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67화 (366/569)

2부 96화

천하제일정병(天下第一精兵)

복색을 보아하니 관군이 분명하거늘,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달려들다니.

정광과 함께 있던 이들은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무공을 아는 자들이야! 무슨 연유로 저런단 말인가?’

관군들의 질주가 거세지며 축 늘어져 있던 깃발이 휘날렸다.

펄럭-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무, 무림의용군(武林義勇軍)?’

‘진옥룡이 개과천선시켰다는 소문이 도는 자들이잖아!’

그런 이들이 왜 은인에게 살기를 쏘아내는지 의아해하는데, 무림의용군이 한 맺힌 목소리로 정광에게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악귀 같으니이이이!”

“반드시 죽여 버린다아아아아!”

누가 봐도 복수하려는 기색.

그제야 사람들은 어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개과천선은 무슨. 두들겨 패서 강제로 군(軍)에 집어넣은 것이었어.’

‘다들 진옥룡, 진옥룡 하더니 명불허전이구나.’

어이없어하는 사람들과 달리, 금의위 천호 강대환과 휘하 무장들은 크게 분노했다.

“이런 망종들을 봤나!”

“황상의 성은을 입고 새 삶을 살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냐!”

준엄한 호통을 연달아 쏟아내 봐야 뭐 하나.

무림의용군의 이목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쏠려 있었다.

당사자인 정광은 씩 웃었다.

‘너무 반가워하네. 그새 겁을 상실했나?’

환대를 받으면 그만큼 예를 갖춰 대접하는 게 사람의 도리.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우득. 우드득.

기분 좋은 소리가 울리며 몸에 활력이 돌았다.

며칠 전에 영약을 먹어서 그런지 허한 느낌이 싹 사라져 그야말로 최상의 상태!

정광은 운룡을 뽑아 들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다들 잠시만 기다리세요.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올게요.”

“……!”

기마대에 홀로 뛰어들겠다고?

경악한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었다.

정광은 발뒤꿈치로 진흑풍의 배를 가볍게 찼다.

“가자.”

히히히힝-

진흑풍이 앞발을 크게 들어 올렸다가 내리며 지면을 박찼다.

두두두두-

녀석은 그 이름에 걸맞게 바람처럼 달렸다.

주위 풍경이 휙휙 밀려나며 상대와의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누구부터 팰까?’

정광은 기마대를 쓱 훑어보다가 먹잇감을 정했다.

‘역시 머리를 쳐야지.’

구환도를 젓가락처럼 가볍게 휘두르며 말달려 오는 수염투성이 거한.

과거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埰) 중 말석인 기련채(祁連埰)를 이끌다가 정광에게 사로잡혀 무림의용군, 짧게 의용단이라 명명한 집단의 단주를 맡게 된 황웅이었다.

‘얼마나 늘었나 봐주마.’

정광이 운룡을 고쳐 잡는데.

황웅이 크게 외쳤다.

“조준!”

말달리던 의용단원들 중 상당수가 활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기사(騎射)가 가능하다고?’

활은 오랜 시간을 들여 익혀야 하는 병기다.

의용단의 구성원이 산적, 수적, 흑도 무인이고 산적과 수적은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활을 다룰 줄 아는 자가 있는 게 당연했으나 말 위에서 쏘다니?

‘기마술을 익히기도 바빴을 텐데.’

정광에게 개처럼 처맞고 끌려와 오이라트의 막강한 기마대와 싸우게 된 의용단이었다.

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있나.

그들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훌륭한 궁기병(弓騎兵)으로 거듭났다.

수장인 황웅이 그 사실을 증명하듯 명을 내렸다.

“일제사(一齊射)!”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의용단원들이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허공을 빼곡히 채우며 정광에게 날아갔다.

정광은 내심 감탄했다.

‘기마민족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실력인걸. 잘 컸어.’

허나, 딱 거기까지였다.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에서 모용세가의 강력한 기마대를 농락했던 정광 아닌가?

내공을 끌어 올렸다.

운룡에서 황금빛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와 쏟아져 내리는 화살들을 갈랐다.

황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침착하게 명했다.

“연사(連射)!”

화살들이 연이어 쏘아졌다.

정광은 쉼 없이 운룡을 휘둘러 화살들을 막아야 했다.

황웅은 냉정한 눈으로 그 모습을 주시하다가 옆에서 말달리는 사내에게 나직이 물었다.

“군사가 보기엔 어때?”

기련채에서부터 황웅을 보필해온 서도한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격차를 많이 좁혔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괴물이군요.”

“그래도 애들이 힘을 빼놓고 있잖아.”

“다 빼기 전에 우리 목이 날아갈 것 같습니다만.”

서도한의 지적대로 정광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오고 있었다.

“망할. 하필 타고 있는 말도 명마라니.”

황웅이 이를 부드득 갈자 서도한이 간언했다.

“단주. 지금이라도 그간의 성취를 보여주기 위해 이랬다고 둘러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진옥룡을 원망의 대상으로 삼아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잖아. 칠 수밖에 없어.”

본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감숙성에 던져졌던 의용단은 오이라트의 기마대와 맞닥뜨리자마자 전멸할 위기에 처했었다.

모두 무력감에 빠진 그때, 군사 서도한이 꾀를 냈다.

이 모든 것이 정광 때문임을 주지시키며 복수심을 부채질했다.

반드시 살아남아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평상시라면 정광에게 복수의 칼을 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죽을 상황이 되자 의용단은 악에 받쳤다.

‘놈! 어떻게든 살아서 죽여주마!’

‘길어야 이 년이야! 그때까지 실력을 기르며 버티면 돼!’

결국 의용단은 살아남았다.

그 후 피나는 수련과 실전을 통해 나날이 강해졌다.

그럴수록 정광에 대한 원한은 커질 수밖에.

그런데 오늘 놈이 나타났다.

다들 눈을 희번덕거리며 살기를 쏟아내는데 어찌 말리겠는가?

황웅이 씹어 뱉듯 말했다.

“군사. 진옥룡을 치지 않으면 의용단은 와해될 게 뻔해. 그럼 다음 전장에선 전멸할 것이고.”

“후우. 그렇겠지요.”

황웅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나마 이쪽이 승산이 높아. 내 말 이해하지?”

서도한이 이를 악물었다.

“물론이지요. 예전의 우리가 아닙니다. 단주, 그것으로 가지요. 늦기 전에 명을 내려주십시오.”

부상자가 많으면 많았지, 사망자는 항상 적었던 의용단 최고의 전술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황웅이 무겁게 답했다.

“좋아. 해보자고. 다들 들어라! 반원진(半圓陣)으로 퇴각! 시차를 두고 연사!”

“하아!”

의용단이 한쪽으로 선회한 뒤 반원을 그린 형태로 물러났다.

동시에 정해진 순서대로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정광은 여러 방향에서 날아오는 화살들을 베다가 이맛살을 모았다.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다고? 꽤 기특하긴 한데…….’

자신이 당하니 기분이 더러웠다.

비룡으로 황웅의 이마를 꿰뚫어 버렸으면 이런 귀찮은 짓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을.

‘이왕 이렇게 된 거. 약조했던 기간을 넘어 한참 더 굴려주마.’

그러기 위해선 일단 두들겨 패야 했다.

말고삐를 내려쳐 진흑풍의 속도를 끌어 올렸다.

황금빛 검기로 화살들을 베어내며 일직선으로 말달렸다.

황웅을 향해!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황웅의 얼굴이 조금씩 창백하게 변했다.

‘썅! 저놈은 지치지도 않나?’

전장에서 죽도록 구르며 일취월장한 실력으로도 모자란 걸까?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철천지원수를 만나 살기를 내뿜던 수하들의 눈이 상한 생선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정광의 압도적인 신위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멍청한 새끼들! 이제 와서 복수심이 무너지면 어쩌라고!’

더 늦기 전에 손을 써야했다.

내공을 일으켜 사자후를 터뜨렸다.

“이 새끼들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그토록 맹세해 놓고 뭐 하는 짓이냐!”

“……!”

“지난날들을 떠올려! 감숙성에서 어떻게 굴렀는지!”

“……!”

그간 겪었던 지옥 같은 고난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의용단의 눈동자에서 불씨가 피어올랐다.

황웅이 때맞춰 외쳤다.

“우리는 강하다!”

“하아!”

“활이 안 통하는 게 뭐! 우리는 원래 개싸움! 백병전이 장기야!”

“하아!”

“정신 차렸으면 차륜전으로 들어간다! 부단주들은 이쪽으로 튀어와!”

“네! 단주!”

과거 청해성 당고랍산맥을 주름잡다가 운후를 살리기 위한 영약 재료를 찾던 정광에게 쫓겨난 뒤, 황웅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다시 정광에게 잡혀 감숙성주에게 팔린 쌍도비호(雙刀飛虎)가 달려왔다.

공동파 속가무문 주가장(周家莊)이 백가상단을 집어삼키기 위해 세운 주연표국의 표두 노릇을 하다가 역시 정광에게 처참하게 당하고 감숙성주에게 팔린 지재원도 함께했다.

다른 단원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전의를 불태우며 정광을 징치할 준비를 했다.

황웅은 수하들의 사기를 한껏 끌어 올렸다.

“전군 정지! 말 따위 버려! 옛날처럼 놀아보자! 놈을 한곳에 묶어놓고 도륙한다!”

“와아아아!”

사기충천한 의용단원들이 말고삐를 당겼다.

황웅도 말을 세우며 정광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보려고 하는데.

먼저 뒤를 확인한 군사 서도한이 딸꾹질을 했다.

“히끅! 마, 말도 안 돼! 어느새 여기까지!”

“무어라?”

황웅은 고개에 힘을 줘서 빠르게 돌렸다.

‘미친!’

정말이었다.

정광이 말을 버리고 경공술로 달려와 코앞에 이른 것 아닌가!

황웅은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리며 구환도(九環刀)를 치켜들었다.

‘백도살망(白刀殺罔)!’

두꺼운 칼등에 달린 아홉 개의 고리가 요사한 소리를 냈다.

도신에서 토해진 백색 진기가 그물처럼 정광의 신형을 옥죄었다.

마지막으로 예리한 칼날에서 넘실거리던 도기가 정광의 정수리를 반으로 쪼개려는 순간!

쿠와아아아!

정광의 오른손에서 황금색 용이 솟구쳤다.

황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처럼 당할 것 같냐!’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얼마나 치열하게 수련했던가.

오이라트 놈들과 생사를 넘나드는 실전을 치르며 갈고닦은 무공 실력은 예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흡!”

구환도에서 백색 도기가 폭발적으로 일어나 정광을 덮쳤다.

함께 죽어 사이좋게 삼도천을 건너자는 강렬한 의지가 실린 동귀어진의 일식!

단주가 이렇게 용맹하게 원수와 맞서는데 부단주들이 가만히 있을 리 있나.

“차핫!”

왼편에 있던 쌍도비호가 칼 두 자루를 악독하게 휘둘러 정광을 갈기갈기 찢으려 했다.

“하압!”

오른편에 있던 지재원이 창을 맹렬히 내질러 정광의 심장을 꿰뚫으려 했다.

각고의 노력과 수많은 실전을 통해 만들어낸 비장의 합격술!

세 사람은 동시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진옥룡이라도!’

‘셋 모두를 막을 순 없어!’

‘출혈을 일으키고 물러나 차륜전을 펼치면 우리가 이긴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정광에 대해 잘 몰랐다.

진정한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

찬란한 금룡이 세 사람을 휩쓸었다.

빠바바바박!

* * *

정광은 한참 열중하다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군사님. 그간 잘 계셨죠?”

슬금슬금 말머리를 돌려 도주하려던 서도한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가려고 하세요?”

“가, 가다니요? 소인은 이 자리에 뿌리박았습니다! 그렇고말고요!”

정광의 시선이 다른 이들에게 향했다.

“오석경 백인장님, 기한엽 십인장님은 왜 조금씩 물러나시는 거죠?”

호명된 두 사람이 기겁했다.

“죄, 죄송합니다! 말이 말을 갑자기 안 들어서…….”

“오해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진옥룡의 위엄에 짓눌려 밀려난 것입니다!”

정광이 피식 웃었다.

허나 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가 모든 분의 용모와 존함을 외웠던 거 기억하시죠?”

얼어 있던 의용단원들이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였다.

“출신이나 이력, 그 밖의 사소한 것들까지도요.”

의용단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전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여러분은 일시적이지만 군에 입대한 거예요. 만약 한 분이라도 도주하면 어떻게 될까요?”

모두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꿀꺽.

“당연히 연대책임이죠. 그분이 속한 십인대와 백인대가 책임을 져야 해요.”

과거에 들었던 말 그대로였다.

“그리고 도주한 분은 훨씬 더 큰 대가를 언젠가, 반드시, 처절하게 치르시게 되겠죠. 이해하셨죠?”

모두가 한목소리로 답했다.

“네! 진옥룡!”

“좋아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던 일부터 마저 끝내고 다시 얘기하죠.”

“알겠습니다!”

정광은 황웅, 쌍도비호, 지재원을 자근자근 밟았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그들은 간헐적으로 꿈틀거리기만 할 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의용단원들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내가 미쳤지. 저 대마두를 죽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왜 이런 미련한 짓을.’

‘죽일 놈의 오이라트. 놈들과 싸우며 헛바람이 든 게 틀림없어. 이를 어쩐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느라 희미해졌던 정광의 악랄한 손속이 머릿속에 다시 새겨졌다.

이렇게 두려움이 마음을 지배하자 자세도 달라졌다.

처처척-

의용단은 천하제일정병(天下第一精兵)처럼 군기 잡힌 모습으로 정광의 처분을 기다렸다.

어느새 다가와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대환과 휘하 무장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르고 봤으면 금의위에 차출해도 되겠다고 생각했겠군.’

‘역시 진옥룡이구나.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실력자들을 제압하다니.’

정광은 제압을 넘어 아직도 우두머리들을 구타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계속 저렇게 패다간 죽을 텐데…….’

팽수빈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생전 처음 보는 사부의 난폭한 모습에 놀라는 것도 잠시. 크게 심호흡을 하고 앞으로 나섰다.

“사부님.”

“응? 수빈아, 저리 가 있어. 금방 끝낼게.”

“제자, 소원이 있습니다. 그만하시면 안 될까요?”

정광이 팽수빈을 바라보며 자애롭게 웃었다.

“하하. 걱정하지 마. 조절하면서 패고 있으니까.”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그분들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러는데?”

팽수빈은 솔직히 말했다.

“제자, 다른 분들이 사부를 두려워하는 게 싫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권각술을 펼치던 정광의 손발이 우뚝 멈췄다.

허나 팽수빈의 입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천하의 그 누구보다 따뜻한 심성을 지니신 사부께서…….”

“……!”

“세상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으시는 게 슬퍼서 그럽니다.”

“……!”

모든 이들이 입을 떡 벌리고.

정광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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