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94화
스스로 크는 습관
정광은 석가장(石家莊)을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이렇게 부산해?’
땅거미가 지는 어둑어둑한 저녁에 뭐가 그렇게 바쁜지.
다가가면 갈수록 많은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운이 진하게 느껴졌다.
거리가 더 가까워지자 정광과 함께 가던 일행도 석가장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모두의 눈에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이 시간에 뭘 하길래 저러지?’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놀란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화톳불을 밝혀놓고 정문을 지키고 있던 석가장 무인들은 많은 사람이 접근해오자 바짝 긴장했다.
무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절도있게 포권했다.
“석가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디에서 오신…… 헉!”
정광의 외모는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기에 대번에 눈에 띄었다.
그를 알아본 중년인이 커진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지, 진옥룡? 오랜만일세.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정광은 우아하게 예를 취했다.
“안녕하세요, 석 대협. 곤륜으로 가는 길에 잠시 신세 지려고 들렀어요. 괜찮죠?”
정광은 석가장의 은인.
중년인이 긴장을 풀고 밝게 웃었다.
“하하. 물론일세. 본장이 자네를 반기지 않으면 누구를 반기겠는가?”
“감사합니다.”
평정을 되찾은 중년인은 하북팽가사람들의 복색을 알아보고 정중히 인사를 나눴다.
문제는 짙은 주황색 관복을 입은 무장들과 화려한 사두마차 세 대였다.
‘저들은…….’
중년인은 그들을 슬쩍 본 뒤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보아하니 악명 높은 금의위 같군. 마차도 예사롭지 않은 것들이고. 안에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 겐가?
-네, 대협.
-허어. 관과 엮이면 좋을 게 없는데. 이를 어쩐다.
정광은 곤혹스러워하는 중년인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보장할게요.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믿어야지. 잠시만 기다리게나. 안에 소식을 전하겠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정광은 석가장 사람들에게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석가장주(石家莊主) 석우완은 정광의 어깨를 두드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왔는가?”
“안녕하세요, 장주님.”
“정사대전 이후 사라져서 걱정했었는데. 아주 큰일을 해냈다고 들었네. 역시 진옥룡이라 불릴 만해.”
“근데 뭐 하시는 거예요?”
정광이 의아해할 만큼 석가장 사람들은 사방에 불을 밝힌 채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여러 수레에 가득 쌓인 짐이며 병기며,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러 가는 듯한 같은 광경 아닌가?
석가장주는 가슴을 펴며 호탕하게 답했다.
“뭐 하는 거냐니. 곤륜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교 놈들과 싸우려고 준비 중이지.”
“네? 물자의 양이 보통이 아닌데. 이렇게 많이 가시려고요?”
석가장주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자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하지 않겠나. 보아하니 팽가도 본장과 같은 생각인 것 같은데. 마침 이렇게 만났겠다, 함께 가면 되겠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에서 사람이 왔었네. 황상의 명을 받들어 당분간 무림맹에 소속된 가문과 문파를 보호할 거라더군. 자네 솜씨지?”
“네.”
“그럴 줄 알았지. 장원이 털릴 일도 없겠다, 뭘 걱정하겠나? 이왕 싸울 거, 제대로 해보려 하네.”
정광이 활약하여 산서성에 들어왔던 사마련 무리를 별다른 피해 없이 쫓아낼 수 있었다.
정광이 산서성 전역을 돌며 도박장들을 털거나 영업정지시켰기에 산서성 노름꾼들은 갈 곳이 없어져 방황하다가 씨가 말라 버렸다.
석가장은 모든 의욕을 잃은 그들을 거둬 일을 주선해 주고 적절한 삯을 치렀다.
변화가 일어났다.
망종이라 손가락질받던 자들이 새사람으로 거듭나고 그들의 집안이 살아났다.
자연히 석가장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질 수밖에.
무력뿐만 아니라 인망까지 갖춘 산서성의 진정한 패자로 거듭났다.
또한 흐릿하던 협의가 또렷해져 실로 정파다운 기상을 지니게 됐고.
이 모든 것이 정광 덕분이거늘, 어찌 허투루 대하겠는가?
석가장주의 눈에 뜨거운 열기가 어렸다.
비슷한 열기가 담긴 시선들이 정광을 향해 쏟아졌다.
정광은 천천히 신형을 돌려 사방을 확인했다.
석가장 무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정광을 향해 포권하고 있었다.
석가장주가 그들을 대표해 심정을 표출했다.
“자네를 믿고 우리 자신을 믿네. 무림맹 또한 마찬가지고.”
“…….”
“모두가 힘을 합치면 마교는 물론이오,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아.”
“…….”
“이제껏 정파무림이 이렇게 하나로 뭉친 적이 있었나? 전혀 없었지. 모두 자네 덕일세. 그러니 함께 싸우세나. 잘 부탁하네.”
석가장 무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열기에 전염된 팽가 사람들까지 일제히 외쳤다.
“함께 싸우세나! 잘 부탁하네!”
“…….”
정광은 그들을 한동안 둘러봤다.
그간 해왔던 일들이 제대로 열매를 맺은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사람들에게 진지한 어조로 화답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와아아아아!”
“진옥룡! 진옥룡!”
의기가 들불처럼 타올라 터져 나온 뜨거운 함성이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얼음이 되어 바스러졌다.
“그런데 아직 저녁을 못 먹어서요. 벌써 드신 건 아니죠?”
* * *
정사대전을 치르기 전, 허청이 정광의 공적을 천하에 드러내며 육식과 음주를 허한 것은 유명한 얘깃거리였다.
덕분에 정광은 전에 들렀을 때와 달리, 도사라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고기와 술을 즐길 수 있었다.
석가장주는 정광의 옆에 나란히 앉아 식사하다가 기회를 봐서 전음을 보냈다.
-마차에서 내려서 방에 들어가 먹고 있는 이들은 모두 황족인가?
-네.
석가장주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금의위가 호위하기에 설마설마했거늘 정말이었군. 그냥 모르는 척하겠네.
존귀한 황족이 척박한 청해성에 좋은 일로 갈 리 있나.
이쪽에서 알은체해 봐야 불편해할 게 뻔하니 모르는 척 넘어가겠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오해하지 않게 은근슬쩍 잘 좀 말해주게나.
-네. 그렇게 할게요.
석가장주는 비밀스러운 얘기가 끝나자 술병을 들고 술을 권했다.
“자. 드세나.”
“네, 장주님.”
술잔이 몇 순배 돌았다.
다소 무거웠던 분위기가 점점 활기차게 변했다.
무림인치고 술을 싫어하는 자가 몇이나 될까?
금의위 무장들은 이미 밥만 먹고 방에 들어간 상태.
꺼림칙한 이들도 없겠다, 석가장 무인들과 하북팽가 사람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통성명을 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석가장주는 흐뭇한 얼굴로 그 광경을 구경하다가 알고 싶던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꽤 오래 있었다고 들었네. 깊은 일들은 얘기하지 말게나. 요즘 분위기가 궁금하네.”
“황태자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시고, 황태손 저하가 바로 넘겨받으셨어요.”
“으음. 대명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군. 앞으로도 그럴 테고. 하북성 북방의 전황은 어떤가? 무척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고 들었네만.”
“상황이 나쁜 편은 아니래요. 산서성 위쪽은 어때요?”
“달자(韃子)들의 군세가 하북성 쪽에 집중되어 있어서 그나마 낫다고 들었네. 오히려 감숙성(甘肅省)이 여기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라지 아마?”
“오이라트 때문에요?”
“바로 맞췄네. 거세게 압박하다가 어느 순간 치고 빠지는데 그 움직임이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아주 환장할 지경이라더군.”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청해성으로 가려면 섬서성을 지나 감숙성을 통과해야 하는데. 귀찮게 됐네요.”
석가장주가 손을 내저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아지고 있다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걸세.”
“황군이 충원되고 있나 봐요.”
“그렇기도 하고. 왜 있잖는가. 무림의용군(武林義勇軍). 자네가 개과천선 시킨 자들이라는 소문이 돌던데. 아닌가?”
“맞긴 한데. 그분들은 왜요?”
석가장주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하하하. 곧 약조한 기한이 끝난다고, 그때까지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며 날이 갈수록 용맹을 떨치고 있다 하네.”
“아…….”
정광은 무림의용군의 수장으로 삼은 황웅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짧으면 일 년, 길면 이 년입니까?’
‘응. 그 정도면 중앙에서도 책잡지 않을 거야. 의용군이 생겼었다는 게 중요하니까.’
‘다시 뵈면 무공 꼭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사부.’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황웅 무리가 아직도 살아서 싸우고 있다니.
열심히 잡아 두들겨 패며 감숙성까지 끌고 가 팔아먹은 보람이 있지 않은가.
‘기한이 끝나면 한 번 더 팔까?’
곰곰이 생각하는데 한쪽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사람들이 모여 누군가를 응원하고 있었다.
“쭉! 쭉! 쭉!”
“지면 안 돼! 가즈아!”
석가장의 한 거한이 불콰한 얼굴로 큰 술동이를 노려보다가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상태로 잠시 망설이던 그는 술동이 속에 가득 찬 술을 입속에 쏟아 넣었다.
콸콸콸콸-
“오오오!”
“다 됐어! 조금만 더!”
거한은 괴로운 표정으로 목젖을 쉼 없이 움직였다. 그렇게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거쳐 술동이 주둥이에 맺힌 술 방울마저 말끔히 털어 마신 뒤 포효했다.
“크하앗! 어떠냐!”
“우와아아아!”
“세 동이나 비우다니! 역시 두주불사(斗酒不辭)구나!”
거한의 주량은 원래부터 정평이 났는지 거센 환호가 일어났으나 그의 맞은편에 앉은 여인은 담담했다.
조용히 술동이를 들어 깨끗하게 들이켰다.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지켜보다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사람이 어떻게…….”
“……불취검(不醉劍)이라고 했나? 대체 누가 지은 별호인지. 아주 딱 들어맞잖아.”
힘겹게 술동이를 비웠던 거한은 망연한 눈으로 혜진을 바라봤다.
혜진은 그에게 평온한 음성으로 권했다.
“다시 석 대협 차례입니다. 드시지요.”
거한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결국 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패배를 인정했다.
“내가 졌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혜진이 싫어하는 별호를 연호했다.
“불취검! 불취검!”
“저 작은 체구로 이렇게 잘 마실 수 있다니!”
“사봉(四鳳)이 오봉(五鳳)으로 바뀌게 생겼구나!”
“올커니! 불취검을 주봉(酒鳳)으로 추대하세!”
자오도 그랬지만 혜진은 조간왕과 너무 닮았기에 아직도 역용을 한 상태.
그녀가 교봉인 걸 모르는 사람들은 신이 나서 외쳤다.
혜진이 그걸 좋아할 리 있나.
한마디 하려고 하는데 정광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마음이 좀 편해지셨어요? 내일 출발해야 하니 오늘은 여기서 끝내죠.”
“…….”
목숨을 걸고 싸우러 떠나기 전에 일부러 한껏 기분을 내봐서일까.
분위기가 삽시간에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정광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모두 수양이 높으시네요. 그럼 내일 봬요.”
“그러세.”
“잘 자시오.”
사람들은 분분히 인사를 건네고 흩어졌다.
석가장주도 적당한 때에 여흥을 끝내준 정광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떠났다.
정광은 남은 이들을 확인하다가 동방장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술 안 드셨어요?”
“당연하지. 밥도 안 먹었다.”
“왜요?”
“주군이 태원에 도착하면 영약을 준다고 했잖아.”
“아.”
“아? 아아? 설마 나를 놀린 거였냐?”
동방장이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자 정광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요. 받으세요.”
“어이쿠, 고마워라. 역시 주군이라니까.”
동방장은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단약을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레 받고 코를 킁킁거렸다.
“이상하네. 주군, 오해하지 말고 들어. 신진공묘유환 맞아? 냄새는 별다를 게 없는데…….”
“영약이 효과로 말하는 거지, 그깟 향이 대수인가요.”
“그, 그렇겠지?”
“물론이죠. 내키지 않으시면 반납하시고요.”
“아니. 아니. 좋아. 내일 보자고.”
동방장이 신법을 펼쳐 순식간에 사라졌다.
끝까지 남아 있던 자오와 혜진은 안쓰러운 눈으로 그가 가버린 방향을 주시했다.
“단주. 측간 근처에서 드시라고 말씀 안 하실 겁니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복용했다간 큰 참사가 일어날 텐데요.”
정광은 동방장을 높였다.
“경공술에 능하시니 어떻게든 되겠죠. 그보다 두 분도 오늘 드세요.”
두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시, 신진공묘유환을 또 먹으라는 말씀입니까?”
“저, 저희는 괜찮…….”
정광이 작게 웃었다.
“하하. 그거 말고요. 요녕성에서 나눠 드렸던 거 있죠? 나중에 제가 드시라고 말씀드리면 그때 드시라고 했던 거요.”
두 사람이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아! 수은망극단(受恩罔極丹)!”
“네, 그거요. 지금이 적기에요. 각자 방에 가서 드시고 운기조식하세요.”
자오는 영인문의 무공서를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혜진은 부동심에 이르진 못했으나 자신을 똑바로 보고 바로 세울 줄 알게 됐고.
술 몇 동이쯤이야 아무런 영향도 없을 터, 지금이 아니면 언제 먹는단 말인가.
“제가 도와드리면 약효를 쉽게 흡수하시겠지만 안 그럴 거예요. 하실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해보세요.”
언제까지 챙겨줄 순 없다는 얘기.
“모자란 건 나중에 채우면 되니까 조급해하지 마시고요.”
정광의 조언에 자오와 혜진은 정중히 두 손을 모았다.
“감사합니다, 단주.”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정광은 그들이 떠나자 발치에 은신해 있는 흑서에게 명했다.
-두 사람이 운기조식하는 동안 호법을 서. 혹시라도 잘못되면 멈춰주기만 하고.
-존명!
-배고프지? 식은 밥이라도 챙겨가서 먹지 그래.
-……교, 교주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흑서가 밥을 챙기고 사라졌다.
정광은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을 돌아봤다.
팽수빈이 의자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잘도 자네.’
피곤할 만도 했다.
각종 수련에 몰두하며 얼마나 힘들게 왔던가.
정광은 제자를 가볍게 안고 배정받은 방으로 가 침상에 눕혔다.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아플 텐데.’
추궁과혈을 해줄까 하다가 고개를 젓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스스로 크는 습관을 들여야 해.’
정광 자신도 그랬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 그랬기에 더 클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
소혜에게 심공에 대해 묻는 건 나중이다.
항마토납술(降魔吐納術)을 홀로 깊이 궁리해 봐야 했다.
‘이런. 깜빡할 뻔했네.’
몸이 허한지라 수은망극단을 한 알 삼키고 가부좌를 틀었다.
명상에 잠긴 정광의 육신이 은은한 빛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