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2화
뜨거운 결의
“의욕이 넘치시네요. 그럼 가보죠. 앞으로 여러분이 걸어갈 길을 보러.”
의용단은 바짝 긴장했다.
오이라트군 또한 마찬가지.
적이 늘어나자 정광을 포위하고 있던 그들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질서 있게 물러났다.
정광은 거리를 벌리고 진형을 정비하는 그들을 보며 내심 칭찬했다.
‘역시 싸울 줄 아는 녀석들이야.’
용맹하긴 하나, 무모하게 덤비지는 않는다.
최대한의 실리를 추구하는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정광은 구환도를 꼬나쥐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황웅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시기에 어때요?”
황웅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광이 다시 존댓말을 쓰는 게 어색했고 한 가지 의문이 생겨서였다.
“생각보다 당황하지 않는군요. 토곤이 죽었을 텐데…….”
정광은 빙그레 웃으며 허리춤을 툭툭 쳤다.
요대에 매달려 있던 피로 물든 보자기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분 머리통은 여기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의, 의심한 건 아닙니다.”
“일단 넘어가죠. 목이 잘린 시신은 흙더미로 덮었거든요. 파오에 불도 질렀고요.”
“아!”
“오이라트군 수뇌부는 그분이 잘못되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사기를 고려해 군 전체에 알리진 않았을 거예요.”
의용단 군사 서도한이 눈치를 보다가 끼어들었다.
“동시에 토곤의 행방을 열심히 찾고 있겠군요. 혹시 그렇게 되도록 유도하신 겁니까?”
“역시 군사시네요. 토곤 그분이 귀천하신 걸 알아도 남은 분들이 복수를 다짐하며 결사항전하지는 않겠죠?”
“그럴 겁니다. 오이라트는 조금만 불리해져도 퇴각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중원인의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나, 오이라트가 별난 게 아니라 유목민족의 특성이었다.
형편없이 패주해 뒤를 잡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기마술과 궁술에 능했기에 퇴각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했다.
추격해 오는 적을 끌어들여 포위하고 기사(騎射)로 타격을 입히거나 역으로 쫓아 섬멸하는 전술은 천하무쌍(天下無雙)!
초기에 몇 번 당해 생사를 넘나들었던 의용단원들은 그때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영리한 서도한은 다른 쪽에 집중했다.
“지휘부에 혼선을 줘서 당장 퇴각하는 것만큼은 막으신 거군요.”
“네. 그사이 성주께서 군마들이 모여 있는 곳을 치시고요. 퇴각도 말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으니 발을 묶는 거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감탄하던 의용단원들은 또 다른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잠깐. 도주를 막았다는 건?’
‘지금 이 자리에서 승부를 내겠다는 의미잖아!’
아니나 다를까.
정광이 선언했다.
“최대한 큰 피해를 줄 거예요.”
“……!”
“대칸 세력보다 훨씬 강한 오이라트의 군세를 꺾어놔야 양측이 오래오래 사이좋게 싸우겠죠? 다소 힘들더라도 훗날을 위해 조금만 더 땀을 흘리는 게 어떨까요?”
“…….”
의견을 물어주는 건 고마운데.
이미 다 정해놓고 무슨!
정광은 입을 떡 벌린 의용단원들에게 찬찬히 설명했다.
“성주님의 의도를 눈치채고 오이라트군이 몰려가고 있어요. 주변을 정리하고 그 뒤를 쳐야 해요.”
“…….”
이 인원으로?
역으로 포위되어 전멸당하기 딱 좋은 역할 아닌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광은 한술 더 떴다.
“단주님, 이거요.”
황웅은 얼결에 정광이 내민 것을 받았다.
토곤의 머리를 싼 보자기였다.
“가, 갑자기 이건 왜…….”
떨리는 황웅의 목소리를 정광이 잘랐다.
“왜긴요. 장창에 꿰어 높이 들어야죠.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게.”
“……!”
황웅뿐만이 아니었다.
의용단원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툭 불거졌다.
‘미친! 이 와중에 적들의 이목까지 끌겠다고?’
‘개미 떼처럼 몰려와 칼질할 게 뻔하잖아!’
모두 미친 짓이라 생각했지만 정광은 담담했다.
“뭐 하세요? 시간 없어요.”
결국 참다못한 서도한이 대표로 한마디 하려는 순간.
황웅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정광을 노려봤다.
“우리를 사석(捨石)으로 쓸 셈입니까?”
“설마요. 그간 들인 공이 얼마인데.”
“그럼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말씀드렸잖아요. 여러분이 걸어갈 길을 보여 드리겠다고요.”
“…….”
잠시 침묵하던 황웅이 씹어뱉듯 말했다.
“만약 그 길이 별것 아니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죽더라도…….”
“패기 좋네요. 그 정신으로 가보죠.”
황웅은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다른 수가 없지 않은가?
의용단원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기호지세(騎虎之勢)다! 전장에서 장수의 지휘를 따르지 않으면 몰살당할 뿐! 진옥룡의 명에 따라 싸운다!”
한 몸처럼 움직여도 부족할 판에 따로 놀아서야 살 수 있나.
익히 경험으로 알고 있던 진리를 다시 새긴 의용단은 핏발 선 눈으로 함성을 질렀다.
“하아!”
정광이 흐뭇한 얼굴로 덧붙였다.
“다른 장창 끝에 횃불을 달아서 같이 올리시죠. 그래야 더 잘 보일 테니까.”
이미 미친 짓을 벌이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그 정도쯤이야.
토곤의 머리와 그것을 밝히는 횃불이 높이 올라갔다.
대치하고 있던 오이라트군이 흔들렸다.
“태사! 태사의 머리다!”
“방화에 습격으로도 모자라 태사까지 당하다니!”
천인장(千人長)이 수하들을 진정시켰다.
“당황하지 마라! 복수가 먼저다!”
놀람도 잠시.
오이라트군은 거대한 살기를 발하며 병기를 고쳐 쥐었다.
천인장(千人長)은 냉정한 음성으로 명을 내렸다.
“모두 놈들을 다시 포위…… 헉!”
안타깝게도 명령은 완성되지 못했다.
적들이 벌써 다른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
천인장은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느낌을 받았다.
‘태사를 시해한 흉수인 것이 분명한 엄청난 고수가, 평소 아군을 귀찮게 하던 의용단 놈들을 이끌고 달린다고?’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좋은 일일 리는 없었다.
“빌어먹을! 쫓아라! 걸음이라도 늦춰야 해!”
천인장은 수하들을 이끌고 정광 일행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허나 얼마 못 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갑자기 몸이 불편해졌어. 어떻게 된 거지?’
뛸 때마다 바닥에서 일어난 먼지를 들이마셔서였다.
그 먼지가 정광이 감숙성주에게 요구해 받은 약재들로 만들어낸 독이란 것을 천인장이 어찌 알까.
무공을 모르는 일반병들이 먼저 쓰러졌다.
“쿨럭, 쿨럭. 크흑!”
“커헉! 수, 숨이 막힙니다. 제발 살려…….”
천인장은 그제야 눈치챘다.
즉시 호흡을 멈추고 소맷자락을 세차게 내저었다.
“독이다! 숨을 쉬지 말고 뒤로 물러나! 뭔가 또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해라!”
그때, 파오들을 태우고 달려와 독을 뿌린 뒤 은신해 있던 자오가 나타났다.
그것도 천인장의 뒤에서.
휘릭-
“흡!”
머리카락처럼 가는 줄이 천인장의 목을 한 바퀴 감았다가 사라졌다.
목에 혈선이 생기고 그 선이 크게 벌어져 핏물을 뿜을 때, 자오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천인장을 잃은 수하들이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자객이다!”
“천인장이 당했어!”
“소리치지 마! 또 독에 당하고 싶으냐? 쿨럭! 커헉!”
추격자들을 무력화시킨 자오는 잠행술을 펼쳐 달리며 눈을 빛냈다.
‘한 무리는 됐고. 서둘러야겠군.’
정광과 의용단이 저 앞에서 오이라트군을 돌파하고 있었다.
자오의 임무는 오이라트군이 그들을 쫓지 못하게 독을 뿌리는 것.
‘바람 방향 좋고…….’
시기도 적절했다.
‘너희들도 여기까지다.’
입이 근질거리는 걸 참느라 힘들었지만 별수 있나. 일이 끝난 뒤 의외로 얘기 듣는 걸 좋아하던 수응에게 풀어놓으면 될 일이었다.
스윽-
자오의 신형이 은밀하게 움직였다.
한편, 정광을 따라 달리던 의용단은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왜 쫓아오던 놈들이 픽픽 쓰러지지?’
‘진옥룡이 무슨 수를 부린 건가?’
그들의 마음을 짐작한 것처럼 정광이 외쳤다.
“뒤는 신경 쓰지 마세요! 돌파만 하면 돼요!”
정광은 평소와 달리 말로만 떠들지 않았다.
금광을 줄기줄기 뻗으며 앞을 막아서는 자들을 도륙했다.
그 누구도, 어떤 합격술도 정광의 일검을 견디지 못했다.
그야말로 무신 같은 신위!
의용단이 용기백배할 수밖에!
“크하앗!”
정광의 좌측 후방을 맡은 황웅이 거대한 구환도를 내려쳐 상대를 양단했다.
“좋아! 다음!”
정광의 우측 후방에 배정된 쌍도비호와 지재원도 있었다.
각자 쌍도와 창을 휘두르고 내질러 접근하는 적들을 물리쳤다.
“나 쌍도비호와 싸울 자! 당장 나서라!”
“의용단 부단주가 노름으로 얻는 자리인 줄 아느냐? 다 덤벼!”
전장에서의 용맹은 전염되기 마련.
뒤를 따르던 의용단원들도 원래의 무위를 상회하는 활약을 펼쳤다.
이런 피가 끓는 질주가 계속되자 흥분에 사로잡혀 진형을 이탈하려는 자도 있었으나…….
그때마다 군사 서도한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장칠! 죽으려고 환장했냐? 헛짓거리 말고 복귀해!”
“죄, 죄송합니다!”
“오석경 너 이 새끼! 백인장이라는 놈이 뭐 하는 거야? 네 백인대만 간격이 벌어지고 있잖아!”
“젠장! 알겠소!”
의용단은 시간이 흐를수록 손발이 맞았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공유하며 전장을 휩쓸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그들은 결국 명군과 오이라트군이 접전을 벌이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명군은 군마들이 갇혀 있는 울타리를 등에 지고, 공격해 오는 오이라트군을 막고 있었다.
정광의 목소리가 새벽을 울렸다.
“성주님! 하실 만하세요?”
감숙성주의 근엄한 외침이 의용단원들의 귀에 박혔다.
“장난하는가? 자네와 의용단만 기다리고 있었어! 모루 노릇을 할 준비가 끝났으니 어서 망치가 되어 치게나!”
“네! 이따 봬요!”
정광은 즉시 명을 내렸다.
“의용단! 여러분이 이 전장의 주역이에요! 지금부터 신나게 두들겨 보죠!”
“……!”
의용단원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감숙성의 왕이나 다름없는 성주가 아군과 적군 앞에서 신뢰를 표하며 도움을 청하다니.
뿐이랴?
당금 무림에서 제일 유명한 고수이자 대마두인 정광이 자신들을 전장의 주역이라 칭했다.
게다가 신나게 두들겨 보자고?
뱃속 깊은 곳에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고양감이 솟구쳤다.
그것은 거대한 함성으로 변해 피로 물든 대초원을 쩌렁쩌렁 울렸다.
“우와아아아아!”
정광이 씩 웃었다.
“소리 한번 시원시원하네. 가죠!”
“하아!”
정광과 의용단은 성주의 주문대로 거대한 망치가 되었다.
상대를 쉴 새 없이 때려 한 치의 틈도 없었던 진형을 경쾌하게 깨뜨렸다.
오이라트군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안에서 철벽처럼 버티고 밖에서는 정신없이 때리는데 무슨 수로 견딜까?
의용단의 장창에 꿰인 토곤의 머리도 사기를 떨어뜨리는데 큰 일조를 하고 있었다.
오이라트군을 지휘하던 선임 만인장은 얼굴을 귀신처럼 일그러뜨리며 한탄했다.
‘태사가 당하고 우리까지 전멸하게 생겼구나. 이렇게 된 이상 한 놈이라도 더 죽여서…… 음?’
만인장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계속된 접전에 지쳤는지 명군 진형에도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닌가!
‘틈이 생겼다! 저곳을 뚫으면 말을 손에 넣을 수 있어!’
아직 동이 트진 않았지만 사물을 어느 정도는 분간할 수 있는 상황.
말을 타고 퇴각할 기회였다.
반드시 도주해서 이 원한을 몇 배로 갚아줘야 했다.
“모두 나를 따르라!”
만인장은 오이라트군을 이끌고 명군 진형의 틈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결국 명군이 견디지 못하고 갈라지자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군마에 올라탔다.
만인장은 말고삐를 내려치며 외쳤다.
“어서 달려라! 대열 따위는 무시하고 달려!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다!”
콰앙!
오이라트군은 울타리 한쪽을 부수고 말달리기 시작했다.
명군이 급히 쫓았으나 미처 말에 오르지 못한 자들만 잡았을 뿐, 대부분의 인마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허어…….”
감숙성주는 멍하니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신형을 돌렸다.
뜻밖에도 그의 눈매는 둥글게 휘어있었다.
“수응. 어디 계시오? 일은 계획대로 잘 끝내셨소?”
주변을 살피며 묻는데 그의 발치에서 흑서가 솟아났다.
“당연한 소리. 진옥룡이 조제한 독을 말들이 먹는 물에 푼 지 오래요. 녀석들, 잘도 마시더이다.”
“허허. 정말 수고하셨소.”
정광이 정정했다.
“제가 설마 죄 없는 말한테 독을 쓰겠어요? 그냥 속을 시원하게 비우는 약인데요.”
“하하. 어쨌거나 놈들은 얼마 못 가 두 발로 걸어야 할 것 아닌가? 자네의 공이 제일 커.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놈들을 섬멸할 수 있게 됐네.”
“성주님, 그보다 신호부터 보내셔야죠.”
감숙성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암. 그래야지. 여봐라, 무엇들 하느냐? 어서 장성(長城)에 있는 이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지 않고.”
“충!”
궁수 한 명이 하늘을 향해 명적(鳴鏑) 세 대를 연달아 쏘아 올렸다.
마치 귀신이 우는듯한 요란한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끼익- 끼이익- 삐이익-
잠시 뒤.
장성 문이 열리며 기마대가 쏟아져 나왔다.
그 선두에는 도지휘첨사가 있었는데, 더없이 냉정한 얼굴을 한 채 오이라트군이 도주한 뱡항으로 기마대를 이끌었다.
감숙성주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 번 실수할 이는 절대 아니야. 진옥룡, 잠시만 기다려 주겠는가? 피해를 확인하고 조처한 뒤 다시 얘기하세.”
“네. 그러시죠.”
정광도 바빴다.
몸을 드러낸 흑서와 자오를 칭찬했다.
“역시 수응 어르신. 대단하시네요.”
“헉! 무, 무슨 그런 말…….”
“겸손하시기는. 각응도 정말 잘하셨어요.”
대경해서 말을 더듬는 흑서와 달리 자오는 기쁜 표정으로 정광의 칭찬을 즐겼다.
“감사합니다, 모두 단주 덕분입니다.”
“뭘요. 그리고 의용단 여러분.”
정광을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던 의용단원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 했다.
“어? 진짜 정병(精兵)이 되셨네요. 이번 싸움, 어떠셨어요?”
황웅이 대표로 답했다.
“뿌듯했습니다.”
“그래 보이시네요. 왜 그럴까요?”
“……인정을 받았고, 주체가 되어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은 아니시겠죠.”
정광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과거와 달리 천하에 도움이 되는 일로 싸우셨잖아요. 그 싸움을 통해 나날이 발전하셨고요. 그러시다가 마지막으로…….”
정광은 자신을 가리켰다.
“저와 함께 싸우셨죠. 이 즐거움, 버리실 거예요?”
“…….”
잠시 달싹거리던 황웅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희가 앞으로 걸어갈 길을 보여주시겠다고 했는데, 그것이 진옥룡의 길이었습니까?”
정광은 환하게 웃었다.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겹치는 부분은 있지 않은가?
“네. 함께 가시죠.”
“……한낱 산적이었던 저 같은 놈도 쓸모가 있을까요?”
정광은 황웅의 어깨 위로 불쑥 솟아 있는 거대한 구환도를 가리켰다.
“그거, 처음 만났을 때 제가 두 동강 냈던 것을 대장간에서 이어 붙이신 거죠?”
“그렇습니다.”
“망가진 칼도 더 강하고 날카롭게 벼릴 수 있는데, 마음을 고쳐먹은 사람을 왜 못 쓸까요.”
“……!”
정광은 의용단원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장창에 적장의 수급(首級)이 아니라 본인들이 지은 이름이 수놓인 깃발을 매단 채 질주하고 싶지 않으세요?”
“……!”
“어렵지 않아요. 마음만 먹으시면 충분히 가능해요.”
“…….”
황웅은 정광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지난날들을 돌이켜 봤다.
‘기껏 익힌 무공이 하필 마공이라 천하의 눈을 피해 산적질을 하며 살았지.’
그러다 정광을 만났고 그 덕분에 평생의 한이었던 마공이 남에게 보일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 무인은 더욱더 그래.’
칼날 위에서 춤을 추다가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인생.
부귀영화 따위는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무인으로서 천하에 이름을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뿐.
그 계기를 만들어줬고, 앞으로도 가능하게 해줄 자가 눈앞에 있었다.
‘……진옥룡.’
황웅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격정에 찬 목소리로 진심을 토했다.
“전장에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은공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은공을 만나기 전처럼 버러지 같은 삶은 아니었습니다. 저라는 사람의 쓸모를 일깨워 주신 은공께서 가리키시는 길이니 이번도 틀림없겠지요. 앞으론 원망 없이 따를 테니 제가 가야 할 길을 계속해서 짚어주십시오.”
황웅의 진심이 담긴 말은 의용단원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들도 연이어 무릎을 꿇으며 청했다.
“은공을 따르겠습니다! 저희를 거둬주십시오!”
모두의 눈과 음성에 맺힌 뜨거운 결의!
그 열기가 은공이라 불린 정광에게도 닿았다.
정광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먹을 쓸 필요도 없이 잘 풀렸네. 말을 탈 줄 아니 낙타도 금방 다룰 수 있게 되겠지. 탑극랍마간(塔克拉瑪干) 사막에서 굴리면 딱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