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97화
역(逆)으로
“천하의 그 누구보다 따뜻한 심성을 지니신 사부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으시는 게 슬퍼서 그럽니다.”
이런 팽수빈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얘가 왜 이러는지, 혹시 내가 이상한 건지 혼란에 빠졌으나 정광의 감상은 달랐다.
‘그깟 오해 따위는 알 바 아니지만 내가 많이 바뀌긴 바뀌었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해.’
소원이니 그만 패달라는 부탁도 거슬리지 않았다.
자질은 다소 부족하나, 정광이 허청에게 했던 것과 달리 이제껏 속 한번 썩인 적 없는 제자 아닌가?
‘어차피 곧 끝낼 생각이었고. 생색도 낼 겸 소원 하나쯤은 들어주는 것도 괜찮겠지.’
정광은 손을 툭툭 털었다.
“그래, 제자야. 일단 여기까지만 하자.”
“감사합니다, 사부님!”
팽수빈은 활짝 웃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일단’이라는 말에 몸이 으스스해지는 건 일단 제쳐놓고, 정광이 누군가의 부탁을 아무런 조건 없이 이렇게 시원스레 받아들이다니!
의용단원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정광의 제자라는 어린 소녀를 응시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 귀한 줄은 안다더니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인가. 저 아이도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제 사부라 해도 그렇지.
천하의 그 누구보다 따뜻한 심성을 지니긴 개뿔, 당금 무림에서 저 악귀와 견줄 만한 대마두가 단 한 명도 떠오르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망언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건 정말 짧은 생각이고, 머리가 있는 이들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정광이 어찌나 교묘하게 때리는지 기절조차 못 하고 저승과 이승의 경계에서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꿈틀거렸던 황웅과 부단주들은 더욱더 그랬다.
‘저 아이 덕분에 겨우 살았구나.’
‘유일한 구명줄일지도 몰라. 어떻게든 잘해줘야 해.’
정광은 분명 ‘일단 여기까지만 하자’라고 말했다.
차후 살아남으려면 정광을 빨리 보내거나 조금 전처럼 팽수빈이 또 나서서 말려줘야 하는 것이다.
의용단에서 제일 머리가 좋은 군사 서도한은 정광이 무슨 변덕을 부릴지 몰라 급히 감사를 표했다.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헌데 한겨울에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존귀한 분들도 같이 계신 것 같은데…….”
서도한은 말끝을 흐리며 금의위와 화려한 사두마차들을 슬그머니 눈짓으로 가리켰다.
정광은 간단하게 답했다.
“청해성요.”
“허어. 먼 곳이군요.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빨리 가셔야겠습니다.”
“꽤 오랫동안 급히 달려서 조금 쉬었다가 가야 할 것 같은데요.”
서도한은 내심 장탄식하면서도 최대한 밝게 웃었다.
“하늘이 도우셨군요.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난주성으로 가시지요.”
“네.”
정광은 바로 승낙한 뒤 아직도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세 사람을 재촉했다.
“뭐 하세요? 일어나시지 않고. 몸이 상하지는 않았잖아요.”
“……!”
황웅과 두 부단주는 솟구치는 화를 간신히 억눌렀다.
그렇게 패놓고 괜찮지 않냐니.
그게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
‘어?’
조심스레 움직여 보니 정말 괜찮은 것 아닌가!
‘너무 아파 비명을 지를 힘도 없었는데 부러진 곳 하나 없어?’
‘구타하는 것만큼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올랐구나!’
정광은 넋이 나간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을 둘러보며 손짓했다.
“어서 가죠. 배고프네요.”
* * *
감숙성주의 집무실.
그곳의 주인은 핏발 선 눈으로 업무를 보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불청객을 보고 뒷목을 잡았다.
“헉! 자,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안녕하세요, 성주님. 잘 계셨죠?”
“묻는 말에나 답하게. 뭘 노리고 온 것이냔 말일세.”
“노리다뇨. 귀한 분들을 모시고 청해성으로 가다가 잠시 들렀을 뿐인데요.”
“귀한 분이라니?”
정광이 나직이 설명했다.
“한왕 전하, 조간왕 전하, 영평공주님께 인사드리시죠.”
“으음.”
감숙성주는 무척 노회한 인물이었다.
영평공주야 어떤 사정으로 이렇게 됐는지 몰랐지만, 두 친왕은 황상에게 숙청되어 척박한 청해성으로 내쳐진 것임을 눈치챘다.
“이보게, 진옥룡. 숨기지 않고 언질을 줘서 고맙네.”
“하하.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씀을.”
좋은 사이가 아니기에 고맙다고 한 것이었는데 무슨.
“……잠시 다녀올 테니 편한 곳에서 쉬고 있게나. 이곳 말고.”
감숙성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어섰다.
‘어쨌든 다행이군. 만나서 싫은 소리를 듣더라고 꼭 가야만 해.’
친왕들은 절망의 나락에 빠져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겠지만 감숙성주의 입장에선 모르는 척 지나칠 수 없었다.
사람의 신세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 결국 그들이 변방에서 쓸쓸히 여생을 보내다가 죽게 된다 해도 대명의 충신으로서 황족을 성심성의껏 대했다는 걸 세상에 알려야 했다.
“아. 성주님.”
정광의 부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무실을 나가려던 감숙성주가 신형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
정광이 바짝 붙어 속삭였다.
“영명하신 황상께서 오해하실 리는 없지만. 아시죠?”
“물론이지. 다른 자를 통해 내 처신에 대해 들으시기 전에 미리 사실을 아뢸 걸세.”
“과연. 태상황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시며 감숙성을 계속해서 책임질 만하시네요.”
감숙성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중앙으로 돌아가려고 갖은 애를 쓰다가 이 꼴이 됐는데 뭐가 어째?
“……끄응. 그것에 대해선 나중에 얘기하세나. 안 그래도 부탁할 게 있네.”
“그러시죠.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곳 말고 편한 곳에서 쉬라고 했는데. 그새 까먹었나?”
“여기가 제일 편해 보여서요. 할 수 없죠. 자, 나가시죠.”
정광이 먼저 집무실에서 나가며 감숙성주를 안내했다.
감숙성주는 못마땅한 얼굴로 뒤따라 나가다가 전각 밖에 도열해 있는 의용단 수뇌부를 보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나같이 성한 곳을 찾기 힘든 비참한 몰골 아닌가?
“후우우우. 한동안 괜찮더니 이번에 또 사선을 넘었나 보군.”
정광에게 처맞아 이렇게 된 것이었지만 감숙성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다들 정말 고생했네.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마워. 급한 일이 있어 가봐야 하니 보고는 나중에 하는 것으로 하고 쉬게나.”
감숙성주가 사라지자 정광이 웃었다.
“하하. 어디에 가서 쉴까요?”
황웅, 쌍도비호, 지재원, 서도한.
전장에서 함께 구르며 어느 정도 마음이 통하게 된 그들은 내심 한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네놈만 없는 곳이면 도산검림(刀山劍林)이라 해도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야 있나.
의용단의 군사 된 죄로 서도한이 정중히 권유했다.
“일행분들이 쉬고 계신 고급 객잔으로 가 회포를 푸는 건 어떠십니까? 저희와 함께 말입니다.”
팽수빈이 근처에 있으면 어떻게든 죽는 꼴은 면할 것 같아 고심 끝에 내놓은 계책이었건만.
정광은 단칼에 거절했다.
“단출하게 우리끼리 놀죠.”
“……영광입니다. 마침 괜찮은 곳이 있으니 가시지요.”
잠시 뒤.
그들은 꽤 그럴듯한 반점을 통째로 빌려 한 탁자에 둘러앉았다.
서도한이 기민하게 수많은 요리와 명주를 시키자 정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 먹을게요, 군사님. 다들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
어떻게 지내긴.
살기 위해 발버둥 쳤지.
모두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머뭇거리는데 정광이 부드럽게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
“개개인도 강해지시고 집단 전술도 치밀해지셨더군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눈부신 성과를 올리셨어요.”
“…….”
네 사람은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침을 삼켰다.
‘또 뭘 하려고 이러는 거지?’
‘때렸으면 때렸지, 칭찬할 위인이 아닌데.’
바짝 긴장한 그들에게 정광이 진지하게 물었다.
“예전의 삶보다는 나으시죠?”
“……!”
그럴 리가 있나.
“가끔가다가 작은 위기에 처할 때도 있으셨겠지만 전부 이겨내고 강해지셨잖아요.”
“…….”
‘가끔’과 ‘작은 위기’라는 말에 울컥했으나 강해진 건 사실이었다.
네 사람은 복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광은 탁자에 놓이기 시작하는 요리와 술을 가리키며 권했다.
“드시면서 얘기하죠. 어서요.”
요리를 먹고 술을 마셨다.
처음 한동안은 정광이 짧게 묻고 그들이 길게 대답하는 식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정광의 말이 더 길어졌다.
“흐음. 그 상황에서 원진(圓陣)을 펼쳐 방비를 단단히 하셨어요?”
서도한이 초조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제 판단이 틀렸던 것입니까?”
“아뇨. 나쁘지는 않아요. 그래도 아쉬운 점은 있죠.”
서도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후우우. 역시 그렇군요.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 그러셨겠지만, 단주님과 부단주님들의 용력을 믿고 추행진(錐行陣)으로 돌파를 시도하셨으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나았을걸요.”
정광의 설명이 계속됐다.
네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경청하며 중간중간 질문을 던졌다.
그때마다 정광은 명쾌한 해답을 내놨다.
“이해하셨죠?”
“네, 진옥룡.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무 맹신하진 마세요.”
“……네?”
정광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들에게 충고했다.
“저는 설명을 듣고 상황을 유추해 대안을 제시했을 뿐이에요. 허나 실제 상황에선 네 분이 내리셨던 판단이 더 맞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죠.”
“……!”
“그러니 이런 방법도, 저런 방안도 있다는 걸 머릿속에 담고 복기해 보세요. 때로는 역(逆)으로도 짚어보시고요. 작게나마 얻는 게 있을 거예요.”
정광이 알려준 것들은 지휘관에게 있어 피가 되고 살이 될 만한 묘리들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네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포권했다.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베풀어주신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뭘요. 그만 앉으셔서 마저 드시죠. 다 식겠어요.”
식사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 단주님, 의용단이 한 몸처럼 움직이던데. 단원분들의 마음을 어떻게 하나로 모으신 거죠?”
황웅이 머리를 긁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거참.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무척 죄송스럽지만, 진옥룡을 팔았습니다.”
“아. 제게 원망을 품게 하셨나 보네요.”
쌍도비호가 부끄러운 얼굴로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부족한 탓에 그만…….”
정광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실 수도 있죠. 그런데 어느 분이 그런 계책을 생각해 내신 건가요?”
지재원이 공손하게 답했다.
“군사입니다.”
“아아. 역시 예상대로네요.”
정광은 고개를 돌려 서도한을 바라봤다.
머리가 좋은 서도한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제,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봅니다. 제발 사, 살려주십시오.”
공포에 질린 표정과 애처로운 목소리.
정광의 질문에 술술 대답했던 다른 세 사람은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그들이 그러든 말든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매만졌다.
“아까 하던 거. 마저 끝내죠.”
반점을 통째로 빌렸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정광은 만족할 만큼 때린 후 황웅만 정신이 들게 했다.
“뭐 해? 앉아.”
“조, 존명!”
황웅이 잽싸게 일어나 앉자 정광이 부드럽게 웃었다.
“존댓말 써주니까 좋냐?”
“아, 아닙니다!”
“네가 감히 날 담그려고 해?”
황웅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새, 생각해라 황웅! 이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
번쩍!
황웅의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사, 사부!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사부?”
“다시 뵈면 무공을 가르쳐 주시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쾅!
“커헉!”
황웅은 머리를 부여잡고 탁자에 엎어졌다.
“사, 사부…….”
“그따위 말을 또 꺼내면 검으로 벤다고 했었을 텐데.”
“헙!”
“사고 치지 말고 알려준 무공이나 갈고닦으라 했지. 사람들이 봐도 마공인 걸 모르게 고쳤으니 안심하고 제대로 익히라고.”
천마신교 칠대가문 중 하나인 합밀오가(哈密吳家).
그들의 비기 흑도살망(黑刀殺罔)은 정광이 전생에 창안해 내려준 무공이었다.
헌데 황웅이 그것을 우연히 이어받았고, 그를 만난 정광이 다시 백도살망(白刀殺罔)으로 변형시켜 가르쳐 준 것이다.
황웅은 목을 움츠리고 있다가 간신히 변명했다.
“여, 열심히 수련했습니다.”
정광도 인정했다.
“뭐 나쁘진 않더라.”
“감사합니다!”
“시끄러워. 쓸데없는 얘긴 그만하고. 이 년, 채울 수 있을 것 같냐?”
약조했던 기간 동안 살아남을 수 있겠냐는 의미.
황웅의 눈동자에 열기가 맺혔다.
“반드시 버틸 겁니다.”
“그 후엔?”
“……네?”
“뭐 하면서 먹고 살지 생각해 봤어? 설마 또 산적질이나 하며 허송세월할 건 아니지?”
황웅의 눈동자에서 열기가 빠졌다.
사는 것에만 온정신을 쏟아왔기에 구체적인 길은 생각해 보지 못해서였다.
“세, 세상에 나가서 고민해도 될 것 같습니다만…….”
정광이 코웃음 쳤다.
“거지가 한 명 늘겠네. 개방에 소개해 줄까?”
“그, 그건 좀…….”
“어차피 너는 끝났어.”
“……네?”
정광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전장에서 이 년 가깝게 굴렀지? 네가 이제 와서 그곳을 떠나 살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너희 의용단 애들 전부 말이야.”
황웅이 기겁했다.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빨리 벗어나고 싶습니다.”
“과연 그럴까?”
정광이 빙글빙글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번 보자고. 어떻게 되는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정광은 바로 신형을 날렸다.
감숙성주의 집무실을 향해 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씨앗은 던졌겠다, 비를 좀 뿌리고 수확하면 되는 건가.’
황웅을 비롯한 의용단은 제법 굴려볼 만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상황 봐서 정하면 되겠지.’
집무실에 도착해 보니 감숙성주가 돌아와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내가 할 말이네만.”
정광은 감숙성주의 맞은편에 앉아 물었다.
“부탁할 게 있다고 하셨죠? 뭔데요?”
감숙성주가 주위를 면밀하게 훑었다.
“사제는 함께 안 왔는가? 독하게 셈을 하던 백씨 청년 말일세.”
정광이 씩 웃었다.
“네. 거래를 하되, 손해를 안 보면서 하고 싶으신가 보네요. 뭐길래 그러시죠?”
“자네가 황궁에서 자객을 잡았다고 들었네.”
“그랬죠.”
감숙성주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역으로 자객이 될 수도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