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83화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정광은 황궁 문이 열리기 직전, 천변만화역용축골마공(千變萬化易容縮骨魔功으로 용모를 바꿨다.
사나워 보이는 미청년의 모습이었는데, 몸에 걸친 고급스러운 경장(輕裝)과 허리춤에 찬 운룡이 그 얼굴과 어우러져 무림세가의 귀공자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자연히 걷기도 편할 수밖에.
누가 굳이 무서운 인상의 무림인과 다투려 할까.
혼잡한 길이 저절로 열렸다.
정광은 번화한 거리를 태연히 걸으며 사방을 살폈다.
얼마 안 가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분명 일이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됐을 텐데도 황궁 주변을 감시하는 놈이 없네.’
혹시라도 함정에 빠져 잡힐까 봐 그러는 것이리라.
꽤 조심스러운 녀석들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물러났을 리는 없지.’
안전을 위해 잠시 시간을 두려고 하는 것일 뿐. 황궁에서 자신들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어떻게 나오려고 하는지 확인하려고 할 게 뻔했다.
‘놈들은 아직 있어.’
우선 급한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는 반점으로 향했다.
‘선미반점(鮮味飯店)이라…….’
싱싱하고 산뜻한 맛이 일품이란다.
‘일단 이름은 합격.’
정광은 안에 들어가자마자 품에서 전표 한 장을 꺼냈고, 그것을 건네받은 점소이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재신(財神)께서 납셨구나!’
성깔 있어 보이는 무림인이었지만 그게 무슨 문제인가?
즉시 전망 좋은 이 층 창가 자리로 모셨다.
“대인. 무엇을 올릴까요?”
“자신 있는 요리로 부탁드려요. 전부 다요.”
재신답게 주문도 화끈했다.
게다가 예의까지 바를 줄이야!
점소이는 조상을 모시는 것보다 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네! 대인! 금방 대령해 올리겠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이 층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정광은 요리가 나오길 기다리며 창밖을 구경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보이는 봉화대(烽火臺)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외적과 교전하고 있다는 신호!
거리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저, 저 연기는!”
“빌어먹을! 달자(韃子) 놈들이 결국 쳐들어오는 건가!”
“흑흑.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이렇게 모두가 두려움에 휩싸인 그때, 황궁 문이 열리고 금의위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흩어지더니 공포에 질린 사람들에게 외쳤다.
“그만! 이렇게 소란을 떨 일이 아니오!”
“황제 폐하께서 진작 안배하신 대로 대명의 황군이 놈들을 물리치고 있는 것이외다!”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시오!”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건 금의위만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금의위와 비슷한 말을 했다.
“황상께서 이런 일이 있을 줄 아시고 본가를 시켜 그대들을 돕게 하시지 않았소?”
“걱정하지 마시오. 모두 잘 풀릴 것이오.”
무인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컸다.
정광은 그들 중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미소 지었다.
익히 아는 사람들이었다.
‘팽강휘와 모용수수네. 그동안 계속 붙어 다닌 건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이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 슬며시 훔쳐보는 모습이 무척 재밌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팽가도 한몫 잡겠어.’
그간 팽가에서 쏟아부은 재물과 곡식 덕분인지 사람들은 곧 평정을 되찾았다.
‘민초들 일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겠는데.’
대신 다른 것에 집중했다.
어느새 탁자를 가득 채운 수많은 요리들을 맛봤다.
그리고 실망했다.
‘명성보다 모자란 맛이네. 자오가 있었으면 제대로 된 곳을 찾았을 텐데.’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는 황궁 요리에 길들여져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정광은 배를 채운 뒤 점소이를 불렀다.
그는 무림고수처럼 빠르게 달려왔다.
“대인.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네. 철전 백 개만 주시겠어요? 밀가루도 한 움큼 넣어서요.”
철전과 밀가루를?
이런 재신이 왜?
어리둥절해 하는 것도 잠시, 점소이는 그것들이 담긴 가죽 주머니를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잘 먹었어요.”
정광은 그것을 품속에 넣고 일어섰다.
점소이는 일 층 대문까지 따라 나와 허리를 숙였다.
“조심히 돌아가시고 또 찾아주십시오, 대인.”
땅에 닿을 만큼 내려간 그의 얼굴엔 웃음꽃이 가득했다.
재신이 준 전표의 액수가 너무 커서 요리를 잔뜩 시켰는데도 한참 남아서였다.
‘철전과 밀가루쯤이야. 흐흐. 이건 다 내 것이다.’
아니었다.
“거스름돈 안 주세요?”
정광은 칼같이 받아내고 잠행술을 펼쳐 달렸다.
암왕이 황궁에서 빠져나온 뒤 숨기로 되어 있던 안가(安家)는 텅 비어 있을 터.
놈들과 접촉하는 방법도 쓸모없어졌을 테니 은신처로 바로 향해야 했다.
‘서쪽으로 십리만 가면 된다 했지.’
그리 오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허름한 울타리 안쪽에서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암왕이 얘기했던 도축장이었다.
‘한적한 곳에 있어서 다행이야.’
놈들의 비명이 아무리 커도 들을 사람이 없었다.
설령 있다 해도 짐승들의 울음소리에 묻히리라.
‘들어가 볼까.’
은신한 채 번을 서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나 눈치 못 채게 지나갔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움막 위에 올라 잠마대법(潛魔大法)을 펼쳤다.
정광의 신형이 순식간에 천장으로 스며들었다.
내부를 살펴본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쩐지 익숙한 기운이더라니. 여기에 숨어 있었어?’
어림군 지휘사인 호도가 한 중년인을 매섭게 노려보며 따지고 있었다.
“그렇게 성공을 장담하더니, 이 일을 대체 어찌할 것이오?”
“…….”
“내 식솔들이 모두 잡혀갔소이다! 나도 곧 그럴 것이고! 입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교주!”
정광의 눈이 빛났다.
교주라 하면 분명 명교주일 터.
밀약의 핵심 인물 중 하나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잠깐. 그렇다기엔 너무 젊잖아.’
태조 주원장이 명교를 멸한 건 약 육십 년 전이다.
명교주가 그때의 생존자라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칠팔십 살은 돼야 하거늘, 눈앞에 있는 저자는 많이 쳐줘야 사오십 살밖에 안 돼 보이지 않는가?
‘반로환동 할 만큼 대단한 고수는 아닌데.’
그렇다고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호도 역시 그랬고.
정광은 잠마대법을 유지하며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것이오?”
호도가 계속 다그치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대계를 위해 지휘사는 몇 년을 준비하셨소?”
“갑자기 무슨 말이오?”
“내 물음에 답하시면 설명해 드리리다.”
호도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교주가 나를 포섭한 게 삼 년 전이니 삼 년이지.”
“나는 이십 년이외다.”
“지금 쏟아부은 세월을 가지고 유세를 떠는 것이오?”
“지휘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시간이었소. 나는 명교도가 아니었기에 무공부터 새로 익혀야 했소.”
호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니었다고? 그게 무슨…….”
중년인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정확히 오십칠 년 전. 명교도였던 주원장은 교주 한림아를 남경(南京)으로 모시고 오던 도중, 그가 탄 배를 침몰시켰소. 교주와 명교 고수들을 모두 수장시킨 것이오. 완벽한 토사구팽이었지.”
호도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다들 쉬쉬하지만, 알고 있는 얘기 아니오?”
“이건 모를 것이오. 교주였던 한림아의 열 살배기 아들, 한서원은 살아남았소.”
“……!”
“아비가 미리 피신시킨 덕분에 횡액을 면한 한서원은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해 중원을 떠돌았소. 허나 복수는커녕 숨을 곳조차 없다는 걸 깨닫고 변경으로 가게 됐지.”
“……그래서 어찌 됐소이까?”
“신분을 숨긴 채 산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며 살았소. 비슷한 처지의 화전민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는 아들을 일자무식으로 키웠소. 당연한 일 아니오?”
호도도 동의했다.
“괜히 세상에 나갔다가 화를 당할까 두려웠겠지. 이해가 가오.”
“허나 결과는 좋지 않았소. 한서원과 그의 부인이 차례로 죽자 홀로 남은 아들은 가난한 삶에 분통을 터뜨리다가 중년이 되었을 때 무언가를 발견했소.”
아비 한서원이 차마 파기하지 못하고 숨겨뒀던 명교주의 신물과 서책들이었다.
“글을 모르니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 리가 있나. 그래도 돈이 될 듯하여 큰 도시로 팔러 나갔소.”
“아! 교주가 그에게서 물건들을 빼앗은 것이오?”
“비슷하오.”
“서책을 보고 명교의 무공을 익힌 것이었구려.”
“서책 중에는 비밀교도 명부도 있었소. 거기에 적힌 이들을 모두 포섭해야 했지. 허나 단 한 명만 살아 있었소.”
“아! 인효황후!”
“맞소. 원래 사교로 배척받던 명교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비밀리에 믿을 정도로 총명한 여인이었지. 그러던 중 주원장이 명교를 멸하자 원한을 품었소. 주원장이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며 그녀의 아비인 서달도 비밀리에 처리하자 원한은 더 깊어졌소.”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래서 주원장이 그녀의 오라비들에게 벼슬을 내리려 하자 외척을 만들어선 안 된다며 극렬히 거절했다.
“주원장은 며느리의 처신을 마음에 들어 했소. 덕분에 그녀는 살 수 있었지. 오라비들도 한지에 박혀 조용히 살다가 죽을 수 있었고.”
“그리고 교주가 그녀에게 접근해 신분을 드러낸 것이오?”
“그렇소. 뜻밖에 그녀는 여식인 영평공주까지 명교도로 만들었더이다.”
“영평공주는 또 소혜를 명교로 끌어들였겠군. 교주는 그 아이까지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고.”
“맞소.”
“궁금했으나 묻지 못했는데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조간왕 전하는 어떻게 움직인 것이오?”
“하하. 이제 보니 지휘사께선 호기심이 무척 많으시구려. 그동안 어떻게 참았소?”
호도가 흠칫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내가 왜?”
교주는 몽롱하게 변한 호도의 눈을 들여다보며 사이(邪異)하게 웃었다.
“섭혼술(攝魂術) 때문이지.”
“커헉!”
“쉬잇. 조용해야지. 가면서도 시끄러워서야 쓰나.”
촤악-
호도의 입에서 목소리 대신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교주는 그의 심장을 뽑아 움켜쥔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입은 봉했지만 큰일이군. 교주께 이 일을 어떻게 보고하지? 헉!”
교주가 헛바람을 토하며 신법을 펼쳤다.
종잇장 하나 차이로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두 동강 났다.
“어떤 놈이 감히! 흡!”
하얀 가루가 움막 안을 가득 채웠다.
‘이럴 수가. 내 이목을 속이고 어떻게?’
아직 상대의 모습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
하얀 가루가 독이라 판단한 교주는 호흡을 멈추고 벽을 부수려 했다.
그때, 그가 향하려는 쪽으로 하얀 가루가 묻은 철전들이 쏟아졌다.
‘이렇게 절묘한 순간에!’
벽을 부수고 뛰쳐나가다간 독분이 묻은 철전에 맞을 게 분명했다.
‘내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강요하는 거구나!’
그쪽으로 피하면 또 어떤 악랄한 수가 펼쳐질까?
얌전히 따라줄 수는 없는 일.
교주는 손해를 보더라도 밖으로 나가는 걸 택했다.
‘독에 당해도 수하들을 부르기만 하면…….’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엎어지고 있었다.
‘……내가 왜?’
쓰러지며 자신의 발을 확인했다.
두 개 모두 방바닥을 굳건히 디디고 있었다.
‘아무 이상 없는데…… 아!’
그게 문제였다.
몸은 엎어지고 있는데 발은 그대로 있다?
발이 잘려서 그런 것 아닌가!
‘미친!’
뒤늦게 통증이 밀려왔다.
입을 열고 신음을 토하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머리털을 세차게 낚아챘다.
신형을 바로 세우며 아혈과 마혈을 짚었다.
‘대체 어떤 놈이?’
마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것처럼 사나운 인상의 미청년이 눈앞에 나타났다.
미청년은 교주를 노려보다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명교주잖아. 그런데 교주께 이 일을 어떻게 보고하냐고 중얼거린 건 무슨 의미지?”
“…….”
아혈이 제압당한 교주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독기로 똘똘 뭉친 눈빛으로 절대 토설하지 않을 것이란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미청년의 살기가 짙어졌다.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어떻게 된 연유인지 대충 짐작은 가는데 그리 듣고 싶은 내용은 아니거든.”
“…….”
교주의 두 눈에 미청년의 얼굴이 확대됐다.
“그래도 들어야 해서 말이야. 같이 한번 놀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