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66화 (365/569)

2부 95화

제삿날

기연이란 느닷없이 찾아오지만 준비된 자만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던가.

자오는 정말 맞는 말이라 생각하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영인문의 무공서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뒤로 고요하게 가라앉았던 눈이 부드럽게 빛났다.

‘한 걸음 또 나아갔구나.’

천지만물이 전과 다르게 보이게 됐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이거늘, 어제 봤던 방 안 풍경이 영약을 먹고 운기조식하자 또 변해 있었다.

‘모두 단주 덕분이야.’

정광이 아니었다면 이런 경지에 오르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지난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끔찍한 고문 뒤, 무림맹에 전수하셨던 체조법을 내게 맞게 변형시켜 주신 데다 높은 수준의 잠행술과 은신법도 내려주셨지.’

그게 시작이었다.

사마련에서 갖가지 편법을 동원해 수련했던 사공 때문에 쌓인 사기(邪氣)를 영약으로 깨끗이 씻겨줬다.

무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대로 정립해 주고 때에 따라 필요한 수련을 강요하며 구타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동시에 목숨을 건 실전을 무수히 경험시켜 어색하게 걸치고 있던 무공을 딱 맞게 재단해 주기까지.

뿐이랴.

정광을 따르며 수많은 협행을 하게 됐다.

타인을 돕는 기쁨을 알게 되며 다설범협(多舌凡俠)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얻었고, 까마귀에 불과한 그를 첫 만남에서 약조했던 대로 각응(角鷹)에 걸맞게 변모시키지 않았던가.

더구나 틈만 나면 영약을 베푸는 것으로도 모자라 반평생 동안 정신을 짓누르고 있던 사부까지 죽여 완전히 해방시켜 줬다.

이런 과정을 거친 상태에서 자신의 본바탕이라 할 수 있는 영인문의 비기들을 접하게 되니, 솜이 물을 흡수하듯 전부 빨아들일 수밖에.

‘단주…….’

정광이 내려준 수은망극단(受恩罔極丹)이라는 영약의 이름처럼 입은 은혜가 끝도 없기에 감히 갚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

정광을 평생 따르며 모시리라 마음먹고 있었으나 그 결심이 더욱더 강해졌다.

‘일단 단주께 성과부터 보고를 드리자.’

자오는 뿌듯한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우연찮게 혜진도 옆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역시. 혜진 소저도 많이 변했구나. 눈빛부터 달라.’

혜진은 잔잔하지만 또렷하게 빛나는 눈으로 목례했다.

“자오 대협. 대단한 성취를 또 이루신 것 같군요. 축하드립니다.”

“하하. 혜진 소저도 축하드립니다. 잔잔함 속에 굳셈이 있으니, 실로 부동이라 할 만한 것 같습니다.”

“부동이라니요. 작은 걸음을 내디뎠을 뿐입니다. 너무 과찬을 하시니 몸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발전에 기뻐하며 전각 밖으로 나갔다.

동이 튼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석가장 사람들은 벌써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자오는 그들을 응시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변한 건 나와 혜진 소저만이 아니야. 석가장도 많이 달라졌어.’

어제도 느꼈지만 예전처럼 이름만 정파인 곳이 아니었다.

억지로가 아닌, 진심으로 도우려는 열의가 느껴졌다.

‘좋은 날씨군.’

자오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둘러봤다.

추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따스한 햇볕이 내리쬈다.

그 온기를 받은 공기가 바람결을 따라 부드럽게 춤을 추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세상이 이리도 아름다웠던가.

‘이건 원래 그렇지만 이제야 알게 된 것이겠지.’

이렇게 전과 다르게 변했거나, 변하지 않았는데도 달리 보이는 것투성이였는데…….

정광만은 여전했다.

여느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전각에서 나와 자오와 혜진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모두 성과가 있으셔서 다행이네요. 축하드려요.”

두 사람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단주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광은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손을 흔들어 보이고 한쪽을 바라봤다.

“오. 마지막 한 분도 성취를 얻으셨네요. 아주 잘됐어요.”

정광은 저 멀리 있는 측간으로 향했다.

하루 만에 얼굴이 해쓱해진 동방장이 측간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허망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는 정광이 다가오자 몸을 가늘게 떨며 울먹였다.

“나쁜 새끼…….”

“제가요? 사람 잘못 보셨네요. 몸이 한결 가벼워지셨죠?”

“……밤을 새우며 쉴 새 없이 쌌는데 무겁겠냐?”

“잘하셨어요. 비운만큼 얻는 법. 남김없이 비우셨으니 그만큼 많은 걸 얻게 되실 거예요.”

동방장은 눈물을 훔치며 손을 내저었다.

“가라…… 혼자 있고 싶다.”

“네. 옷 전부 갈아입고 떠날 준비 하세요.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그러셨다간 알죠?”

가늘게 떨리던 동방장의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귀, 귀신같은 놈. 알고 싶지 않다.”

“네. 계속 모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정광이 신형을 돌려 사라지자 묵묵히 있던 자오와 혜진이 동방장을 위로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그만 방에 들어가서 잠시나마 쉬십시오.”

“신진공묘유환은 저희도 복용해 봤습니다. 진기가 전과 달리 정순해진 것을 느끼실 겁니다.”

동방장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내가 한 걸음 나아간 걸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너희들도 먹어봤다며. 새벽 내내 쌌더니 물도 마시기 무섭단 말이다. 흐윽.”

자오는 슬쩍 몸을 돌려 혀를 차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단주의 기분이 조금 안 좋아 보였던 것 같기도 한데…….’

무공이 늘면 눈치도 느는 걸까.

이유는 모르지만 왠지 그런 것 같았다.

실제로 자오의 생각은 정확했다.

새벽에 항마토납술(降魔吐納術)을 궁리하고도 그 얼토당토않은 개소리의 진의를 꿰뚫지 못한 정광은 동방장을 놀리고 나서야 기분이 풀렸다.

‘여흥 삼아 생각날 때마다 파고들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소혜와 헤어지기 전에 심공도 물어보고.’

그때, 팽수빈이 전각에서 나왔다.

정광은 제자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곤하고 근육통도 심할 텐데 잊지 않고 체조법을 수련했어.’

수빈일기공(秀彬一氣功) 또한 착실히 운기한 모습이 역력했다.

저 나이에 스스로 여독을 씻어내고 새로운 수련을 시작할 준비를 끝마치다니.

며칠 동안 보아온 성실한 모습이었지만 흐뭇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수빈아. 잘 잤어?”

“아! 사부님.”

팽수빈은 정광을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달려와 문안 인사를 했다.

“기침하셨습니까. 늦게 나와서 죄송합니다.”

“아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괜찮아. 변명하지 않는 것도 좋고.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

“……사부님.”

팽수빈은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사부를 감동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정광은 제자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으며 오늘 해야 할 수련에 대해 설명했다.

“일단 마보 반 시진.”

“네, 사부님.”

“출발하면 신법을 펼쳐서 반 시진 달리고…….”

정광의 말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의지를 불태우는 팽수빈과 달리, 물을 것이 있어 오고 있던 팽강웅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보게, 진옥룡.”

“안녕하세요, 소가주님.”

“오면서 가만히 들어보니 너무 심한…….”

팽강웅은 속에서 쏟아져 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끊었다.

정광은 팽수빈의 사부 아닌가?

자신이 팽수빈의 큰 오라비이긴 하나, 정광이 지시한 수련이 너무 심하다고 지적할 권리는 없었다.

“……후우. 아닐세. 실례되는 말을 할 뻔했군. 최대한 빨리 출발할 생각인가?”

“네.”

마침 나타난 석가장주 석우완이 준비가 거의 끝나감을 알렸다.

“진옥룡, 나왔는가? 반 시진 뒤에 식사를 하세나. 그때쯤이면 바로 떠날 수 있네.”

“고생하셨어요, 장주님.”

석가장주가 빙그레 웃었다.

“별것 아닐세. 그쪽 사람들은 어떤가?”

황족과 금의위를 에둘러서 칭한 것.

정광은 바로 알아듣고 금의위 무장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강대환을 불렀다.

“강 천호님! 아침 먹고 출발할 건데 괜찮으시죠?”

강대환이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렇소.”

“그럼 이따 봬요.”

약 한 시진 후.

석가장 정문이 열리고 정광을 필두로 많은 인마가 쏟아져 나왔다.

장원에 남는 사람들은 청해성으로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며 한목소리로 외쳤다.

“무운과 건승을 빕니다!”

정광 일행이 말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정광은 팽강웅 곁에서 말을 몰며 대화를 나누는 석가장주를 보고 피식 웃었다.

‘장주가 직접 나서다니. 이번 싸움에 많은 걸 걸었네.’

협의 때문만이 아니라 석가장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함이리라.

‘칭송도 계속 받다 보면 중독되곤 하지.’

처음엔 작은 것으로도 뿌듯함을 느끼나 시간이 갈수록 더 큰 칭송을 갈구하게 되는 게 사람이었다.

순간 시선이 마주친 석가장주가 정광의 속마음을 짐작한 듯 얼굴을 붉혔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말게나.”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래도 영 그렇군. 선은 지켜가며 그럴 테니 이해해 주게.”

“하하. 물론이죠.”

정광은 옆에서 뛰고 있던 팽수빈에게 웃음 띤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수빈아. 그만하고 말에 타.”

“네, 사부님!”

정광은 제자의 손을 잡고 끌어 올렸다.

팽수빈의 신형이 작은 반원을 그리며 날아 황금풍(黃金風)의 안장에 안착했다.

정광은 자신이 타고 있는 진흑풍(眞黑風)의 고삐를 내려치며 사람들에게 외쳤다.

“속도를 조금 올리죠!”

“하아!”

말과 마차가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정광은 제자를 향해 소맷자락을 슬쩍 떨쳤다.

후웅-

강한 바람이 일어나 팽수빈의 얼굴에 가득했던 땀방울을 날려 버렸다.

“시원하지?”

풍압 때문에 얼굴이 웃기게 일그러졌던 팽수빈이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네, 사부님.”

“좋아. 일각만 쉬고 다시 명상을 시작하자. 네가 썼던 신법을 더 빠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렇진 못하더라도 조금이나마 편하게 펼치려면 무엇을 변형해야 하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거야.”

팽수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 사부님. 명을 거둬주십시오. 사부님께서 전수해 주신 무공을 제자가 감히 어떻게…….”

주변에서 말달리던 사람들도 대경했다.

사부의 무공에 의심을 품으라니.

기사멸조(欺師滅祖)의 중죄를 강요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정광은 담담했다.

“전에 얘기했듯이 무엇이든 의문을 느끼고 궁리하라는 거야. 사고의 폭을 넓히는 습관을 가지라고.”

“아!”

“그리고 하나 더. 감히라니?”

“……네?”

“사람 나고 무공 났지 무공 나고 사람 났나? 어차피 사람이 창안한 무공이야. 완벽할 것이란 생각은 버려. 소중히 하는 무공이면 깊이 탐구해서 발전시킬 생각을 해야지.”

팽수빈의 멍했던 큰 눈이 또렷해졌다.

“사부께서 곤륜의 무공을 더 강하게 만드신 것처럼 말입니까?”

“응.”

팽수빈의 눈이 밝게 빛났다.

“제자가 그럴 수 있으리라 보시는 겁니까?”

“아니.”

팽수빈의 눈빛이 가라앉고 어깨 또한 축 늘어졌다.

허나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완전히 뜯어고치진 못하더라도 네가 천하제이인이 되면 머리카락 몇 올만큼은 다듬을 수 있게 되겠지.”

“……!”

정광은 제자의 눈을 들여다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조급해하지 말되 최선을 다해. 이거 은근히 기대되네. 먼 훗날 네가 내 앞에서 자랑을 하면 꽤 재밌을 것 같거든.”

* * *

정광 일행은 달리고 또 달려 섬서성에 들어섰다.

청해성까지 최단 거리로 가는 중이라 성도(省都) 서안보다 훨씬 위쪽을 통해 감숙성으로 향했는데, 번화하지 않은 섬서성 북부에도 정파무림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무림인들이 지나가는군. 자네, 그 소식 들었나? 무림맹 원로들이 친히 나서서 곤륜파로 가고 있다 하네.”

“알다마다. 화산파와 종남파도 그들과 서안에서 만나 함께 떠났다지.”

“산동악가와 진주언가도 가고 있다 들었어. 감숙성에 이르면 공동파도 합류할걸?”

“거참. 안 그래도 천하가 뒤숭숭한데 무슨 생각으로 이 야단을 부리는지 원.”

“뻔하지 않나? 마교 놈들 때문이겠지.”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 정사대전(正邪大戰)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정마대전(正魔大戰)을 벌이냐는 말일세. 우리 같은 상인들에게까지 불똥이 튈까 봐 겁이 나서 이러는 것 아닌가?”

이렇게 큰 줄기를 보고 걱정하는 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개방 거지들이 사라지니까 속이 다 시원하군그래.”

“이거 혹시 땅값 오르는 거 아니야? 빚을 끌어서라도 좀 사둬야겠는데.”

“하여간 무림인들이란. 왜 맨날 치고받고 싸우는 거야?”

“그냥 포기하게. 제 목숨 귀한 줄도 모르고 서슬 퍼런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자들일세. 제정신으로 그게 되겠나?”

“하긴. 그야 그렇지.”

물론 정파무림을 응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무림맹에서 잔악한 마교 놈들을 토벌하러 가고 있는데 치성이라도 드리는 게 어떨까?”

“말로만 듣던 그 무서운 놈들을 멸하면 큰 우환이 하나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러는 게 좋겠어. 함께 해보세나.”

정광 일행은 말을 타고 달리며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었다.

팽수빈은 무공이 약해 제대로 듣진 못했으나 언뜻언뜻 들은 말에 상처받아 풀죽은 얼굴이 됐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정광이 헝클어뜨렸다.

“표정이 왜 그래? 응원하는 분들도 계신데.”

“……그래도 무림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분이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좀 무섭겠어? 수틀리면 칼부터 휘둘러서 피바다를 만들곤 하잖아.”

팽수빈의 얼굴이 더 어두워지자 정광이 머리를 살짝 두드렸다.

“또 이러네. 마음에 안 들면 네가 바꾸면 되지.”

“……네?”

“나는 권장하지 않는다만 협객이 되고 싶다며. 협을 행해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라고.”

“……!”

“바보처럼 퍼주지는 말고. 적당히, 아주 적당히 말이야. 그 정도는 허락해 줄게.”

혼란스러워하던 팽수빈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사부님. 반드시, 기필코 그러겠습니다.”

“적당히 하라니까. 소가주님, 얘 좀 말려주시죠.”

표정이 굳어 있던 팽강웅과 사람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수빈이가 나보다 낫구나.’

‘철이 없어서 저런다고 치부하면 안 돼.’

‘저렇게 어린아이도 마음을 굳혔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느끼는 것도 많고 고민할 것도 많은 여정이 계속됐다.

그렇게 이동하던 그들은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蘭州)에 이르렀다.

강대환이 말을 몰아 정광의 옆으로 다가왔다.

“진옥룡. 어디에서 묵을 생각이오?”

“글쎄요. 감숙성주님, 최근에 바뀌셨죠?”

“아니오. 그대로 계시오.”

“네? 공을 세웠는데도 중앙으로 못 가셨어요?”

“태상황께서 오이라트를 잘 막은 공을 치하하시며 더욱더 힘쓰라고 칙명을 내리셨었소만. 왜 그러시오?”

정광은 내심 웃었다.

‘그렇게 중앙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더니. 태상황에게 한 방 먹었네.’

이번엔 얼마나 벗겨 먹어볼까.

행선지가 정해졌다.

“감숙성주님께 신세를 지죠.”

“번거로운 일이 많이 생길 텐데 괜찮겠소?”

“귀한 분들이 계시잖아요. 가끔은 좋은 곳에서도 쉬셔야죠.”

틀린 말은 아닌지라 강대환도 납득했다.

“그럽시다.”

정광 일행은 곧바로 난주성(蘭州城)을 향해 갔다.

‘그대로네.’

정광이 다시 들른 난주성을 보며 옛 생각에 잠기는데…….

큰 전투를 치른 듯한 관군들이 반대편에서 오고 있었다.

‘저건?’

여기저기 찢어졌지만 그리운 글귀가 적힌 깃발들이 보였다.

깃발 밑에 있는 관군들의 얼굴도 익숙했고.

정광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건강히 잘 계셨죠?”

“……!”

잔뜩 지친 게 분명했던 관군들의 기세가 돌변했다.

뜨거운 군기(軍氣)가 넘실거렸다.

선두에서 말을 타고 있던 거대한 체구의 무장이 밤송이처럼 빳빳한 수염을 곤두세우며 한 손을 번쩍 들었다.

“전군!”

“하아!”

“돌격!”

“와아아아아!”

관군들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초라한 깃발들이 활짝 펴졌다.

[진충보국(盡忠報國)]

[황제폐하만세(皇帝陛下萬歲)]

[무림의용군(武林義勇軍)]

명을 내렸던 무장이 거대한 구환도(九環刀)를 붕붕 휘두르며 정광을 향해 외쳤다.

“진옥룡!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동시에 관군들이 한 맺힌 목소리로 저주를 퍼부었다.

“건강히 잘 계셨냐고오오오오?”

“빌어먹을 악귀 같으니이이이!”

“반드시 죽여 버린다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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