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64화 (363/569)

2부 93화

앞으로도 똑바로 보시길

정광 일행은 자금성에서 출발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산서성에 접어들었다.

빠른 이동을 위해 말과 마차를 타고 달리는데 유람할 시간이 있을 리 있나.

좋은 일로 가는 것도 아닌지라 분위기도 무거운 편이었다.

특히 동방장은 더했다.

가는 내내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한숨만 푹푹 쉬는 모습이라니.

그가 그러든 말든 관심조차 가지지 않던 정광이 갑자기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친구인 개는 없고 사람만 있어서 외로우신 거구나.”

“…….”

뭐가 어째?

“너무 침울해 보이시네. 몇 마리 훔쳐서 말벗이라도 하시죠.”

동방장은 참지 못하고 대꾸했다.

“개가 없는 게 아니라 네가 있어서 그런 거다. 마교 놈들과 싸우겠다니. 날 죽일 셈이냐?”

“천하의 낭인 중에서 손꼽히는 분이 왜 이러실까. 싸우는 게 좋아서 낭인으로 살아오셨으면서.”

“낭인은 보수라도 받지. 그 미친놈들이랑 내가 왜 싸워야 하는데? 주군을 잘못 모신 죄로?”

“네.”

“……후우우. 내가 진짜 말을 말아야지.”

동방장은 입을 꾹 다문 채 말을 몰았다.

정광이 피식 웃으며 그를 달랬다.

“태원(太原)에 가면 영약 하나 드릴 테니 힘내세요.”

“……!”

동방장은 귀를 개처럼 쫑긋거리며 눈을 떴다.

“여, 영약을 준다고?”

“네. 제가 영약깨나 빚거든요. 소문 들으셨죠?”

듣다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 천인공노할 악귀에게 무슨 놈의 재능이 그리도 많은지.

영약을 만드는 재주도 천하일품!

그것을 준다고 하자 분노가 싹 달아나 버렸다.

‘안 그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결렸는데 이런 행운이 있나!’

영약은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대로 된 영약은 더더욱 그랬고.

‘가만. 이놈이 그럴 리가 없는데.’

승천하던 입꼬리가 싸늘하게 굳었다.

‘벽곡단 같은 거 하나 던져 주고 사기 치려는 거 아냐?’

동방장은 수많은 전장에서 무수한 음모와 맞닥뜨리면서도 살아남은 역전의 고수!

정광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최대한 돌려서 물었다.

“역시 주군이라니까. 천하에 수하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주는 주군이 어딨어. 어떤 효능이 있는 것인지 무척 궁금해지네.”

“드시면 알 거예요.”

“……하하. 너무 궁금해서 말이야. 조금만 알려주면 안 될까? 응?”

정광이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동방장님께 필요한 건 내공의 양이 아니라 질이에요. 토양을 깨끗하게 하고 정순함을 높여야 한다는 말이죠.”

동방장의 나이를 보나 경지를 보나 확실히 그렇긴 했다.

“그, 그렇지. 영약 이름은?”

“신진공묘유환(新眞空妙有丸). 전에 만들었던 진공묘유환을 개량시킨 거예요.”

동방장은 학문이 짧아 그 뜻을 헤아리진 못했으나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개량형이라지 않는가.

“크으. 좋은 뜻이군. 아주 좋은 뜻이야. 근데, 좀 쉽게 풀이해 주면 안 될까?”

“진공(眞空)은 참된 이치의 근본이오, 묘유(妙有)는 신묘한 운행을 나타내죠. 참되게 비움으로써 오묘함을 얻는다. 그런 영약이에요.”

그래, 영약이라면 이런 먹물 냄새 물씬 풍기는 이치쯤은 담겨 있어야지!

의욕이 활활 솟았다.

“드디어 더러운 마교 종자들을 멸할 기회가 왔구나! 걱정하지 마라, 주군. 내가 한 손 거드마.”

정광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더러운 마교 종자가 뭐가 어째?

신진공묘유환을 아예 두 개를 먹여서 온몸의 수분을 모조리 빼게 해줄까?

정광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동방장은 안절부절못했다.

‘이놈이 또 왜 이러지? 하여간 변덕스럽기는.’

개처럼 꼬리를 살살 흔들며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동방장은 사람에 가까웠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쥐어짜는데. 황족들을 호위하는 무장들의 우두머리가 정광에게 말을 몰아 다가왔다.

금의위 천호 강대환이었다.

“진옥룡. 마음이 급한 건 이해하나 너무 빨리 가고 있소. 오늘 안에 태원에 도착하려는 것이오?”

“네.”

“우리야 괜찮지만 무공을 모르시는 데다 건강도 안 좋으신 영평공주께선 얼마나 힘드시겠소.”

정광은 시선을 슬쩍 돌려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사두마차들 중 한 대를 확인했다.

“조금 힘들어하시긴 하네요.”

“그러니 조금만 속도를 늦춥시다.”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태원에 도착하면 내공으로 돌봐드릴 테니까요.”

강대환은 어이없는 눈으로 정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무슨. 더 걱정하게 되지 않는가.

그래도 따지지는 않았다.

일행의 수장은 정광이었고 정광은 정말 그럴 능력이 있는 자였다.

“알겠소. 그렇게 합시다. 산서성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에서 묵을 것이오?”

“관부에 가면 시끄러워질 게 뻔하니 그건 별로네요.”

한왕이나 조간왕이나 숙청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신세였지만 황족은 황족이었다. 더구나 영평공주까지 있었으니 대명의 관리가 얼마나 호들갑을 떨며 맞이할지 안 봐도 뻔하다는 얘기였다.

강대환도 인정했다.

“조용하고 안전한 곳이 있소이까?”

“네. 석가장(石家莊)요.”

“육방칠단삼장(六幇七團三莊)에서 삼장에 속한 산서제일장을 말하는 것이구려.”

“괜찮죠?”

강대환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대가 수장이고 안전을 보장했으니 아무런 불만도 없소.”

“무림에 편견이 있으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강대환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있었소. 많이 희석됐지만 지금도 있고. 그대 덕분에 이 정도나마 된 것이오.”

“하하. 황상께서 강 천호님을 선택하셔서 다행이에요. 다른 분이었으면 설득하느라 얼마나 피곤했을까.”

“자원한 것이외다.”

“네? 왜요? 청해성에 뭐 볼 게 있다고.”

“전에 그대가 말하지 않았소? 땅은 척박하나, 하늘과 사람은 좋은 곳이라고.”

“그건 그렇죠.”

“그 말을 들으니 자금성이 답답하게 느껴졌소.”

강대환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지셨다는 얘기네요.”

“개방 분타주가 그러더이다. 답답할 때 좋은 곳에 가서 잠시 바람이라도 쐬면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아예 관복을 벗으시죠.”

강대환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내려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소. 진충보국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속물이기 때문이오.”

“아. 그렇다면 현명한 판단을 하신 거네요. 잠시 쉬시다가 다시 열심히 달리세요.”

강대환이 정광을 힐끔 봤다.

“비난할 줄 알았는데 의외구려.”

“제가 왜 강 천호님을 비난해요?”

“여느 무림인들처럼 권력을 탐하는 소인배나 관부의 개라고 탓할 줄 알았소이다.

“적성에 맞고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거지 무슨. 그럼 무림인은 무림의 개겠네요.”

강대환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하하. 재밌는 표현이군. 나중에 한 번 써먹어야겠소.”

“저한텐 하지 마시고요.”

“안심하시오. 스승에게 배운 걸 어찌 스승에게 쓰겠소?”

강대환은 빙그레 웃다가 정광의 옆에서 걷는 말의 기수를 보고 중얼거렸다.

“팽 소저는 좋은 스승을 만나 다행이군.”

팽수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눈을 꼭 감은 채 정광이 시킨 수련에 열중하느라 듣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 그녀를 강대환이 언급하자 정광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팽수빈의 어깨를 두드렸다.

“명상은 여기까지. 내가 느껴보라 했지? 뭐가 떠올랐어?”

팽수빈이 눈을 뜨며 부끄러운 얼굴로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눈을 감으니 울렁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느꼈네.”

“……네?”

“말 위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속이 안 좋아지는 게 당연하잖아.”

정광은 어리둥절해 하는 팽수빈에게 찬찬히 설명했다.

“눈을 감으면 평형감각이 무뎌져. 시각이 차단돼서지. 지금은 어때? 울렁거리는 느낌이 사라졌지?”

“그렇습니다.”

“네 눈이 많은 것을 보고 있고 그에 맞춰 몸이 자연스레 반응해서야. 지면의 상태가 어떤지 말이 어떻게 걸음을 내디디는지 아니까 본능적으로, 또는 익혀왔던 대로 적합한 자세를 취해 무게중심을 조절하는 것이지.”

“아!”

“자. 여기서 문제. 눈을 감고도 속이 괜찮아지려면 어떡해야 할까?”

팽수빈이 이맛살을 좁히며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부님. 하나는 알고 하나는 모르겠습니다.”

“아는 것만 말해봐.”

“말의 움직임이 변할 때마다 전해져오는 느낌과 그에 맞는 제 자세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을 때, 그 느낌에 따라 자세를 취합니다.”

정광은 흐뭇한 얼굴로 팽수빈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역시 내 제자네.”

팽수빈이 환하게 웃다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을 때 지형이 갑자기 크게 변하면 어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수준으론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허리 세우고 가슴 펴.”

팽수빈은 정광의 명을 따랐다.

“네. 사부님.”

“내가 원하는 건 네가 항상 의문을 느끼고 그에 맞는 답을 궁리하는 거야. 네 사고가 넓어질수록 네가 오를 수 있는 하늘도 높아질 테니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허투루 흘리지 마.”

팽수빈이 눈을 빛내며 힘차게 답했다.

“네!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귀 따갑다. 그리고 이거.”

정광은 품속에서 작은 장갑을 꺼내 내밀었다.

“가져. 아예 지금 끼는 게 낫겠다.”

팽수빈은 얼결에 받은 뒤 손에 꼈다.

장갑이 작아서 괜찮을까 걱정했지만 티끌만큼의 무리도 없이 손이 들어갔다.

‘무엇으로 만든 것이길래…….’

투명한 데다 이렇게 부드럽고 편할 수 있나.

“사부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천잠사(天蠶絲)로 만든 장갑.”

정광이 팽수빈에게 내리는 가르침을 들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주변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처, 천잠사?’

‘그 귀물로 만든 장갑이라고?’

‘그런 걸 저런 어린아이에게 주다니!’

‘대체 어디에서 구한 걸까?’

팽수빈도 놀랐다.

“이, 이런 귀한 것을 어찌 제자에게…….”

“제자니까 주지.”

“……!”

“이름을 지어야겠네. 좋아. 수빈수갑(秀彬手甲)으로 하자.”

정광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이 뺏을 생각 못 하겠죠? 수빈이 것이니까요.”

동방장이 진저리를 쳤다.

“천하에 누가 있어 그걸 빼앗을까. 주군의 제자 것이잖아. 상상만 해도 으스스하네.”

다른 이들도 격하게 동의했다.

‘차라리 입에 칼을 물고 엎어져 죽는 게 낫지.’

‘모르는 놈이 탐하다가 무림에 피바람이 불게 될지도 몰라. 빨리 소문을 내야겠군.’

팽수빈은 영특했기에 정광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준 이유를 알아챘다.

“사부님!”

“어? 왜 네 말을 두고 내 말로 건너와?”

“정말 감사합니다!”

정광은 대견하다는 듯 칭찬했다.

“너도 물욕이 많구나. 그래. 없는 것보단 낫지.”

그래서가 아니었다.

정광이 선물을 주고 추후의 안전까지 고려해 안배하는 모습에 감격해서였다.

“사부님. 저는…….”

“응. 권이 아니라 검을 쓰지. 그거, 검법을 펼치기도 좋은 수갑이거든. 검에 신경 쓰느라 바빠 한동안 권각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할 것 같아서 주는 거야. 그것에 의지하지 말란 뜻이다. 이해했지?”

팽수빈은 더 감격했다.

“네!”

“힘이 넘치네. 명상은 할 만큼 했고. 말에서 내려서 뛰어.”

“알겠습니다!”

팽수빈은 정광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보법을 밟으며 전진했다.

그때까지 조용히 지켜보던 팽강웅이 정광에게 다가가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뭘요. 제 제자인데.”

“그래서 더 고맙다는 얘기야.”

팽강웅은 팽수빈을 힐끗 본 뒤 말을 이었다.

“아까 자네가 말한 명상 수련법 말일세. 곤륜에선 그렇게 가르치나? 자네가 이렇게 강해진 것도 그래서고?”

“아뇨. 제가 고안한 건데요.”

“대단하군.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걸 넘어 해내기까지 하다니. 솔깃한 이론이지만 그걸 해낼 이가 몇이나 될까? 고금제일천재라는 평이 허언이 아니야.”

정광은 내심 웃었다.

반만 맞는 얘기여서였다.

끝없이 궁리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이용해 적을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전생을 팽강웅이 어찌 알까?

‘뭐 그건 그거고.’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말달려 오고 있었다.

자오가 금의위 백부장 한 명과 함께 괜찮은 반점을 알아내 온 것이다.

“단주. 백리만 가면 됩니다.”

“딱 좋은 거리네요. 모두 가죠!”

며칠 안 됐지만 자오가 일행을 실망시킨 적이 있었던가?

모두 두 눈을 번뜩이며 말을 재촉했고 팽수빈도 땀방울을 흘리며 신법을 펼쳤다.

그리고 잠시 뒤.

그들은 고급스러운 반점에 들어가 식사부터 즐겼다.

마차에서 나온 황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정광은 그들을 둘러보며 요리를 우물거렸다.

‘한왕은 아직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네.’

얌전히 지내고 있었으나 눈에서 간간이 의지가 드러났다.

‘영평공주는 모든 걸 뒤로하고 비구니라도 될 기세고.’

그녀는 오랫동안 꿈꿔온 대업이 물거품이 되고 명교주까지 죽어버렸다는 걸 알게 되자 엄청난 실의에 빠졌다.

‘소혜는 안색이 조금 창백하지만 큰 문제는 없고. 조간왕은 왜 이리 담담해?’

마치 득도한 도사 같은 표정 아닌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궁금해져 호위를 핑계로 그와 같은 마차를 타고 온 혜진에게 물었다.

-소저. 조간왕 저하의 심정에 무슨 변화라도 있었어요?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다른 삶을 살아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생각보다 마음을 잘 다스리시네요. 부전여전인가? 소저의 눈빛도 한결 또렷해졌어요. 원하시던 부동심에 한발 다가가신 것 같은데요.

-부동심은 모르겠지만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똑바로 바라볼 줄은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조간왕 전하께서 살기를 원하셨고 그게 이뤄졌으니 평온해지신 거군요.

-그렇습니다, 단주.

-하하. 앞으로도 똑바로 보시길 빌게요.

혜진은 정광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다짐했다.

-꼭 그러겠습니다.

정광은 순간 섬찟해지는 기분에 의아해하다가 요리에 집중했다.

‘자객이 있는 건 아닌데. 몸이 허해졌나?’

목적지에 이르면 영약이라도 하나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자. 해지기 전에 빨리 가죠.”

배를 채운 그들은 태원을 향해 달려 석가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선 의외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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