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98화
수확의 계절, 겨울
자객을 잡았으니, 역으로 자객이 될 수도 있냐고 물을 줄이야.
예상외의 질문에 정광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농이 많이 느셨네요.”
감숙성주는 진지했다.
“풀어서 말하지. 한번 들어보기나 해주게.”
“말씀하시죠.”
“자객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고 방비한 것으로도 모자라 도주 후 은신까지 했는데 찾아내서 주살했다고 들었네. 맞는가?”
“네.”
“그 자객은 불경스럽게도 살수의 왕이라 불리는 암왕이었고. 그런 위인을 무공만으로 잡을 순 없었을 것 같네만.”
“머리도 써야 했죠.”
“그걸 말하고 싶었네.”
감숙성주의 눈이 빛났다.
“자네에게 자객의 행동 양식과 수법을 환히 꿰뚫어보고 대응하는 지혜가 있기에 가능했겠지. 포두(捕頭)도 도적을 잘 아니 잡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정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성주님 말씀은. 제가 자객을 상대할 줄 아니까 입장을 바꿔 생각하고 움직이면 그들처럼 살행을 할 수 있지 않느냐, 이거죠?”
“그렇네.”
“지나친 비약이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
정광이 피식 웃었다.
“포두가 도적을 잘 안다고 도적질을 할 수 있나요? 아. 여기저기서 뒷돈을 쏠쏠히 챙기니 그럴 필요가 없는 건가.”
“…….”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얼추 이해했으니까.”
“경청할 테니 말해보게.”
“황상을 시해하려는 자객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반대를 떠올리신 거죠? 예를 들면 성주님을 괴롭히는 오이라트의 태사(太師) 토곤을 암살한다던가 그런 거요.”
“…….”
감숙성주는 정광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다가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설명할 일이 줄었는데도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군.”
“긍정적으로 생각하시죠.”
“자네를 위해 하는 말이니 고깝게 듣지 말게. 상대의 속을 들여다보는 건 좋으나 그것을 입 밖에 내는 건 미련한 짓일세. 그러다 큰 화를 겪을 수도…….”
감숙성주는 뭔가 생각난 듯 말끝을 흐렸다.
“그래, 자네는 진옥룡이었지. 쓸데없는 충고를 했어.”
“그거, 칭찬이죠?”
“반반일세. 하던 얘기로 넘어가지. 자네 의향은 어떤가?”
“내키지 않네요.”
“그럴 줄 알았네. 천하에 이름 높은 진옥룡이 살수처럼 암습 따위를 할 리 있나.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거, 잘 알아.”
“암습은 제 특기 중 하나인데요.”
“……역시 진옥룡. 체면만 따지는 여느 정파무인들과 달리 개방적이군. 그럼 무엇이 내키지 않는 겐가?”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왜 그걸 해야 하죠?”
“대명의 백성이니까.”
“지금까지 해온 것들만 해도 넘치는 것 같은데. 저만큼 한 사람이 또 있으려나.”
전혀 없었다.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어.”
“저도 백성인데요. 왜 고통받는 걸 넘어 사지(死地)에 밀어 넣으려고 하세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지. 다른 길이 안 보여서 그러네.”
“그렇게 사정이 안 좋으세요?”
감숙성주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오이라트의 태사 토곤이 야욕을 드러낸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닐세. 강대한 세력을 이끌며 몽고의 황제라 할 수 있는 대칸(大汗)과 반목해 왔지.”
“하지만 한계가 명확하죠.”
“바로 보았네. 지닌바 힘으로만 따지면 그가 대칸이 되어야 해. 허나 황금 씨족이 아니기에 다른 부족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 우리로선 무척 다행인 일이지만.”
“그가 그렇게 뛰어난가요? 만약 대칸의 자리에 오르면 대명이 두려워해야 할 정도로.”
감숙성주가 단언했다.
“토곤은 효웅일세. 위험한 자야.”
“칭찬에 인색하신 성주님이 그런 극찬을 하시다니. 인물은 인물인가 보네요.”
“……나는 칭찬에 후한 편이네.”
“그럼 아까는 왜 반반이라고…….”
“태상황께서 내리셨던 칙명에 그가 밀약(密約)이라는 대역무도한 조직의 한 축이라고 적혀 있었네. 자네 덕분에 알게 됐다고 하시더군.”
감숙성주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어쩐지 몇 년 전부터 대칸을 압박하지 않고 감숙성만 두들기더라니. 차도살인의 계책으로 대칸이 하북성을 치게 했다지? 토곤은 대칸을 밀어내는 것은 물론이오, 언젠가는 중원을 차지하려고 할 걸세.”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처럼 막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싹을 잘라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자만 죽이면 그런 야욕을 품을 자는 당분간 없을 테니까요.”
“바로 보았네. 자네라면 할 수 있어.”
“확신하세요?”
“자네가 아니면 천하의 그 누구도 못 할 것이란 건 확신하지. 더구나 지금만큼 좋은 기회는 없거든.”
감숙성주는 탁자 위에 지도를 펼친 뒤 한 점을 가리켰다.
“토곤이 국경 언저리까지 내려와 직접 지휘하고 있네. 여기에서 육백리(六百里) 거리야. 평소 거주하는 먼 대초원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일세.”
“확실히 기회는 기회네요.”
“해주겠는가?”
정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밀약의 수뇌 중 하나인 놈이야. 훗날 힘을 키워서 중원을 어지럽히면 놀러 다니기도 어려워질 거고.’
예비마를 끌고 말달리면 이삼일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단다.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곤륜은…….’
무림맹에 속한 여러 문파와 가문이 정광보다 먼저 떠났고 계속해서 출발하고 있는 상황.
정광 역시 최대한 빨리 달려왔기에 시간 여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가서 죽이고 싶긴 하네.’
그렇다고 그냥 응할 수야 있나.
감숙성주에게 대놓고 말했다.
“토곤을 잡으면 오이라트는 물러날 거고 성주님은 중앙으로 돌아갈 기회를 다시 잡으시겠죠.”
“부정하지 않겠네.”
“성주님께는 무척 좋은 일인데. 땀을 흘리는 당사자인 저는 뭘 얻을 수 있죠?”
감숙성주의 안색이 밝아졌다.
“할 마음이 생겼는가?”
“말씀을 듣고 정하려고요.”
감숙성주의 목소리가 신중하게 가라앉았다.
“전에 들렀을 때 자네 사제가 내게 내밀었던 의용군 청구명세서(請求明細書)를 기억하나?”
“물론이죠.”
“거기에 적혀 있던 금액만큼 사례하겠네.”
“백성들을 얼마나 수탈하셨길래 아직도 그만큼 있으세요?”
감숙성주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손도 못 댄 지 오래인데 무슨 모함인가? 오이라트가 틈만 나면 국경을 침범하는 상황에 민심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만큼 바보는 아닐세.”
“역시 성주님. 그런데 금액이 적긴 하네요.”
“……자네, 조금 전엔 대단히 많은 금액인 것처럼 말하지 않았었나?”
“기분 탓이시겠죠. 또 주실 수 있는 거 없나요?”
감숙성주는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이곳에 부임한 뒤로 있던 재산도 까먹고 있는 형편일세. 이것도 무리해서 제시한 게야. 자네 마음에 안 차도 더는 여력이 없으니 이쯤에서 제발 좀 도와주게나. 간곡히 부탁하네.”
정광은 숙고하다가 손가락을 하나 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제안해 주신 거 받고. 하나만 더 가질게요.”
“……묻기 겁이 나는군.”
“별것 아니에요. 제가 토곤을 잡으면 오이라트의 군세가 한풀 꺾이겠죠?”
“자연히 그렇게 되겠지. 상황을 면밀히 지켜보다가 때를 노려 공격할 생각이네.”
“네? 성주님도 가시게요?”
감숙성주는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히 말했다.
“나는 무관 출신일세. 무림인인 자네가 나서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직접 지휘해서 놈들을 몰아쳐야지.”
“오오.”
공을 세우려는 속셈인 게 빤히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유능한 지휘관은 환영이다.
그 지독한 영락제가 괜히 감숙성을 그에게 맡겼겠는가? 그럴 만한 인재니까 그랬겠지.
“그럼 성주님도 함께 가시는 것으로 하고. 의용단, 제게 주세요.”
“으음…….”
감숙성주의 머리가 눈부신 속도로 회전했다.
‘토곤이 죽는다고 놈의 수하들이 결사항전할 리는 없어.’
오이라트는 유목민족답게 퇴각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후계 다툼도 하게 될 테고. 한동안은 중원으로 시선을 돌릴 틈도 없겠지.’
그렇게 되면 의용단의 쓸모는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
‘어차피 계약 기간도 거의 끝나가겠다, 넘겨주고 생색이라도 내는 게 낫겠군.’
감숙성주는 정광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좋아. 그러는 것으로 하세.”
“필요한 게 조금 있는데. 부탁드려도 되죠?”
토곤을 잡을 수만 있다면 뭐가 아까울까.
“말만 하게나.”
정광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들은 조금이 아니라 많았다.
그래도 힘에 부칠 만한 것들은 아니었기에 감숙성주는 바로 준비하겠노라 장담했다.
“성주님, 밤이 깊었으니 나머지 것들은 내일 다시 논의하죠.”
정광은 황족과 금의위 무장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이 묵고 있는 고급 객잔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몇몇 사람들을 불러 모아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진지하게 듣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입을 크게 벌렸다.
정광을 절대적으로 믿는 자오와 혜진만 빼고.
정광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간단히 물었다.
“이해하셨죠?”
하긴 무슨.
석가장주가 두 눈을 부릅떴다.
“오이라트의 태사를 암살하러 가겠다니. 제정신인가?”
“물론이죠.”
팽강웅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무랐다.
“진옥룡. 자네의 무위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위험해. 다시 생각하게.”
“생각 많이 한 건데요.”
동방장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군 혼자 간다고? 진심이야?”
“자오는 함께 가야 해요. 다른 분들은 푹 쉬고 계세요.”
“휴우. 정말 다행…… 아니지. 아이고, 큰일이네. 이를 어쩌나. 안 가면 안 돼?”
억지로 걱정하는 척하는 동방장과 달리 팽수빈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사부님. 제자, 너무 걱정됩니다. 꼭 그러셔야 합니까?”
“응.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수련하면서 기다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잘할 수 있지?”
팽수빈의 얼굴이 조금씩 제 혈색으로 돌아왔다.
정광이 곧 돌아올 거라고 약조해서였다.
사부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는가!
“항상 천하를 위해 희생하시는 사부님께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유일하게 정광을 말릴 수 있는 팽수빈이 이렇게 나오자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광은 손뼉을 치며 사람들에게 권했다.
“자, 자. 그럼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고 아침이나 먹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요리를 삼켰다.
허나 혜진은 담담한 얼굴로 정광에게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다.
“단주. 제 실력이 부족해 데려가지 않으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만 마음이 무척 아픕니다.”
“역시 투지가 있으시네요. 많이 성장하셨으니 너무 의기소침하지 마세요.”
혜진은 정광을 빤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정말 단주답구나. 그걸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다니.’
모든 것에 통달한 것 같으면서도 정에 대한 것만큼은 보통 사람보다도 한참 모자란 정광이었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변했지. 점점 감정이 풍부해지고 있어.’
자신도 변해야 했다.
‘최소한 단주에게 누가 되지 않는 수준까지는 올라서야 해. 갈 길이 멀지만 아무리 오래 걸려도 반드시 해낸다.’
한편, 자오는 기분이 무척 좋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만 뽑히다니. 실력을 인정하신 거야. 이런 영광이 있나.’
하지만 얼마 안 가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려야 했다.
‘이번 싸움을 기회로 삼아 그간 얻은 성취를 갈고닦아야 해. 그런 의도로 데려가시는 거다.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하자.’
이렇게 각자 다른 생각과 다짐을 하며 식사가 끝났다.
정광은 금의위 천호 강대환을 만나 사정을 설명했다.
그의 반응은 다른 일행들이 보였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옥룡. 미치셨소?”
“설마요.”
강대환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오이라트가 얼마나 흉악한 놈들인지. 기마술과 궁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열변을 토하며 말렸다.
허나 정광의 한마디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제가 수장이죠?”
“…….”
“한왕 전하와 조간왕 전하는 그나마 나으신데 영평공주께선 피로가 많이 쌓이셨더라고요. 정신적인 부분이 크니 내공으로 회복시켜 드리는 것보다 푹 쉬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참에 다들 휴식을 좀 가지는 거로 하죠.”
강대환이 딱딱한 얼굴로 힘주어 답했다.
“명을 받들어 맡은바 임무를 다하리다. 그대 역시 그럴 거라 믿겠소.”
“네. 금방 다녀올게요.”
정광은 감숙성주를 만나 지도를 펼쳐놓고 머리를 맞댔다.
준비된 것들을 받은 뒤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이틀이 흐르고…….
아침이 밝았다.
정광과 감숙성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국경을 향해 출발했다.
당연히 의용단도 함께였다.
그들의 안색은 벌써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 죽도록 고생하다가 돌아와 며칠 쉬지도 못했거늘, 또 싸우러 가야 한다니.
아니, 그것뿐이면 이렇게까지 걱정되진 않지.
‘진짜 미치겠군. 이 악귀와 함께 싸우게 될 줄이야.’
‘달자(韃子) 놈들이 아니라 진옥룡한테 죽게 되는 거 아닐까?’
‘빌어먹을.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다들 절망에 빠진 상황.
하지만 수장인 황웅은 달랐다.
정광과 나눴던 대화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그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전장에서 이 년 가깝게 굴렀지? 네가 이제 와서 그곳을 떠나 살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너희 의용단 애들 전부 말이야.’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빨리 벗어나고 싶습니다.’
‘과연 그럴까? 한번 보자고. 어떻게 되는지.’
망할.
황웅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듯한 답을 도출해 낼 수 없었다.
군사인 서도한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왠지 그러기는 싫었다.
‘더 고민하지 말자.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진옥룡 본인이 직접 알려줄지도 모르고.’
실제로 정광은 그럴 생각이었다.
쉼 없이 질주하며 앞으로 할 일을 되짚었다.
‘어디 보자. 의용단에 비를 뿌려 모조리 거두고…….’
입가에 미소가 절로 맺혔다.
‘토곤을 잡아 돈도 벌고. 겨울 수확이라,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