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4화
하여간 요즘 것들은
인간(人間)이라는 단어가 사람 인(人)과 사이 간(間)으로 이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이란 본디 외로운 존재이기에 타인들 사이에 섞여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수(殺手)는 그럴 수 없었다.
단 한 순간을 위해 며칠 동안 홀로 은신한 채 외로움과 싸우는 건 기본이었다.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거쳐 암습을 할 때도, 처절한 도주를 감행할 때도, 심지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간신히 잠적해 버릴 때조차 홀로 모든 걸 해내야 하는 고독한 존재인 것이다!
얘기가 돌고 돌아 이런 내용까지 나와 버리자 영평공주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탁자에 글을 썼다.
[그렇게 외로움에 익숙한 살수가, 고독한 살수의 왕이 왜 그리 말이 많은 것이오?]
암왕의 대답은 깔끔했다.
-참으면 병나니까.
[…….]
-생각해 봐. 맨날 벙어리로 어떻게 지내? 말할 기회가 생기면 최대한 해야지. 그래야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것 아냐.
[……지금도 그다지 온전한 것 같지는 않소만.]
암왕이 전음으로 혀를 찼다.
-쯧쯧. 내가 봤을 땐 네가 그래. 공주씩이나 돼놓고 왜 그렇게 침울하게 사냐? 살행(殺行)을 나와 사람 숨통을 끊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인생 참 짧다. 좀 즐겨봐. 황궁에만 박혀 있다 보니 즐길 거리가 없나? 좋아. 큰맘 먹고 재밌는 얘기를 해주지. 내가 소싯적에…….
영평공주가 폭발했다.
[제발 그만 좀 하시오! 전혀 궁금하지 않소! 그대 때문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란 말이외다!]
-이거 큰일이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암왕의 전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 정신 수양을 좀 해야겠다. 이 정도도 못 견뎌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만수절 행사 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어?
[……!]
-네가 수상한 티를 내면 네 딸도 의심받을 거야. 그럼 내가 일을 벌이는 데도 지장이 생기겠지.
[…….]
-똑똑히 들어. 두 번째 기회는 없어. 이번 한 번에 끝내야 한다. 이해했냐?
영평공주의 눈빛이 변했다.
그토록 원하고 기다리던 거사를 자신의 실수로 허무하게 날렸다간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게 분명해서였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글을 썼다.
[알겠소. 최선을 다하리다.]
-최선으론 부족해. 열심히 하면 뭐 해? 잘해야지.
[…….]
-그러려면 말이야, 우선 마음가짐부터…….
암왕은 영평공주를 한동안 더 괴롭힌 뒤 놔줬다.
오래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흔들리는 모습이 영 미덥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써먹을 수 있을 만큼은 써먹어야지.
‘일단 입은 풀었고.’
문제가 있었다.
‘공주야 그렇다 쳐도 명교에서 안배해 놓은 괜찮은 도구를 못 쓰게 됐어.’
소혜는 대단한 심공을 익힌 데다 침착하기까지 한 아이였다.
헌데 그러면 뭐 하나?
불취검, 정확히는 아미파의 교봉이라는 감시인에게 이것저것 다 부는 모습을 봐버렸는데.
‘공주에겐 얘기 안 하는 게 나아.’
알게 되면 다시 일어서지 못할 만큼 흔들릴 게 분명했다.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고.’
아니, 그냥 훌쩍 떠나 변방에 박혀 살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천하제일살문으로 꼽힌 영인문(影人門)이었지만, 이제껏 황제를 암살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어서였다.
심지어 몇 대 전의 문주는 원(元) 황제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해 멸문한척하며 파천방(破天幇)이라는 사파로 위장하고 맥을 이어오지 않았는가.
‘황제를 죽일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지그시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해가 저물고 깊은 밤이 되자 명상으로 정신을 단련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영인문 비전 고독벽곡단(孤獨辟穀丹)을 섭취하자 움직일 준비가 되었다.
‘슬슬 가볼까.’
나가기 전에 영평공주에 전음을 보냈다.
-공주.
‘……!’
-왜 그렇게 놀래? 이렇게 담이 약해서야 원. 나가서 둘러보고 올 테니 정신 수양이라도 하고 있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한참 동안 조용했던 암왕이 전음을 보내자 화들짝 놀랐던 영평공주는 나갔다 오겠다는 말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소. 조심히 다녀오시오.]
-나 암왕이야.
그는 귀신처럼 은밀하게 만안궁에서 빠져나갔다.
담벼락에 녹아든 뒤 하늘에 뜬 해의 위치로 시간을 가늠하며 기다렸다.
‘올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림군 무장 한 명이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암왕은 무장이 스쳐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그의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영인문의 은영술(隱影術)은 천하제일.
암왕은 무장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이동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번을 서는 놈들이 많아. 진법과 기관진식의 수도 꽤 되고. 과연 황궁이군.’
얼마 안 가 무장은 어림군 지휘사의 집무실에 이르렀다.
무장이 지휘사에게 일과 보고를 하고 떠났을 때, 무장의 그림자 속은 텅텅 비어 있었다.
암왕이 지휘사의 그림자로 갈아탄 것이다.
-네가 호도무적(豪刀無敵)이냐?
암왕의 느닷없는 전음에도 지휘사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올 것이란 걸 알고 있었고 암왕이 일부러 기척을 내서였다.
-알면서 묻는 이유가 뭐지?
-무적은 빼야 할 것 같아서. 호도라 부를게.
지휘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진옥룡 그놈과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어? 걔도 그랬어? 안목이 있는 놈이네.
-잡설이 길군. 시간이 없으니 빨리 말하마.
어림군 지휘사는 이번 만수절이 어디서 어떻게 열리는지, 진옥룡이라는 변수 때문에 무엇이 변했는지 설명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암왕이 감탄했다.
-호오. 황제, 황태자, 황태손을 한군데 모아 지킨다? 효율적이네. 황제가 잘도 허락했어.
-해낼 수 있겠느냐?
-조금 더 번거로워질 뿐이지. 그보다 진옥룡 그놈. 듣던 것보다 더 재밌는 녀석이네. 여의치 않을 경우 황제, 황태손 중에 누구를 살릴지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니.
-방심하지 마라. 정말 무서운 놈이다.
-그게 그거지. 그래서, 너희들은 뭐라고 답했어?
-병필태감은 황상이라 했다.
-황제가 태어날 때부터 보필해 왔다는 내시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금의위 지휘사는?
-황태손 저하.
-간도 크네. 천자가 아니라 대명에 충성한다 이건가.
-원래 그런 자다. 황상이 물었어도 그리 답했을 거다.
-너는 뭐라 했는데?
-무조건 두 분 다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제일 무난한 답이네. 진옥룡은?
-황태손 저하라더군.
-그럼 황제 한 명, 황태손 두 명, 둘 다 살려야 한다 한 명. 우선순위고 뭐고 없잖아. 그걸로 끝난 거야? 진옥룡이 행패는 안 부렸어?
-일치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몇 번 설득하다가 안 되니 한동안 투덜댄 후 어쨌든 잘해보자 했다.
암왕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뭔가 이상한데. 그놈은 애초부터 황태손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잖아. 병필태감은 황상을 택할 게 뻔하거늘, 어차피 일치될 리 없는데 왜 물어본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금의위 지휘사와 어림군 지휘사를 떠보려고 그랬을지도 몰랐다.
‘가만. 호도 이놈의 말에 따르면 금의위 지휘사는 어차피 황태손을 택할 자라 했지. 이건 진옥룡도 예상했을 거야.’
그런데 어림군 지휘사는 황제와 황태손 둘 다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난하게 답해서 오히려 의심을 사게 됐을까? 아니면 몸 한번 잘 사린다고 혀를 찼을까?’
암왕이 아무런 말도 안 하자 어림군 지휘사가 물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암왕은 속마음을 숨긴 채 엉뚱한 대답을 했다.
-황실의 비밀수신호위라는 황실수호암응(皇室守護暗鷹) 있잖아. 걔들의 정확한 실력을 알고 싶어서.
-일호, 이호, 삼호. 모두 네 적수는 아니다. 네 은신술과는 차이가 커.
-놈들의 수장이자 사부라는 수응(首鷹)은? 마공의 부작용으로 망가진 거 맞아?
-한 달 전쯤 내가 직접 확인해 봤으니 확실하다.
-만수절이 열린다는 근신전(謹身殿)도 궁금한데. 가볼 수 있지?
-당연한 소리. 곧 근신전에 가서 곳곳을 둘러볼 수하가 올 거다. 황태자 전하의 침소도 들를 테니 황실수호암응 이호의 실력을 봐둬라. 그리고 진옥룡 말인데.
-그놈 꼭 봐야 해. 멀리서라도.
-안 들킬 자신이 있고?
-말이라고.
-아까 말한 수하가 황태손과 놈이 있는 단본궁에도 들릴 게다. 안에 들어가진 않고 밖에서 번을 서겠지만 네 능력이라면 가능하겠지. 금의위 지휘사와 병필태감은 내일쯤 기회를 만들어볼 테니 그때 확인해라.
-좋군. 그럼 오늘은 볼 것만 보고 만안궁으로 돌아갈게. 그리고…….
암왕은 거사 당일 어림군 지휘사가 해야 할 일을 알려줬다.
-이해했지?
-물론.
-바꿔야 할 게 있으면 내일 말해주마.
-알겠다. 만안궁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느냐?
암왕은 그림자 속에서 미소 지었다.
왜 없을까.
소혜라는 암살 도구가 배반했는데.
‘그건 그것대로 써먹으면 돼. 변수는 나만 쥐고 있어야 하고.’
암왕은 전부 숨겼다.
-없어. 그럼 그때 보자.
* * *
암왕은 어림군 무장의 그림자에 숨은 채 근신전을 낱낱이 돌아봤다.
금의수호팔진(錦衣守護八陣)의 배치와 목표물들의 위치를 그리며 암살 과정을 떠올렸다.
다소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할 만해. 아주 재밌겠어.’
황태자의 처소에 가서 황실수호암응 이호의 수준도 파악했다.
‘나쁘지 않아.’
하지만 그래 봤자지.
셋이라 걸리적거리겠지만 역시 암왕의 상대는 아니었다.
‘이제 진옥룡만 남았군.’
단본궁 밖에서 번을 서는 무장의 그림자 속에 은신한 채 기다리는데.
역용을 한 여인과 사내가 문을 열고 나왔다.
‘불취검이군. 여기에서 식사를 한다더니.’
그때, 불취검이 같이 나온 중년 사내에게 포권했다.
“각응. 그럼 수고하십시오.”
“하하. 불취검이야말로 고생하십시오.”
‘각응’이라는 말에 암왕의 눈썹이 치솟았다.
각응은 곧 자오 아닌가!
‘이놈! 드디어 보는구나!’
말을 꽤 조리 있게 하는 것이 어린 시절의 자신과 닮아 이뻐했었다.
자질도 괜찮은데 독기가 부족해서 어찌나 안타까웠던지.
매일같이 애정 어린 말과 손짓으로 다독여 제 대사형과 삼사형을 죽일 만큼 키웠건만, 조금 배우는 척하더니 사부가 살행을 떠난 틈을 타 도망가 버려?
‘대체 뭘 하며 사는지 구경이나 해보자.’
옛 제자의 그림자 속에 숨어 따라갔다.
어디를 가나 했더니.
자오는 황궁에서 나가 근처에 있는 거대한 연무장에 들어갔다.
그곳은 짙은 주황색 관복을 입은 금의위 무관들로 가득했다.
자오는 그들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넨 후 진형 속으로 뛰어들었다.
암왕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녀석.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기껏하는 짓이 금의위를 상대로 자객 노릇을 하는 거라니.
‘어? 근데 꽤 하네?’
사마련에 들어가서 잡스러운 사기로 가득 차 있을 줄 알았는데. 기가 왜 저리 깨끗할까?
‘진옥룡을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배워 정파인으로 탈바꿈됐다더니 사실인가 보군.’
허송세월하진 않았는지 느껴지는 기운이 제법이었다.
‘그래도 내가 계속 키웠으면 훨씬 더 강해졌을 텐데. 에잉, 고얀 녀석.’
그걸 못 견디고 도망가?
하여간 요즘 것들은 근성이 없다니까.
‘후우우. 참자, 참아.’
내가 고생했으니 제자 놈들은 좀 더 편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가끔가다가 울컥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뭐 금의위들이 이미 찰지게 패고 있으니 굳이 한 손 거들 필요도 없었고.
그래도 도망가지 않고 악착같이 계속 뚫으려는 모습이 가슴을 울렸다.
‘이제라도 다시 거둬들여?’
영인문의 수련은 워낙 혹독해서 도망가는 이가 적지 않았다.
때문에 도주한 제자가 어떻게 지내는지 지켜보다가 여전히 자질이 괜찮고 발전했다 싶으면 살수 출신인 걸 알리겠다고 협박해 다시 거둬들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흐음. 그러려면 진옥룡을 반드시 죽여야 하는데…….’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휴식시간이 됐다.
한 금의위 무관이 자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각응. 수고하셨소.”
“하하. 천호님이야 말로 고생하셨습니다.”
“헌데 진옥룡은 어디에 있소? 왜 그대만 보내 이렇게 고생시키는 건지 이해가 안 가오.”
“워낙 바쁘신 분이라…… 원래 성품이 그렇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와 그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니. 참 대단하오.”
“뭐,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괜찮아야지요. 휴우. 가끔 좀 벅찰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소?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점점 진옥룡에 대한 험담이 시작되는데 자오 이놈.
험담을 말리는 척하지만 은근히 동조하고 있지 않은가?
암왕은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옥룡을 죽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군.’
그때, 한 청년이 연무장에 들어왔다.
난생처음 보는 엄청난 미남자!
누가 봐도 진옥룡 아닌가!
하지만 암왕은 다른 이유로 놀랐다.
‘미친. 뭐 이리 강해?’
멀리서 보는 거라 확실하진 않았지만 어림군 지휘사보다 강하지 않은가.
놀람도 잠시.
‘흥. 훌륭하긴 하다만. 나를 상대로 될 것 같으냐?’
암왕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본좌는 암왕이니라.’
그때, 정광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찔끔한 암왕은 재빨리 기를 흩었다.
‘미친! 어떻게 알았지? 아니, 알고 본 게 맞나?’
* * *
한편, 금의위 연무장에 들어선 정광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확실하게 실체가 잡히진 않았으나 분명 무언가가 주변에 있는 게 확실했다.
‘저긴가?’
슬쩍 돌아보자 뭔가 흔들렸다가 흩어졌다.
정광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며 속으로 웃었다.
‘암왕인가? 상당한데? 모습을 드러내야 잡을 수 있겠어.’
어차피 그렇게 될 터.
정광은 눈을 빛냈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뻐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