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48화 (347/569)

2부 77화

너였냐?

살수는 고독하기 마련.

이른 새벽 홀로 근신전(謹身殿)에 잠입해, 한 귀퉁이에 숨어 기다려 왔다.

짧지 않은 인내의 시간이 지나, 하나둘씩 들어와 착석하는 황족들의 그림자를 은밀히 갈아탄 지 어언 반 시진.

마침내 자신이 원했던 한왕의 그림자에 무사히 은신하게 된 암왕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대놓고 저지르는 게 제일 확실한 법이지.’

한왕의 그림자에서 튀어 나가 목표물을 암살해야 한다.

그래야 모반의 주체로, 또는 협력자로 한왕이 의심받을 테니까.

피눈물을 흘리며 억울해하겠지만 알 게 뭔가?

의뢰인이 내건 조건이니 피의뢰인인 살수는 수행할 수밖에.

‘이게 순리이니 받아들여라.’

얼마 안 가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황태자가 들어오고 그 못지않은 황제도 나타났다.

황제가 병필태감의 도움을 받으며 희망찬 전망을 늘어놓는 모습이 우스웠다.

‘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라 불리면 뭐 하는가?

한낱 인간일 뿐인 것을.

허나 암왕은 달랐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순리를 만들어내는 자였다.

대명의 황제와 황태손을 죽여 황위를 조간왕에게 넘겨준다.

본인의 살행(殺行)으로 세상의 이치를 틀어버리는 것이다.

미래를 상상하자 짜릿한 쾌감이 전신을 타고 달렸다.

‘그래. 이래서 살수가 된 것이지.’

강한 상대를, 더 높은 곳에 있는 자를 죽이며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살수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그게 없다니까.’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도 좋아야지.

나름 고르고 골라 거뒀건만, 첫째 제자도 셋째 제자도 범재에 불과했다.

‘그나마 막내는 나았는데.’

암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 뭐 하는가?

첫째와 셋째를 기껏 해치워 놓고도 기회를 보다가 도주해 버린 심약한 놈인 것을.

‘둘째가 있어서 다행이야.’

녀석은 제일 중요한 자질은 없었으나 그 다음가는 재능이 있었다.

바로 복수심!

제자를 구하러 다니다가 과거 태조(太祖)에게 토사구팽당한 개국공신의 후손인 녀석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워낙 못 먹고 커서 그런지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볼품없어 보였으나 근골은 좋았다.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데다 주씨(朱氏)에게 강한 원한을 품고 있었고.

덕분에 그토록 원했으나 여건이 안 돼 반쯤 포기했던 꿈의 불씨를 다시 지필 수 있었다.

황제 암살!

그래서. 그 꼬마에게 기회를 줬다.

내게 배우고 나와 함께하면 주씨들을 죽일 수 있다!

대신, 너의 의지를 지금 당장 증명해라!

자신도 해내기 힘든 일이라 솔직히 반신반의했건만.

놀랍게도 꼬마는 시험을 훌륭히 통과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암왕과 함께 이곳에 있었다.

‘잘 해내리라 믿는다.’

암왕은 둘째 제자를 슬쩍 본 뒤 정신을 집중했다.

자신이 은신하고 있는 그림자의 주인이 예물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이다. 우선 저년부터 써먹어야 해.’

이번 거사를 위해 명교에서 준비해줬지만 몰래 배를 갈아탄 소혜에게 전음을 보냈다.

-진공가향(眞空家鄕) 무생노모(無生老母)! 동창 첩형에게 심공을 써라!

이렇게 암어로 약조된 명교의 요사한 진언을 말하고 대상까지 지정했거늘…….

그 대상이 다 죽어가는 황태자를 호위하는 동창 첩형이라는 게 의외였을까?

소혜의 눈이 살짝 커졌다.

반면, 암왕의 눈매는 가늘어졌다.

‘그래. 혼란을 주려고 한 것이니 그래야지.’

소혜는 예상했던 대로 명을 따르지 않고 입술을 움직였다.

옆에 있는 아미파의 교봉에게 실토하는 것이리라.

‘당연히 저 녀석은 진옥룡에게 그 사실을 전할 것이고.’

아니나 다를까.

황태손 뒤에 시립한 정광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고민해라. 의심하고 거듭 생각해라.’

그사이 예물을 들고 걷던 한왕은 황제의 오장 앞에서 멈춰 섰다.

이게 황족들에게 허락된 거리였다.

암왕이 한왕을 이용해 얻어낸 거리였고.

한왕이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 만세만세만만세(萬歲萬歲萬萬歲)!”

원래 목청이 좋은 데다 살고 싶은 의지까지 섞였는지 한왕의 외침은 우렁찼다.

지붕 위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무장들의 귀에도 충분히 들릴 만큼.

역으로, 근신전 내부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외침이 지붕 위에서 터졌다.

“지, 진천뢰를 숨기고 있었다니!”

“양 천호(千戶)가 자폭하려고 한다! 막아!”

막기엔 너무 늦었다.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근신전 지붕이 폭발했다.

천장에 웅장하게 그려져 있던 황룡이 산산이 조각나며 지붕 잔해와 함께 추락했다.

그 누구보다 빨리 움직인 건 암왕과 한패인 어림군 지휘사였다.

“자객이다! 밖을 살필 테니 안을 보호하라!”

외침과 동시에 신형을 솟구쳐 천장에 뚫린 거대한 구멍 밖으로 날아갔다.

어림군 지휘사는 조간왕을 옥좌에 앉히고 자신도 부귀공명을 누려야 하기에 황족들 앞에서 대놓고 손을 쓸 수는 없는 처지.

수하를 매수해 진천뢰를 터뜨리고, 밖에 나감으로써 암왕의 손을 덜어주는 게 그의 임무였다.

암왕은 한왕의 그림자 속에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흘흘. 아주 엉망진창이 됐군.’

무공을 모르는 황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금의위와 어림군 무장들은 떨어지는 잔해들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마디로 아수라장!

황제 삼대의 사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피신하기에는 늦은 상황.

병필태감은 극심한 분노 때문에 안색이 더 안 좋아진 황제에게 내공을 주입하느라 아무것도 못 했다.

그러나 정광, 금의위 지휘사, 어림군 부지휘사, 진화가 있었다.

게다가 황실수호암응들까지.

모두 신형을 솟구쳐 위에서 떨어지는 것들은 멀리 쳐냈다.

암왕이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

‘좋아. 간다!’

슬슬 손을 쓰려고 하는데.

황태손이 벌떡 일어나 재빨리 황제 앞에 우뚝 섰다.

정면을 노려보며 뒤에 있는 황제와 오른편에 있는 황태자에게 외쳤다.

“폐하! 전하! 신들을 믿고 움직이지 마십시오! 반드시 막아낼 것입니다! 역도들의 칼날은 결코 두 분께 닿지 못할 것입니다!”

“……!”

대체 이게 무슨 만용인가 싶어 모두 놀라는 그때.

암왕은 기뻐하며 신형을 드러냈다.

자신의 손으로 황제와 황태손을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 * *

정광은 쏟아지는 기와를 쳐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찬란한 황금색 기와가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망할 놈의 진천뢰. 이걸 또 보게 될 줄이야.’

정광은 만수절 경계에 참여한 무장들의 직책과 이름을 전부 꿰고 있었다.

‘분명 양 천호라 했지.’

어림군 무장이었다.

그것도 고위 무장.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궁에 진천뢰를 품고 들어왔다고?’

더 큰 힘이 개입됐을 터.

분명 상관인 그놈이리라.

또 다른 자객이 없는지 확인하겠다며 밖으로 나간 호도 그 쥐새끼 말이다.

그때, 어린 용이 움직였다.

황제의 앞을 막아서며 당당히 외쳤다.

“폐하! 전하! 신들을 믿고 움직이지 마십시오! 반드시 막아낼 것입니다! 역도들의 칼날은 결코 두 분께 닿지 못할 것입니다!”

이 위급한 순간에 가당치도 않은 만용을 부린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황제와 황태자의 안색은 한결 나아졌다.

정광도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나라를 경영하지. 마음을 확실히 먹었구나.’

황태손의 외침은 황족들에게도 전해졌다.

그의 당당함에 감복해서든, 어이가 없어서든 황족들의 비명도 멎어버린 상태.

‘밥상을 차려줬으니 빨리 나와.’

마치 정광의 속마음을 들은 것처럼 한왕의 그림자에서 복면을 한 괴한이 솟아났다.

그의 손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비도가 떠났다.

극독을 잔뜩 머금은 듯 기이하게 번들거리는 그것은 황태손의 가슴을 향해 유성처럼 쏘아졌다.

어찌나 빠른지 황태손을 뚫고 뒤에 있는 황제까지 꼬치로 꿰어버릴 기세!

정광의 눈이 빛났다.

‘역시 황태자는 허초였어.’

아까 혜진에게 듣고 생각했던 대로였다.

암왕이 노린 건 황태자가 아니라 황태손과 황제였다.

‘그게 될 것 같냐?’

정광은 어느새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황태손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허리에 잠들어 있던 운룡이 금룡으로 화해 세상에 나왔다.

그것을 휘둘러 날아오는 비도를 검면으로 쳐냈다.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정광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런 잔재주를 부리다니!’

암왕이 두 손을 움직이자 비도가 두 개로 갈라졌다.

하나는 정광의 우측으로 돌아 바로 뒤의 황태손에게, 다른 하나는 정광과 황태손의 좌측으로 돌아 황제를 꿰려 했다.

아무리 정광이라 해도 둘 다 막을 수는 없는 상황!

암왕의 복면이 뒤틀렸다.

크게 웃어서였다.

‘내 패가 어떠냐!’

허나 패가 있는 건 암왕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옥좌 뒤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복면에 뚫린 구멍 사이로 보이는 암왕의 눈이 커졌다.

‘저건 또 뭐야!’

그보다 더 빠른 이틀 전부터 은신해 있던 흑서였다.

정광에 의해 완전해진 투명암혼마공(透明暗魂魔功) 덕도 있었고 응일, 응이, 응삼이 미세하게 기척을 흘려 기감을 흐렸기에 암왕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설마 황실수호암응의 수응(首鷹)?’

당장 호도를 쳐 죽이고 싶었다.

마공의 부작용으로 망가졌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완전히 놀아난 것 아닌가!

그래도 암왕은 자신했다.

‘살수의 왕인 내가 던진 패를 너 따위가 감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흑서로서는 막기 어려운 일격이었다.

허나 지금의 흑서는 달랐다.

그의 머릿속에서 정광과 나눴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분골쇄신(粉骨碎身)으로 임하겠습니다!’

‘그래, 나한테서 도망쳤을 때의 반만 하면 되겠네.’

그랬다.

그때의 반만 하면 됐다.

설령 암왕이 던진 비도에 천하를 뚫고도 남을 힘이 담겨 있다 해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온몸이 갈가리 찢어지고 혼마저 정광의 마혼(魔魂)에게 잡아먹히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하압!”

흑서는 자객답지 않게 기합을 지르며 칙칙한 검은색을 띤 두 개의 철괴(鐵拐)를 휘둘렀다.

그의 전면에 칠흑보다 짙은 어둠이 생겼다.

그 어둠이 기이하게 번들거리는 암왕의 비도를 삼켰다.

쩌엉!

“크흑!”

어둠이 흩어지며 흑서의 모습이 드러났다.

“쿨럭. 쿨럭.”

그의 입과 철괴를 쥔 손아귀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정광이 부리고 있는 금룡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해냈다! 내가 해냈어!’

예전보다 약해진 교주였지만 두렵긴 매한가지였다.

그런 교주의 명을 충실히 수행했다.

목숨을 걱정할 필요도 없어진 데다 큰 상이 내려질 게 분명했다.

‘교주라면 분명 그럴 테지. 어서 그 쥐새끼를 해치우십시오!’

정광은 황태손을 노리던 비도를 어느새 튕겨내고 암왕을 몰아치고 있었다.

암왕은 한쪽 소매가 잘린 채 대항하고 있었는데 여유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아니, 암왕의 마음은 다급했다.

‘빌어먹을! 다 망쳤잖아!’

지붕에서 떨어질 건 다 떨어졌다.

더 이상 그것들을 막을 필요가 없어진 고수들이 사방에서 조여 오려 하고 있었다.

더구나 내공까지 많이 소모해 단전이 비어가는 상황.

‘결국 그 수를 써야 하는가.’

아직 마지막 패가 남아 있기에 미련 없이 도주를 택했다.

정광의 검격은 오줌을 찔끔 지릴 만큼 강했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내공과 정신력을 끌어모아 영인문 비전 은영술(隱影術)을 연달아 펼쳤다.

장내에 잔뜩 있는 황족들 덕분에 그림자를 계속 갈아타며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순식간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정광은 하도 어이가 없어 속으로 웃었다.

‘무슨 놈의 은영술이 이따위야? 이렇게 빠른 속도로 펼치는 게 말이 돼?’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대단한 수법 아닌가!

‘그래 봤자지.’

쉽게 쓸 수 있는 무공이면 진작 썼을 것이다.

암왕은 상당히 무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광은 인상을 찡그린 채 크게 외쳤다.

“지휘사님! 금의수호팔진(錦衣守護八陣)이요!”

금의위 지휘사가 즉시 명했다.

“진을 발동해라! 폐(閉)!”

금의수호팔진은 근신전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진 절진.

금의위 무장들이 복명복창하는 소리가 자금성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정광은 그제야 인상을 풀었다.

‘그 몸 상태로 쉽게 빠져나가진 못하겠지.’

빠져나가도 멀리 가진 못하리라.

허리를 숙여 암왕이 남기고 간 소맷자락을 주웠다.

소맷자락에 묻은 피가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여기서 끝이면 바로 잡으러 가면 되는데.’

신형을 돌리자 흑서가 황제 옆에 무릎을 꿇고 적당히 꾸민 사정을 늘어놓는 모습이 보였다.

정광이 몇 번이나 강조했던 대로 또 다른 살수를 대비해 남아 있던 금의위 지휘사와 병필태감은 물론이오, 다른 모든 이들 역시 황당한 눈빛으로 흑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한 명만 빼고.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너였냐?’

암왕이 소혜에게 심공을 쓰라고 명했던 대상이었다.

진화가 검을 뽑아 황태손을 베었다.

하필이면 철혈무쌍용갑으로 막을 수 없는 목을!

쉬이익-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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