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71화 (370/569)

2부 100화

토곤

칠흑처럼 캄캄한 하늘이 내려앉은 밤.

그 어둠에 잠긴 명군(明軍) 진영에는 조용하지만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신호가 떨어지면 목숨을 걸고 적진을 향해 달려야 하는데 누가 마음 편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두려움에 몸을 떠는 이는 없었다.

화톳불이 일렁일 때마다 언뜻언뜻 비치는 관군들의 얼굴에는 똑같은 감정이 맺혀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오늘로써 끝내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결의였다.

허나 야습을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오이라트의 태사(太師) 토곤을 암살하는 데 성공해야 한다는 것.

명군은 너 나 할 것 없이 하달받은 명령을 떠올렸다.

‘천하에 이름 높은 진옥룡이 토곤을 척살한다.’

‘그가 신호를 보내면 성주님을 따라 혼란에 빠진 오이라트군을 습격한다.’

토곤을 죽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할 수 있었으면 벌써 했지,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진옥룡이라면…….’

‘그가 못하면 천하의 그 누구도 해낼 수 없을 거라고 성주님께서 확언하셨어.’

성주의 안목을 믿어야 했다.

소문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진옥룡의 인성은 일단 제쳐두고, 천하가 경외하는 그의 놀라운 무위를 신뢰하며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명군의 간절한 기대를 한 몸에 짊어진 정광은 감숙성주의 푹신푹신한 침상에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자신의 침상을 빼앗긴 감숙성주는 밖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하다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 정광을 깨웠다.

“이보게, 진옥룡. 시간이 되었네.”

정광이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성주님?”

“……유감스럽게도 건곤일척의 승부를 앞두고 잘 만큼 신경이 굵지는 않아.”

“긴장을 유지하는 것도 좋죠. 잠시만요. 곧 나갈게요.”

정광은 병기와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먼저 나가 있던 감숙성주가 희미한 불빛들만 보이는 오이라트 진영을 가리켰다.

“도지휘첨사의 말에 따르면 화톳불의 수는 평소와 비슷하다더군.”

“재밌네요.”

똑똑한 자들은 보통 의심이 많기 마련인데 토곤은 많이 똑똑한 자였다.

갑자기 감숙성주가 나타나 함정에 빠지려던 명군을 제지하는 걸 보고 뭔가 이상함을 느꼈을 터.

자객을 보낼 것이라 예상하진 못하더라도 방비를 단단히 굳히고 있어야 정상이거늘, 평상시와 별다름이 없다니.

감숙성주의 생각도 비슷했다.

“함정을 파고 있을지도 모르네.”

“그렇겠죠.”

“괜찮겠는가?”

정광이 싱긋 웃었다.

“안 괜찮아도 가서 괜찮게 만들어야죠.”

감숙성주가 정광의 어깨를 두드리며 무겁게 말했다.

“자네의 희생. 절대로, 영원히 잊지 않겠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그런 불길한 말씀을.”

정광은 어느새 다가와 곁에 있던 자오에게 가볍게 물었다.

“준비됐죠?”

“물론입니다, 단주.”

은신해 있는 흑서에겐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툭하면 구박하곤 하나, 암흑 속에서만큼은 제 몫을 해내는 북천호가(北天扈家)의 후예 아닌가?

“좋아요. 우리는 됐고…….”

정광은 천천히 신형을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묵묵히 서 있던 무장들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정광과 자오에게 예를 표했다.

“우리도 다 되었네.”

“그대들의 무운을 비네.”

무장들 사이에는 의용단의 수장 황웅도 있었다.

정광은 복잡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에게 담담히 당부했다.

전음으로.

-의용단은 별동대야. 성주가 아니라 내 명을 따라야 해.

-알고 있습니다.

-신호를 보내면 아까 지시했던 대로 움직이고. 너희들에게 꽤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야.

정광이 몸을 돌리려고 하는데 황웅이 다급히 물었다.

-이번 싸움에서 보여주실 셈입니까? 저희가 왜 전장을 떠나서 살 수 없는지 말입니다.

-글쎄. 닥치면 알겠지. 그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자고.

정광은 모두를 향해 포권했다.

“그럼 이따 봬요.”

오이라트 진영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거리에 있었다.

지금처럼 야밤에 은밀하게 움직이는 경우엔 후자일 수밖에.

정광은 잠행술을 펼쳐 조용히 나아갔다.

-자오. 혹시 모르니 빙 돌아가죠.

-네, 단주.

초원 곳곳에서 가늘게 느껴지는 인기척은 문제 될 게 없었다.

강한 자는 내부를 지키는 법. 진영 외부에서 은신한 채 번(番)을 서는 자들의 이목이 뛰어나 봐야 얼마나 뛰어나겠는가?

정광이 주의하는 것은 낮에 봤던 철질려들처럼 토곤이 쳐놓았을 장난질이었다.

‘어디 한번 볼까?’

미리 정해뒀던 대로 자오가 앞서 나갔다.

최근 들어 일취월장한 그는 주변을 샅샅이 살피며 위험을 정확히 감지했다.

정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전진하는 속도는 조금 느렸으나 피할 것은 피하고 해체할 건 해체하는 모습이 제법 믿음직스러웠다.

말이 많은 건 여전했지만.

-단주. 잠시만 멈춰주십시오. 수풀 사이에 철편을 뿌려 밟으면 소리가 나게 해놓았…….

-설명 없이 알아서 하시면 돼요.

-……네.

자오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했다.

정광은 편하게 뒤따르다가 허공에 동화된 흑서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이 녀석 말씀입니까?

-응.

-처음 봤을 때도 괜찮은 편이었는데 근래 들어 깜짝 놀랄 만큼 많이 늘었습니다. 무슨 기연이라도 얻은 것 같습니다만.

정광이 인정했다.

-사문의 비급을 찾아 깨달음을 얻었지.

-역시 그렇군요. 암왕과 비슷한 향을 미약하게 풍기는데 혹시…….

-맞아. 영인문(影人門) 출신이야. 앞으로 더 커야 하니까 네가 좀 신경 써. 할 수 있지?

흑서로서는 할 수 없어도 해야 할 판이었다.

-속하를 믿고 맡겨주십시오, 교주.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괜한 거 가르치다 망치면 안 돼. 필요한 것만 딱딱 알려줘. 때리지 말고 말로.

흑서는 속으로 장탄식했다.

저 수다스러운 놈을 말로만 지도하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궁금한 게 있다며 장광설을 늘어놓으면…….’

손발이 묶인 것이나 다름없는 자신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정광의 전음에 바로 답해야 했다.

-왜? 그러기 싫어?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부드럽게 잘 이끌어가겠습니다.

-그래. 잘해봐. 네게도 작게나마 도움이 될 거야.

-……!

흑서는 놀란 얼굴로 정광의 말을 되뇌었다.

‘내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막무가내로 부렸으면 부렸지, 입에 발린 말을 덧붙일 교주가 아닌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렴풋이 짚이는 게 있었다.

‘영인문! 자오 저놈이 영인문 출신이랬지.’

암왕이 죽은 이상 현 문주는 자오인 것이나 진배없었다.

‘분명 사문의 비급을 찾았다고 했어. 깨달음을 얻었다 해도 경험이 부족하니 아무래도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달리 말하면 현재의 자오는 영인문의 수법을 이론 그대로 펼치는 경향이 짙을 수밖에 없다는 것.

영인문이 북천호가보다 나을 거라 믿지는 않았으나 중원에서 오랫동안 첩보와 암살로 명성을 떨치던 집단 아닌가?

‘그런 그들의 것 중 본가의 비기에 접목할 수 있는 건 받아들이라는 말이었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북천호가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한계가 있지, 정광에게서 도망친 이래로 수십 년이 넘게 홀로 수련하다 보니 여러모로 부족함을 느꼈었다.

‘그래. 교주의 말대로 영인문의 것을 참고해 부족하다 느꼈었던 것을 보완하자. 많이 늦었지만 더 나아질 수 있어.’

자오를 가르치며 동시에 배우는 거다.

한 걸음 더 나아갈 기회인데 그깟 수다쯤이야 무슨 대수랴.

어엿한 제자를 이미 셋이나 길렀겠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바로 자오에게 전음을 보냈다.

-까마귀야. 단주께서 너를 지도하라 하셨다.

정광이 다른 사람들 앞에선 교주라는 호칭을 꺼내지 말라고 명했기에 단주라 칭한 것이었다.

정광을 통해 이미 흑서를 소개받았던 자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감사를 표했다.

-어르신. 정말 영광입니다. 안 그래도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 가슴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는데 황실을 수호하시던 어르신께서 이렇게 발 벗고 나서주시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 마음이 놓입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정식으로 예를 표하지 못하는 걸 이해해 주시면 감사…….

-…….

망할.

그깟 수다쯤이야 무슨 대수냐고 생각한 뒤 숨을 몇 번 쉬지도 않았는데 벌써 후회될 줄이야!

흑서는 저도 모르게 움켜쥐었던 주먹을 간신히 풀었다.

‘참자. 참아야 해.’

불쑥불쑥 솟구치는 살심에 참을 인(忍) 자를 무수히 새기며 점잖게 충고했다.

-예는 그만하면 됐다. 그보다 일에 집중해라.

-그건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르신.

-무어라?

-저는 말을 하며 일하면 집중력이 더 올라가는 편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현재 눈앞에 펼쳐진 형국을 보니 침입자를 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 같은데…….

-…….

쉼 없이 떠들면서도 할 일은 제대로 하는 모습이라니.

흑서는 다시 참을 인 자를 되뇌며 자오의 말에 동의했다.

-네 말이 옳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야 당연히…….

자오가 입술에 침을 묻히고 떠들려 하자 흑서가 기겁했다.

-말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라.

-네? 그랬다가 혹시 제가 실수라도 하면 어떡하시려고…….

-노부는 너를 믿는다. 혹 실수할 것 같으면 바로 깨우쳐 줄 테니 안심하고 행해라.

-……어르신.

자오는 감격한 눈으로 흑서가 은신한 허공을 빤히 봤다.

흑서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놈이 내 은신술을 눈치챈 건가? 어떻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허나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말을 해야 더 집중이 되는 편이니 일일이 설명해 드리며 움직이겠습니다. 시작하지요. 번을 저런 식으로 나눠서 세운 것은…….

자오는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났다.

흑서는 가산을 탕진한 노름꾼처럼 망연자실했고.

정광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오의 입도 풀고 흑서의 수양도 높이고. 일거양득이네.’

일도 잘 진행되고 있었다.

별다른 문제 없이 오이라트 진영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정광 홀로 들어가는 게 더 빨랐지만 신강에서의 싸움을 대비해 자오와 흑서의 힘을 조금이라도 더 키워놔야 했다.

‘밤이슬을 맞아가며 고생할 만한 가치가 있지.’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결국 오이라트 진영에 진입하게 되었다.

정광은 두 사람에게 다전음을 펼쳤다.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단주.

-아닙니다, 교…… 다, 단주.

정광은 은신해 있는 흑서를 한 번 쏘아본 뒤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화톳불 수에 비해 상당히 많은 자들이 번을 서고 있었다.

‘이거야 뭐 당연히 이럴 줄 알았고.’

그 외의 준비가 얼마나 돼 있는지 확인하며 움직일 차례.

저 앞에 있는 화려한 파오를 주시하며 가져온 것들을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이제부터 나눠서 움직이죠. 이따 봬요.

정광이 각자에게 내렸던 임무가 있었기에 자오와 흑서는 동시에 복명했다.

-네, 단주.

두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 갔다.

정광은 그들의 움직임과 주변에 있는 오이라트군의 기척을 살피다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은근히 기대되네.’

토곤은 오이라트의 수장.

오이라트가 대명에 비하면 많이 척박하겠지만 토곤까지 가난할까?

그럴 리가.

중원의 웬만한 세력가보다 거부(巨富)일 게 분명했다.

정광은 화려한 문양이 수놓인 파오의 내부를 파악하기 위해 청력과 기감을 키웠다.

이마에 주름이 저절로 잡혔다.

‘외로움을 많이 타나? 뭐 이리 많아?’

파오 안은 고수로 가득했다.

유독 또렷한 기는 토곤의 것일 터.

‘기척을 굳이 숨기지 않는 걸 보면 회의 중인가.’

늦은 시간이라 해도 충분히 가능한 일.

조금 더 접근했다.

다른 곳에 비해 철통같은 경계를 서고 있었으나 정광을 곤란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야 있나.

지루하더라도 공을 들여 천천히 움직였다.

얼마 안 가 파오 근처에 다다른 정광은 내부 상황을 다시 살폈다.

걸쭉한 몽고 방언이 들려왔다.

천마신교에도 몽고 출신 가문이 몇 있었기에 듣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두 사람이 다투는 중이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어쩌기는. 명군의 깃발을 못 보았소? 감숙성주가 직접 왔소이다. 놈을 잡고 인질로 삼아 식량이라도 뜯어내야 할 것 아니오?”

“말도 안 되는 소리. 몸값으로 받아내는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게 분명한데 왜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내뱉는가? 자중하시게.”

“어리석다니! 태사께선 평소처럼 어떤 의견이든 기탄없이 말하라 하셨소. 그 명에 따라 언급했을 뿐이거늘, 나를 모욕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보자 보자 하니까 감히!”

병기를 뽑는 소리와 동시에 냉랭한 음성이 파오를 울렸다.

“그만. 의견을 내라 했지 도를 꺼내라 명하진 않았다.”

다투던 두 사내가 주눅 든 목소리로 즉시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태사.”

“되었다. 꽤 오래 회의를 했는데 결국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는군. 겨울이 깊어지고 있으니 그만 돌아가자는 것과 명군을 한 번 더 쳐서 성주를 사로잡는 것.”

“…….”

“나 토곤이 정하겠다. 이의가 있는 자, 지금 나서라.”

파오 안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답했다.

“태사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대들의 의견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허나 더 좋은 길이 있지.”

토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감숙성은 버린다. 우리의 터전으로 돌아가 정비한 뒤 동쪽으로 향한다. 해와 달을 계속 삼키며 말달려 결국에는 황금 씨족까지 먹어 버린다. 그리고 나 토곤이 대초원의 진정한 지배자가 될 것이다.”

잠시 정적에 잠겼던 파오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북성을 치느라 여념이 없을 대칸의 뒤를 치고, 그의 권위까지 빼앗아 대초원에 우뚝 서겠다는 선언 아닌가!

‘드디어 마음을 정하셨구나!’

‘태사의 뜻이 옳다! 황금 씨족이 뭐가 대수라고! 언제까지 그 망령에 사로잡혀 허송세월할 수는 없어!’

수하들이 환호성을 터뜨리려 하는데 토곤이 말렸다.

“대칸이 헛된 싸움을 벌여서 그를 따르는 부족들 내부에 불만이 팽배할 것이나, 아직도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

“말은 언젠가 새어나가기 마련. 밖으로 표출하지 말고 가슴속에 심어라.”

“알겠습니다, 태사.”

“날이 밝으면 바로 떠난다. 그만 돌아가서 준비하도록.”

“네, 태사.”

파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정광은 그 모습을 훔쳐보며 토곤에 대한 평가를 조금 더 올렸다.

‘수하들의 의견을 빠짐없이 들어 내부 기류를 파악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내세워 모두의 뜻을 하나로 모았네.’

평소 그만한 성과를 보여줬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밀약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은 걸 보면 홀로, 또는 심복만 아는 상태로 진행해 온 것이 틀림없었고.

명교주 노릇을 했던 놈이 털어놨던 얘기가 떠올랐다.

‘토곤과 모용회는 밀약이 자신들과 명교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고 있어. 토곤 입장에선 모용회와 명교가 실패했으니 여기 더 있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지.’

원래부터 토곤의 목표는 감숙성이 아니었다.

대칸이 대명과 오랫동안 싸우게 해서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다.

허나 대명 황제 암살에 실패한 지금 대명이 싸움을 오래 끌만큼 쇠약할 리 있나.

대칸은 얼마 안 가 못 견디고 퇴각할 것이다.

‘그 전에 감숙성에서 말머리를 돌려 대칸의 본거지를 치는 거야.’

대칸이 급히 돌아와도 토곤의 상대는 못 될 터.

여러 곳에서 외적과 싸우고 있는 대명으로선 대칸을 쫓아 대초원으로 들어올 여력이 없을 것이다.

‘그사이 대초원을 일통하고 힘을 기르는 거지.’

그리고 언젠가는 대명까지 먹는다.

정광이 생각해도 현 상황에선 제일 나은 수였다.

‘역시 오길 잘했네. 많이 귀찮아질 뻔했어.’

파오 내부엔 아직도 몇 명의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토곤을 호위하는 자들이겠지만 아까에 비하면 한참 적은 숫자.

‘기회야.’

그래도 정광은 조금 더 기다렸다.

반각쯤 지났을까?

파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토곤의 것이었다.

“자객치곤 소심하군. 여기까지 숨어들어 와놓고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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