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70화 (369/569)

2부 99화

전략 회의

수확할 수 있는 건 좋았지만, 겨울은 겨울이었다.

정광은 고수 중의 고수였기에 별다른 영향이 없었으나 다른 이들까지 그럴 리 있나.

매서운 한파를 가르며 말달리다 보니 사람도 말도 급속도로 지쳐갔다.

정광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점점 느려지네.’

이래서야 언제 도착하나.

말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고,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웠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법. 선선한 봄바람이라 생각하고 달리죠.”

“…….”

다들 기운이 솟긴커녕 힘이 빠졌다.

그래도 효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또 안 들으려면 어떻게든 빨리 가야 해.’

‘조금만 더 참자. 얼어 죽더라도 가서 죽는 거야.’

말도 같은 심정이었던 걸까?

재촉하니 조금이나마 이동속도가 빨라졌다.

결국 그들은 예정일에 맞춰 국경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고 말에서 내리자마자 화톳불 근처로 달려가 몸을 녹였다.

허나 감숙성주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이곳을 지키고 있던 무장들에게 그간의 상황을 보고받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허어. 아직도 틈만 나면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감숙성주가 묻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성주님.”

“이 추운 날씨에 대단하군.”

“그래도 땅이 단단히 얼어 놈들이 토굴을 못 파고 있어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지. 장성(長城) 밑을 파고 들어와 무너뜨리는 꼴은 안 봐도 된 게 어딘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장성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지금도 훼손된 부분들을 보수하느라 바빴는데, 거의 무너져 내리다시피 한 곳들도 있을 정도.

감숙성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가 인편으로 고충을 토로한 게 저것들이군.”

도지휘첨사가 이를 갈았다.

“보수할라 치면 쳐들어오고, 막으려 하면 도주합니다. 밤에 불을 밝히고 조금이나마 고치려 했으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다가와 화살을 쏘아대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른 무장들도 인상을 찡그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감숙성주는 속으로 탄식했다.

‘의용단과 기마대를 장성 밖으로 내보내 막게 하면서 보수했는데도 이 모양이라니…….’

역시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었다.

‘토곤을 잡아 오이라트가 물러나게 해야 해.’

마침 그 일을 해낼 고수도 함께 온 상황.

감숙성주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관군의 옷을 얻어 입고 투구를 눌러 쓴 정광이 장성 밖에 펼쳐진 초원을 주시하며 묵묵히 서 있었다.

감숙성주의 눈이 빛났다.

‘지형을 살피며 계획을 수정하는 것 같은데…….’

방해 말고 정숙을 유지해야 할 터.

수하들에게 눈짓하며 조용히 몇 걸음 물러났다.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무장들은 감숙성주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정광을 힐끔거렸다.

‘아까 성주께서 그 유명한 진옥룡이라 하셨지.’

‘명불허전이군. 투구로 가려야 할 만큼 잘생겼어.’

전부 소문 그대로인 것은 아니었다.

경박하다 들었거늘, 이렇게 과묵하고 신중할 줄이야.

무슨 용무로 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저 먼 곳에 진을 치고 있는 오이라트와 무관한 일은 아닌 듯싶었다.

‘대체 무엇을 보며 고심하고 있는 걸까?’

정광은 오이라트의 진영에 세워진 수많은 파오들 중에서, 중앙에 있는 가장 화려한 것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중이었다.

‘무슨 놈의 천막에 화려한 문양을 저렇게 많이 수놓았지? 토곤의 것 같은데. 안에는 또 뭐가 있을까?’

털면 제법 쏠쏠할 게 분명했다.

정광은 옆에 서 있는 자오와 자신의 그림자를 슬쩍 봤다.

‘자오, 흑서, 나. 세 사람이나 있으니 웬만한 건 다 챙길 수 있겠지.’

그때, 오이라트 진영에서 호각(胡角) 소리가 울렸다.

부우우웅-

염소가죽이나 양가죽 옷을 입고 털모자를 쓴 사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점으로 보일 만큼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정광의 눈엔 또렷이 들어왔다.

‘공격하려는 건가?’

도지휘첨사가 정광의 추측이 맞다는 걸 확인해 줬다.

“성주님. 놈들이 또 들이치려 합니다. 잠시 장성에서 내려가셔서 아군을 지휘해 주십시오.”

내려가면 밖이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지휘를 할까.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몸을 피하라는 뜻이었다.

감숙성주는 단칼에 거절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럴 거면 내가 굳이 왜 왔겠는가? 지금껏 적들을 어떻게 상대해 왔는지 볼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명을 내리게.”

“충!”

감숙성주는 돈을 다소 밝히는 게 흠이지만 영락제가 인정할 만큼 뛰어난 지모를 뽐냈던 장수.

도지휘첨사는 두말하지 않고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포수(砲手), 준비! 궁병과 방패병도 모두 올라와! 창병은 사이 사이에 서고! 고수(鼓手)는 뭐 하는가? 어서 북을 치지 않고?”

바로 북소리가 울리며 명군(明軍)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용단은 이제 막 도착했으니 휴식을 취하고 나머지 기마대는 출진 준비를 해라!”

도지휘첨사는 쉴 새 없이 명을 내리다가 정광을 쳐다봤다.

“이보게, 좀 도와줄…….”

“그만.”

감숙성주가 끼어들며 막았다.

“진옥룡이 왔다는 걸 적이 알면 안 돼. 패퇴시켜 멀리 물러날 때까지 아무것도 청하지 말게나.”

정광이 신위를 드러내면 토곤이 의심을 품고 경계를 강화할지도 몰라 이러는 것이었다.

도지휘첨사는 그 뜻을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바로 수긍하고 나직이 답했다.

“알겠습니다, 성주님. 머릿속에서 지우고 전투에 임하겠습니다.”

“나는 자네를 믿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양측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직 정광만 느긋한 얼굴로 초원을 응시했다.

나란히 서 있던 자오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단주. 몰려오는 인마 뒤에 있는 건 무엇입니까?”

“투석기요.”

“아! 저게 그것이군요. 처음 봅니다. 저렇게 클 줄이야.”

천천히 오던 인마가 서서히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투석기를 운용하는 이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장성을 향해 방향을 맞추고 줄을 당겼다.

무거워 보이는 추가 올라가자 즉시 고정하고 반대편에 바위를 올렸다.

고정을 풀자마자 추가 세차게 내려가며 바위가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그 먼 거리를 넘어 장성 벽에 부딪혔다.

콰앙!

바위와 장성 벽이 동시에 박살 났다.

바위가 연달아 날아오며 굉음이 계속 이어졌다.

그사이 오이라트군이 전력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냉정한 눈으로 전황을 파악하던 도지휘첨사가 고함을 질렀다.

“화포를 쏴라!”

장성 위에 줄지어 서 있던 화포들이 불을 뿜었다.

포환들이 날아가고 아비규환의 지옥이 펼쳐졌다.

그래도 오이라트군은 계속해서 말달려 왔다.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양측은 서로를 향해 화살을 쐈다.

아무래도 장성 위에서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쏘는 명군이 유리한 상황.

하지만 오이라트군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상자가 급속도로 늘어났으나 결국 끝까지 다가와 성벽에 사다리를 기댔다.

명군에겐 안타깝게도 장성의 높이는 낮은 편이었다.

오이라트군이 사다리를 타고 하나둘 올라오는 그 순간.

“죽여!”

창병들이 장창을 내질렀다.

꼬치에 꿰인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시신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우오오오!”

허나 끝까지 기어올라 와 도를 휘두르는 자들도 있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공방전이 계속됐다.

비명이 터지고 핏물이 흘렀다.

나름의 사연을 지닌 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오이라트의 진영에서 아까의 호각 소리가 또 울렸다.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퇴각 신호겠지.’

아니나 다를까.

오이라트군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시기를 읽을 줄 아네.’

양쪽 모두 별 재미를 못 보고 피해만 커지고 있었다. 지금 병력을 안 빼면 언제 뺄까?

‘저놈이 토곤인가?’

오이라트 진영에서 담비 모피로 지은 옷을 입은 중년인이 연이어 명을 내리고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란 얘기지.’

효웅이라더니 과연.

그에 비해 도지휘첨사는 많이 부족했다.

“기마대! 모두 추격해서 적들을 주살하라!”

기마대는 멀리 달리지 못했다.

정광이 감숙성주에게 전음을 보내서였다.

-성주님. 말리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

토곤이 갑자기 이런 식의 소득 없는 소모전을 벌일 리 있나.

안 그래도 뭔가 수상함을 느끼고 있던 감숙성주는 확신을 갖고 외쳤다.

“그만!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함정일 수도 있어!”

기마대가 재빨리 돌아왔다.

퇴각하던 적들이 말머리를 돌리더니 장성 쪽을 쏘아봤다.

그들보다 더 먼 곳에 있는 토곤 역시 마찬가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감숙성주를 정확히 노려봤다.

정광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 거리에서 누가 추적을 멈추게 했는지 확실히 알아봐?’

어째 서 있는 자세부터 균형 잡혀있더라니.

토곤은 상당한 고수.

그를 호위하는 사내들도 크게 떨어져 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그러니까 아직도 살아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겠지.’

토곤은 감숙성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들어 올렸다.

부웅- 우우웅-

호각 소리가 다시 울렸다.

물러나던 오이라트군이 말에서 내려 초원 바닥에 숨겨놓았던 철질려(鐵蒺藜)들을 수거했다.

위치를 정확히 숙지하고 있었는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도지휘첨사와 명군 기마대는 몸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성주님이 제지하지 않으셨으면 죽을 뻔했구나!’

‘빌어먹을 토곤 새끼. 누가 좀 안 죽여주나?’

마침 그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다.

정광이었다.

‘비룡으로 화살을 쏴볼까?’

고민도 잠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기엔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지키는 놈이 너무 많아. 토곤이 피할 수도 있고. 어차피 밤에 방문해 인사할 건데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필요는 없지.’

한편, 도지휘첨사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감숙성주 앞에 달려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성주님! 평정을 지키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다가 일을 그르칠 뻔했습니다! 소장을 벌해주십시오!”

감숙성주는 도지휘첨사를 따끔하게 나무랐다.

“잘못을 인정하는 건 좋으나 아직 적이 건재한데 벌을 내려달라고 청하다니. 적에게 도움을 주려는 겐가? 과는 공으로 갚아야지! 어서 일어서게!”

도지휘첨사가 눈물을 흘리며 일어섰다.

감숙성주는 그를 노려보며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한 시진을 주지. 머리를 식히고 피해를 파악하게. 놓치는 게 있어선 안 될 것이야.”

“충!”

도지휘첨사는 절도있게 군례를 올린 뒤 수하들을 지휘했다.

감숙성주는 오이라트 진영을 주시하다가 묘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런 눈길로 보는가?”

정광이 씩 웃었다.

“탐관오리보다 장수가 조금 더 잘 어울리셔서요. 성주님이 여기 오셔서 다행이에요.”

“실없는 소리. 자네가 왔기에 잘 풀린 것이지.”

“그렇기도 하죠.”

감숙성주가 한숨을 쉬었다.

정광의 자화자찬 때문이 아니라 상황이 안 좋아서였다.

“오랫동안 계속된 전투 때문에 모두 지쳤네. 영민한 도지휘첨사가 막무가내로 추적해 담판을 짓고 싶어 할 만큼. 나조차 그런 마음이 조금은 들었으니 더 말해서 뭐 하겠는가?”

토곤은 그런 심리까지 꿰뚫어보고 함정을 판 게 분명했다.

감숙성주는 한동안 투덜거리다가 얼굴을 굳혔다.

“이제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갑자기 괜히 승부수를 둔 건 아니겠죠.”

감숙성주의 눈이 빛났다.

“날도 계속 추워지고 있겠다, 물러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힘을 쓴 거라고 생각하는군.”

“밀약이 황궁에서 꾸몄던 일이 실패했다는 소식도 들었을 거고요. 더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죠.”

“그래, 그럴 게야.”

감숙성주의 입꼬리가 승천하다가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바로 내려앉았다.

“토곤 본인은 떠나도 식량을 약탈하러 병력은 수시로 보내겠지만요.”

“역시 무조건 죽여야 해. 자네만 믿겠네.”

“아까 도지휘첨사님한테도 믿는다고 하셨는데.”

“……자네는 훨씬 더 믿어. 그러니 제발 좀 부탁하네. 내가 언제까지 이런 촌구석에서 썩어야 하겠나? 중앙으로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단 말일세.”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광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제가 여기 온 건 그를 죽이기 위해서니까요.”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명군은 피해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감숙성주를 위해 세워진 큰 천막에 사람들이 모였다.

대부분 명군 수뇌부였다.

“모두 앉게나.”

“네, 성주님.”

감숙성주는 사람들이 모두 앉자 정광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진옥룡일세. 토곤을 죽이기 위해 왔지.”

“……!”

무장들이 경악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지 이런저런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자객으로 왔으리라곤 상상조차 못 해봐서였다.

하지만 정광은 담담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려요.”

“…….”

“다들 과묵하시네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정광은 자오를 가리켰다.

“이분은 각응이에요. 각응, 잠깐만요. 인사는 나중에 하시죠.”

“……알겠습니다.”

“자. 그럼 전략 회의를 시작해 볼까요?”

정광은 감숙성주와 세운 계획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저와 각응이 오이라트 진영으로 가 토곤을 죽인 뒤 신호를 보낼 거예요.”

“……!”

무장들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여러분은 성주님의 지휘하에 오이라트군을 공격해 몰아내시면 되고요. 아, 의용단은 제가 지휘할 거예요. 질문 있으신 분?”

입을 떡 벌리고 있던 무장들 중에서 도지휘첨사가 간신히 물었다.

“그게 가능하리라 보는가?”

“물론이죠.”

정광이 빙긋 웃었다.

“여러분만 잘해주시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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