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5화
만수절(萬壽節)
정광은 자오와 함께 금의위 연무장에서 나와 단본궁으로 돌아갔다.
길을 걷는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자오는 정광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허리를 깊이 숙이며 절절하게 사과했다.
“단주. 절대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뭘요?”
“그…….”
말 많은 것으론 십존의 경지에 오른 자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정광이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제 성품이 원래 좀 그래서 가끔 벅찰 때도 있다고 말씀하셨던 거요? 저를 험담하는 금의위 무장들을 말리는 척하시면서 은근히 동조하시는 기술이 일품이던데요.”
“그, 그게…….”
“뭘 그런 걸 가지고. 요리에 독을 푼 것도 아니고 뒤에서 비수로 찌른 것도 아닌데요, 뭐.”
자오가 울상을 지으며 애통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금의위 무장들이 동질감을 느낄 수 있게 하려면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 살짝 입을 놀렸습니다만 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해 당장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허나 단주께서 내려주신 중요한 명을 수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한 것이니 제발 이해해 주십시오.”
정광은 피식 웃으며 자오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안 우시던데.”
탁.
“그래서.”
팡.
“성과는 있으셨어요?”
빠아앙!
“크헉!”
자오가 어깨를 빠르게 문질렀다.
입은 손보다 더 빨리 움직였고.
“죄송합니다. 사부가 어떻게 행동할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알아보려 했으나 잘 안 됐습니다.”
자오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 마음에서 일어난 부끄러움이 더 컸다.
정광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반드시 해내겠다고 다짐했었건만 결국 실패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정광의 반응은 달랐다.
“잘하셨어요.”
“……네?”
“아까는 알아내셔서 실행하셨으면 곤란한 상황이었거든요.”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을 끔뻑거리던 자오는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입을 떡 벌렸다.
“암왕 그분이 숨어서 지켜보고 계셨어요.”
“저, 정말입니까? 아니, 단주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사부가 있었다고 하시니 놀라서 여쭈는 겁니다.”
“맞을걸요. 제가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은신술이었으니까. 중원에 그런 분이 또 계실 리는 없잖아요.”
자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곧 사부를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듣게 되자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정광은 자오의 마음을 짐작하고 부드럽게 위로했다.
“두려워하실 필요 없는데. 저를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시죠?”
“……!”
어찌 잊으랴.
마혈과 아혈을 제압당한 채 상상조차 못 했던 기괴한 방식으로 고문을 당하며 극한의 고통에 괴로워했던 기억을.
“암왕께서 그러신 적 있으세요?”
암왕이 아무리 악랄하다 해도 그럴 리 있나.
자오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흉악한 수법으로는…….”
“흉악이 아니라 깔끔. 어쨌든 없으시죠?”
“……네. 없습니다.”
“거봐요. 그때도 잘 견디셨는데 뭐가 두려우세요. 허리 세우고 가슴을 펴세요.”
잘 견딘 기억은 없었지만 겪어본 건 사실.
정광의 말대로 자세를 바로 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암왕께서 자오의 정체를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어요. 황상을 암살하는 게 더 중요할 테니까요.”
대업을 앞두고 사소한 일로 소란을 피우진 않을 거란 얘기였다.
“금의수호팔진은 충분히 경험하셨으니까 금의위 연무장에는 더 이상 가지 마시고요.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시는 것과 큰 차이는 없을 거예요.”
자오는 흔들림 없는 어조로 짧게 대답했다.
“네, 단주.”
“마지막으로. 암왕께서 오신 거. 비밀이에요.”
“네? 혜진 소저에게까지 말입니까?”
자오가 의아해하자 정광이 설명했다.
“금의위 연무장에 숨어들었으면 황궁 안에도 들어왔었을 수 있죠. 살수가 목적지에 오면 제일 먼저 누구를 찾을까요?”
“그야 조력자…… 아! 사부는 영평공주가 있는 만안궁으로 가셨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커요. 그렇다면 암살 도구인 소혜 소저가 돌아섰다는 걸 눈치채셨을 수도 있죠.”
“이해했습니다. 혹시라도 혜진 소저가 그 사실을 알고 동요한 모습을 보이면 사부께서 의심할지도 모르기에 그러시는 거군요.”
“마침 오시네요.”
잠시 뒤, 혜진이 와서 고개를 숙였다.
“단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혜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살짝 창백한 얼굴에 박힌 두 눈이 또렷하게 빛났다.
“황궁에 남아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고 싶습니다.”
“후회 안 하시겠어요?”
“아미타불. 흔들리면 바로 세우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광은 혜진이 제법 대견했다.
지금껏 뒤집어쓰고 있던 핏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홀로 우뚝 설 각오를 한 것 아닌가.
그것도 자신이 알려준 방법으로.
되도록 좋은 방향으로 끝나게 해보겠지만 그야 해봐야 아는 것.
혜진도 그걸 알기에 아비의 목숨에 대해 얘기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러면 더 잘해주고 싶어 하는 게 정광이라는 사람이었다.
“하하. 오랜만에 불호를 외우시네요. 좋아요, 무량수불. 고기로 배 좀 채우죠. 술도 한잔하고.”
얼마 안 가 황제를 만나러 갔던 황태손이 돌아왔다.
정광은 기미와 식사를 즐기며 황태손의 몸을 훑어봤다.
‘상체가 미세하게 커졌네. 가만. 설마?’
궁금할 땐 물어야지.
-저하. 백가상단에서 진상했던 도마뱀…… 아니, 철혈무쌍용갑요. 원래는 황상께서 입고 계셨는데 오늘 저하께 주신 건가요?
황태손은 놀란 기색 없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오히려 정광이 놀랐다.
‘황제가 왜 그랬지? 자기는 절대 자객 따위에게 죽지 않을 거라는 오만함 때문인가? 손주를 아껴서 그럴 위인은 아닌데.’
억지로 거부하던 천명을 더는 거스를 수 없게 되자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어쨌든 잘된 일이니 상관없지.’
반드시 살겠다는 의지를 굳힌 황태손이 철혈무쌍용갑이라는 방패까지 얻었다.
그의 역할에 기대를 걸고 있는 정광에겐 좋은 일이었다.
‘다음은…….’
식사가 끝나고 밤이 깊어지자 정광의 방에 흑서가 나타났다.
“왔어? 만세 어쩌고 하지 마.”
“……네. 교주를 뵙습니다. 어젯밤 내리신 명을 수행하고 왔습니다.”
정광이 금의위 지휘사, 병필태감, 어림군 지휘사에게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고 말한 뒤 흑서에게 명령을 내렸는데 그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금의위 지휘사와 어림군 지휘사 집에 모두 가봤어?”
“물론입니다.”
“어땠는데?”
“금의위 지휘사 쪽은 별다른 이상한 점이 없었지만 어림군 지휘사 집에선 부인이 향수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흠. 친정에 가서 쉬다 오면 될 것을. 호도가 막은 건가?”
“탐문해 보니 그렇다 합니다.”
“왜?”
“시국이 어수선한 때일수록 하북성에 남아 민초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고 했답니다.”
“제법인걸. 황제와 황태손 둘 다 살려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만 하더니. 충신 나셨네.”
황제를 지키는 자들 중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건 가정이었을 뿐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 직접 떠보고 흑서에게 집안을 살피라 했는데도 아무것도 안 나왔다.
‘배신자가 있으면 거사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가족을 대피시킬 줄 알았는데.’
이쯤이면 알아볼 만큼 알아봤으니 그냥 넘어가도 되련만.
정광은 최선을 다하는 사내였다.
“병필태감은 빼야 해. 최소한 황제만큼은 언제라도 죽일 수 있었던 자니까. 나머지 둘 중 혹시 수상한 행적을 보인 놈은 없었어?”
골똘히 생각하던 흑서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한 달 전쯤 어림군 지휘사가 병문안을 왔었습니다.”
“걔가? 원래 교분이 깊었어?”
“그런 건 아닙니다만. 둘 다 황상을 호위하는 일을 하다 보니 먼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병문안은 정말 오랜만이었지요.”
정광이 씩 웃었다.
“네가 회복됐나 여전히 망가져 있나 확인하러 간 것 같은데. 끈 떨어진 연을 챙길 위인으론 안 보였거든.”
흑서가 조심스레 얘기했다.
“교주. 충심으로 간언하겠습니다. 원래 그런 자이긴 하나, 제 쓸모를 확인한 뒤 가망이 있으면 연을 키우려고 왔었을 수도 있습니다.”
“응. 나도 확신하는 건 아니야. 우선순위에서 위에 뒀을 뿐이지.”
“……그가 맞군요. 교주의 우선순위는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요.”
“일단 놈이 배신자라 치자. 네 상세가 엉망이란 걸 확인했으니 거사에 방해가 될 목록에서 지웠을 거야.”
“그, 그럼…….”
“네가 놈들의 뒤통수를 치기 딱 좋은 상황이라는 거지. 할 수 있지?”
“분골쇄신(粉骨碎身)으로 임하겠습니다!”
“그래, 나한테서 도망쳤을 때의 반만 하면 되겠네.”
“조, 존명!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요, 용서해 주십시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흑서가 명을 받고 떠나자 정광은 침상에 드러누웠다.
혹시 빠뜨린 건 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요녕에서 모용회를 죽이고 도주했던 놈과 소혜에게 심공을 가르친 놈처럼 명교에는 고수가 또 있을 건데. 그놈들의 역할은 뭘까?’
황궁에 잠입하긴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거사가 성공했을 시 조간왕이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한왕을 암살하는 걸까?
정광은 눈을 감았다.
‘하든 말든. 어차피 황태손은 안 죽어.’
* * *
다음 날 아침.
의외의 인물이 찾아왔다.
정광은 반가운 얼굴로 팽만소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태상가주님. 무림맹에서 연락이 온 건가요?”
“정말 모르는 게 없군.”
“사마련과 장강수로연맹은요?”
“그들의 서신도 왔네. 한번 읽어보게나.”
정광은 서신 세 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밀약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은 우려감을 느끼며 황실을 도와 그들을 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무림맹은 운남성에 있는 점창파에 원군을 보냈네요.”
“야만족들의 기세가 대단해 점창은 물론 관군까지 애를 먹고 있다더군.”
“오. 사마련이 벌써 해적들과 싸우고 있다니. 하긴. 해안가는 그들의 세력권이니 밥그릇을 지켜야겠죠.”
“허허.”
“장강수로연맹은 배들을 풀어 군량과 병기를 나르는 데 앞장서겠다고 천명했고요. 황상께서 좋아하시겠네.”
팽만소가 빙그레 웃으며 정광을 바라봤다.
“전부 자네가 해낸 일이야. 자네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지. 정당한 명분과 악랄한 협박으로.”
“칭찬 맞나요?”
“물론. 자네 같은 대협과 본가가 연을 맺어 영광일세.”
정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사래 쳤다.
“가실 날은 멀었는데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
“…….”
“어서 황태손 저하를 뵙고 황상께 직접 서신을 올리세요. 아. 황상께서 칙명(勅命)을 내려 문서화 하신다고 하셨으니 꼭 받으시고요. 토사구팽당할 순 없잖아요.”
팽만소가 허리를 곧게 펴며 굳게 다짐했다.
“고맙네. 반드시 그러지.”
이날, 팽만소는 불명예스러웠던 과거를 지우고 대명의 충신으로 거듭났다.
황궁의 분위기도 변했다.
몽고가 곧 남하하기 시작할 게 뻔했지만 사기충천하여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났다.
동이 트자마자 팽가에서 달려온 자오가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단주. 알 것 같습니다. 사부께서 도주하시면 어떻게 하실지 말입니다.”
“확실한 건가요?”
“그, 그건…….”
정광은 피식 웃었다.
어찌 됐든 자오도 혜진처럼 사부의 무거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지 않은가.
“말씀해 주세요.”
자오는 열변을 토했고 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한데요.”
“저, 정말입니까?”
“음. 밥이나 먹을까요?”
정광은 배를 든든히 채우고 쉬다가 황태손에게 권했다.
“저하. 가시죠.”
“알겠소. 잘 부탁하오.”
“저야말로요.”
황태손은 뜨거운 눈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정광은 그 눈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이거, 의욕을 너무 과다하게 주입시킨 거 아니야?’
혜진과 자오가 마음을 먹었듯, 황태손 역시 황제라는 거목에서 벗어나 홀로 크려 노력하고 있었다.
“저하. 눈 빠지시겠어요. 가시죠.”
“……아, 알겠소.”
그들은 근신전(謹身殿)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오늘, 만수절 행사가 열리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