? 괜한 의심 사지 않게 조심하세요.”
“양주강가(揚州姜家)의 강대환이라고 했던가? 먹물 가문에서 칼잡이가 나오다니. 게다가 그 나이에 그 직위라. 아까 언뜻 봤는데 실제로도 괜찮아 보이더구나. 제법 인물이라 할 수 있지만…….”
청해성주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봐야 애송이지.”
“좌천되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이젠 더 밀려날 곳도 없으시잖아요.”
“……끄응. 그래, 신경 쓰마.”
청해성주는 앓는 소리를 내고 뒷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잠시만 기다리거라.”
“태상황과 황상께서 군량과 병기는 물론이오, 그 외에 필요로 하는 것들도 전부 쓰게 해주라고 칙명(勅命)을 내리셨죠?”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리라고. 뭘 말할지 겁이 나서 견딜 수가 있나.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들어야지.”
“이쯤이면 됐겠네요. 무림맹에서 연락 왔죠?”
“진작에 왔지. 얼마나 많이 요구하던지 원. 모두 곤륜산으로 보냈다. 물량도 물량이지만 곤륜산까지 올리는 데 얼마나 막대한 인력이 소모됐는지 아느냐?”
“고생하셨어요.”
“고생 정도가 아니었어. 힘이 생기면 뭐 하나? 전부 내 살 깎아 먹는 데 쓰고 있는데.”
청해성주가 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적당히 좀 가자. 뭐가 필요하지?”
“아까 기마대를 보셨을 건데 불회당(不悔堂)이라고 하거든요.”
“듣자마자 아직 관직을 내놓지 않은 게 후회되는구나. 설마 그 많은 인원에게 예비마를 지급하라고?”
정광이 손사래 쳤다.
“그럴 리가요.”
“후우우. 다행이군.”
“낙타를 주세요.”
“……뭐?”
“말이 아니라 낙타요. 예비용까지 넉넉하게.”
청해성주가 소리를 빽 질렀다.
“청해성에 낙타가 있어 봐야 몇이나 있다고! 더구나 얼마나 비싼데!”
“서역과 교역하는 상인들에게 대여해 주는 사업을 하고 계시잖아요.”
“어허. 사업이라니. 상인들이 활발하게 드나들어야 백성들에게 뭐라도 떨어질 것 아니냐? 청해성의 발전을 위해 상단에 편의를 제공하는 것뿐이야.”
“그게 그거죠. 되죠?”
“……너라는 녀석은 진짜…….”
“성주님 개인 재산이니 나중에 황상께 청구하시면 되잖아요.”
“……그게 되겠냐? 앓느니 죽지.”
청해성주가 씨근덕거리다가 정광을 노려봤다.
“낙타가 필요할 만한 이유는 사막밖에 없지. 불회당이라는 자들을 탑극랍마간(塔克拉瑪干)으로 보내 정찰이라도 시키려고 그러느냐?”
“네. 천마신교가 청해성으로 넘어오려면 그곳이나 그 주변을 통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뭐 겸사겸사 보급품 약탈도 하고요.”
“탑극랍마간이 아니라 감숙성을 통해 돌아서 올 수도 있어.”
“이거 왜 이러세요. 그러려면 옥문관(玉門關)이나 가욕관(嘉峪關)을 뚫어야 하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러겠어요?”
청해성주가 쓰게 웃었다.
“허허. 이런 똑똑한 조카가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나.”
“그만 포기하시고 낙타 주시죠.”
청해성주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정광의 왼손 중지(中指)에 끼워져 있는 거무튀튀한 철환(鐵環)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줬던 걸 뺏을 수도 없고. 알겠다. 그렇게 하마.”
“역시 성주님이시네요.”
“됐고. 불회당은 의용단이겠지. 그들이 사막을 아느냐?”
“전혀요. 격이목(格爾木)으로 보내서 훈련시켜야 해요.”
“격이목도 사막이지만 탑극랍마간은 격이 다른 곳이야.”
“일단 맛이라도 보는 거죠.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사막에 익숙한 자와 무장을 보내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청해성주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그런 건 필요 없으니 네 이모나 한번 봐주거라.”
정광도 진지하게 답했다.
“원래 그럴 생각이었어요. 바로 가봐도 되죠?”
“가자꾸나. 당장.”
잠시 뒤.
정광은 연 부인의 침소에 들어가 그녀 앞에 앉았다.
파리한 안색으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옛 생각이 떠올랐다.
어느덧 훤칠한 장부가 되어버린 정광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까치발을 하던 모습과 미소 띤 얼굴로 건넨 진심 어린 조언.
‘네 뜻대로 하되 항상 몸조심해야 한다.’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지.
정광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진맥하다가 고개를 미미하게 저었다.
‘조심할 건 내가 아니었네. 생각보다 더 안 좋아졌어. 뭐가 맞을까?’
도마뱀 내단, 소환단, 수은망극단, 신진공묘유환 등 가지고 있는 영약들을 떠올려 봤다.
‘이 병세에는 수은망극단이 제일 낫겠어.’
정광은 품속에서 수은망극단 한 알을 꺼내 반으로 쪼갰다.
옆에서 숨죽인 채 지켜보던 청해성주가 조심스레 전음을 보냈다.
-조카. 이왕 쓰는 거, 전부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이모 체질상 반 알도 벅차요. 나머진 성주님 드시죠.
-헉! 나, 나도?
-이모보다 먼저 가시면 곤란하잖아요.
-고맙긴 하다만. 내 상태가 그렇게 안 좋지는 않은데…….
정광은 청해성주의 탐스러운 배를 슬쩍 봤다.
성주는 문인이었지만 상당한 무공을 익힌 무인이기도 했다.
그런 무인이 배가 이렇게 나왔다는 건 무공 수련을 게을리 해왔다는 의미 아닌가?
안색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상세가 안 좋아진 이모를 보살피시느라 성주님 본인의 몸은 돌보지 않으셨죠?
-…….
-앞으로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 보신을 해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고맙다. 조카 말을 명심하고 나 역시 지킬 것을 약조하마.
-그럼 시작할게요.
-그래. 잘 부탁한다.
정광은 연 부인에게 수은망극단 반 알을 먹인 뒤 목을 가볍게 주물렀다.
영약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맥문(脈門)을 잡고 기를 흘려 넣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광은 연 부인의 손목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동시에 연 부인이 눈을 떴다.
눈을 몇 번 깜빡인 그녀는 정광의 얼굴을 확인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조카. 오랜만이야.”
“얼마나 됐다고요.”
“나한테는 그렇단다. 그새 더 큰 것 같은데. 일어나서 확인하지 못해 아쉽구나.”
“뭐 어려운 일이라고. 성주님. 이모 좀 도와주시죠.”
청해성주가 두 손으로 그녀의 상반신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부인. 괜찮으니 일어나 보시오.”
“지금 말입니까?”
“그렇소. 정광 저 녀석을 믿고 천천히…… 그렇지. 그렇지! 되었소! 정말 다행이외다!”
왜 이러는가 싶어 의아해하던 연 부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성주의 부축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었다.
잠시 당황하던 그녀는 성주의 손을 잡고 곱게 웃었다.
“항상 고맙습니다.”
“어허. 무슨 그런 말을. 내가 아니라 조카가 부인을 치료했소.”
“마음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보다 더 기뻐하고 계시잖습니까?”
“크흠. 흠. 조카가 삐지겠소. 어서 한 말씀 하시오.”
연 부인은 활짝 웃어 보인 뒤 신형을 돌렸다.
“어디 보자…….”
정광에게 다가가 키를 가늠한 뒤 밝게 웃었다.
“역시 조금 더 큰 것 같구나. 밥은 제대로 챙겨 먹을까 걱정했는데 한시름 놓았어.”
“곤륜에서보다 훨씬 더 잘 먹었죠. 풀보다는 고기 체질이더라고요.”
“그래, 잘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모가 오랜만에 요리해 줄까?”
“……!”
청해성주가 기겁하며 정광에게 연신 눈짓을 했다.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났는데 요리는 무슨!
정광도 동의했다.
다른 이유로.
‘요리 실력이 성품의 반의반만 따라갔으면 먹을 텐데 이건 아니지.’
그간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을 새로 느끼고 인격적으로 많은 성장을 한 정광이었기에 직접적으로 꼬집지는 않았다.
“성주님께서 연회를 준비 중이시거든요. 그게 더 맛있지 않을까요? 편하게 앉으셔서 같이 드시죠.”
연회는 성대했다.
두 친왕과 공주도 마지못해 참석했는데, 청해성주가 곁에 붙어 계속 정성을 기울이자 어느 정도 마음이 풀리게 되었다.
그런 그들과 달리 정광 일행은 처음부터 연회를 치열하게 즐겼다.
이런 제대로 된 요리와 술을 맛보는 게 너무 오랜만인지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두 기쁜 마음으로 먹고 마셨는데…….
제일 기뻐하는 건 연 부인이었다.
“수빈아.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렴.”
“네, 연 부인.”
“그런 딱딱한 호칭 쓰지 말라니까 자꾸 그러네. 아까 어떻게 부르라고 했지?”
팽수빈이 정광을 힐끔 보자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팽수빈은 연 부인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모할머님. 앞으론 잊지 않겠습니다.”
연 부인은 환하게 웃으며 팽수빈을 꼭 안았다.
“사부의 눈치를 보는 게 이리도 귀엽다니. 많이 믿고 따르는 게 여실히 보여서 기쁘구나. 조카가 어떻게 이리 총명하고 귀여운 제자를 거뒀을꼬.”
“이모, 그거 칭찬이죠?”
“물론이지. 네가 아까 내 요리 솜씨를 평가했을 때도 기뻤단다.”
“왜요?”
“전처럼 독을 탄 것 같아 도저히 못 먹겠다고 말하지 않고 예쁘게 돌려 말해줘서 그랬지. 조카, 중원에 나가길 잘했어. 정말 크고 넓은 사람이 돼서 돌아왔구나.”
연 부인은 자신의 몸이 나은 것보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와 새로 생긴 종손녀 때문에 너무나 행복했다.
정광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 뭐 좋으시면 좋은 거죠.”
정광은 팽수빈과 함께 연 부인을 챙기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잘 즐기고 있네. 하루쯤은 이러는 것도 좋겠지.’
내일이면 남을 이는 남고, 떠날 이는 각자의 길로 떠나야 했다.
서로 다시는 못 보게 되는 이들도 있을 테니 이렇게라도 작별 인사를 해두는 게 좋으리라.
정광은 술잔을 들고 일어나 외쳤다.
“오늘은 한번 달려보죠!”
엄청난 함성이 서녕성을 뒤흔들었다.
“와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