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53화 (352/569)

2부 82화

환한 미소

휘익-

정광은 진화의 행색을 확인하고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진 공공. 생각보다 좋은 대우를 받고 계시네요.”

금의위 지휘사가 갖은 방법을 다 써서 정광이 짚었던 마혈과 아혈을 해혈했다더니.

진화는 별다른 조치 없이 의자에 편히 앉아 정광 일행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이 열리고 평소보다 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은 대우라니요. 단전이 박살 났습니다만.”

정광이 정색했다.

“그걸로 끝난 게 어디예요. 사지의 근맥도 멀쩡하고 손가락 발가락 다 있으신데. 피부도 안 벗겼네. 금의위의 손속이 맵다더니, 듣던 것보다 온화한 분들이시네요.”

진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범인(凡人)과는 기준이 많이 다르십니다.”

“진 공공도 마찬가지죠. 목소리가 원래 이 정도 크기였나 봐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그런데도 크게 내시는 건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 같은데.”

“…….”

정광은 진화의 눈빛이 변하는 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구나. 굳이 고문할 필요가 없겠네요. 좋게좋게 가죠.”

잠시 침묵하던 진화가 허리를 천천히 세웠다.

단전을 파괴당한 고통 때문에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으나 개의치 않고 끝끝내 해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그 끝에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태손이 있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으시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고 있던 황태손은 진화의 달라진 말투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입이 열리며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종종 고마움을 표한 것 기억하나? 자네는 내게 참 잘해줬어.”

“…….”

“어릴 때는 놀이 상대가 돼줬고 장성한 후론 적절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지. 분명 그랬는데…….”

황태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네 이놈! 나 역시 네게 섭섭하게 대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역도가 된 것이냐?”

“역도라니. 오해요.”

진화는 황태손을 응시하며 또박또박 설명했다.

“먼저 그대에게 유감은 없다는 걸 분명히 하겠소. 주씨가 저질러 온 천인공노한 일들이 비수가 되어 돌아온 것이외다.”

“무어라?”

“나는 과거 주원장에게 토사구팽당한 개국공신 가문의 생존자요.”

가문이 멸문당하고 어떻게 살았었는지.

사부에 대한 내용은 물론이오, 아비와 가신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거세했다는 얘기까지.

진화는 숨김없이 털어놓고 나지막이 덧붙였다.

“내 죄를 묻기 위해 선조들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할 생각은 버리시오. 그분들의 묘는 그대의 증조부에 의해 풍비박산이 난 지 오래니까.”

황태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끝일 거라 생각하지도 마시오. 주씨에 의해 아픔을 겪은 이들이 모두 죽었을 것 같소? 주원장이 손을 쓴 지 수십 년이 흘렀으니 어렸던 아이들은 내 나이쯤 됐겠지. 주체에게 당한 가문의 생존자들도 자라고 있을 것이오. 그들이 대를 이어 방문할 것이니 목을 씻고 기다리는 게 좋을 것이외다.”

증조부와 조부의 잔인한 숙청과 그 대가로 돌려받게 된 것들을 피해자에게 직접 들은 황태손의 얼굴이 미묘하게 경련했다.

‘너무 심한 처사였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한이 이렇게까지 깊었을 줄이야…….’

태조와 영락제는 수많은 숙청 끝에 강력한 황권을 손에 넣었다.

그 황권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된 황태손은 진화의 담담하면서도 한 맺힌 말을 들으며 가슴이 저리는 한편 전신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진화는 그런 황태손을 지켜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대의 잘못은 아니나 어쩌겠소? 천륜에 따라 그대의 몫이 된 것을.”

강력한 황권을 물려받는 반대급부로 짊어져야 할 업보였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소. 아니, 그대는 더 악랄하게 칼을 휘둘러 댈지도 모르겠군. 주씨의 피가 어디 갈까.”

황태손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허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주씨의 피가 어디 가겠느냐는 마지막 말이 가슴을 때려서였다.

‘나도 정말 그렇게 될까?’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있었다.

‘황상께서는 독심을 더 키워야 한다고 꾸준히 지적하셨지. 그래야 지킬 수 있다고, 자리에 올라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라고.’

솔직히 싫었다.

피가 아니라 덕으로 천하를 다스리고 싶었다.

‘그래. 그럴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확신이 안 섰다.

낮에 근신전에서 숙부인 친왕들과 인사를 나눌 때만 해도 독기를 품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뿐이랴. 곧 실행할 예정이었다.

절로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 나도 결국 똑같은 것인가.”

“아뇨.”

정광의 말에 황태손이 웃었다.

“또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것이오?”

“제게 그런 재주는 없는데요.”

“헌데 시기적절하게 어찌 그런 말을 하오?”

“그냥 짐작한 거죠. 원래 마음먹으신 게 있는데 진 공공의 말을 듣고 흔들리신 거죠?”

“부끄럽지만 그렇소.”

“저하답지 않네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저하께선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시는 분이잖아요.”

“그렇다고 생각했소만. 지금은 아니외다.”

“그것도 잘못 생각하시는 건데. 찬찬히 설명해 드리죠.”

정광은 황태손을 똑바로 응시했다.

“살다 보면 손익에 따라 뱉은 말을 뒤집어야 할 경우가 허다한데 그걸 지킨다는 건 두 가지 능력이 있다는 걸 의미하죠.”

반드시 지킬 수 있는 약조만 하는 판단력과 그 판단력이 빗나가더라도 어떻게든 지켜내는 뚝심이었다.

“저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일단 판단을 잘못했다고 치자고요. 다 끝난 건가요?”

황태손이 크게 심호흡한 뒤 중얼거렸다.

“그렇지. 지켜내는 뚝심이 아직 남았군.”

“바로 그거죠. 저하라면 가능하실 것 같은데.”

“……깨우쳐 줘서 고맙소. 잠시 생각 좀 하고 오겠소이다.”

정광은 황태손이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고민해라. 애쓴 보람은 있어야지.’

황태손을 자객을 잡기 위한 미끼 겸 진법 발동 수단으로 쓰되 목숨 또한 살리기 위해 생에 대한 의지를 불어넣었다.

자연히 독심도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황태손은 한왕과 조간왕을 숙청하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이는 정광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한왕이야 상관없지만 조간왕은 곤란해. 어떻게 마음을 돌릴까 생각 중이었는데 진화가 자객이어서 다행이야.’

암왕에게 진화의 사정을 듣고 계획을 세웠다. 그대로 황태손에게 화두를 던졌으니 잘되길 바라며 지켜볼 일만 남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자오와 함께 한쪽에 묵묵히 서 있는 혜진을 보며 생각하는데 진화의 시선이 느껴졌다.

“진 공공. 저한테도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없을 리가 있나.

대업을 망친 주범인데.

진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처음부터 나를 의심한 것이오?”

“아뇨. 눈치 빠르고 똑똑한 분이라 여겼지, 세작 냄새는 못 맡았죠.”

정광은 턱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배신하신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신 거니 그럴 만도 하네요.”

“그대의 거침없는 언행이 이렇게 좋게 들리는 날이 올 줄이야.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 말해줘서 고맙소.”

“고맙긴요. 제가 다 망쳤는데. 원망스럽지 않으세요?”

진화가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이곳에 끌려와 갇힌 뒤 많은 생각을 했소. 처음엔 그대를 저주했소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틀린 생각이었소. 태풍이나 해일처럼 사람의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상대를 원망해봐야 뭐 하겠소? 하지만…….”

진화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조금 전에 이용당한 건 원망스럽소이다. 황태손에게 덕 있는 정치를 하도록 부추기는 것이오?”

“글쎄요.”

정광은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부정했다.

“부추긴 게 아니라 저하께서 본연의 품성으로 대명을 다스리시길 원하는 거죠.”

“천하의 평안과 그대의 행복을 위해?”

“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그보다 괜찮으시겠어요?”

더 털어놓을 것이 있든 없든 진화는 모진 고문을 받게 될 게 뻔했다.

진화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괜찮지는 않지만 받아들여야겠지. 그러는 그대는 괜찮겠소?”

“뭐가요?”

진화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무 큰 능력을 보이셨소. 황제는 곧 죽을 테니 그렇다 치고. 황태손은 그대를 점점 두려워하게 될 것이오. 앞날이 기대되는구려.”

무척 무서운 얘기였지만.

정광도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소 피곤하겠지만 그것도 재밌겠네요.”

“……천하의 평안은?”

“제 행복이 먼저죠.”

“……하. 하하! 하하하!”

진화는 점점 크게 웃은 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과연 진옥룡. 되지도 않는 수를 부려 미안하오. 황태손은 그런 위인이 아니니 안심하시오.”

그때, 황태손이 들어왔다.

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정광을 주시했다.

“진옥룡. 그대 앞이니 말을 편하게 하겠소. 선대의 업보는 내가 치르고 후대를 위해 객기를 부려보려 하오. 누구도 배신할 생각을 꿈꾸지 못할 만큼 강한 힘을 기르고, 그 힘을 바탕으로 덕을 베풀어 천하를 다스릴 것이오.”

“그런데도 역도가 생기면요?”

“차등을 두려 하오. 죄가 있는 자는 죽이되 없는 자는 살려야겠지. 살린 이에겐 힘과 덕으로 복수를 허락지 않을 것이외다. 다른 이들에겐 아버님께서 근신전에서 하셨던 충고대로 줄 건 주고 받아낼 건 받아내며 최소한의 선이라도 지키겠소.”

“멋지네요. 그런데 한왕 전하와 조간왕 전하는 애초 계획대로 처리하실 건가요?”

“그 점도 고민을 했소만. 그분들이 사셔봐야 얼마나 더 사시겠소? 목숨까지 빼앗을 생각은 없소. 혈족에겐 정을 베풀 것이오.”

정광이 씩 웃었다.

“혈족에겐 그래야죠. 저하께선 성군이 되실 거예요.”

황태손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내 얼굴에 금칠을 하다니. 그대가 원하던 대로 일이 풀린 모양이구려.”

“아뇨. 저하께서 원하시던 대로 된 거겠죠.”

정광의 말대로였다.

“맞소. 나를 바꾸지 않고 세상을 바꾸고 싶었소. 그렇게 확실히 마음을 먹었으니 앞으로 잘 부탁하오.”

정광은 바람이 불자 돛을 돌렸다.

“저하. 밤이 깊었는데 그만 가시죠. 내일 몽고가 밀고 내려올 거예요. 아침부터 조회가 열릴 테니 황상께 빨리 보고하신 뒤 푹 주무세요.”

황태손은 어이없는 얼굴로 정광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좋소. 내일 다시 얘기합시다.”

정광이 뭐라 하기 전에 황태손은 은근슬쩍 시선을 돌려 진화를 쏘아봤다.

“덕으로 천하를 다스리겠다고 맹세했다만. 내게 직접 검을 휘둘렀던 너는 용서할 수 없다.”

“알고 있소. 나를 용서하면 그건 덕이 아니라 멍청한 것이겠지.”

“남길 말은?”

진화는 담담한 눈으로 황태손을 바라보다가 탄식했다.

“주씨의 치세가 길어질 것 같아 원통하오. 허나 백성들에겐 잘된 일이겠지. 천자와 천자가 될 자는 못 죽였으나 당분간 나 같은 이들이 늘어나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오.”

“……잘 들었다.”

황태손은 몸을 돌려 방을 나가다가 중얼거렸다.

“되도록 고통 없이 보내 드리겠소. 잘 가시오, 진 첩형.”

* * *

정광은 황태손에게 허락을 받고 한왕, 조간왕, 영평공주의 상태를 확인했다.

애초에 한왕은 관심 밖이었으니 대충 보고 지나가고.

소혜가 어찌나 절묘하게 심공을 썼는지 조간왕도 영평공주도 아직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정말 그럴듯한 심공이야.’

어떻게 펼치는 것인지 전에 한 번 물어보려 했다가 때를 놓쳐 그냥 지나쳤었다.

‘황궁 일이 전부 끝나면 알아봐야지. 황궁무고(皇宮武庫)에도 들어가고.’

명색이 황궁무고인데 쓸 만한 게 얼마나 많을까?

일단 소혜를 불러내 상황을 다시 확인했다.

“태의들이 야단법석 부리지 않았어요?”

“그랬습니다만 두 분 모두 의식을 잃으셨을 뿐, 호흡도 맥도 정상이어서 물러났습니다. 아마 내일쯤이면 깨어나실 겁니다.”

“힘 조절을 너무 살짝 하셨네.”

“네?”

“아직 정리가 안 됐거든요. 심공, 하루에 두 번 쓸 수 있으시죠? 내일도 부탁드려요.”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푹 주무세요.”

혹시 또 있을지도 모를 자객을 대비하기 위해 황태손 역시 건청궁에서 묵게 된 상황.

당연히 정광 일행도 방을 배정받았다.

정광은 자신의 방에 이르자 자오와 혜진에게 인사했다.

“그럼 내일 봬요.”

방에 들어가려는 그를 혜진이 잡았다.

“단주. 감사합니다.”

“아직 아니죠. 황태손 저하께선 말씀을 번복하지 않으시겠지만 조간왕 전하는 어떻게 나오실지 몰라요.”

“여기까지 애써주신 것만 해도 감사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뭐 그렇다면야.”

빙그레 웃으며 지켜보던 자오가 물었다.

“단주. 황상께 말씀드렸던 대로 내일 사부의 안가(安家)에 가보실 생각입니까?”

“네.”

“저도 따르겠습니다.”

“아뇨. 자오와 혜진 소저는 다른 할 일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각각 조간왕 전하와 영평공주를 지켜주세요.”

자오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해했습니다. 혹시라도 의식이 돌아오실 위험에서 지키라는 말씀이군요.”

“네. 소혜 소저는 몸이 하나라 두 분을 동시에 돌볼 순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혹시 정신을 차리는 분이 계시면 살짝 수혈을 짚은 뒤 소혜 소저를 불러 심공을 쓰게 하고 해혈하겠습니다.”

“역시 자오. 음흉한 음모 쪽에 소질이 있으시네요.”

“……단주께서 꾸민 음모 아닙니까?”

“그걸 알아채셨으니 저보다 더 대단하신 거죠. 두 분 모두 잘 부탁드려요.”

정광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피딱지가 앉은 상처들에 금창약을 다시 바른 뒤 운기조식했다.

‘이 정도면 됐어. 근데 얘는 왜 안 와?’

마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흑서가 나타났다.

“교주! 늦어서 죄송합니다!”

“응. 뭐 하다 늦었어?”

“황제에겐 설명을 끝냈는데 금의위 지휘사가 자꾸 꼬치꼬치 캐물어서 그만…….”

“지휘사는 됐고. 황제가 믿어?”

흑서의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의심은 하는데 득이 됐으니 일단 넘어가는 눈치였습니다. 더구나 속하가 교주와 합을 맞추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그를 지키지 않았습니까?”

“황제가 생각이 많아졌겠네.”

“내일이라도 교주께 뭔가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라지. 새로운 임무를 줄게.”

흑서가 신형을 바로 했다.

“영광입니다, 교주!”

“황제를 지켜.”

“……네? 아! 죄, 죄송합니다! 이미 지키고 있는데 또 말씀하셔서 그만 실언을 했습니다.”

“제대로 지키라고. 황제는 곧 죽을 테지만 권력욕이 강한 늙은이라 죽기 직전에야 황태손에게 양위(讓位)할 거야.”

“아! 황제가 유언을 남길 때 혹시라도 누가 장난질을 칠까 봐 걱정하시는 거였군요. 이해했습니다.”

“응. 엉뚱한 놈이 황제가 되면 어떡해.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은 일이지. 잘해낼 거라 믿을게. 상도 줄 테니 열심히 하고.”

“만세만세만만…….”

“시끄러워. 가서 자라.”

“……존명!”

정광도 잤다.

다음 날 아침.

푹 자고 일어난 정광은 넝마처럼 변한 금의위 관복을 벗어 던지고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역시 관복은 안 맞아. 한결 낫네.’

상쾌한 기분으로 건청궁 밖으로 나갔는데.

동방장이 퀭한 눈을 억지로 부릅뜨며 개들과 함께 서 있는 것 아닌가!

“어?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동방장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았다.

“지키라며!”

“저런. 잠은 주무셔야죠.”

“이제 와서 그게 할 말이냐?”

“늦다고 생각했을 때가 제일 빠른 법이죠. 곧 조회가 시작될 테니 개들도 좀 재우세요.”

동방장이 씹어 내뱉듯 감사를 표했다.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나는군.”

“뭘 또 그런 걸 가지고. 이따 봬요.”

정광은 암왕의 안가를 뒤지기 위해 황궁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건 표면적인 이유였고.

사실은 암왕이 몰래 알아놨다는 밀약의 은신처로 향하는 것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계속 신경을 긁어대던 쥐새끼들에게 한 걸음 다가갈 기회야.’

이 쥐새끼들은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에 맞는 방식으로 상대해야 할 터.

그래서 아무에게도 얘기 안 하고 홀로 가는 것이었다.

정광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얘네들은 전생처럼 다뤄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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