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49화 (348/569)

2부 78화

일행

태조 홍무제(洪武帝)는 원(元)을 몰아내고 대명(大明)을 건국한 뒤 수많은 개국공신을 토사구팽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집요한 숙청이었는데 숙청 당사자인 개국공신은 물론이오, 그가 속한 가문까지 씨를 말려 버릴 정도였다.

그 당시 다섯 살이었던 진화의 가문도 그중 하나.

다행히 그는 운이 좋았다.

가문이 멸문하기 전, 위험을 느낀 아비가 가신을 시켜 멀리 피하게 했으니까.

가신에게 업혀 도주한 진화는 귀주성(貴州省)까지 흘러들어 가 작은 촌락에서 신분을 숨긴 채 살게 됐다.

허나 그 생활은 몇 년 가지 못했다.

진화를 지키며 이 먼 곳까지 오느라 무리했던 늙은 가신이 결국 죽어버린 것이다.

가신은 숨을 거두기 직전, 아비의 마지막 당부와 똑같은 말을 했다.

‘주씨(朱氏)를 멸해 원한을 갚아야 합니다, 소주(小主).’

낳고 길러준 아비가 원했다.

보호해 주다가 죽어버린 가신도 원했다.

진화 또한 그랬다.

그리고 그날 밤.

촌락을 습격한 마적단에게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갑자기 나타나 신위를 뽐낸 한 중늙은이가 그 길을 열어줬다.

마적에게 빼앗겼던 부모의 위패(位牌)를 확인한 그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호오. 뭐기에 그렇게 악착같이 돌려받으려고 하는지 궁금해서 와봤거늘. 사냥이 끝나고 삶아 먹힌 가문의 아이구나.’

‘……!’

신분이 들통나 당황하는 것도 잠시.

중늙은이가 진화를 붙잡고 근골을 살폈다.

‘살집은 없지만 잔가시가 제법 단단해. 쓸 만하군. 마음은 어떨까?’

이어지는 질문에 진화는 눈을 빛냈다.

‘이렇게 무지렁이로 살다가 죽을 것이냐, 죽더라도 복수할 것이냐?’

‘……!’

‘으하하하. 녀석. 눈이 아주 활활 타오르는구나.’

기꺼워하던 중늙은이가 오연하게 제안했다.

‘나는 언젠가 황제를 죽일 것이다. 내 제자가 되어 함께할 기회를 주마. 따를 각오가 있으면 그렇다 답해라.’

중늙은이는 말이 무척 많았다.

자신이 천하제일살문 영인문의 문주라느니, 이제껏 누구를 죽여왔고 너를 괴롭히던 마적들쯤은 좀 전에 본 것 같이 식전 운동거리도 안 된다는 말을 끝없이 늘어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절하면 죽일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진화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집도 절도 없는 고아 신세인 그가 언제 또 이런 고수를 만날 수 있겠는가.

‘따를게요, 사부님. 사부님과 함께 주씨를 단죄할게요.’

‘흐뭇하다만. 너무 앞서가지 마라.’

중늙은이는 조건을 내걸었다.

‘네 의지를 지금 당장 증명하면 둘째 제자로 받아주마.’

뭘 어떻게 증명하라는 건지 의아해하는데.

중늙은이가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불에 달궜다.

붉게 달아오른 검날을 아무렇지도 않게 맨손으로 쥐고 진화에게 내밀었다.

‘고환을 잘라라. 내 것 말고 네 것.’

‘그걸 왜……?’

‘황제에게 접근하려면 내시가 최고지. 시간은 걸리겠지만 나와 함께 하면 반드시 죽일 수 있다. 다른 설명이 필요한가?’

갈등은 짧았다.

진화는 중늙은이의 시험을 훌륭히 통과했다.

중늙은이는 까무러친 진화를 치료하고 혀를 끌끌 찼다.

‘독한 건 좋은데 티가 많이 나. 숨기는 법을 알려주마.’

삼 개월 동안 진화는 많은 걸 배웠다.

무공을 익혔다간 반드시 들통날 터. 몸이 아닌, 마음에 관계된 것들이었다.

‘이 정도면 됐다. 아니지. 모든 게 뛰어나면 시기를 받아 위로 올라가기 힘들어져. 한 가지 흠쯤은 있어야 하는데…… 그래, 목소리를 작게 내면 재밌겠군.’

그때는 황당했지만 실제로 출세하는 데 도움이 됐다.

‘네가 잘하면 황궁에서 무공을 배우게 될 거다. 그럴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줬으니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라.’

‘네, 사부.’

진화는 바로 황궁에 들어갔다.

오랜 세월 동안 노력해 위로, 또 위로 올라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일 년에 한 번씩 하북성에 들러 진화의 성취를 확인하고 조언을 해주던 사부가 어느 날 느닷없이 선언했다.

때가 됐다고.

의뢰인이 나타났고 대가는 물론 협조까지 받게 됐다고.

‘그래. 결국 그렇게 됐지.’

진화는 지난 수십 년을 돌이켜 본 뒤 현재에 집중했다.

‘사부는 실패했지만 나는 아니야. 황태손을 죽여 주씨를 망가뜨린다.’

황제를 죽이면 당장은 통쾌하겠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장기적으로 보면 이쪽이 더 나았다.

황태손보다 뛰어난 인재는 황실에 없었으니까.

당당히 일어나 장내를 진정시킨 뒤,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는 황태손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죽어!’

쉬이익-

그때, 황태손과 시선이 마주쳤다.

놀랍게도 그의 두 눈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곧 알 수 있었다.

황태손의 목에 검날이 닿는 순간.

진화는 끝없는 암흑 속에 내동댕이쳐졌다.

대경하여 다급히 신형을 바로 세우려 했지만 균형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사술인가!’

아니.

정광이 의자와 탁자 등을 이용해 펼쳐놓고, 황태손이 정해진 자리에 우뚝 섬으로써 발동된 진법이었다.

‘너였냐?’

정광은 사냥감이 덫에 걸리자 진법 속에 뛰어들었다.

들어가 보니 이도 저도 못 한 채 떨어지고 있는 진화의 모습이 보였다.

‘본인의 미래처럼 앞이 캄캄하겠지. 이 진법의 효과가 그렇거든.’

정광은 지체 없이 진화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며 깍지를 낀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가 내려쳤다.

콰앙!

“끄악!”

이렇게 큰 비명이라니.

모기처럼 앵앵거리는 목소리에 익숙해져 있을 진화의 성대가 걱정될 정도 아닌가.

정수리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진화는 정신을 잃고 추락했다.

정광은 천근추의 수법으로 빠르게 떨어져 내려 진화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리고 마혈과 아혈을 짚은 뒤 진 밖으로 나왔다.

‘후우. 뒤통수 맞았지만 잡긴 잡았네.’

이 괘씸한 놈을 어떻게 처리할까 이런저런 방법을 떠올리는데.

지켜보고 있던 황족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지, 진 첩형이 역도였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검을 휘두르다가 갑자기 사라지다니!”

“저 눈부시게 잘생긴 금의위 무장은 또 뭐야? 뒤이어 사라지더니 진 첩형의 목덜미를 잡고 나타났잖아!”

황족들뿐만이 아니었다.

황제, 황태자, 황태손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정광과 진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 중 황태손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진옥룡. 이제 움직여도 되오?”

“아직요.”

황태손의 얼굴이 굳었다.

또 다른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니 진법을 유지하고 있으라는 의미 아닌가.

‘가만. 분명히 한 번밖에 못 쓰는 진이라 했었는데? 아! 적들은 모르니 허장성세를 부리라는 말이구나.’

정광은 황제와 황태자에게 슬쩍 두 손을 모아 양해를 구한 뒤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의 그림자에서 자객이 튀어나온 한왕은 황제를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고 있었다.

영평공주의 낯빛은 파랗게 질렸고 조간왕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상태.

다른 황족들은 아직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정광은 전음으로 소혜에게 물었다.

-소저. 지금 심공 쓸 수 있죠?

가능하다는 의미로 눈을 한 번 깜빡인 소혜가 입을 살짝 벌렸다.

정광이 지정한 목표물이 너무 의외의 인물들이어서였다.

‘왜 그분들께?’

그녀의 귀에 정광의 전음이 다시 꽂혔다.

-소저. 영평공주님과 조간왕 전하께 심공을 쓰세요! 돌아가시지 않을 정도로요!

소혜는 반사적으로 행동했다.

심공을 펼치자 두 개의 신음이 연달아 터졌다.

영평공주와 조간왕이 정신을 잃으며 뱉은 것이었다.

그들이 쓰러지는 순간 정광이 외쳤다.

“망할! 자객이 또 있어요! 금의위 지휘사님! 병필태감님!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모시고 건청궁으로 피하세요! 아. 황태손 저하도요!”

놀란 황족들 때문에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으나 황제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어쩌려는 것이냐?”

“아까의 살수도 그렇고. 잡아야죠.”

“다른 이들은?”

“지금은 떨어져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황족들 중에 역도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

싸늘한 눈으로 일족을 훑어보는 황제에게 정광이 덧붙였다.

“한왕 전하는 누명을 쓰신 것 같고. 조간왕 전하와 영평공주님이 당하셨어요.”

“…….”

“빨리 움직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일이 터지자마자 밖으로 나가셨던 어림군 지휘사님요. 돌아오시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게 낫겠죠?”

정광의 말은 논리정연했다.

역도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죽을 것 같은 황태자는 제쳐두고 황제와 황태손을 암습했다.

그들이 죽었을 경우 황위 계승권을 갖게 되는 건 한왕이었는데, 그의 그림자에서 자객이 나왔다고 해서 무턱대고 의심하는 건 무리였다.

이 일을 빌미로 숙청하거나 한 톨의 의심이라도 용서할 수 없어 죽이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나중에 따질 일.

황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진화가 역도였다니. 어림군 지휘사도 의심스럽다. 조간왕과 영평공주까지 당했어. 일단 몸을 피해야 해.’

몇 년만 젊었더라면 더 냉철하게 생각해 보고 또 다른 의심을 품게 되었을지도 몰랐지만, 천수가 다한 데다 암습까지 당한 지금의 황제는 아니었다.

“그렇게 하지.”

바로 명을 내렸다.

“한왕, 조간왕, 영평공주를 수습해 건청궁(乾淸宮)으로 옮겨라. 그리고 진옥룡.”

“저요?”

“금의위 북진무사 천호인 네게 한시적이지만 짐을 대신해 명을 내릴 권한을 주마. 무장들을 지휘해 반드시 역도들을 잡아내라.”

정광이 씩 웃었다.

“안 그래도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어떤 수를 써도 되죠?”

“…….”

“불을 지르거나 무너뜨리진 않을 건데.”

황제는 고개를 미미하게 젓다가 금의위 지휘사에게 명했다.

“그만 가지.”

‘무능한 신들을 죽여주십시오’라고 외칠 상황이 아니었다.

“네! 폐하!”

황제 삼대가 고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났다.

그 속엔 흑서도 있었다.

근신전에 남은 정광은 황족들부터 진정시켰다.

“다친 분도 없으시면서 웬 소란이세요. 소혜 소저를 보고 좀 본받으시죠. 모친께서 쓰러지셨는데도 꿋꿋이 참고 계시잖아요.”

심공을 연달아 쓴 여파로 소혜의 안색이 창백해졌으나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함께 있던 어미가 당했는데 당연한 일 아닌가?

황족들이 조금씩 조용해지자 정광이 찬찬히 설명했다.

“아까 조간왕 전하와 영평공주님께서 쓰러지신 뒤 미약한 기가 근신전 밖으로 사라졌어요. 더 이상의 살수는 없을 테니 금의위의 보호를 받으며 여기서 쉬고 계세요.”

“아, 알겠네.”

황족은 정리됐고.

정광은 혜진과 자오를 불렀다.

“두 분 모두 힘 좀 쓰시던데. 움직일 여력이 있으세요?”

지붕이 터져 무너졌을 때 자오가 영평공주와 소혜를, 혜진이 조간왕을 보호한 걸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단주.”

두 사람의 똑같은 대답에 정광이 웃었다.

“좋아요. 그럼 자객을 잡으러 가죠. 아. 그전에…….”

다전음으로 말을 이었다.

-아까 쓰러지신 두 분요. 암살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어떻게 행동하실지 몰라 소혜 소저에게 부탁해 기절시킨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두 사람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하에 어떤 고수가 정광의 이목을 속이고 두 사람이나 해칠 수 있겠는가?

정광은 자오에게 명했다.

“각응. 준비해 뒀던 것을 쓸 시간이에요.”

“다녀오겠습니다, 단주.”

자오가 경공술을 펼쳐 사라졌다.

정광은 금의위 부지휘사들과 어림군 부지휘사들을 모았다.

“아까 폐하께 말씀드린 것처럼. 어림군 지휘사님을 보면 방심하지 마세요. 포위하고 저를 부르세요.”

“……알겠소.”

“조금 전에 떠난 각응이 일행을 이끌고 올 건데 바로 통과시키시고요.”

“……그렇게 하리다.”

그들의 힘없는 대답에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인데 왜 이렇게 풀이 죽으셨어요? 역도들을 잡아 설욕하면 되죠. 하실 수 있죠?”

그들은 곧 가슴을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표정이네요. 황상께서 제게 내리신 권한을 아직 모르는 분들이 많을 테니 빨리 퍼뜨려 주세요. 금의수호팔진(錦衣守護八陣)은 대단한 절진이니 자객은 아직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예요. 힘을 합쳐 잡아보죠.”

“알겠소이다!”

부지휘사들이 흩어지자 정광은 생각에 잠겼다.

‘자오가 말하길, 암왕은 살행을 하다가 곤란한 지경에 처하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내부에 숨는 게 제일 현명한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했지. 힘도 많이 쓴 데다, 금의수호팔진 때문에 그러고 있을 거야.’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짧게나마 운기조식하여 몸 상태를 끌어 올려야 했다.

그리고 원했던 데까지 내공을 채웠을 때.

어림군 부지휘사가 당황한 얼굴로 달려왔다.

“지, 진옥룡! 각응이 돌아왔소!”

“네. 들여보내세요.”

“허, 헌데 그 일행이…….”

“음. 곤란하신가? 제가 직접 가죠. 어느 문이에요?”

“동문(東門)인 동화문(東華門)이외다.”

정광은 혜진, 부지휘사와 함께 신법을 펼쳤다.

동화문에 이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반가워라.”

“흥.”

자오 옆에 있던 동방장이 코웃음 쳤다.

“반갑기는 무슨. 조금 쉬게 해주나 싶더니 정신이 없을 정도로 부려먹어 놓고.”

“하하. 겸손하시기는. 여기요.”

정광은 암왕이 남기고 간 피 묻은 소맷자락을 꺼냈다.

동방장은 한숨을 내쉰 뒤 함께 온 일행들에게 그것의 냄새를 맡게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광이 물었다.

“찾으실 수 있죠?”

동방장이 거만하게 답했다.

“황궁 안에만 있다면.”

“좋아요. 가죠.”

동방장이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이이익-

왈왈!

컹컹컹!

으르르르-

마치 기합 같은 울음소리와 함께.

개떼가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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