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44화 (343/569)

2부 73화

반드시 살겠다는 의지

“영평공주가 외부와 어떻게 연락을 취하는지 알아냈습니다.”

이렇게 혜진이 중요한 소식을 전했지만 정광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소저. 낯빛이 엊저녁에 비해 다소 파리해졌네요.”

“…….”

“목소리는 갈라져서 나오고요.”

“…….”

“밤을 새우신 것 같은데. 아침도 안 드셨죠?”

“…….”

한동안 침묵하던 혜진이 입을 살짝 열었다.

“단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정광이 정색했다.

“중요하죠. 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입고 건강하게 장수하자고 하는 일인데. 일단 밥부터 드시죠.”

정광은 혜진처럼 못 먹고 못 자다가 수혈을 짚여 단잠에 빠진 자오를 깨웠다.

“어때요? 좀 나아지셨어요?”

자오의 눈이 빛났다.

“아! 정신이 번쩍 듭니다. 머리가 맑아지니 단주께서 하셨던 말씀이 일목요연하게 이해가 되는군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해 보겠습니다. 그럼 분명 사부처럼…….”

“그렇죠. 그러려면 힘을 더 내셔야 하니 배 채우러 가죠.”

“……네, 단주.”

황태손과 혜진은 영 식욕이 없어 깨작거렸지만 정광과 자오는 최선을 다해 먹었다.

변함없는 식성을 자랑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황태손이 실소를 흘렸다.

“하하. 항상 느끼지만 보는 사람이 기분 좋아질 만큼 맛있게 드시는구려.”

정광은 입에 들어있던 것들을 꿀꺽 삼키고 답했다.

“실제로 맛있으니까요. 저하께서도 좀 드시죠.”

“음.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하오.”

“드실 수 있을 때 드셔둬야죠.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

“배가 고파 기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일이 터지면 이 순간이 무척 후회되지 않을까요?”

정광은 황태손을 나무란 뒤 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저도 마찬가지예요. 술이 없다고 시위하시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럼 드셔야죠. 제가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하는 말이 있는데. 그새 잊으셨어요?”

혜진은 저도 모르게 나직이 중얼거렸다.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네. 그래야 해요. 몸과 마음은 연결돼 있거든요. 그걸 명심하고 실행하면 안 좋은 상황은 좋아질 거고 좋은 상황은 더 좋아질 거예요.”

정광은 싱긋 웃으며 황태손과 혜진을 번갈아 봤다.

“이제 식욕이 동하시죠? 그렇지 않더라도 드실 의지가 생겼으리라 믿을게요.”

황태손과 혜진은 억지로 먹었다.

시간이 흘러 모두 배를 채우자 정광은 황태손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하. 잠시 얘기 좀 하다 올게요.”

“그러시오. 그리고 깨우쳐 줘서 고맙소.”

“뭘 그런 걸 가지고.”

정광은 자오, 혜진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갔다.

“자오. 아까 주무시느라 못 들으셨을 텐데. 혜진 소저가 중요한 사실을 알아내셨어요. 소저, 말씀해 주시죠.”

“네, 단주.”

안색이 한결 나아진 혜진이 또렷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어제저녁, 단주를 뵙고 만안궁으로 돌아갔더니 영평공주가 방에서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혜진이 인기척을 내자 영평공주가 고개를 내렸다.

드러난 그녀의 안색은 예전보다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바로 돌아섰지만 확실히 그랬습니다.”

혜진은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였지만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제가 만안궁에서 머문 지 며칠 됐는데 영평공주가 방 밖으로 나온 건 처음이었습니다. 감기에 걸린 그녀가 왜 추운 겨울에 나와 그러고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평소와 다른 특별한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정광이 그 점을 짚었다.

“아침에 한왕 전하와 조간왕 전하가 만안궁을 방문했었죠.”

“그렇습니다. 허나 그 때문이라 단정하진 않았습니다.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니까요.”

혜진은 틈을 봐서 소혜를 만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었는데,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영평공주가 곧 만수절이니 제일 좋은 의복으로 신경 써서 준비하라고 했답니다. 건강도 유의하라고 주의를 줬고요. 원래 그랬냐고 물었더니 해마다 마지못해 억지로 참석했다고 하더군요.”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해하던 만수절이 중요한 행사가 된 거네요. 갑자기 그러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요.”

자오가 가만히 듣다가 끼어들었다.

“아침에 찾아왔던 한왕 전하나 조간왕 전하 둘 중 한 분이 영평공주께 만수절에 일을 벌일 거라고 전했을 거라 믿으시는 거군요.”

혜진이 인정했다.

“그렇습니다. 영평공주와 종일 함께하다시피 하는 소혜 소저가 근래에 유일하게 떨어져 있었던 건 그분들이 오셨을 때뿐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소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혜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영평공주가 황궁으로 돌아와 지낸 이래로 누구보다 자주 찾아와 그녀를 위로해 준 건…….”

정광이 뒷말을 이었다.

“조간왕 전하겠죠.”

“……맞습니다, 단주. 비밀을 지키기 위해 직접 소식을 주고받은 것 같습니다. 필담 같은 것으로.”

혜진이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분명 그럴 거라 확신하고 달려왔는데 막상 말씀드리고 나니 조심스러워집니다. 제 추측일 뿐이니 참고만 해주십시오.”

정광은 빙그레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혜진이 의아한 눈으로 정광의 손바닥과 얼굴을 번갈아 봤다.

“단주. 손은 왜……?”

“치세요.”

“네?”

“주먹 말고 손바닥으로요. 내공 넣지 말고 세차게.”

혜진은 일단 정광의 말에 따랐다.

짝!

경쾌한 소리가 방을 울렸다.

정광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혜진을 칭찬했다.

“부동심에 한 걸음 다가가셨네요.”

“제가 말입니까?”

“네.”

정광은 부드럽게 설명했다.

“마음이 어지러우신 와중에도 맡은 임무를 훌륭히 소화하셨잖아요. 조간왕 전하와 관계된 일이라 소저의 주관이 개입된 판단일 수도 있다고 첨언까지 하셨고요.”

“…….”

“아까도 제가 한 말씀 드리니 입맛이 없는 와중에도 바로 드셨죠?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바로잡고 계시는 거죠.”

“…….”

혜진은 복잡한 눈빛으로 정광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정광은 그녀와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하나씩. 하나씩.”

“…….”

“그게 더 빠를 수도 있어요.”

“……명심하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만 만안궁으로 돌아가셔서 푹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 봬요.”

혜진은 정중히 예를 표하고 떠났다.

자오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정광에게 물었다.

“단주. 성장했다 해도 마음이 많이 복잡할 겁니다. 일이 끝날 때까지 황궁 밖에서 지내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건 혜진 소저 스스로 판단할 문제죠.”

“그렇긴 합니다만…… 후우우.”

자오는 한숨을 내쉰 뒤 애써 쾌활하게 말했다.

“어쨌거나 두 친왕 중 누가 밀약과 관련이 있는지 밝혀져서 다행입니다. 아. 아직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냥 확실하다고 봐도 될 거예요.”

“하하. 역시 그렇군요. 영평공주가 외부와 연락을 취하는 방법을 알아냈지만 그걸 써먹을 수 없는 건 좀 아쉽습니다.”

“더 이상 연락할 일도 없을 테니 큰 상관은 없죠.”

자오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단주께선 조간왕부를 돌아보실 생각입니까?”

“동창의 진 공공이 어느 정도 냄새를 맡았으니 면밀하게 감시하고 있을걸요. 조간왕부에 밀약의 인물이나 암왕께서 계시면 벌써 감시받고 있다는 걸 눈치채셨을 거예요.”

“이해했습니다. 숨죽이고 있을 게 뻔한데 단주께서 굳이 가실 필요는 없겠지요. 밀약에서 혹시 계획을 바꿀 수도 있겠습니다.”

정광이 부정했다.

“요녕에서 모용회가 토설한 바에 따르면 몽고가 남하하기로 약조한 시기는 이때쯤이에요. 안에서 난을 일으키고 밖에서 쳐 혼란을 극대화하려고 했던 거죠. 시간이 지날수록 대명의 방비는 굳건해질 테니 밀약으로선 날짜를 미룰 수 없을 거예요.”

“……그 말씀은?”

“더 빨리 일을 벌이면 벌였지 늦추진 않을 거란 거죠.”

정광은 자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슬슬 금의위 연무장으로 가셔야죠. 수고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다, 단주께선 안 가시는 겁니까?”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황태손 저하 곁에 있어야죠.”

자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 혼자 가면 금의위 무장들이 더 사납게 달려들 텐데…….’

마치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정광이 조언했다.

“그분들에게 제 욕을 하시면 나아질 거예요.”

“네?”

“사람이란 동질감을 느낀 상대에겐 친절해지기 마련이죠. 하실 수 있죠?”

“아! 그렇군요! 그 정도야…….”

자오는 눈을 빛내며 손뼉을 치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꿀꺽. 저, 절대 안 됩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잘하실 것 같은데.”

“단주!”

“저녁 식사 때 뵙죠. 성과가 있으시길 빌게요.”

자오가 복잡한 얼굴로 사라졌다.

정광도 해야 할 일을 했다.

황태손에게 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하. 황상과 저하 중 한 분만 살릴 수 있으면 저는 저하를 살릴 거예요.”

입궐해서 황태손 옆에 시립해 있던 어림군 부지휘사가 입을 떡 벌렸다가 호통을 쳤다.

“지, 진옥룡! 그게 대체 무슨 망발이오!”

정광은 태연히 답했다.

“황상께선 어차피 곧 돌아가실 거잖아요. 저하께서 사시는 게 천하 평안에 도움이 되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요?”

“닥치시오!”

“제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건 황상께서도 알고 계실 건데. 왜 부지휘사님이 화내세요?”

“이, 이익!”

부지휘사는 도파(刀把)를 움켜쥔 채 부들거렸다.

평소라면 이런 망언을 뱉은 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았겠지만, 이제껏 정광에게 받은 도움이 너무 많았고 그가 한 말 역시 옳다는 걸 알아서였다.

‘진옥룡! 아무리 그래도 저하가 계신데 그런 말을 뱉으면 어쩌자는 것이오!’

부지휘사는 속으로 외치며 황태손의 기색을 살폈다.

황태손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정광을 노려보고 있었다.

부지휘사의 얼굴도 굳어졌다.

‘진옥룡은 진짜 용이다. 저하께서 평생 가까이하셔야 할 인재야. 아니, 그렇진 못하더라도 절대 척을 져선 안 되는 위인이거늘. 이 일을 어찌 풀어야 한단 말인가.’

그때, 황태손의 시선이 부지휘사에게 향했다.

“부지휘사.”

“네, 저하.”

“지금부터 나와 진옥룡이 나누는 얘기는 못 들은 척해주시오. 그대 없이 대화할 수도 있으나 나를 계속 지켜준 그대를 속이긴 싫어서 부탁하는 것이오.”

부지휘사는 불안감과 감동을 동시에 느꼈다.

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고?

나를 이리도 생각해 주고 계셨단 말인가?

두 가지 감정이 격렬히 부딪혔으나.

더 큰 건 감동이었다.

“저하. 소장은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고맙소이다.”

황태손은 시선을 정광에게 돌렸다.

“진옥룡.”

“네, 저하.”

“황상과 나. 둘 다 살려주시오.”

“웬만하면 저도 그러고 싶죠. 그게 저에게도 좋으니까요.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놓고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저하께선 어느 쪽을 원하세요?”

“…….”

황태손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뒤.

다시 뜨인 그의 두 눈에서는 강렬한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내가 살아야겠소. 황상의 뒤를 이어 대명을 윤택하게 가꿔 나갈 능력을 지닌 건 나밖에 없소이다.”

정광이 씩 웃었다.

“뭘 또 새삼스럽게. 황상께서도 그걸 아시니까 황태손 저하로 책봉하신 거잖아요.”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이미 말했구려. 진옥룡의 말이 맞소이다.”

“좋네요. 마음을 확실히 굳히셨으니 최악의 상황이 와도 살아나실 확률이 높아졌어요.”

“그건 무슨 의미요?”

“저하께서 반드시 살겠다는 의지를 굳히셨잖아요. 즉사하시지만 않으면 제가 어떻게든 살릴 수 있다는 얘기예요.”

“아! 그대의 의술을 말하는 것이구려. 혹시 황상이나 황태자 전하의 병도 고칠 수 있소이까?”

운후를 살렸을 때처럼 죽어라 노력하면 될지도 몰랐지만, 정광으로선 그럴 시간도 이유도 없었다.

“천수를 다하신 건 화타가 와도 안 되죠.”

“후우. 익히 알면서도 무리한 말을 해 미안하오.”

“뭘요. 부지휘사님. 안 들리시는 거 맞죠?”

경악하고 있던 부지휘사는 정광의 말에 놀라 대답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황태손이 그런 그에게 말했다.

“이제 되었소.”

“……네, 저하.”

“부지휘사의 생각은 어떻소?”

부지휘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소장은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정광이 씩 웃었다.

“좋네요. 그럼 다음 얘기를 해볼까요?”

황태손과 부지휘사의 눈이 커졌다.

다음 얘기?

또 뭘?

* * *

혜진의 추측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어제 영평공주의 안색이 밝았던 것은 조간왕과 만나 모종의 말을 들어서였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이가 조간왕의 그림자에 숨어 무사히 들어온 것이다.

이제 대업의 반은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

가슴이 너무 벅차 찬바람을 쐬어 식혀야 할 정도였다.

만수절도 코앞으로 다가왔겠다, 당연히 오늘도 기분이 좋아야 했는데…….

영평공주는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그만! 그만해! 이 악귀야! 제발 그만하란 말이다!’

천장 위에 은신한 암왕은 온종일 전음으로 떠들고 있었다.

-내가 말이지. 여태껏 실력이 없어서 황궁에 안 들어왔던 건 아니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들어왔을 거라니깐. 어? 표정 봐라. 그렇게 설명해 줬는데도 안 믿겨? 좋아.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 줄게. 본 영인문이 왜 위대한 문파고 노부는 얼마나 뛰어난 살수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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