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56화 (355/569)

2부 85화

웬만하면 넘어가려 했는데

강대환은 저명한 문장가를 여럿 배출한 명문가의 자제였다.

핏줄이 어디 가지는 않는지 그 역시 뛰어난 머리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노력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했는데, 모두가 놀라고 부러워할 만큼 빠른 출세였지만 가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성품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문관이 아닌 무관이 되어서였다.

큰 기대를 걸고 있던 인재가 붓을 버리고 칼을 휘두르다니. 꼬장꼬장한 문사들이 이를 어찌 받아들이겠는가?

하지만 강대환은 개의치 않았다.

문(文)보다 무(武)가 더 좋았고 적성에도 맞았다.

그랬기에 출세가도(出世街道)를 달릴 수 있었고 대명 최고의 권력 기관 중 하나인 금의위에 차출되어 북진무사 천호(千戶)직에 제수될 수 있었다.

누구나 탐낼 만큼 적지 않은 녹봉과 대단한 권력.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고 무공 수련에 힘을 쏟느라 아직 혼인하지 못한 걸 빼면 모든 게 잘 풀리고 있었는데. 만족스러운 삶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근래 들어 마음이 흔들렸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자격지심이 생겼다.

그의 수하와 가끔 그에 대해 험담…… 이라기보다는 아쉬운 점을 토로하는 시간을 가지긴 했지만 질시해서가 아니었다.

중원 곳곳을 누비는 그의 거침없는 행보가 부러웠다.

황제 앞에서도 여전한 그의 언행에 경악했다.

강대환은 몽고의 남침 때문에 경계가 강화된 자금성에서 서문인 서화문(西華門)을 배정받아 수하들을 지휘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심한 면이 많지만 감탄스럽긴 하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강호를 진동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황궁에서까지 신위를 떨친 무공을 믿고?

‘아니. 그것만으론 안 돼.’

강한 무력에 취해 그러는 것이라면 약한 이에겐 더 함부로 대해야 한다.

허나 그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하지 않는가?

가만히 생각하는데.

저 멀리서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보였다.

강대환도 그자가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였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거지가 자금성에 오다니.

구걸하러 오는 건 아닐 테고.

대체 무슨 용무로?

‘보통 거지가 아니긴 하군.’

다부진 체격과 균형 잡힌 걸음걸이, 눈에서 흘러나오는 정광(正光)이 인상적이었다.

‘개방의 거지야. 무공 수위를 보면 낮은 위치는 아닌 것 같은데.’

거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서더니 짝다리를 짚은 채 큰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에서 제일 높으신 나리가 누구요?”

금의위 무장들이 분노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다.

강대환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림의 무뢰배답게 예의가 없구나. 감히 어디에서 이런 짓을.’

문관들은 대부분 무림인을 싫어했다.

무관들도 그랬다.

부단히 수련한 무공으로 진충보국하진 못할망정, 나라의 법을 우습게 알고 멋대로 구는 무뢰한들을 어찌 좋게 보겠는가?

강대환은 호통을 치려다 멈칫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구는 진옥룡을 떠올려서였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두 손을 정중히 모았다.

“금의위 천호 강대환이라 하오. 개방의 의협이신 것 같은데, 이곳엔 어인 일로 오셨소이까?”

거지는 기름기가 번지르르하게 흐르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강대환처럼 정중하게 포권했다.

“본방의 하북분타(河北分舵)를 책임지고 있는 윤우라 하오. 진옥룡의 부탁을 받고 찾아왔소이다.”

“……!”

“이거야 원. 사기 치는 거 아니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오. 이걸 보이면 믿어줄 거라 했소.”

거지는 품속에서 주황색 목패를 꺼내 던졌다.

그것을 받아 살펴본 강대환의 눈이 커졌다.

벼룩이 몇 마리 앉아 있어서가 아니었다.

금의위를 상징하는 목패에 새겨진 글자 때문이었다.

[금의위 북진무사 천호 진옥룡]

그의 것이 맞았다.

‘아침 일찍 나간 그가 왜? 보통 일이 아닌가 보구나.’

강대환은 거지에게 가까이 다가가 전음으로 물었다.

-중요한 사안인 것 같으니 전음으로 얘기합시다. 무슨 일이오?

-자세한 건 모르오. 찾던 자들을 발견했다고 하더이다. 마차 세 대와 사람이 필요하다 하면 알아들으실 거라 했소.

찾던 자라 하면 역도들일 것이고.

마차와 사람을 보내달라는 건 이미 잡았으니 호송해 가라는 의미 아닌가?

-대협의 노고에 감사드리오. 진옥룡은 어디에 있소?

강대환의 진심이 담긴 말에 거지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나라에서 녹을 먹는 대부분의 이들과 다르시구려. 서쪽으로 십리쯤 가면 되오. 안내해 드리러 왔으니 갑시다.

강대환은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휘사에게 보고를 하는 한편 말과 마차를 준비했다.

떠날 준비가 됐을 때, 지휘사에게 달려갔던 수하가 돌아왔다.

“즉시 움직이시라 하셨습니다.”

“마차 창문에 천을 내려 백성들이 못 보게 할 것이니 안심하시라 전해 드리게. 달리 당부하시는 말씀은 없었는가?”

“강 천호라면 알아서 할 테니 따로 전할 말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녀오겠네.”

강대환은 수하들을 이끌고 개방 거지 윤우와 함께 길을 나섰다.

시국이 어수선한 상황.

급히 움직이면 간신히 진정시켜 놓은 백성들이 불안해할 게 뻔했기에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은 답답했는지 윤우가 나직이 투덜거렸다.

“하루 종일 걸리겠군. 끼니도 못 챙기고 이게 무슨 짓이야.”

“미안하오. 이래야만 하니 이해해 주시오.”

“거 적당히 좀 하시오. 나는 새도 떨어뜨릴 분이 왜 그러오?”

윤우가 또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천호 나으리께 불만이 있는 게 아니오. 진옥룡 때문에 그러는 것이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오.”

“그가 무슨 실례라도 했소이까?”

윤우가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언행 자체가 실례지.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쩌다 그런 괴물을 세상에 내려보냈는지.”

“강호에서 평이 안 좋은가 보오?”

윤우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꼭 그런 건 아니고. 엮이면 죽어라 뛰어야 해서 피하고 싶은 인물인데, 마침 딱 걸려서 고생하게 돼서 그러오.”

망할 놈의 새끼 거지가 진옥룡이 있는 곳을 지나다가 잡히지 않았으면. 새끼 거지의 보고를 받고 그곳에 직접 달려가지 않았으면 이럴 일이 없었을 텐데!

윤우는 개방의 미래를 책임질 후개(後丐) 유정풍이 진옥룡과 함께 다니며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부들부들 떨며 설명했다.

묵묵히 들으며 걷던 강대환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소문으론 많이 들었소만. 하도 평이 엇갈려 갈피를 잡을 수 없었는데 지금껏 말씀하신 건 전부 협행 아니오? 진옥룡이 협객이었소?”

윤우가 코웃음을 치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절대 아닌데. 살짝 그런 면이 있기도 하고. 거참.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라니까.”

강대환의 관점에선 윤우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자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하나만 묻고 싶소만.”

“그러시구려.”

“호기심 때문에 묻는 것이니 곡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소. 오랜 세월 동안 뼈를 깎는 수련을 하여 무공을 익히셨을 텐데, 왜 안빈낙도의 삶을 사시오?”

윤우가 크게 웃었다.

“우하하하. 그냥 거지라 하면 되는 것을 안빈낙도는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오. 가진 게 없고 욕심도 없어야 순수한 협을 행할 수 있어 그러오.”

“순수한 협이라…….”

“크흠.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건 그런 거고. 그냥 편해서 그러오. 자유롭기도 하고.”

“편하다는 건 알겠지만 자유롭다는 건 이해가 안 가오. 하북성 분타주시잖소?”

“내가 지금 하북성에 매여 있는 건 사실이오. 허나 다른 곳에 보내달라 떼를 쓰면 시간만 걸릴 뿐, 반드시 갈 수 있소. 그것도 싫으면 아예 때려치우고 진짜 거지가 되면 그만이고. 그 고생을 해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신 천호 나으리와는 사정이 다르외다.”

“…….”

강대환은 할 말이 없었다.

권력의 달콤함을 실컷 맛본 네가 그걸 버릴 수 있을 것 같냐고 꼬집는데 무어라 대꾸하겠는가?

묵묵히 걸음만 옮기자 윤우가 힐끔거리며 말을 돌렸다.

“거창하게 입을 놀리긴 했지만 자유가 뭐 대단한 것이오? 답답할 때 좋은 곳에 가서 잠시 바람이라도 쐬면 느낄 수 있는 건데. 음. 다 왔군. 저기외다.”

강대환은 윤우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허름한 울타리가 있었다.

‘잡념이 많구나. 일이나 제대로 처리하자.’

울타리가 가까워지자 피 냄새가 훅 풍겨왔다.

‘도축장인가?’

들어가 보니 짐승들이 이곳저곳에 매여 있었다.

‘맞군. 그런데 왜 우는 녀석이 하나도 없지?’

짐승들은 모두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무엇을 봤기에?’

곧 알 수 있었다.

한 건물을 빙 돌아가자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이럴 수가!’

이미 한번 봤던 윤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지만, 강대환과 금의위 무장들은 숨이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피! 피! 피!

저 넓은 공터가 붉은 핏물과 그것에 물든 육편(肉片)으로 뒤덮여 있다니!

짐승들의 것이 아니었다.

분명 사람들의 것이었다.

‘누가 이런 살육을?’

답은 정해져 있었다.

공터 끝에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칠갑을 하고 있으나 그래도 숨길 수 없는 잘생긴 얼굴, 진옥룡이었다.

“……진옥룡?”

강대환이 저도 모르게 꺼낸 말에 정광이 눈을 떴다.

“강 천호님이 오셨네요.”

“……그렇소. 어찌 된 일이오?”

“명교의 은신처를 발견하고 싸웠어요.”

“……!”

“다 잡고 운기조식하고 있었죠.”

내용은 경악스러웠지만 어조는 담담했다.

강대환은 정광을 응시하다가 두 손을 모았다.

“수고하셨소이다.”

“뭘요.”

“고생하신 분께 이런 말을 하게 돼서 미안하오. 사로잡은 자는 없소이까?”

정광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물증이 필요했다.

육편을 그러모아 가져가서 보고하면 누가 기뻐하겠는가?

안타깝게도 정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는데요.”

“……알겠소.”

“그래도 물증은 있죠.”

정광이 일어서자 그의 뒤에 쓰러져 있던 사람이 보였다.

“귀천하셨지만 이분이 명교 교주시거든요.”

“……!”

강대환은 신법을 펼쳐 명교주 앞에 내려섰다. 명교주의 시신을 살펴보던 그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참혹하군. 싸운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구타한 것 같은데.’

그의 속마음을 짐작한 것처럼 정광이 설명했다.

“문초를 하느라 그렇게 됐네요.”

“…….”

얼마나 독하게 버텼길래 이 모양 이 꼴이 됐을까?

“진옥룡. 이자가 토설한 게 있소?”

“대가 세더라고요. 계속 버티다가 스스로 심맥을 끊어 자결했죠. 분명 내공을 폐했는데 어떻게 그랬을까? 그래도 이건 건졌네요.”

정광은 품속에 손을 넣어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금패(金牌)를 꺼냈다.

미륵불(彌勒佛)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뒤집자…….

[진공가향(眞空家鄕)]

[무생노모(無生老母)]

[명교주(明敎主)]

세월의 때는 묻었으나 유려한 필체로 새겨진 문자가 드러났다.

강대환은 확신했다.

이것은 명교주의 신분을 상징하는 신패(信牌) 아닌가!

“……명교주가 맞구려.”

“혹시 모르니 황궁에 가져가셔서 확인해 보세요. 남은 기록이 있을 거예요.”

“……그러겠소. 정말 수고하셨소이다.”

정광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하늘을 올려다봤다.

강대환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분위기가 평소와 완전히 다르구나. 너무 많은 이들을 잔인하게 죽여서 그런 것인가?’

무심한 표정도, 착 가라앉은 음성도 낯설었다.

강대환은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정광을 힐끔힐끔 살펴봤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운데…….’

수하들이 육편을 그러모아 땅에 묻고, 그들이 남기고 간 소지품을 마차 한 대에 채우고, 명교주의 시신을 다른 마차에 넣자 떠날 준비가 끝났다.

강대환은 머뭇거리다가 정광에게 물었다.

“하늘에 무엇이 있길래 그렇게 오래 보는 것이오?”

정광은 하늘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오늘따라 청해성 하늘과 비슷해서요.”

“그대의 사문이 있는 곳이구려. 돌아가고 싶소이까?”

정광이 시선을 내려 강대환을 바라봤다.

“네.”

“청해성은 어떤 곳이오? 다소 척박하다 들었소만.”

정광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담담히 설명했다.

가만히 듣던 강대환은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땅은 척박하나, 하늘과 사람은 좋은 곳이라. 대체 어떻길래 진옥룡이 이렇게 칭찬을 하는 걸까?’

갑자기 윤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거창하게 입을 놀리긴 했지만 자유가 뭐 대단한 것이오? 답답할 때 좋은 곳에 가서 잠시 바람이라도 쐬면 느낄 수 있는 건데.”

강대환은 그 말을 곱씹다가 정신을 차렸다.

가야 할 시간이었다.

“진옥룡. 그만 갑시다. 빈 마차에 타시구려.”

“네.”

정광은 마차에 타기 전에 윤우를 돌아봤다.

“분타주님. 수고하셨어요.”

“큼.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무슨. 아, 아니지. 아이고 허리야. 죽어라 뛰어다녔더니 삭신이 쑤시…… 엉?”

윤우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코앞에 나타난 전표의 액수를 세었다.

‘일, 십, 백…… 헉! 더 있어! 그다음은 뭐였지?’

정광은 윤우의 손에 전표를 쥐여준 뒤 두 손을 모았다.

“그럼 이만.”

“어? 어! 그, 그래! 조심히 가시게나! 고맙네!”

정광은 마차에 들어가 앉았다.

창문에 천을 늘어뜨려 놓아 어두침침한 상태.

그 어둠 속에서 정광의 눈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명교주가 토설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회오리쳤다.

‘새로운 교주놈이 나를 계승했다는 건 절반은 맞는 말이니 이해는 해주겠다만. 웬만하면 넘어가려 했는데…….’

마령제혼술 때문에 이미 망가진 놈이라 죽여버렸으나 분이 풀리지 않았다.

‘여기 일부터 빨리 마무리 짓자.’

마차가 자금성에 도착했다.

정광은 황제를 알현하자는 강대환에게 피투성이가 된 의복을 갈아입고 가겠다고 말한 뒤 자오와 혜진을 불렀다.

“조간왕 전하와 영평공주님은요?”

자오가 답했다.

“의식을 찾으시자마자 소혜 소저가 다시 기절시켰습니다.”

“잘하셨어요.”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정광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혜진이 물었다.

“단주.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명교주를 잡았어요.”

“……!”

“그리고 안 좋은 얘기를 들었죠.”

정광이 살기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천마신교가 곤륜을 칠 거래요.”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