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81화
저는 제 일을 할게요
정광은 황궁 무장들에게 모든 일이 끝났음을 알렸다.
“자객을 잡고 필요한 정보도 얻었어요. 별다른 피해가 없어서 다행이네요.”
“…….”
정광의 남다른 배포에 무장들은 할 말을 잃었다.
‘장락궁(長樂宮) 후전(後殿) 동배전(東配殿)이 두 동강 난 뒤 박살 났는데 뭐?’
‘황궁이 개판이 되다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어이없어하던 무장들은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까 자객이 던졌던 우모침과 독분에 당한 분 없으시죠? 개도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그의 말대로였다.
‘우리가 차륜전을 펼치겠다고 달려들었으면 떼죽음을 당했겠지.’
‘진옥룡이 아니었으면 흉수를 막지도, 잡지도, 정보를 캐내지도 못했을 게야.’
그 ‘정보’라는 것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어림군 부지휘사를 필두로 무장 전원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감사하오, 진옥룡.”
“그대 덕분에 대명이 큰 화를 피했소.”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으리다.”
정광도 우아하게 답례했다.
“뭘요. 상처 좀 치료하고 운기요상(運氣療傷) 할게요.”
부지휘사와 무장들이 입을 열 틈도 없었다.
정광은 눈부신 속도로 금창약을 덕지덕지 바른 뒤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자오는 물론이오, 혜진까지 달려와 호법을 서자 부지휘사는 한숨을 쉬었다.
‘저들을 믿고 중인환시 속에 저러진 않겠지.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아니면 그만큼 몸 상태가 안 좋은 것일지도 몰랐다.
무장들 모두 진심으로 우려할 만큼 정광의 행색은 엉망진창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칠갑을 하고 있군.’
‘대단한 상처는 없는 것 같아도 그 수가 많아.’
‘찢어진 옷 틈으로 보이는 저 누런 비늘들이 그 유명한 보의인가?’
‘저것 때문에 상체는 괜찮아 보이지만 그 속의 몸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텐데.’
시간이 흘렀다.
어둑어둑해졌던 하늘이 완전히 검게 변했다.
무장들은 화톳불을 밝히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광이 눈을 뜨고 일어섰다.
아까의 흉험했던 싸움과 다르게 부드럽게 가라앉은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계속 그를 지켜보고 있던 부지휘사가 급히 물었다.
“진옥룡. 괜찮소? 조금이라도 나아졌소이까?”
“네. 움직일 만해요.”
부지휘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안 되겠군. 그 몸으로 무리할 생각하지 마시오. 황상께 태의(太醫)를 보내주시라 주청할 테니 따뜻한 곳에 들어가서 쉬고 계시구려.”
정광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럴 시간 없어요. 자객에게 들은 정보를 황상께 말씀드려야 하니 그만 갈게요. 뒷정리를 부탁드려요.”
어림군 지휘사의 눈이 커졌다.
“지금 바로 말이오?”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서요.”
황제까지 들먹이는데 어쩔 수 있나.
어림군 부지휘사가 대표로 답했다.
“알겠소. 갑시다.”
일부는 남고 일부는 정광과 함께 건청궁(乾淸宮)으로 향했다.
동방장과 그가 이끄는 개떼도 함께였다.
부지휘사가 개들을 힐끔거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저 녀석들을 건청궁에까지 데려가야 한다니…….”
동방장이 코웃음 쳤다.
“흥. 네놈들 같은 식충이들보다는 훨씬 쓸모 있는 아이들인데 무슨.”
황궁을 수호하는 무장들에게 식충이들이라니?
부지휘사가 화를 내기 전에 정광이 끼어들었다.
“부지휘사님. 이해해 주세요. 저보다 더 위아래가 없는 분이거든요.”
“…….”
확실히 그래 보이긴 했다.
정광이 예의 바르게 느껴질 만큼 건방진 놈이 있을 줄이야.
더구나 별다른 역할을 못 한 무장들과 달리 개들은 큰 공을 세웠기에 반박하기도 마땅찮았다.
“내가 실언을 했소. 사과할 테니 그대도 언행을 조금만 주의해 주시오.”
동방장이 아니라 정광이 대답했다.
“물론이죠. 반드시 그러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죠, 동방장님?”
두 손을 매만지며 묻는 데 아니라 할 수 있나.
동방장이 봐준다는 표정을 애써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정광은 끊겼던 생각을 이었다.
‘일단 몸 상태는 괜찮고.’
소모했던 내공을 다시 모은 데다 상처도 타박상도 대수롭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암왕의 유품도 챙겼으니 당장 해야 할 일은 다 했네.’
자오와 혜진을 시켜 호법을 서는 척 주위를 가리게 만든 뒤, 곤륜 비전 섬전수(閃電手)로 암왕의 소지품을 몽땅 털었다.
‘문제는 다음 것들인데…….’
영평공주, 조간왕의 처우도 허투루 다룰 순 없었으나 암왕이 말해준 밀약의 인물을 잡는 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외상을 치료하고 운기요상 하느라 이미 때를 놓친 상황.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완전치 않은 몸으로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황제를 만나는 건 더 위험하지.’
절대열세의 상황에서 살아남아 조카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능력 있는 자였다.
엄청난 숙청을 단행해 황권을 단단히 다질 만큼 과감하고 잔인한 면도 있었고.
그런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죽여달라 청하는 것과 다름없으리라.
‘암왕을 통해 진화의 사정도 들었겠다, 하나씩 해치우자.’
이렇게 생각을 정리한 정광과 달리, 혜진은 건청궁에 가까워질수록 복잡해지는 마음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모르겠구나.’
비록 친부라 하나 오늘을 포함해 단 세 번밖에 못 만난 조간왕에게 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가 과거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아미산으로 보냈고, 이번에도 같은 목적으로 쫓아내려 했을 것이라는 정광의 추론이 사실이라 해도 고마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저 답답했다.
그가 어떤 처분을 받게 될 것이며 자신은 어떤 감정을 갖게 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치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 홀로 있는 것 같았다.
‘다 받아들이겠다고 해놓고 이게 무슨 짓이냐.’
자신을 스스로 책망하던 혜진은 그녀와 비슷한 일을 경험한 사람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아주 담담한 얼굴로.
-자오 대협.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게요? 물론이지요.
혜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음을 보냈다.
-절대 대협을 책망하는 게 아니라는 걸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부께서 돌아가셨는데 어찌 그리 담담하십니까?
자오는 눈치가 빨랐기에 그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소저와 저는 경우가 다릅니다.
-다르다고요?
자오의 전음이 빨라졌다.
-그렇습니다. 제 어린 시절을 잔인하게 지배했었고 도망친 후에도 머릿속에 악몽처럼 들어차 있던 분입니다. 사실 받은 은혜보다는 쌓인 원한이 훨씬 더 크지요. 제가 직접 죽일 수…… 귀천시켜 드릴 수 있었으면 진작 보내 드렸을 겁니다.
-아…….
-비슷한 점도 있긴 하군요. 한편으론 부딪힐 일만 없으면 건강히 살아 계시길 바라기도 했습니다. 천륜과 비견되곤 하는 사제(師弟) 관계라 그럴 것입니다.
-……천륜. 그렇군요.
자오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제 사부는 살행의 도구로 저를 키웠습니다. 그랬는데도 그런 감정을 느꼈지요. 하물며 소저의 경우는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미 결심을 했다고 믿었어도 계속 고민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
당연한 일이라.
혜진은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다가 불쑥 물었다.
-대협. 지금 마음은 어떠십니까?
-글쎄요.
자오는 정말 모르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하다가 살짝 웃었다.
-사부가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비는 마음과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기대하는 마음이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솔직히 후자 쪽이 훨씬 크지요. 단주가 또 어떤 사고를 칠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도 소저도 식은땀깨나 흘릴 것 같습니다만.
굳어 있던 혜진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난감함과 기대감이 뒤섞인 흐릿한 미소였다.
혜진은 자오에게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대협.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하하. 별말씀을. 단주 흉을 본 것밖에 없는데요.
아니었다.
자오는 혜진에게 정말 큰 도움을 줬다.
정답이 없는 문제에 답으로 수다를 늘어놨을 뿐이지만, 그 수다에는 어떠한 강요도 없었다.
그리고 미소가 지어지는 미래를 상상하게 해줬다.
혜진은 어느새 코앞에 이른 건청궁을 보며 다짐했다.
‘일단 만나는 거야.’
* * *
정광이 나타나자 건청궁이 술렁였다.
제일 먼저 뛰어나와 말을 건 사람은 금의위 지휘사였다.
“드디어 왔군. 자객을 척살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정말 고맙구나. 수고했어.”
“어? 말투가 살짝 부드러워지셨네요?”
잠시 동공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지휘사의 말투가 원래의 딱딱한 것으로 돌아갔다.
“개들을 이용해 자객을 찾았다더니. 또 다른 자객이 있을지도 몰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군.”
“네. 이미 개판이 됐으니 그래도 괜찮죠?”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저 개들이 공을 세운 건 엄연한 사실이었기에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렇고. 자객이 무어라 토설했느냐?”
“어차피 황상께 말씀드려야 하니 함께 들으시죠. 진 공공은 문초하셨나요?”
지휘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체 무슨 수법으로 놈의 마혈과 아혈을 짚은 것이지? 조금 전에야 겨우 해혈을 했다.”
“저도 함께 들으면 되겠네요. 가시죠.”
정광은 동방장에게 건청궁 주위를 철통같이 경계하라 명했다.
동방장은 입술을 삐죽이며 개들에게 휘파람으로 명했고.
휘이익- 삐익-
무장들이 아연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개들이 배정된 자리로 가서 당당히 섰다.
“거참. 장관이네요.”
정광의 감탄에 금의위 지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장섰다.
“어서 가자.”
“네. 황상께선 어떠세요? 피곤해 보이시던데.”
“……좋지 않으시다.”
“황태자 전하는요?”
“……직접 보는 게 더 빠를 거다.”
지키기 쉽게 황제 삼대가 한 방에 모여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안색이 안 좋았다.
특히 황태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태의들이 잔뜩 달라붙어 침을 꽂고 뜸을 들이는 등 부산을 떨고 있는데도 호흡이 가늘고 불규칙한 게 곧 귀천할 것 같았다.
‘그래도 잘 버텼네.’
정광은 황태자의 손을 꼭 잡고 끝없이 말을 건네고 있는 황태손을 일견한 뒤 황제 앞에 섰다.
“황제 폐하 만세만세만만…….”
“되었다.”
“아. 폐하께서도 이거 싫어하시는구나.”
폐하께서도라니?
평상시였다면 무슨 말인지 따졌을 테지만 지금의 황제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정광의 상처에 앉은 피딱지들을 유심히 살피던 그는 이마를 좁힌 뒤 입을 열었다.
“자객의 정체는?”
“암왕이요.”
“그럴 거라 생각했다. 놈이 무엇을 토설했느냐?”
“어르고 달래서 겨우 들었어요. 귀가 좀 많은데 괜찮을까요?”
“상관없으니 말해라.”
황제의 무심한 말에 태의들, 환관들, 궁녀들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사, 살인멸구를 하시려는 거구나!’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들의 낯빛을 확인한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공으로 소리를 차단하라는 말씀이네요. 그걸 깜빡하다니. 저도 참.”
정광은 내공으로 기의 막을 만든 뒤 눈썹을 꿈틀거리는 황제에게 설명했다.
“태의 분들이 겁먹어서 엉뚱한 혈도에 침을 꽂을 뻔했잖아요. 화나신 게 당연하지만 좀 가라앉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
황제는 정광을 쏘아보다가 표정을 풀었다.
“네 말이 옳다. 짐이 이렇게 마음을 못 다스리는 때가 올 줄이야.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 것이겠지.”
그에게 내공을 쏟아붓고 있던 병필태감이 나직이 말했다.
“폐하.”
“말하지 않아도 안다. 장암, 네 이 녀석. 그러는 와중에도 짐을 책망할 힘이 남아 있구나.”
“그게 아니오라…….”
“그만. 진옥룡, 자객이 무어라 했느냐?”
“어림군 지휘사님이 배반자래요.”
“역시 그랬군.”
황제는 시선을 금의위 지휘사에게 돌렸다.
정광과 나란히 서 있던 그가 바로 답했다.
“그자의 장원에 사람을 보내 식솔들을 확보했습니다.”
“놈 얘기는 안 하는 걸 보니 식솔들을 버리고 도주했나 보군.”
“폐하. 무능한 소장을…….”
“쓸데없는 소리. 그대가 제일 유능하다. 놈의 종적은 못 찾았느냐?”
“의심받는 걸 눈치채고 멀리 떠난 것 같습니다. 동창이 뒤쫓고 있으나 잡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진 못하는 상황입니다.”
‘동창’이라는 말에 황제의 수염이 떨렸다.
“진화 그놈도 역도였을 줄이야. 장암. 너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놈들의 인내력과 치밀함에 감탄하는 것이니라.”
황제는 병필태감을 다독여 준 뒤 정광에게 물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지?”
“황궁에서 탈출한 뒤 몸을 숨길 안가(安家)의 위치와 의뢰인과 접촉하는 방법요.”
“지금은 쓸모없어진 것들이군.”
“그렇죠.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자마자 다 도망쳤을 테니까요.”
황제가 정광을 노려봤다.
“겨우 이런 것들 때문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막았을 리는 없고. 무엇이 더 있는 것이냐?”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으니 제가 가볼게요.”
“이왕 늦은 것, 적을 방심시키고 치는 것도 좋겠지. 그리고?”
“몽고가 내일 밀고 내려올 거라 하던데요.”
황제, 병필태감, 금의위 지휘사가 눈을 크게 떴다.
어차피 북방에서 방비를 갖추고 있으니 알게 될 일이었지만 바로 내일이란 얘기를 들으니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런 그들에게 정광이 포권했다.
“그럼 수고하세요. 저는 제 일을 할게요.”
“…….”
“모두 바쁘실 것 같은데, 이왕 하는 김에 진 공공 문초는 제가 황태손 저하를 모시고 할까요?”
삿된 마음으로 진화를 고문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황태손과 함께하겠다는 말에 황제는 잠시 고민했다.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것도 좋겠지. 깨끗한 화원에서 커온 녀석에게 좋은 자극이 될 것이야.”
손자가 피와 비명을 경험하고 독심을 키우길 원하는 할아비라니.
다른 이라면 혀를 찰 일이었지만 정광은 달랐다.
즉시 황태자를 돌보고 있는 황태손에게 가, 사정을 설명했다.
“황상께서 저하를 많이 아끼시네요. 진 공공을 문초할 건데 저하께서도 참관하시래요.”
“지금 말이오?”
“네. 좋은 경험이 되실걸요.”
황태손은 황제의 의도를 바로 눈치챘다.
‘아버님의 곁에 있고 싶거늘. 피를 보는 게 더 중요하다 여기시는 건가…….’
황제가 원망스럽지만 어쩔 수 있나.
의식을 잃은 아비의 손을 힘주어 쥔 뒤 신형을 일으켰다.
“알겠소. 갑시다.”
황태손은 정광, 자오, 혜진과 함께 진화가 감금돼 있는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정광이 장담한 대로 정말 좋은 경험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