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57화 (356/569)

2부 86화

때를 놓치기 전에

천마신교가 곤륜을 칠 것이다!

정광의 느닷없는 말에 자오와 혜진은 입을 떡 벌렸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먼저 입을 연 건 자오였다.

“정말 큰일이군요. 설상가상이라더니 그 악독한 마교까지 발호하고 말입니다.”

“…….”

정광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악독한 건 맞지만 ‘마교’라는 단어가 거슬려서였다.

하지만 자오는 한술 더 떴다.

“곤륜이 진천마 그 악적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명줄은 또 어찌나 긴지. 겨우 죽어서 한시름 놓는가 했는데 얼마나 됐다고 또 그런단 말입니까?”

“…….”

정광의 눈썹이 솟구쳤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도 수하들이 곤륜을 잡아먹고 기세등등해할까 봐 적정선에서 멈추게 했단 말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이 전부 내 탓이란 말이냐?

자오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허어. 진천마가 만악의 근원이라더니 과연. 그 대마두의 망령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일까요?”

“…….”

되살아난 당사자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툭 불거졌다.

주먹도 그랬다.

그 주먹이 움직이려는 순간.

정광의 분노를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혜진이 입을 열었다.

“단주의 사문이 위험에 처한 건 사실이지만 냉정해지십시오. 예전의 곤륜이 아니잖습니까?”

자오가 거들었다.

“혜진 소저의 말이 맞습니다. 곤륜은 더 강해졌습니다. 예전처럼 홀로 싸우지도 않을 겁니다. 이미 천룡단이 가 있지 않습니까? 지룡단도 그렇고요. 지룡단의 전력이야 대단치 않으나, 그들이 속한 사문과 가문이 가만히 지켜볼 리 없지요.”

혜진이 덧붙였다.

“그뿐입니까? 청해성과 인접한 사천성에서는 내 일처럼 달려갈 것입니다. 당가, 아미, 여력이 있을진 모르지만 청성까지 말입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란 것을 염두에 두시고 미리 안배를 해두셔서 다행입니다.”

자오와 혜진이 동시에 위로했다.

“별일 없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정광은 화를 가라앉혔다.

두 사람의 진심이 느껴져서였다.

“그렇긴 하죠.”

정광이 진정하자 자오가 입을 빠르게 놀렸다.

“단주. 마교가 언제 곤륜을 침공한답니까? 어디서 누구에게 그 얘기를 들으셨는지요? 명교주의 정체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자를 죽이셨습니까? 다른 잔당은…….”

자오는 다른 건 몰라도 수다만큼은 암왕의 심득을 제대로 물려받은 훌륭한 제자였다.

정광은 그의 줄기찬 공세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숨길 건 숨기고 드러낼 건 드러내야겠지. 황제에게 기회를 주면 안 돼.’

천마신교가 밀약의 머리라는 걸 황제가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몽고의 침입도, 오이라트의 압박도, 야만족의 준동도, 해적의 노략질도 전부 천마신교 탓이라고 천하 곳곳에 격문을 붙이리라.

그걸 보고 누가 좋아하랴.

모든 백성들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비분강개할 터.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황제는 무림에 명을 내리는 게 아니라 요청할 것이다.

황군은 외적들을 막느라 바쁘니 너희들이 좀 나서줘야겠다고.

이미 대명을 돕고 있는 건 알지만 이권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냐고. 지금 현재 여력이 있는 건 너희들밖에 없다고.

관과 무림이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떠나서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황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거절하면 백성들의 원망이 무림에 쏟아질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지.’

천마신교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가려야 할 텐데 그 피해가 얼마나 클까.

둘 중 어느 쪽이 되든 간에 황제는 이득, 무림은 손해였다.

‘황제가 곧 죽는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야. 황태손이 황위에 올라도 비슷하게 할 수밖에 없어.’

대명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여유가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역도의 수괴를 빤히 알면서도 가만둘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엔 무림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으리라.

‘관과 무림의 균형을 지켜야 해. 무림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볼 바엔 황제에게 적당히 꾸며서 알리고 지원을 받아내는 게 나아.’

머릿속이 정리됐다.

‘내 일부분을 얻어놓고 감히 진천마라 자처하는 그놈. 그놈과 윗놈들만 죽여서 최대한 빨리 끝낸다.’

정광은 자오와 혜진에게 사실을 그럴듯하게 가공해서 알려줬다.

그리고 쉴 것을 명한 뒤 옷을 갈아입고 건청궁으로 향했다.

황제는 정광을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놈이 명교의 수괴가 맞다고 확신하느냐?”

정광은 황제 앞에 놓인 목함을 들여다봤다.

그새 소금에 절인 명교주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네.”

“무엇을 근거로?”

“강 천호가 이분이 가지고 있던 신패(信牌) 안 드렸어요? 그거 보시면 아실 텐데.”

황제가 손에 쥐고 있던 금패를 살짝 흔들었다.

전면에 새겨진 미륵불(彌勒佛)에 햇빛이 반사되어 괴이하게 빛났다.

“기록을 찾는 중이다만. 네가 확신하는 걸 보면 맞는 것이겠지. 수고했다. 헌데…….”

황제가 정광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고문을 꽤 심하게 했더구나. 놈이 무어라 토설했느냐?”

“그것 역시 강 천호에게 말했는데요.”

황제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대가 세서 계속 버티다가 자결했다고? 네 솜씨가 겨우 그 정도일 거라 믿기지는 않는다만.”

“음. 괜히 말씀드렸다가 폐하께서 곤란해하실 것 같아 그냥 지나가려 했는데…….”

“그건 짐이 판단한다.”

정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요. 밀약의 머리는 명교였어요.”

“그놈들이? 무슨 힘으로?”

“태조께 토사구팽당한 전 교주가 숨겨둔 재물이 아주 많았다고 하던데요.”

“…….”

“그것들로 오이라트의 태사와 모용세가의 모용회에게 접근해서 힘을 실어줬데요. 자객을 고용하고 야만족들과 해적들을 움직이는 데도 쓰고요.”

불편한 표정으로 듣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열거한 놈들만 없애면 밀약은 끝이란 얘기군.”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야만족들이나 해적들처럼 밀약에서 움직인 세력이 하나 더 있다네요.”

황제의 눈이 빛났다.

“어떤 놈들이냐?”

“천마신교요.”

“……!”

“역시 놀라시네요. 저도 놀랐거든요.”

황제는 정광을 노려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새로운 교주가 나타났나 보군. 그 마인들이 중원을 노리는 건가?”

“좀 달라요. 명교가 천마신교에서 갈라져 나온 지파라 하더라고요. 좀 더 고문했더니 지파가 아니라 배교자들이라 실토했지만요.”

“……흥미롭군. 계속 말해보거라.”

“명교주는 일부러 명교의 흔적을 천마신교에게 흘리는 중이었대요. 잡으러 오라는 의미죠. 일단 청해성에 비밀 분타가 있는 것처럼 꾸몄고 다른 성에도 줄줄이 만들었는데, 조만간 천마신교가 방문하지 않을까 예상하던데요.”

“……분타의 위치는?”

정광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죽어도 말 안 하겠다고 버티더니 정말 죽어버렸죠.”

“……마인들이 정말 그럴 거라 생각하느냐?”

“교(敎)를 믿는 자들은 배교자들을 역도처럼 취급한다고 들었어요. 가만두진 않을 것 같네요. 겸사겸사 그걸 빌미로 중원에 몇 걸음 내디디려 하는 것일 수도 있죠.”

“명교 놈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을 쳤다고?”

“대명을 흔들 수만 있다면 그 정도야 기쁘게 할 거라고 하던데요.”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자 정광이 위로했다.

“교주와 고수들을 죽였으니 남은 자들의 실력은 별것 아닐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사라지겠죠.”

황제의 이마에 밭고랑 같은 주름이 깊게 파였다.

정광이 늘어놓은 말은 모두 이치에 합당했다.

‘이 녀석 말대로 잔당은 걱정할 것 없지만 마교가 문제다. 사교의 힘은 익히 겪어봤지 않은가.’

태조가 명교를 이용해서 대명을 세웠듯이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교도가 퍼지는 건 금방이야. 절대로 중원에 들어오게 놔둬선 안 돼. 청해성에서 막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원군을 보낼 여유는 없고.’

그 미친 종자들을 청해성에 있는 병력만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신강(新疆)만이 아니라 서장(西藏)도 경계해야 하는데?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만큼 천마신교에 대해 남겨진 기록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무림의 무뢰배들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가만. 이 녀석의 사문이 마교가 발호할 때마다 멸문지화를 당하기 직전까지 싸워온 곤륜 아닌가?’

황제는 마음이 조금 느긋해지는 걸 느꼈다.

“하필이면 청해성이라니. 곤륜이 또 피를 흘리겠구나. 어서 무림맹에 도움을 청하는 게 좋을 게다.”

정광의 대답은 의외였다.

“무량수불. 헛된 피를 흘리는 건 멈춰야죠.”

“……무어라?”

“남의 집안일에 함부로 끼어들어서야 쓰나요.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얻어먹다니?”

정광은 담담히 설명했다.

“이제껏 곤륜이 죽어라 피를 흘리면서 그들을 막아왔지만 얻은 게 뭐가 있나요. 도사도 사람인데 뭐라도 먹어야죠.”

“길을 비켜주겠다는 말이냐?”

“그건 아니죠. 싸우긴 하되 크게 안 다칠 만큼. 그게 딱 좋겠네요.”

“세상의 비난은 어쩌려고?”

정광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곤륜이 세상을 비난했으면 했지, 세상이 곤륜에 뭘 해줬다고 비난을 해요?”

“…….”

황제는 할 말이 없었다.

맞는 소리 아닌가?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야 있나.

황제의 눈이 강하게 불타올랐다.

“무림맹에 명을 내려 곤륜을 돕게 해주마.”

“이미 그러고 있고 그럴 거예요.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죠. 사마련과 싸우며 흘린 피가 적지 않은데 천마신교를 막겠다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진 않을걸요.”

“…….”

황제가 인상을 찡그리다가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그에게 내공을 밀어 넣고 있던 병필태감이 대경했다.

“폐하!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된다!”

황제는 숨을 몇 번 고른 뒤 희미하게 웃었다.

살기가 가느다랗게 맺힌 미소였다.

“입을 다물어서 짐이 재촉하게 하고, 짐의 제안을 거절하여 더 큰 걸 받아내려 하다니. 전에도 느꼈지만 협상을 할 줄 아는구나.”

“과찬의 말씀을 들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발칙한 녀석. 원하는 걸 말해보거라.”

“뭐든지 들어주실 거죠?”

“짐과 대명에 이익이 되는 것만.”

정광은 애초부터 무리한 걸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무림맹에서 청해성에 원군을 보낼 건데. 폐하께서 익히 아시다시피 본문은 가난해서요.”

“청해성의 군량과 병기는 물론이오, 그 외에 필요로 하는 것들도 쓰게 해주마.”

“폐하의 성은을 입어 배는 곯지 않겠네요.”

“객쩍은 소리는 됐다. 다음.”

“좋은 일을 하러 집을 떠났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그새 도둑이 들어 살림이 궁핍해지면 무척 슬프지 않을까요?”

“각 성에 명을 내려 당분간 무림맹에 소속된 가문과 문파를 보호하도록 하마. 대명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중이라 하면 되겠지. 만약 이를 어기고 해를 끼치는 개인이나 무리가 있으면 역도로 규정하고 반드시 멸할 것이다.”

파격적이지만 불가능한 조치들은 아니었다.

청해성의 물자가 아깝긴 했지만 천마신교를 막지 못하면 어차피 사라질 것들이었다.

무림맹에 소속된 가문과 문파를 보호하는 건 더 쉬웠다. 관병 몇 명씩 보내놓고 칙명(勅命)을 붙여놓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무척 힘든 일이라고 생색을 내야 했다.

“힘든 시기다. 더 이상은 어려워.”

“그렇겠죠. 이해해요.”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덧붙였다.

“황상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죠?”

“……뭘 말이냐?”

“천마신교를 멸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요. 교주와 높은 곳에 계시는 몇 분만 귀천시켜 드려도 대단한 성과죠.”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교주 자리를 놓고 자중지란을 벌일 거란 얘기구나. 진천마, 그 만악의 근원이 죽은 뒤 근 이십 년이 흘러서야 새로운 교주가 나타난 것처럼.’

지금까지 정광이 했던 말 중에 거짓이 섞여 있다 해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피를 흘리는 건 무림맹과 마교 아닌가?

정광이 성공하면, 이번엔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마교도들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그만큼 황태손은 대명을 굳건히 다질 시간을 벌 것이고.

무림맹은 황실의 도움을 얻고 황실은 무림맹의 도움을 얻는 괜찮은 장사였다.

“그 정도면 족하다.”

정광은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낭랑히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만세만만세. 문서로 부탁드릴게요.”

“……어차피 칙명을 써야 한다. 알겠으니 당장 나가라. 어서.”

“네. 안녕히 계세요.”

정광은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일단 천마신교가 곤륜을 치기 전에 원군을 보낼 기반은 얻지 않았는가.

‘황제 암살에 성공해서 조간왕이 황위에 오르면, 조간왕을 시켜 몽고와의 싸움을 길게 끌게 한 뒤 곤륜으로 향할 거라 했지.’

암살이 실패한 지금, 그 계획은 백지장이 됐다.

정광은 새로운 천마신교주를 떠올렸다.

‘그놈은 변수를 싫어하지. 당장 곤륜을 치진 않을 거야.’

하지만 결국 칠 것이다.

욕심이 많은 놈이었으니까.

‘그 전에 죽여주마.’

황제에게 얻을 건 다 얻었겠다, 더 있을 필요 있나.

‘내일은 팽가에 들르고. 모레는 영평공주, 조간왕과 일을 마무리 짓자. 황궁무고에 들어갈 준비도 하고.’

정광이 돌아서려는 그때.

황제가 지나가듯 말했다.

“사흘 후 열릴 아침 조회에 참석하거라.”

“네? 영 불편한데.”

황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양위(讓位)를 할 것이다. 때를 놓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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