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3화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좋아요. 함께 가보죠.”
“우와아아아아!”
정광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의용단은 환호성을 질렀다.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만 해도 뿌듯하거늘, 그 길을 제시해 준 은인이 그들을 거둬주지 않았는가.
천하에 이보다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예전이었다면 병기를 하늘로 던져 올리며 한바탕 난리를 쳤겠지만, 정병(精兵) 중의 정병으로 거듭난 의용단은 과도하게 흥분하지 않았다.
벅찬 감동을 가슴 깊숙한 곳에 아로새기며 꼿꼿한 자세로 대열을 유지했다.
그야말로 칼날 같은 군기!
그들의 선두에 선 황웅이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정광에게 청했다.
“은공. 첫 번째 명을 내려주십시오.”
설령 도산검림(刀山劍林)에 뛰어들라 해도 기꺼이 행할 의지가 담긴 말이었건만.
정광이 찬물을 끼얹었다.
“때와 장소에 따라 행동하셔야죠.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의용단은 뜻밖의 질책에 실망하며 사방을 살폈다.
서운함도 잠시.
그들의 눈에 자책의 빛이 떠올랐다.
‘이런. 나름 자제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흥분했구나.’
‘이런 판국에 시끄럽게 환호성을 지르다니.’
대승을 거뒀다고 피해가 없을 리 있나.
계속 적을 몰아친 의용단에도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
하물며 오이라트군의 주력과 장시간 맞서 싸운 명군은 어떻겠는가?
감숙성주가 직접 상황을 파악하며 적절한 조치를 내리고 있었으나 이미 죽은 생명과 크게 다친 몸을 원래 그대로 되돌릴 순 없었다.
이제껏 많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참혹한 광경.
복잡한 표정을 짓는 의용단원들에게 정광이 나직이 명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네, 은공.”
그들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걸어 오이라트 진영 중앙에 도착하자 지면에 봉긋하게 솟은 잿더미가 보였다.
정광은 그것을 가리키며 담담하게 설명했다.
“태사 토곤과 그분을 호위하던 분들이 저 밑에 계세요.”
“……!”
“지독하게 덤비시더군요. 바빠서 흙으로 덮어드렸었는데 좀 깊이 묻어드리죠.”
의용단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홀로 그런 위업을 이룬 무공도 대단하지만 목숨을 걸고 겨뤘던 적을 높이며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하는 모습이라니.
그렇다면 의용단 역시 적절한 예를 갖춰야 할 터.
단주 황웅을 비롯한 수뇌부가 나섰다.
얼굴에 새카만 재를 묻혀가며 시신들을 수습했다.
그사이 백인장들은 정광이 지정한 자리를 각자의 병기로 열심히 팠는데…….
깡-
갑자기 쇳소리가 울렸다.
이게 뭔가 싶어 다들 의아해하는 그때, 정광이 재빨리 다가와 주의를 줬다.
“여기부턴 살살요. 꺼낼 것이 꽤 많아요.”
“…….”
뭐가 많다고?
곧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파니 화려한 장식품들이 자태를 드러냈다.
‘이게 다 뭐지?’
‘은공이 묻어놓은 건가?’
파면 팔수록 가관이었다.
값비싼 장식품들로도 모자라 고급스러운 궤짝들까지 줄줄이 나오는 모습이라니.
경건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도굴꾼이 된 듯한 기분.
그 기분은 자오가 어느새 몰고 온 말과 말에 연결된 수레를 보자 더 커졌다.
‘설마 이거…… 장물?’
정광은 황당해하는 의용단원들을 채근했다.
“뭐 하세요? 어서 꺼내서 실으시지 않고. 그래야 귀천하신 분들을 묻어드리죠.”
“…….”
확실히 그렇긴 한데…….
어째 전자가 훨씬 더 중요해 보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정광은 마차에 쌓이는 전리품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토곤의 재물이 생각보다 많아 다시 꺼내기 귀찮았는데. 의용단에게 시키니 금방이지 않은가?
“다 실으셨죠? 수레 위에 건초 더미를 살짝 올려서 가리죠. 네. 그렇게요. 자, 자. 수고하셨습니다. 그만 가죠.”
“…….”
멍하니 듣고 있던 황웅이 입을 열었다.
“은공. 아직 시신을 제대로 묻지 못했…….”
눈치 빠른 군사 서도한이 잽싸게 나섰다.
“단주님. 피곤하실 텐데 잠시 쉬시지요. 다들 뭐 하는가? 빨리 던져 넣고 대충 덮어. 할 일이 태산이란 말일세.”
아닌 게 아니라 할 일이 많기는 많았다.
정광은 재물을 확보하자 의용단과 함께 명군을 도왔다.
다친 이를 치료하고 시신을 모으는 것만 해도 반나절이 훌쩍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덕분에 일이 빨리 정리되자 감숙성주가 긴 한숨을 내쉰 뒤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큰 도움이 됐어.”
“잘됐네요. 이제 감숙성 사정도 나아지겠죠?”
감숙성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뿐이겠는가? 자네 덕에 큰 우환을 제거했어. 백성들이 얼마나 기뻐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군.”
“황상께서도 좋아하시겠네요.”
“물론이지. 토곤의 수급(首級)을 소금에 절여 빨리 보내 드려야겠군. 얼마나 기꺼워하실까.”
그때, 오이라트군을 쫓아갔던 기마대에서 전령이 왔다.
그는 말에서 내려 군례를 올린 뒤 상기된 얼굴로 전과를 보고했다.
“성주님. 적군의 군마가 연이어 쓰러지며 낙마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감숙성주가 미소 지었다.
“도지휘첨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느냐?”
“인원을 배분했습니다. 일부는 적절한 거리를 두고 포위망을 형성해 적들의 발을 묶는 한편, 나머지는 도주하는 놈들을 계속 쫓는 중입니다.”
“역시 쉽지는 않군. 성한 말들은 얼마나 되느냐?”
“많지는 않습니다. 상태가 그리 좋은 편도 아닌지라 오래지 않아 거의 멈추게 될 것입니다.”
감숙성주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피를 거의 안 흘리고 적들을 섬멸할 수 있게 됐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딨겠는가?
감숙성주는 전령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수고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필요한 물자와 인원을 챙겨 돌아가라. 본관은 당분간 장성에서 머물 것이니 하루에 네 번씩 전령을 보내 상황을 보고해라. 도지휘첨사에게 본관이 무척 기뻐하더라고 꼭 전하고.”
“충!”
전령이 물러나자 정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이 전부 끝날 때까지 여기에 계시려고요?”
“당연히 그래야지. 이런 기회가 또 오겠는가? 이참에 최대한 많이 주살해야 해. 그러기 위해선 모든 책임을 지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내가 여기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렇기야 하지만 생각보다 무척 부지런하시네요.”
“……칭찬이 아닌 것 같네만.”
“기분 탓이시겠죠.”
칭찬이 맞았다.
감숙성주는 일을 아주 제대로 하고 있었다.
황제가 그의 전공(戰功)과 일 처리를 보고 받으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이거 혹시 야만족들이 한창 날뛰고 있는 운남성으로 보내 버리는 거 아니야?’
감숙성주가 그토록 원하는 중앙으로의 복귀는 개뿔.
황제는 아직 젊지만 사람의 옥석을 가려 적재적소에 쓰는 능력이 있는 자. 대공을 세운 감숙성주를 운남성에 부임시켜 안정을 꾀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춥고 황량한 감숙성에서 일산유사계(一山有四季), 십리부동천(十里不同天)이라 불리는 운남성이라…….’
한 산에 사계절이 있고, 십리만 가도 날씨가 다른 곳이라니.
‘뭐 지루할 일은 없겠네. 제 복이 그러면 그런 거겠지.’
할 일도 끝났겠다, 정광은 작별 인사를 했다.
“성주님, 저 그만 갈게요.”
“벌써?”
“네. 황상의 명도 있고 제 일도 급해서요.”
“듣고 보니 그렇군. 사례하기로 한 것은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는가?”
“대륙전장(大陸錢莊) 지부에 제 명의로 넣어주세요.”
원래는 그걸 받아 곤륜에 줄까 생각 중이었으나 토곤에게서 얻은 것들이 많았기에 당장 챙길 필요가 없어졌다.
“괜찮으시죠?”
“그렇게 하지. 나도 부탁 하나 하겠네. 막중한 임무를 수행 중이라 인사를 못 드려 죄송하다고 그분들께 좀 전해주겠나?”
두 친왕과 공주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럴게요.”
“고맙네. 따로 내가 도울 만한 일은 없고?”
정광이 눈을 번뜩이자 감숙성주가 급히 덧붙였다.
“당연히 없겠지. 천하의 진옥룡에게 이런 실례를 하다니. 잘 가게나.”
“있는데.”
감숙성주가 눈짓으로 의용단이 에워싸고 있는 수레를 가리켰다.
“서로 주고받은 것으로 하지.”
“명판관이 따로 없으시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잠깐.”
감숙성주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두 손을 정중히 모았다.
“진옥룡, 수응, 각응. 덕분에 한시름 놓았소. 정말 감사하오. 그대들의 무운과 건승을 빌겠소이다. 그리고…….”
감숙성주는 한동안 함께 하며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든 이들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둘러봤다.
“……의용단. 정말 고생했네. 수고했어. 무운과 건승을 비네.”
명군도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외쳤다.
“무운과 건승을 빕니다! 무운과 건승을 비오!”
앞엣것은 이번 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정광, 흑서, 자오에게.
뒤엣것은 이번뿐만이 아니라 근 이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고난을 함께한 의용단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진심이 담긴 염원이 회색빛 하늘과 차가운 대초원을 울렸다.
이런 후의를 받고도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심지어 정광조차 기분이 살짝 좋아졌을 정도.
정광은 물론이오, 다른 이들도 진지한 얼굴로 답례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 * *
정광은 일행을 이끌고 난주(蘭州)를 향해 말달렸다.
시간은 소중한 것이었기에 잠시 말에서 내려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도 의용단원들을 모아놓고 해야 할 일을 알려줬다.
“난주성(蘭州城)에 도착하면 건량과 육포 외에도 필요한 물자를 사세요. 괜찮은 병기가 있으면 다소 비싸더라도 놓치지 마시고요.”
황웅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먹고 마실 것이야 가능하지만 나머지는…….”
“왜요?”
“……하루하루 사는 데 바빠 성주가 내려 준 돈을 대부분 써버렸습니다.”
“다른 분들도요?”
모두 시선을 피하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황웅보다 사정이 못하면 못했지, 낫지는 않아서였다.
정광은 피식 웃으며 해결책을 제시했다.
“제가 섭섭지 않게 도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말씀드린 대로 하세요.”
“가, 감사합니다.”
“뭘요. 우리 사이에 무슨.”
의용단원들은 모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가 제일 좋은 서도한은 정광이 무엇으로 돕겠다는 것인지 짐작하고 눈을 빛냈다.
‘수레에 실은 저것들이겠지. 은공이 욕심이 없진 않아서…… 아니, 많아서 다행이야.’
강호의 고수들 중 상당수는 본인의 힘을 과신해서이기도 하지만 체면 때문에라도 재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곤 한다.
허나 이것은 무리를 이끄는 자에게는 치명적인 결함.
‘은공은 돈을 밝히고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아. 아까처럼 기회가 되면 계속 챙기겠지.’
더구나 이렇게 아랫사람들에게 베풀기까지.
군사인 서도한으로서는 무척 다행인 점이었다.
‘은공을 따르길 잘했어. 최선을 다해보자.’
마치 그 마음을 짐작한 것처럼 정광이 서도한을 지목했다.
“군사님.”
“네, 은공.”
“의용단에서 군사님 학식이 제일 높으시죠? 깃발에 수놓을 이름을 다른 분들과 상의해서 정해주세요. 앞으로 그 깃발을 휘날리며 사…… 천하를 질주할 것이니 그럴듯한 것으로요.”
정광이 사막이라 말하려다 재빨리 천하로 바꿨지만, 서도한과 의용단원들은 조직의 이름을 직접 정할 생각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자연스레 넘어갔다.
“알겠습니다, 은공.”
“그럼 다시 출발하죠.”
서도한과 의용단원들은 함께 말달리며 조직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상의했다.
의견이 일치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좋았어! 내 직접 말씀드리지!”
황웅이 신난 얼굴로 정광에게 다가와 그 이름을 말했다.
“은공. 불회당(不悔堂)으로 정했습니다. 듣기에 어떠십니까?”
“후회하지 않는다? 무슨 이름이 그래요?”
황웅이 밤송이처럼 빳빳한 수염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설명했다.
“오늘의 선택을 절대 후회하지 않고 초심을 유지하며 길을 걷겠다는 의미입니다.”
“아…….”
“벼, 별로입니까?”
고생을 사서 하겠다는데 말릴 필요 있나.
정광은 빙긋 웃었다.
“아뇨. 무척 괜찮은데요.”
“하하. 다행입니다.”
“깃발 색은 정하셨어요?”
“물론이지요.”
황웅이 가슴을 활짝 폈다.
“붉은 천에 금사(金絲)로 글자를 수놓을 계획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정광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왕 고를 거면 좀 상쾌하게 가지. 피칠갑을 하고 누런 고름을 줄줄 흘리는 느낌이잖아.’
그래도 어쩌겠는가.
자기들이 좋으면 좋은 거지.
“괜찮네요. 난주성에 도착하면 하루 묵고 떠날 예정이니 그사이에 만드시죠.”
“하하. 알겠습니다, 은공. 멋들어지게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들은 계속 열심히 달려 난주성에 이르렀다.
정광은 수레에 실린 궤짝을 몇 개 골라 황웅에게 건네줬다.
“여기요. 나눠 가지세요.”
“어이쿠. 뭘 이런 걸 다…… 헉!”
그것들을 열어본 황웅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궤짝마다 금원보가 꽉꽉 들어차 있는 모습이라니.
“으, 은공. 너무 많습니다. 이걸 어떻게 다…….”
정광이 정색했다.
“그만큼 여러분께 많은 기대를 해서 그래요.”
“……감사합니다. 은공의 기대, 절대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네. 그럼 내일 아침에 봬요.”
정광은 팽가와 석가장이 머물고 있는 객잔으로 가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제일 반가워한 이는 당연히 팽수빈이었다.
“사부님!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정광은 팽수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간의 성취를 살폈다.
대충 봐도 수련을 소홀히 하지 않은 티가 역력했다.
“열심히 했네. 잘했어.”
“감사합니다.”
“그래.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정광은 식사를 하며 사람들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모두 기쁜 얼굴로 정광의 공적을 칭찬했다.
금의위 천호 강대환은 더했다.
그가 있는 곳으로 가 사실을 전하자 기뻐하면서도 부끄러운 기색을 띠며 예를 표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우리가 못한 일을 그대가 해냈구려. 정말 고맙소. 이 은혜, 잊지 않으리다.”
정광은 감숙성주가 부탁한 일을 전하고 내일 떠날 거라 알렸다.
“그렇게 합시다. 일정에 차질이 없게 준비해 놓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푹 쉬시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정광은 사람들을 이끌고 난주성을 나섰다.
그새 소문이 돌았는지 사람들이 쏟아져나와 정광과 의용단을 칭송했다.
황웅과 의용단원들은 승천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과거의 이름이 아닌 새로운 이름을 높이 들었다.
마침 바람이 불며 깃발이 활짝 펼쳐졌다.
펄럭-
[불회당(不悔堂)]
지금부턴 강제로 잡혀 와 기간만 채우고 떠나려 발버둥 치던 의용단이 아니었다.
영광스러운 길을 꿋꿋이 걸어가겠노라 스스로 다짐하며 만든 불회당이었다.
불회당원들은 위풍당당한 기세를 발산하며 정광의 명을 기다렸다.
정광은 깃발을 슬쩍 보고 뺨을 긁다가 정면을 가리켰다.
“자. 후회 없이 가보죠.”
“하아!”
힘찬 함성과 함께 질주가 시작됐다.
그 질주는 청해성에 접어든 이후에도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