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51화 (350/569)

2부 80화

입을 풀어야 말하지

무공에는 강(强), 유(柔), 절(絶), 쾌(快), 패(覇), 환(幻), 변(變), 중(重) 등 수많은 묘리가 있다.

어떤 문파든 어떤 무인이든 간에 이런 묘리들을 조합하여 사용하는데, 추구하는 방향과 품고 있는 특성에 따라 이것들 중 몇 가지를 더 중시하여 익히게 된다.

영인문은 살문(殺門)답게 절(絶), 쾌(快), 강(强)을 중시했다.

일격필살의 빠르고 강한 공격으로 상대를 죽여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공격을 하기 위해선 쾌(快), 환(幻), 변(變)을 중점으로 한 보법, 신법, 은신술이 필요하기 마련.

정광은 암왕을 상대하며 그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생각보다 더 잡기가 힘드네.’

암왕은 빠르고 변화무쌍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왼쪽으로 오나 싶더니 오른쪽으로 돌고, 다가올 것처럼 기세를 키웠다가 훌쩍 뛰어 물러난다.

간간이 틈을 노려 찌르거나 휘두르는 철괴(鐵拐)들도 막기 까다로웠다.

문제는 그것들만이 아니었다.

‘암기!’

가느다란 우모침(牛毛針)들이 쏟아졌다.

‘독까지?’

냄새만 맡아도 속이 메스꺼워지는 가루가 휘날렸다.

‘환대가 지나친데.’

이쯤이면 당황해야 하건만.

정광에겐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들이었다.

‘보답을 해야지.’

황금빛으로 뒤덮인 운룡으로 자신만의 태극을 그렸다. 우모침들을 휘감아 원에 가둔 뒤 그대로 떨쳐 되돌려줬다.

왼손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섬전수(閃電手)를 연달아 펼쳤다. 밀려오는 독분을 모조리 밀어내 암왕에게 선물했다.

당연히 암왕은 받지 않았다.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우모침들과 독분이 그가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정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감에 기감까지 더해 팔방을 살폈다.

흐릿한 기운이 떠도는 게 느껴질 뿐, 제대론 된 기척이 잡히지 않았다.

자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암습 없이 정면 대결을 벌여도 여전히 강하다고 자부한다더니.’

틀린 말이었다.

암왕은 정면으로 싸워도 강하다고 살수로서의 능력을 버리는 바보가 아니었다.

‘결국, 암습하는 걸 기다렸다가 받아쳐야 한다는 얘기인데…….’

하지만 정광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불리해져.’

살아온 세월이 있는 만큼 내공은 암왕이 위였다.

‘황궁 무장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수준 차이가 좀 많이 나야 말이지.

암왕이 도주하지 못하게 진을 펼치고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병필태감이나 금의위 지휘사 같은 진짜 고수가 있으면 해결될 문제지만, 그들은 황제 삼대를 보호하고 있지 않은가.

‘더 오래 끌어봐야 좋을 게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선공으로, 한 호흡으로 끝내야 했다.

‘그러려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하는데…….’

정광은 금의위 무장들 틈에 있는 한 사람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정광의 명을 따랐다.

동방장의 입에서 휘파람이 흘러나왔다.

휘이이익-

함께 있던 개들이 일제히 코를 킁킁거리더니, 암왕의 상처에서 풍기는 피 냄새를 맡고 그가 은신한 곳을 노려봤다.

왈왈왈!

개들이 짖었을 때, 정광은 이미 그곳을 덮치고 있었다.

전력을 다한 검격이 암왕이 숨어 있는 일대를 휩쓸었다.

사악-

“망할!”

암왕은 복면이 베이며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야 말문이 트였다.

“개새끼들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분노 어린 외침과는 달리 그의 눈은 냉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광도 그랬다.

아쉬움은 느꼈지만 실망하진 않았다.

일격으로 못 쓰러뜨리면 연환기로 박살 내면 되니까.

또 은신하는 걸 막으려면 몰아쳐야 했다.

‘절(絶), 쾌(快), 강(强)이다.’

평소 정광이 무공의 묘리들에서 중요시하는 건 어느 몇 개가 아니라 전체의 균형 있는 조화였다.

그것은 곧, 모든 묘리를 제대로 익혔다는 얘기. 각각은 물론이오, 연달아 펼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내공은 이미 한계까지 끌어 올린 상황.

살기를 개방해 암왕을 옭아맸다.

태청용형검(太淸龍形劍)의 일식으로 그의 가슴을 노렸다.

쩌엉!

암왕이 두 개의 철괴를 십자로 교차해 운룡을 막았다.

그의 눈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위력에 당황한 것이리라.

정광은 운룡에 힘을 주며 왼손바닥을 내밀었다.

선운비뢰장(仙雲飛雷掌).

선운(仙雲)의 우아함은 잠시 배제하고 비뢰(飛雷)의 속도와 위력만 담은 변형 장력이 암왕의 단전을 향해 쏘아졌다.

암왕의 눈썹이 솟구쳤다.

철괴들을 억지로 돌렸다. 대치하고 있던 운룡을 뿌리치고 보법을 펼쳐 옆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은신술을 다시 펼쳐 숨으려고 하는데.

정광이 놔주지 않았다.

암왕에 의해 밀려났던 운룡에 힘을 실었다. 신형까지 함께 돌리며 운룡을 휘둘렀다.

암왕의 눈에 찬란하게 빛나는 금룡이 확대됐다.

그의 눈에 악독한 빛이 맺혔다.

‘감히 내게 내공으로 덤비다니!’

받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받아주는 걸 넘어 분쇄하기로 했다.

“갈!”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가슴 앞에 모았던 철괴들을 움직였다.

하나는 금룡의 이빨인 검날을 향해 휘둘렀다.

다른 하나는 금룡의 주인인 정광의 심장을 향해 내질렀다.

정광은 당황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잡고 있던 운룡의 검파(劍把)에 한 손을 더했다. 운룡이 더 빠르고 강하게 암왕의 철괴와 부딪히려 했다.

암왕의 눈이 빛났다.

정광의 이번 검격은 지금까지의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위력을 품고 있었다.

철괴가 버텨줄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다.

하지만 지금 더 큰 위험에 빠진 건 정광이었다.

‘보의를 믿고 나대는 건가? 이런 미친놈을 봤나.’

천하제일의 보의를 입고 있으면 뭐 하는가? 갈비뼈를 부수고 심장까지 터뜨려 버리면 그만인 것을.

시간을 끌면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동귀어진(同歸於盡)을 노리는 것이리라.

‘나도 좀 위험한데.’

갈등은 순간이었다.

어차피 황궁에서 탈출하긴 힘든 상황, 그토록 염원하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흉수를 단죄해야 했다.

‘저놈의 심장을 박살 내고 피하면 돼!’

피할 여건이 안 되면 어깨로 받아내면 된다.

팔이 날아가겠지만 고금제일천재라 평가받는 이놈의 목숨과 바꾸면 많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않은가?

‘죽어라!’

금룡이 철괴에 박히고, 다른 철괴가 정광의 가슴에 꽂히려는 그때!

정광이 두 손으로 쥐고 있던 금룡을 놓고 신형을 낮췄다.

금룡이 철괴에 오분지 일쯤 박혔다.

다른 철괴가 정광의 왼쪽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짙은 주황색 관복이 찢어발겨지며 철혈무쌍용갑이 드러났다. 철괴가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누런 비늘들이 뒤로 꺾여 형편없이 우그러져 있었다.

암왕의 눈이 커졌다.

‘이놈이!’

어느새 정광은 진각(震脚)을 밟으며 암왕의 가슴을 향해 왼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가슴이 훤히 드러난 암왕은 전력을 다해 뒤로 물러났다. 거추장스러워진 철괴들을 놓고 양손을 끌어당겨 가슴 앞에 모았다.

‘내공은 내가 위다. 쌍장으로 막고 움켜쥔 뒤 내공 싸움으로 들어가면 돼.’

암왕은 자신이 있었다.

정광이 승부수를 던졌지만 오히려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 확신했다.

허나 아니었다.

주먹과 쌍장이 격돌하기 직전, 정광의 왼 소매에서 소운룡이 튀어나왔다.

정광은 주먹을 풀어 그것을 쥔 뒤 암왕의 쌍장을 향해 내질렀다.

푹-

“……!”

쌍장이 꼬치처럼 함께 꿰이는 아픔이라니!

암왕은 이를 악물며 비명을 참았다.

‘빌어먹을! 늦게라도 눈치채서 다행이구나!’

당하기 전, 이런 비수가 있다는 소문을 떠올렸기에 바로 대응할 수 있었다.

꿰뚫린 두 손바닥으로 소운룡을 움켜쥐었다.

날이 아니라 면을 잡은 것이기에 손가락이 잘리는 일은 없었다.

‘이거나 먹어라!’

암왕은 소운룡을 잡아당기며 한쪽 무릎을 올려쳤다.

정광의 턱을 부수려는 일격!

하지만 정광이 더 빨랐다.

소운룡을 놓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철괴를 하나 들어 거기에 박혀 있던 운룡을 뽑았다.

그리고 바로 암왕에게 쇄도했다.

암왕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나이에 이런 경험을 쌓다니!’

정광은 보검을 중시하지 않았다.

필요하면 버리고 암수도 마다하지 않으며 상대의 피해를 어떻게든 강요하고 있었다.

‘이놈!’

암왕은 소운룡을 뽑았다.

두 손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지만 지혈할 시간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핏물을 이용했다.

한 손으론 소운룡을 휘두르고 다른 한 손으론 장력을 뻗었다.

핏물이 튀어 나가 정광의 시야를 가렸다.

허나 거기까지였다.

정광은 그대로 짓쳐 들며 핏물을 뒤집어썼다. 눈도 깜빡 안 했기에 세상이 붉게 변했다.

암왕은 정광의 혈안(血眼)을 보며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그렇다고 그냥 죽어줄 수야 있나.

소운룡으로 운룡을 가까스로 막으며 암기를 날렸다.

독분을 던지고 권장까지 써가며 최선을 다했다.

암왕은 암왕이었다.

정광의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하지만 이미 밀린 형세를 뒤바꿀 수는 없었다.

암왕의 몸은 더 심각한 상처들로 만신창이가 됐다.

그는 결국 단전이 꿰뚫린 채 바닥에 쓰러져 헛웃음을 흘렸다.

“흘흘…… 내가 이렇게 당할 줄이야. 웃기지도 않는군.”

정광은 다소 해쓱해진 얼굴로 그의 머리맡에 털썩 앉았다.

“잘 웃으시면서 무슨 말씀을. 괜찮으세요?”

“…….”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 괜찮냐니?

암왕이 황당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정광이 그의 단전에 꽂힌 운룡을 가리켰다.

“이거 때문에 아프실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뽑을 수도 없고. 난감하네요.”

뽑으면 바로 출혈이 일어나 죽을 거란 의미였다.

“이 망할 놈아! 그게 곧 죽을 사람에게 할 말이냐!”

암왕은 화를 버럭 내다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내게 들을 게 있다는 얘기군.”

“당연하죠.”

“내가 말할 것 같으냐?”

“솔직히 모르겠어요.”

“나도 솔직히 입이 근질거리기는 한데…….”

암왕이 말끝을 흐리며 다가오고 있는 무장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쟤들 있는 데에선 싫어.”

“그 정도야 해드려야죠.”

정광은 부지휘사들에게 명했다.

“원래 자리에서 기다려 주세요.”

어림군 부지휘사가 대표로 반발했다.

“진옥룡! 그건 안 되오! 역도를 잡았는데 어찌…….”

“황상께서 제게 권한을 주셨잖아요. 혹시 부지휘사님이 황상보다 높으…….”

부지휘사가 기겁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알겠소이다! 물러나 있을 테니 역도들에 대한 정보를 꼭 받아주시오!”

“받아주시오?”

“……미안하오.”

부지휘사가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무림인처럼 포권했다.

“대명을 위해 부탁드리겠소.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으리다.”

“일단 해볼게요.”

무장들이 물러나자 정광이 암왕을 보며 웃었다.

“이제 됐죠?”

“이건 분명히 하자. 의뢰인에 대해 말할 거라곤 안 했어.”

“말씀하시다 보면 나오겠죠. 아. 자오를 부를까요?”

“됐다. 그놈 불렀다간 그놈이 더 떠들 게 뻔한데 뭐 하러.”

“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간 참느라 근질근질하셨을 텐데 마음껏 풀어보세요.”

정광은 암왕의 혈도를 짚어 출혈을 멈췄다. 금창약을 바르고 내공까지 넣어 상세를 다스렸다.

암왕은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입을 놀렸다.

“일단 영평공주에게 큰맘 먹고 말해주려다가 못 한 것부터 시작하지. 아주 재밌는 얘기야. 내가 소싯적에…….”

정광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자오에게 단련된 상태였지만 즐기지는 않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자 암왕의 기력도 거의 메말랐다.

그는 그 지경이 돼서야 정광이 원했던 것들을 들려줬다.

정광은 집중해서 들은 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짧은 걸 왜 이리 늦게 말씀하세요?”

“입을 풀어야 말하지!”

암왕은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 호통을 친 뒤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냥 묻어두긴 아깝네.”

“뭘요?”

“뭐긴 뭐야. 본문의 무공과 재물이지.”

정광은 눈을 번뜩였다.

“마침 어르신의 유일한 제자가 저기 계시네요.”

자오를 말하는 것이었다.

암왕은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었다.

“너. 재물은 가로챌 셈이지?”

“저를 뭐로 보시고.”

“반만 먹어라.”

“네.”

“…….”

암왕은 정광을 노려보다가 그것들이 있는 곳을 말했다.

정광은 그의 음색까지 완전히 기억한 뒤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암왕이 나직이 탄식했다.

“내가 이런 놈을 믿고 모든 걸 넘겨주다니…….”

“약조만큼은 잘 지키는데.”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암왕은 회색 하늘을 물끄러미 보다가 눈을 감았다.

질 만한 이에게 졌기에 자존심은 챙겨서 다행이었다.

“마무리는 그나마 나쁘지 않아 다행이군. 괴물아, 나 간다.”

“안녕히 가세요, 암왕 어르신.”

암왕은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 떠났다.

정광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자오를 불렀다.

“각응.”

“네! 단주!”

자오가 재빨리 달려왔다.

“시신을 거두길 원하세요?”

자오는 사부의 시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살수답게 돌아가셨으니 살수답게 처리되셔야겠지요.”

“괜찮으세요?”

“…….”

자오는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그의 안색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정광이 씩 웃었다.

“좋아요. 암왕 어르신께서 남기신 게 있는데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다음 일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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