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61화 (360/569)

2부 90화

문을 열다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특정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결국 실패해 버리면 크나큰 분노를 느끼게 된다.

충분히 승산이 있었는데도 압도적인 힘을 지닌 자가 나타나 모든 걸 망쳐 버리면 분노를 넘어 허탈감에 빠져 버리고.

그쯤 되면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고 싶어지기 마련.

모반에 가담한 죄로 극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조간왕과 영평공주는, 정광이 살길을 열어주자 받아들였다.

‘이제 황태손 차례네.’

정광은 건청궁에서 나와 단본궁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들어가 보니 황태손이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하. 폐하를 뵈러 가시려고요?”

“그렇소만. 무슨 일이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황태손은 가볍지 않은 얘기란 걸 눈치채고 환관들을 내보냈다.

“시간이 많진 않아 오래 있을 수는 없소.”

“긴 얘기는 아니에요. 전에 한왕 전하와 조간왕 전하께 정을 베풀 거라 하셨는데 어디로 보내실지는 정하셨나요?”

황태손이 이맛살을 모았다.

“이곳저곳 떠올려 봤는데 적당한 곳이 없어 생각 중이외다.”

“제가 추천해 드릴까요?”

“허어. 어느 곳인지보다 그대가 추천하려는 이유가 궁금하구려.”

“제게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황태손이 작게 웃었다.

“하하. 그렇다면 서로 좋은 일이지. 어디길래 그러오?”

“청해성요.”

의외의 말에 황태손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대의 사문이 있는 곳이군. 사정이 좋지 않은 친왕들께서 그곳에 가신다고 그대에게 이득이 되지는 않을 것 같소만.”

“아뇨. 돼요.”

정광은 이유를 설명했다.

“천마신교는 명교가 일부러 흘린 흔적을 쫓아 청해성으로 올 거예요. 가짜 비밀 분타를 찾아내면 거기 남겨진 서류를 보고 중원에 들어올 거고요. 배교자를 처단하는 것이니 최선을 다하겠죠.”

“그래서 그대와 무림맹이 청해성으로 갈 것이라 했지.”

“네. 곤륜과 무림맹은 청해성에서 천마신교와 싸우게 될 거예요. 싸우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큰 문제가 있죠.”

“백성들이 피해를 입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오?”

“물론이죠. 특히 청해성의 성도(省都)인 서녕(西寧)이 위험해요. 제가 명교주라면 그곳에 가짜 분타를 세웠을걸요.”

“그렇겠지. 명교는 대명을 흔들려고 그런 일을 꾸몄으니 그랬을 확률이 높소.”

“설령 아니라 하더라도 서녕에는 중원으로 통하는 넓은 관도가 뚫려 있죠. 어떤 식으로든 그곳 백성들은 화를 당할 게 뻔해요.”

황태손의 눈이 빛났다.

“가만. 혹시 한왕 전하와 조간왕 전하를 그곳에?”

“역시 저하시네요. 그분들의 거처를 서녕에 만들어 드리면 천마신교가 함부로 치지는 못할 거예요. 생사결을 벌이자고 시비를 거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황족이 죽으면 황제가 체면 때문에라도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천마신교가 아무리 미친놈들이어도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었다.

“으음. 일리가 있소. 설령 마교가 공격한다 해도…… 솔직히 말하리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오.”

언젠가 황권을 위협하게 될지도 모를 숙부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죽이지 않고 변경으로 보내는 것만 해도 질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 아닌가?

“어느 정도 이해했소이다. 대도시인 서녕에서 싸움이 나는 것을 막으면 곤륜과 무림맹이 마교를 상대하기 편해진다는 얘기 아니오?”

“네. 무공을 모르는 분들을 지켜야 한다고 동분서주하다가 죽는 일은 많이 줄어들겠죠.”

황태손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멈췄다.

“가만. 곤륜을 위해서라면 한왕 전하와 조간왕 전하를 곤륜산에 모시는 게 나을 텐데?”

“그분들이 천년만년 사실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무엇보다 곤륜은 무림 문파인지라 싸움을 피하면 안 돼요. 맞서 싸워서 이겨야죠.”

“차라리 피를 흘리면 흘렸지, 얕보이면 안 된다는 말이구려.”

“네. 어떠세요? 그렇게 해주시면 청해성주도 관군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쓸 수 있게 될 거예요. 물론 힘을 더 실어주셔야겠지만요. 괜찮은 방안이죠?”

“…….”

괜찮다마다.

황태손은 청해성주를 떠올렸다.

‘권력다툼에서 삐끗해 밀려났으나 능력 있는 위인이지. 금의위 지휘사와 같은 통주연가(通州燕家) 사람이니 가문도 믿을 만하고.’

그래서 황제가 그를 성주로 삼은 것이었다.

‘더구나 청해성 출신의 여인과 혼인한 뒤론 권력욕도 버렸다지?’

청해성을 목숨 걸고 지킬 적임자로 그만한 이가 있을 리 있나.

그런 자를 키우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래도 무턱대고 힘을 줄 순 없지. 감시할 사람을 붙여놔야 해. 금의위 무장 중에서 적당한 자를 찾아봐야겠군.’

황태손은 정광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합시다. 좋은 방안을 마련해 줘서 고맙소.”

“뭘요.”

“황상께서도 만족하실 것이오. 그대가 건의한 것이라고 솔직히 말씀드리고 관철해 내고야 말겠소.”

황태손은 황제를 알현하러 떠났다.

정광은 홀로 앉아 차를 홀짝이며 영평공주를 떠올렸다.

‘자객이 황궁에 숨어들어 황제를 시해하려 한 데다, 그녀의 거처인 만안궁 바로 옆에 있는 장락궁으로 도망쳤다가 주살됐지. 무서운 황궁을 떠나 먼 곳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면 황태손도 잡지 못할 거야.’

이제 다음을 생각해야 했다.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황태손이 돌아왔다.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마엔 굵은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후우우. 많이 혼났지만 해냈소이다.”

“고생하셨어요.”

정광의 위로에 황태손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엔 그대가 고생할 차례외다. 황상께서 찾으시니 어서 가보시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정광은 태연한 얼굴로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 폐하 만세만세만만세.”

황제가 인상을 찡그렸다.

“왜 아직도 죽지 않았냐고 비꼬는 것이냐?”

“설마요. 그런데 내일까지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창백한 얼굴과 달리 황제의 목소리는 여전히 오만했다.

“내일 직접 봉천전(奉天殿)으로 나와 확인해라.”

“그게 낫겠네요. 그런데 왜 부르셨어요?”

황제의 눈에 희미한 노기가 맺혔다.

“이런 여우같은 녀석을 봤나. 대체 무슨 속셈으로 황태손에게 그런 바람을 넣은 것이냐?”

“바람이라뇨?”

“피가 아닌 덕으로 천하를 다스리겠다니. 그런 철없는 말을 짐 앞에서 당당히 지껄이더구나.”

“좋으시면서.”

“무어라?”

“황상께서 대명의 기틀을 단단히 다지셨지만 그걸로 끝나선 안 되죠. 이제 오래가도록 가꿀 차례잖아요.”

“…….”

“그러려면 덕만 한 게 있나요? 마침 황태손 저하께는 그만한 능력이 있죠. 더없이 좋은 상황인데 왜 싫은 척하세요?”

황제는 정광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정말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걸 확신하지 못했으면 어떤 수를 써서든 죽였을 것이다. 그래도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아. 수응(首鷹)과는 어떤 관계냐?”

“그분이 누구신데요?”

“만수절에 합을 맞춰 짐과 황태손을 지켰으면서 모른다고?”

“아. 그분. 은신술이 정말 대단하시더라고요. 갑자기 튀어나와 폐하를 구할 때야 겨우 눈치챘죠.”

“재밌는 얘기군.”

“그분이 황실수호암응 세 분의 사부세요? 무공이 같던데.”

“아주 재밌어. 황실수호암응은 어떻게 알지?”

“무공이 약하셔서 오래전에 눈치챘죠. 어째 그분들과 제가 부적절한 관계라도 되는 것으로 의심하시는 것 같네요.”

“그렇다면?”

정광이 환하게 웃었다.

“곁에 두고 쓰시긴 힘들 테고. 전부 저한테 주시죠.”

은신하고 있던 응일이 움찔했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무엇에 쓰려고 그러느냐?”

“청해성에 모셔가려고요.”

“마교와 싸우게 하겠다?”

“네. 주실 거죠?”

황제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주자니 아깝고, 안 주자니 꺼림칙하고.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황제는 우유부단한 성품이 아니었다. 내쳤으면 벌써 내쳤지, 지금처럼 데리고 있겠는가?

정광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요구했다.

“수응만 허하마. 대신 황실수호암응 모두 너와의 관계보다 황실을 향한 충성이 우선임을 보장해라.”

“수응이라는 그분. 원래 내보내려고 하신 거 아니었나요? 못 믿겠다고 말씀하셔 놓곤.”

“남에게 주느니 그냥 쓰고 마는 게 사람 마음이지.”

“좀 젊은 분으로 주시죠. 왜 하필이면 얼마 못 갈 분만…….”

“바로 그래서다. 황태손은 아직 젊다. 오래 일할 인재가 필요해. 네 경우엔 반대지. 서로의 이해가 맞는데 무엇이 문제냐?”

천마신교와의 싸움에서 쓰려면 오래 못 살더라도 제일 강한 흑서를 데려가는 게 맞지 않냐는 의미.

정광은 이쯤에서 받아들이기로 하고 두 손바닥을 살짝 들어 올렸다.

“저와의 관계라는 게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실수호암응은 당연히 황실에 충실해야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분들도 그럴 거예요.”

황제가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옥좌에 기댔다.

“정리됐군. 문서로 남길 테니 수결(手決)을 두거라.”

“네? 우리 사이에 뭐 하러 그런걸…….”

“그럼 짐이 써준 것도 모두 파기하면 되겠구나.”

정광은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재촉했다.

“역시 깔끔하게 가는 게 좋겠죠. 빨리 쓰죠.”

정광은 지필묵이 준비되는 사이에 은신해 있는 응일에게 전음을 보냈다.

-응일아.

-네, 네! 교주!

-너희 사형제는 황궁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됐다. 좋지?

응일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제일 치열하게 고민했다.

‘감사하다고 하면 될까? 아니야. 오호라, 나와 떨어져서 좋냐고 이죽거리며 두들겨 팰 게 뻔해. 소인도 제발 데려가 주십시오, 하고 빌어야 해. 헉! 그랬다가 정말 끌려가면?’

둘 중 뭘 골라도 사지(死地)에 뛰어드는 격!

응일이 어쩔 줄 몰라 헤매는데 정광이 혀를 찼다.

-쯧쯧. 머리 적당히 굴려라.

-죄, 죄송합니다!

-뭘 죄송해. 네겐 좋은 일인데. 그리고 네 사부는…….

정광은 씩 웃고 응일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나를 다시 모실 수 있게 됐으니 너보다 더 좋아하겠지. 잘됐지?

-…….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마공의 부작용을 없애준 건 고맙지만 이건 정말 아니지 않은가!

허나 응일은 본능적으로 사부가 아닌 자신을 택했다.

-만세만세만만세! 교주의 말씀이 옳고도 옳습니다!

-시끄럽고. 곧 떠날 테니 준비하라고 전해.

-존명!

* * *

다음 날 아침.

자금성 봉천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황제가 살아 있는 상태로 양위하는 것이라 유조(遺詔)를 반포하는 일도 없었고, 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지라 길일(吉日)도 최대한 가까운 시일을 택했으며, 외적의 침입이 있는 와중이라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는 과정도 축소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엄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대사면은 건너뛰고 조서(詔書)를 반포하는데.

그 내용이 놀라웠다.

황제가 황태손이 아닌 황태자에게 양위한 것이다.

자객의 암습 이후 계속 정신을 잃고 있다가 초인적인 의지로 깨어난 황태자였다. 아들이 황제가 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억지로 가마에 실려 왔던 그는 아비인 황제를 보며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소자를 위해 굳이 이러시는 겁니까?”

황제는 건조하게 답했다.

“이게 모양새가 좋아 그러는 것일 뿐이다.”

“모양새가 좋다니요. 하루에 양위가 두 번 이뤄지게 됐는데 예법에 어긋나는 일 아닙니까?”

황제가 코웃음 쳤다.

“천수까지 거스른 짐이 그깟 것에 구애될 것 같으냐? 짐의 의지가 곧 예법이니라.”

황태자는 아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실없는 소리 말고 할 일을 해.”

“하하. 네. 그래야지요.”

황태자에게 옥새가 전달됐다.

악사들이 연주하는 가운데 황태자는 환관들의 도움을 받아 옥좌에 앉았다.

“황제 폐하 만세만세만만세!”

대소신료와 황족의 축하가 쏟아지자 황제가 된 황태자가 피식 웃었다.

그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보게, 진옥룡. 잠시 도와주겠는가?”

모기처럼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정광은 멀찍이서 구경하면서도 들을 수 있었다.

뭘 원하는지 짐작이 갔기에 군말 없이 다가가 새로운 황제의 명문혈에 손을 댔다.

일개 무부가 양위식에 끼어들어 옥체를 건드린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봉천전에 모인 사람들 중 불만을 품거나 분노하는 이는 없었다.

당사자인 황제는 물론이오, 상황(上皇)이 되어버린 영락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데 누가 감히 그럴까?

화아아-

정광이 진기를 흘려 넣자 황제의 파리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고맙네. 같은 과정을 한 번 더 반복해야 하는데 제대로 버틸 자신이 없었거든.”

“여유 있게 진행하세요, 폐하. 며칠 정도는 괜찮으실 거예요.”

“하하. 그럼 마음 편히 즐기겠네.”

두 개의 해가 차례로 지고 새로운 해가 떴다.

팽만소는 지팡이를 짚은 채 감격에 겨워 몸을 떨었다.

자오는 전과 달라진 고요한 눈으로 새로운 황제를 축하했다.

정광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자오에게 물었다.

“뭐라도 깨달으셨어요? 많이 바뀌셨네요.”

자오는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모두 단주 덕분입니다.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지요. 실은…….”

전혀 간략하지 않았다.

“자오. 입은 여전하시네요.”

“곧 끝납니다. 그래서 저는…….”

“다 들은 걸로 치죠.”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

새로운 시대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정광도 문을 열었다.

황궁무고(皇宮武庫)의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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