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75화 (374/569)

2부 104화

서녕(西寧)

본래 감숙성 성도 난주에서 청해성 성도 서녕으로 가는 길은 꽤 험난했으나, 백승무의 본가 백가상단(白家商團)이 오래전 사장된 서역남도(西域南道)를 재정비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했기에 대략 팔백리 정도로 줄어들었다.

덕분에 정광 일행은 한결 쉽게 나아갈 수 있었는데…….

한가한 여정은 아니었다.

“진법 대형으로!”

황웅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산개해 있던 불회당원들이 재빨리 모였다.

모두 온몸에 흙먼지가 묻은 지저분한 행색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황웅이 다시 명했다.

“불회진(不悔陣), 수(守)! 개진(開陣)!”

“하아!”

큰 원진(圓陣) 안에 다른 원진, 그 속에 또 다른 원진.

각각의 원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서서히 회전했다.

정광이 무혈단의 무혈진(無血陣)을 변형시켜 창안한 것답게 그 어떤 적이 공격해 와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치밀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장칠, 너 이 새끼!”

진 내부에서 흐름을 조율하던 군사 서도한이 욕설을 내뱉으며 한 청년을 걷어찼다.

퍽!

“크헉!”

“정신머리를 어디에 팔아먹은 것이냐! 똑바로 안 해?”

“죄, 죄송합니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다! 하나가 실수하면 열이 위험해지고, 열이 잘못되면 백이 다쳐! 은공의 가르침을 항상 되뇌며 절대로 실수하지 말아라!”

“네! 알겠습니다!”

“당주! 다시 명을 내려주십시오!”

황웅이 찡그리고 있던 인상을 풀며 고함을 질렀다.

“불회진, 수(守)! 개진!”

“하아!”

지적을 받았던 장칠뿐만 아니라 불회당 전체의 움직임이 조금 더 나아졌다.

‘흐음…….’

흑서는 나무 그늘에 앉아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작 저렇게 치열하게 하지. 그랬으면 자질이 모자라도 어디서든 쉽게 맞고 다니지는 않게 되었을 텐데.’

모든 것엔 때가 있는 법.

무공은 더 심했다.

근골이 이미 굳을 대로 굳은 녀석들이 이제 와서 노력한다고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까?

‘하긴. 그놈처럼 예외는 있으니 생각보다 잘될지도…… 헉!’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그놈’이 나타났다.

언제부터 나뭇잎들 사이에 은신해 있었는지, 위에서 뚝 떨어져 내리며 유엽도(柳葉刀)를 내려쳤다.

‘미친! 내 머리를 쪼개려고 해?’

코웃음 치며 당장 반격하고 싶었지만 한참 늦은 상황.

정광에 의해 완전해진 투명암혼마공(透明暗魂魔功)을 재빨리 운용했다.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투명해지며 실제로 사라졌다.

쉬익-

간발의 차이로 허공을 벤 자오는 당황하지 않았다.

바닥에 내려서기도 전에 왼손에 쥐고 있던 비도(飛刀)를 던졌다.

쐐액-

기이한 색으로 번들거리는 비도가 날아가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던 투명한 어둠을 꿰뚫고 지나갔다.

‘이놈이 진짜!’

어둠을 풀고 땅바닥을 몇 바퀴 구른 흑서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분노했다.

수련의 일환으로 암습을 해보라 했지, 머리털이 쭈뼛 설 만큼 필살(必殺)의 각오로 달려들라고 한 적은 없단 말이다!

심지어 보통 유엽도를 써서 방심시킨 뒤, 독을 바른 비도를 던지는 장난질을 쳐?

‘정도를 모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철괴(鐵拐) 두 자루를 꺼내 꼬나쥐며 살기를 담아 쏘아붙였다.

“죽여주…….”

아차!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던 흑서는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내가 미쳤지! 이놈에게 손댔다간 나도 교주에게 죽잖아! 흥분을 가라앉혀야 해!’

그때, 자오가 유엽도를 소매 속에 넣으며 공손히 말했다.

“어르신 말씀대로 정말 죽여주는군요.”

“……뭐?”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계획하고 펼친 회심의 수였는데 이렇게 쉽게 피하시다니요. 온몸에서 힘이 빠질 정도입니다. 어르신을 진작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

흑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쉽게 피해?

유엽도에 스친 귀가 아직도 따갑고 아끼던 옷이 비도에 뚫려 구멍이 났는데 무슨!

‘내 이놈을 당장!’

흑서의 손보다 자오의 입이 더 빨랐다.

“어르신, 오늘도 궁금한 게 참 많습니다. 어르신께서 나무 그늘로 오셔서 쉬실 줄 알고 은밀히 은신하고 있었는데 그걸 이미 간파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니면 제가 은신을 풀고 떨어져 내린 시점이 적절하지 않았던 것인지요? 비도를 던지는 게 아니라 우모침(牛毛針)에 독을 발라 수십 개쯤 뿌렸으면 어르신께서 하나쯤은 맞으셨을까요? 제 생각에는 나쁘지 않았던 연환 공격이었는데 무엇이 문제였던 겁니까?”

“……네 녀석 자체가 문제다.”

“네? 그건 또 무슨 의미…….”

동방장은 먼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혀를 찼다.

‘수다쟁이에게 단단히 걸렸군. 저 영감이 노망이 들었나? 황궁에서 편하게 여생을 보낼 것이지,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따라와서 저 고생을 하는 거야?’

흑서가 들었으면 눈에 불을 켜고 항변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강제로 끌려온 것을 모르니 그를 탓할 수밖에.

‘하여간 한심하기는. 나는 절대로 저렇게 늙지 않을…… 하아아.’

흑서를 한참 욕하던 동방장은 자신의 처지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탄식했다.

‘망할 주군 같으니. 말들을 부려보라고? 말이 되는 일을 시켜야 하든 말든 하지!’

개나 늑대, 승냥이, 여우 같은 놈들만 된다고 입이 부르트도록 설명했건만, ‘똑같이 네발로 뛰는 녀석들인데 안 될 건 또 뭐예요?’라며 가뿐히 무시할 줄이야.

남들이 무공을 수련하거나 편히 쉴 때, 동방장은 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대화를 시도해야 했다.

그런데 그게 될 리 있나.

휘이익-

이히히힝.

휘익-

푸르르륵.

아무리 휘파람을 불어도 본 척도 안 하며 투레질이나 하다가, 저리 꺼지라는 항의로 똥을 싸지르는 모습이라니.

“……이것들이 진짜!”

관자놀이에 핏줄이 툭 불거지며 오기가 치솟았다.

“반드시 부려주마! 조금이라도!”

때마침 자신의 말을 돌보러 왔던 팽강웅은 동방장의 의지를 듣고 턱을 쓰다듬었다.

개를 다루는 것만 해도 놀라운 능력이거늘, 이젠 말까지 그러겠다고?

‘향상심이 대단하구나.’

과연 낭왕의 사지(四肢) 중 하나라 불릴 만한 인물 아닌가?

‘동방장뿐만이 아니야. 다들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어.’

석가장은 물론이오, 금의위까지.

덕분에 팽가도 자극을 받아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지만, 이걸로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팽강웅은 그 의문을 풀기 위해 궁리하다가 눈을 빛냈다.

‘아니야. 조급해할 필요 없어.’

정광이 팽수빈을 가르칠 때마다 강조하는 말이 있었다.

조급해하지 말되 최선을 다해라.

모자란 건 나중에 채우면 된다.

그걸 수차례 들으면서도 이런 고민을 하다니.

‘그만 돌아가서 도법이나 수련해야겠군.’

팽강웅은 애마의 말갈기를 몇 번 어루만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정광은 팽강웅이 떠올렸던 말을 팽수빈에게 하고 있었다.

“조급해하지 마. 너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

팽수빈은 쉼 없이 검을 휘두르다가 천근처럼 무거워진 팔을 축 늘어뜨렸다.

“헉. 헉. 네, 사부님.”

“호흡부터 가다듬어야지.”

팽수빈은 즉시 크게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안정시키려 애썼다.

“그래. 대답보다 그게 먼저야. 그러면서 들어.”

정광은 얼마 전부터 계속 그랬듯이, 막간을 이용해 인성 교육을 시작했다.

현오가 남긴 서책에 쓰여있던 불경 고사(故事)로.

“가뭄이 몹시 심하게 들었던 해였어. 물이 부족해 논이 타들어갔지. 물줄기 위아래로 마을이 하나씩 있었는데, 서로 자기 논에 물을 대려고 다투다가 싸움이 일어났어. 뭐 당연한 일이지.”

“…….”

“그런데 근처를 지나던 부처께서 소식을 듣고 그곳에 가신 거야.”

부처는 사정을 다 듣고 양측 사람들에게 물었다.

“물이 중요한가, 사람의 목숨이 중요한가? 자. 잘 생각해 봐. 사람들이 어떻게 했을까?”

평소의 호흡을 회복하고 진지하게 듣고 있던 팽수빈이 답했다.

“사람의 목숨이 더 중요하니,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화해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랬다더라.”

활짝 웃던 팽수빈은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굳어버렸다.

“근데 그건 말이 안 되지.”

“……네?”

“내가 잘 생각해 보라고 했잖아.”

“……사, 사부님. 제자가 또 틀린 것입니까?”

“당연하지. 극심한 가뭄이 화해한다고 해결돼? 두 마을이 물을 나눠서 논에 대면 양쪽 모두 쫄쫄 굶게 될 게 뻔한데.”

정광의 음성에 힘이 실렸다.

“산에 올라 사냥을 하든, 계곡을 찾아 물고기라도 건지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해.”

“아!”

“눈앞의 방법으로만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다른 쪽으로도 눈을 돌려봐야 한다는 얘기지.”

팽수빈이 감탄했다.

“제자,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그래. 그럼 이번엔 보법을 수련하자. 그 뒤에 또 고사 하나 들려줄게.”

“네! 사부님!”

정광은 제자가 수련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뜬구름 잡는 유치한 고사를 내 식으로 해석하길 잘했어. 꽤 써먹을 만하잖아.’

‘뜬구름’을 생각하자 답보 상태를 이어가고 있는 항마토납술(降魔吐納術)이 떠올랐다.

죽간(竹簡) 두 개를 비교해서 소실된 부분을 적지 않게 복구할 수 있었고 의미도 꽤 풀었으나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았다.

‘진공(眞空)을 해야 묘유(妙有)가 생긴다고?’

이게 말인지 똥인지.

언뜻 보면 정광이 만들었던 진공묘유환과 비슷한 이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단전을 비워야 신묘함이 생긴다니.

어떻게 쌓은 내공인데, 그걸 다 없애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내공을 소모해서 비우라는 것이면 아무 상관없지만, 아예 영원히 소멸시키란다.

‘그냥 확 때려치워? 시간도 부족한데 몇 달 뒤에나 다시 생각해 보든가.’

청해성에 돌아왔으니 슬슬 바빠질 게 분명했다.

‘가만. 내일이면 서녕에 도착하잖아. 소혜와 헤어지기 전에 심공에 대해 물어봐야겠네.’

명교주 노릇을 했던 놈이 말하길. 이론은 그럴듯하나 익힐 수 없는 신공이라 했지만, 어쨌거나 소혜는 해내지 않았는가?

소혜에게 그 비결을 들으면 항마토납술을 궁리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자, 정광은 소혜를 만나 대놓고 물었다.

“소저. 그 심공, 어떻게 익히는 거예요?”

누군가의 비기를 이렇게 함부로 묻는 건 크나큰 실례이기에 자존심 강한 무인이라면 바로 검을 뽑아도 탓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소혜는 무인이 아니었다.

더구나 정광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은 처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알려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대가를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면요.”

“어머님께선 아직도 혼란에 빠져 계십니다. 곤륜의 진인께서 가끔 들르셔서 좋은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흠. 말씀드리면 나서실 분이 계시긴 할 건데. 소저는 아직도 본인은 신경 쓰지 않으시네요.”

“……네?”

“언제까지 공주님만 위하며 사실 거예요. 소저도 좀 즐겨야죠. 그래야 힘도 나고 공주님께도 더 잘해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소혜는 정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귀중한 가르침, 감사합니다.”

“뭘요. 부탁하신 건 곤륜산에 올라 말씀드려 볼게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제 제 차례군요.”

소혜의 입이 열리고.

정광이 궁금해하던 것들이 흘러나왔다.

* * *

정광은 진흑풍(眞黑風) 위에 앉아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무공을 몰랐으니, 그 말도 안 되는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고 익힐 수 있었던 건가?’

아니.

그것만으론 부족했으리라.

나쁘지 않은 머리와 타고난 감각이 더해져서 가능했을 터.

항마토납술도 그런 쪽으로 접근하면 풀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말이 안 되지. 뭐 그건 그거고. 드디어 왔네.’

정광 일행은 서녕에 들어섰다.

낯선 무인들이 이렇게 많이 나타나자 불안해하던 서녕 사람들은 정광을 보자마자 굳었던 얼굴을 펴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진옥룡이다!”

“소신선님이 돌아오셨어!”

“와아아아아!”

청해성에서 정광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정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은 하나같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 척박한 시달목분지를 개간해 주셨지.”

“통행세를 뺏는 것으로도 모자라 심심하면 칼을 휘두르던 수적 놈들을 없애주셨어.”

“청해사흉 그 빌어먹을 대마두들을 일검에 꿰어버리신 건 또 어떻고.”

“그뿐인가? 산사태로 무너졌던 당고랍산맥의 길을 뚫어주시지 않았던가? 산적들까지 깡그리 해치워 주셔서 어찌나 통쾌했던지!”

“하하! 역시 진옥룡! 과연 곤륜이라니까! 멋지고 우아하면서도 강한 협객!”

정광과 곤륜은 여느 정파인이나 명문과는 달랐다.

본인과 사문의 명성을 위해 한창 화제가 되는 일에 나서는 게 아니라 힘없는 민초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들을 제거했다.

정광이 운후를 살리기 위해 반선단 재료를 구하느라 벌인 일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론 그렇지 않은가?

서녕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어 외쳤다.

“소신선님!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옥룡! 다시 뵙게 되어 영광이오!”

“꺄아악! 지, 진옥룡! 흐흑.”

정광은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우와아아아!”

“좀 지나갈게요. 급한 일이 있어서요.”

사람들이 썰물처럼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서 비켜 드리세나!”

“더! 더 물러나자고! 일행이 무척 많으셔!”

순식간에 정광 일행의 앞길이 시원하게 트였다.

‘역시 사부님이시구나. 이렇게 신망이 두터우실 줄이야.’

팽수빈은 사부가 너무 자랑스러워 가슴을 활짝 폈다.

‘본거지라 그렇겠지만 정말 대단하군. 이게 진옥룡과 곤륜의 힘인가.’

팽가와 석가장 무인들은 정광과 곤륜의 위상에 감탄했다.

‘주군의 실체를 모르는 놈들이 왜 이리 많아? 다들 미친 거 아니야? 바보거나.’

동방장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굳어버렸다.

‘교주가 무슨 수를 쓴 걸까? 오랫동안 꾸준히 섭혼술을 써서 경배하게 만든 건가?’

흑서는 정광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다들 뭐 하세요?”

정광은 일행을 재촉했다.

“가시죠. 서녕성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청해성주가 있는 서녕성(西寧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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