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91화
적성
황궁무고는 자금성의 정전(正殿)인 봉천전 서편에 위치한 무루(武樓)에 있었다.
금의위 지휘사는 정광을 그곳까지 안내하고 신신당부했다.
“태상황께서 네게 하사하신 건 세 가지다. 세 가지만 가지고 나올 수 있다는 걸 명심해라.”
“물론이죠.”
정광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들고 나가는 것은 제한이 있다 해도 머릿속에 넣고 나갈 수 있는 건 무한하지 않은가.
쓸 만한 무공이 있으면 모조리 외우고 나올 심산이었다.
“그럼 이따 봬요.”
지하로 통하는 두꺼운 철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훅 하고 올라왔다.
계단 벽면에 박힌 야명주들이 뿌리는 은은한 빛을 받으며 내려가는데.
금의위 지휘사가 낮게 중얼거렸다.
“설마 외관에 현혹되는 소인배는 아니겠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철문이 굳게 닫혔다.
정광은 발걸음을 옮기며 피식 웃었다.
‘아닌 척하면서 챙겨주기는.’
이제껏 황궁무고에 들어온 사람의 수가 아주 적진 않을 터.
겉모습이 훌륭한 병기나 물품 중 정말 좋은 것은 상당량 가져갔을 테니 내실을 살펴 숨겨진 보물을 고르라는 충고였다.
‘어디 한번 볼까.’
계단이 끝나자 꽤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서책이 빽빽하게 꽂힌 서가와 갖가지 것들로 채워진 선반.
무공이 부족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우선 선반부터 살폈다.
‘검, 도, 창, 편, 곤…… 생각보다 더 괜찮은데.’
종류와 수량이 많은 건 물론이오, 하나같이 명품이라 불릴 만한 것들뿐 아닌가?
허나 정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미련 없이 지나쳤다.
‘병기와 보의는 별로 아쉬울 게 없어. 다른 건 없나?’
운룡, 소운룡, 비룡, 철혈무쌍용갑은 명품 중의 명품. 게다가 이미 손과 몸에 익을 대로 익었겠다, 정광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것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만한 물품이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고개를 저으며 선반을 몇 개나 지나쳤을까.
계속 걷던 정광이 우뚝 멈췄다.
어린아이의 손보다 작고 투명한 장갑 한 쌍이 눈에 띄어서였다.
‘이 빛깔은…… 천잠사(天蠶絲)로 만든 것 같은데.’
하나 집어 들어 만져보니 전생에 경험했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역시. 나찰신녀(羅刹神女)가 쓰던 것과 비슷해.’
양손으로 당기자 쭉 늘어났다.
내공을 일으켜 잡아당겨도 그대로 늘어나기만 할 뿐, 끊어질 기색이 전혀 없었다.
‘놓으면?’
힘을 풀자 바로 원래의 크기로 수축됐다.
‘탄력은 괜찮고.’
장갑을 왼손에 꼈다.
정광의 큰 손이 무리 없이 들어갔을뿐더러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봐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강도도 큰 문제는 없겠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 선반에 있던 도를 쥐고 왼손에 내려쳤다.
쩡-
도가 장갑을 강타하자마자 위로 솟구쳤다.
너무 얇고 투명해서 맨손인 것처럼 보이는 장갑에는 미세한 흠집조차 나지 않아 있었다.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쓸 만한 녀석이야.’
나찰신녀가 쓰던 것보다 다소 부족했으나 나은 점도 있지 않은가.
손등 부분은 부드럽기 그지없었으나 손바닥 쪽은 병기를 쥐어도 미끄러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마감되어 있었다.
권사만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 얘기.
‘하지만 거기까지지.’
정광에겐 크게 유용한 병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럴 리가 있나.
마침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수빈이한테 주면 되겠네.’
다른 아이였다면 기물(奇物)에 의지하는 버릇이 들지도 몰라 이런 생각 자체를 안 했겠지만 수빈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었다.
‘검만 파기도 바빠 권장지각(拳掌指脚)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있으면 한결 낫겠지. 훗날 경지에 오르면 다른 이에게 물려주면 되고.’
정광은 장갑을 품속에 넣고 두 눈을 번뜩였다.
‘또 쓸 만한 게 나오려나.’
안타깝게도 정광의 눈은 너무 높았다.
요기(妖氣)와 마기(魔氣)가 담긴 병기들에 서역(西域)의 갑옷과 피독주(避毒珠) 같은 보물까지. 있을 만한 것은 다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건 하나도 없었다.
‘영약도 없고. 하긴. 황제와 황태자가 다 먹어치웠겠지.’
툴툴거리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선반에 이르렀다.
겨우 한 개만 챙기고 나가야 하는가 싶어 혀를 차는데…….
이상하게 눈길이 가는 것이 있었다.
이척(二尺)도 안 되는 길이의 새카만 죽적(竹笛)이었다.
‘뭐야 이건?’
손에 쥐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광은 이리저리 돌려가며 면밀하게 살펴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한쪽 끝에 ‘마적(魔笛)’이라는 두 글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기는 안 느껴지는데 마적이라.’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이름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험 삼아 마혼(魔魂)을 개방했다.
그중 일부를 밀어 넣자 마적의 시커먼 표면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럼 그렇지. 마기를 주입하면 반응하는 기물인가.’
오랜만에 한 곡조 뽑고 싶은 흥취가 일었다.
시서화(詩書畵)는 살짝 부족하지만 음(音)만큼은 장기 중 하나 아니었던가.
음이라기보단 음공(音功)인 데다 마공이어서 문제였지만.
‘가볍게 한 소절만 불어볼까.’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우아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전생에 작곡한 마라팔곡(魔羅八曲) 중 일 곡을 불었다.
큰 싸움을 하기 전, 수하들을 독려하기 위해 진영 뒤쪽에서 불곤 했던 마기충천(魔氣衝天)!
끼이이이아악-
마혼이 마적에 흘러 들어가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을 발했다.
소음은 순식간에 황궁무고를 휩쓸었다. 요기나 마기가 담겨 있던 병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르르 떨며 비명을 토했다.
심지어 정광의 품속에 있던 역천경까지!
-우웅! 우웅!
정광이 피식 웃었다.
-녀석. 신나기는.
-…….
뭐가 어째?
그 반대란 말이다!
역천경은 더 거세게 진동했다.
-우웅! 우웅!
정광은 품속에서 역천경을 꺼내 가만히 노려봤다.
-솔직히 말해봐. 마음에 든다는 뜻이지?
-…….
역천경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웅.
-진작 그러지. 하여간 약해빠져서는. 이 정도로 울어대면 어떡해? 이래서야 언제 밥값을 하려고.
-……!
밥값이라니!
밥이라도 줘놓고 그런 말을 지껄이면 억울하지나 않지!
동남동녀(童男童女)의 피는커녕 땅바닥에 말라붙은 돼지 핏자국에 박박 문지르고, 요기와 사기를 몇 번 뜯어 삼키게 했던 게 전부면서 뭐가 어째?
네 이놈!
네놈 때문에 힘을 키우는 건 고사하고 나날이 약해져 가고 있단 말이다!
이렇게 꾸짖으면 후련할 텐데.
역천경은 말을 할 줄 몰랐다.
살의를 억누르느라 몸을 가늘게 떠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정도가 있지.
정광이라는 악귀가 죽을 때까지 백 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반기를 들려고 하는 순간!
정광의 의념이 전해져 왔다.
-가만. 그러고 보니 밥을 한동안 안 먹였네. 돼지 피라도 한 번 더 줄까.
-…….
세상에 이런 놈이 있나.
화낼 힘조차 사라졌다.
그저 서러울 뿐이었다.
-아니지. 그냥 여기에 있는 기운들을 먹이는 게 더 편하잖아. 너도 그게 좋지?
-……!
좋다마다!
배가 고파 죽을 판이었다. 저런 혼탁한 것들을 먹었다간 속이 안 좋아질 게 뻔하지만 돼지 피보다야 백배 낫지 않은가!
-웅! 웅! 웅!
-좋아. 기분이다. 남김없이 먹어치워.
정광은 요병과 마병을 모아놓은 선반에 역천경을 던져놓고 돌아섰다.
그의 입가엔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적이라 할 만해. 마혼을 많이 불어 넣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크게 증폭시키다니.’
중원에서와 달리 보는 눈이 거의 없을 신강(新疆)에서 다수와 싸울 때 쓰기 딱 좋았다.
그냥 손으로 쥐고 단봉처럼 사용해도 될 만큼 단단했고.
마적을 요대에 찔러 넣고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이제 무공서를 볼까.’
서가를 둘러본 지 얼마 안 돼 발걸음을 멈췄다.
‘천왕삼권(天王三拳)? 이게 여기에 있었네.’
오래전 무림칠대세가에 꼽힐 만큼 강한 세력을 떨쳤으나 원(元)에 밉보여 멸문당했다는 황보세가의 무공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왕보(天王步)도 있고. 웬만한 건 다 있어.’
대명(大明)의 역사는 길지 않으니 원을 몰아내고 그들이 갖고 있던 것들을 얻은 것이리라.
‘구파일방과 다른 칠대세가의 것들도 있으려나.’
드문드문 보였다.
하나같이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은 것을 보니 원이 빼앗았거나 그 이전의 황조에서 전해져 온 것이 분명했다.
‘곤륜 무공은 없네. 깡촌까지 찾아와 털어갈 만큼 성실한 도적은 없어서 그런 건가.’
정광이라도 그럴 터.
실전됐다고 알려진 구파일방과 칠대세가의 무공들은 전부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이해할 필요 없이 암기만 하면 됐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좋아. 이 정도면 되겠지.’
수가 좀 적은 감이 있지만 이것들을 돌려준다고 하면 누가 가만히 있을까?
정파무림의 거두들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고도 남았다.
‘다음 서가로 가자.’
본인이 쓸 만한 무공도 있으면 좋으련만.
눈부신 속도로 책장을 넘기며 샅샅이 들여다봐도 전부 고만고만했다.
황궁무고의 수준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정파무림의 정수라는 무공들을 보고도 욕심이 안 나는데 눈에 차는 게 있겠는가.
사공과 마공 쪽도 마찬가지였다.
명교의 무공 중 독특한 것들이 몇 개 눈에 띄었으나 구미가 당길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끝인가.’
정광은 마지막 서가 앞에 서서 인상을 찡그렸다.
죽간(竹簡)과 목간(木簡)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조양사 비밀 서고에서 봤던 광경 같잖아.’
양은 이곳이 훨씬 많았으나 풍경은 비슷했다.
‘황궁무고답게 뭐라도 좀 있어라.’
하도 오래 묵어 상태가 안 좋은 죽간과 목간을 훑는데…….
과연 황궁무고.
눈에 익은 글자가 보였다.
‘항마토납술(降魔吐納術)! 이게 여기에도 있을 줄이야!’
해진 끈으로 엮여 말린 죽간을 신중하게 펼쳤다.
익숙한 그림과 문장이 천천히 드러났다.
정광의 눈이 빛났다.
이것 역시 훼손된 부분이 있었으나 전에 얻은 것보단 나은 편이었다.
‘둘을 합치면 상당 부분이 채워지겠는데.’
다행히 실제로도 그랬다.
정광은 죽간을 모두 확인하고 빙그레 웃었다.
‘상당 부분이 아니라 거의 다 채워졌어. 알 수 없는 부분은 이 개소리들을 궁리하다 보면 유추할 수 있게 되겠지.’
전의 것은 죽간에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몰라 챙겼지만 이번 것은 그럴 필요 없었다.
‘재질도 형태도 똑같아. 내용만 있으면 돼.’
머릿속에 넣을 건 다 넣었고.
직접 가져가야 할 것들도 전부 정했…….
‘아. 두 개밖에 안 챙겼구나. 뭘 또 가져갈까?’
그다지 끌리는 게 없었지만 뭐라도 챙겨야 했다.
‘아. 그거.’
역천경을 던져놨던 선반으로 돌아갔다.
녀석은 그새 병기들에 담겨 있던 요기와 마기를 전부 먹어치우고 음침한 빛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이게 미쳤나. 흉악하게 뭐 하는 짓이야.
정광은 새로 얻은 마적을 뽑아 힘차게 내려쳤다.
까앙!
-우우우우웅!
역천경이 크게 진동하며 정광을 향해 빛을 쏘아냈다.
요기와 마기가 응축된 살벌한 기운이었으나 마혼을 품은 정광에겐 따사로운 햇볕만도 못했다.
-배가 부르니까 위아래도 몰라보네. 내가 소화시켜 주마.
정광은 역천경을 패고 패고 또 팼다.
오랜만에 배를 채워 잠시 이성을 잃었던 역천경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항복했다.
-우웅! 우웅! 우웅!
-시끄러우니까 얌전히 있어.
-……웅.
정광은 역천경을 회수하고 선반에 있는 병기들 중에서 장검 하나를 꺼냈다.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검파(劍把)와 담담한 빛을 발하는 검신이 인상적인 명검이었다.
‘요기가 사라지니까 제법 그럴듯하게 됐네. 사부와 잘 어울리겠어. 사조 것도 하나 챙겨야 하나?’
정광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선단을 만드느라 그 고생을 했는데 무슨.’
곤륜에 들르는 김에 진맥이나 한 번 하면 되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상태가 안 좋아졌으면 뭐라도 좀 해주고.
갑자기 운후의 품에 안겨 구경했던 허청의 검무와 곤륜산의 정경이 떠올랐다.
‘그만 가자.’
계단을 올라가 철문을 두드렸다.
세상과 통하는, 곤륜까지 이어질 문이 열렸다.
* * *
정광은 바쁘게 움직였다.
우선 황제가 된 황태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황제 폐하 만세만세만만세. 저 그만 갈게요.”
만세는 개뿔.
황제가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이렇게 느닷없이 말인가?”
말투가 바뀌었지만 정광도 황제도 신경 쓰지 않았다.
황태손과 황제의 위치는 천지 차이. 이러는 게 서로에게 좋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렇다고 그간의 정이 희석될 리 있나.
정광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솔직히 대답했다.
“태상황과 상황께서 귀천하시기 전에 빨리 가려고요.”
“……왜 굳이?”
“늦으면 잡혀서 제(祭)를 지내야 하잖아요. 제가 비록 도사지만 제는 영 적성에 안 맞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