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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343화 (342/569)

2부 72화

우선순위

예법이란 무엇인가?

예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예의 기준은 타고난 신분이나 권력, 금력 등에 의해 저마다 달라지게 된다.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민초와 고관대작의 기준이 어찌 같을까.

더구나 황실이라면?

품위를 높이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두려움과 존경을 사기 위해 거창하기 짝이 없는 예법을 세우고 준수하게 된다.

스스로 그것을 지킴으로써 황실의 힘을 더 공고히 하고 위엄을 떨치는 것이다.

헌데 황실은 물론 천하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황제에게 예법 따위 그냥 무시해도 되지 않냐고 묻다니.

그것도 강호의 무부가.

황제를 지키는 무장들의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툭 불거졌다.

‘천하에 이런 망종이 있나!’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말을!’

미칠 필요도 없었다.

정광은 원래 그런 위인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익히 아는 황제는 무턱대고 분노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광을 주시하며 무겁게 물었다.

“지금 짐(朕)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냐?”

“네, 폐하.”

“짐의 체면을 스스로 깎으라고?”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감히 천자에게 또 목숨을 운운하다니.

간신히 참고 있던 무장들이 노호성을 터뜨리려는 순간.

황제가 한 손을 살짝 들어 올려 제지했다.

그의 입에서 위엄에 가득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짐이 자객 따위에게 죽을 것 같진 않다만.”

“음. 하긴. 그 전에 귀천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또 한 번 있을 수 없는 망언이 나왔지만 무장들의 반응은 아까와는 달랐다.

다들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황제는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 어떤 영약으로도, 황궁 고수들의 헌신적인 희생으로도 절대 멈출 수 없는 운명이었다.

허나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천명(天命). 혹은 천수(天壽)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군. 진옥룡, 네게 묻겠다. 하늘이 정해준 명을 짐이 받아들일 것 같으냐?”

정광은 오연하게 고개를 치켜든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표정에서도 자세에서도 격렬히 저항하겠다는 의지가 가득 엿보였다.

“이미 안 받아들이고 계시죠. 진맥을 안 해봐서 확실하진 않지만 진작 가셨어야 했는데 남아 계신 느낌인데요.”

“잘 보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무수한 영약, 끝없는 추궁과혈, 틈날 때마다 펼치는 격체전력?”

정광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답하자 황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정하진 않으마. 허나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짐의 의지가 그것을 가능케 했느니라. 이렇게 말이다.”

앉아 있던 황제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명문혈에 손을 대고 내력을 불어넣고 있던 병필태감이 당황했다.

“폐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된다.”

황제는 병필태감의 손을 밀어내고 계속 일어섰다.

그리고 결국 완전히 일어나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그의 눈에서 굳은 의지로 뭉친 불길이 솟았다.

“보았느냐? 이게 짐이니라. 하늘의 뜻대로 살아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던 무장들이 일제히 열광했다.

“황제 폐하 만세만세만만세(萬歲萬歲萬萬歲)!”

정광도 감탄했다.

‘저 몸으로 일어서? 대단한 독종이잖아.’

잘하면 만수절까지는 버티리라.

정광도 놀랄 만큼 대단한 의지!

마치 미리 짜놓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외치는 무장들도 놀라웠다.

‘어쨌든 명분이 생겼네.’

정광은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바로 그거죠. 주객이 전도되어서야 쓰나요.”

“……무슨 말이냐?”

“예법이고 뭐고 모든 건 황상의 의지에 달렸다는 의미죠. 제가 황궁에서 지내는 것도 예법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황상의 의지에 의해 가능해진 거잖아요. 이왕 베푸신 거, 조금만 더 퍼주시죠.”

무장들이 입을 떡 벌렸다.

시장통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아 흥정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역시 경악한 황태손이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하는데.

황제의 입매가 살짝 휘었다.

놀랍게도 미소였다.

“그런 궤변을 늘어놓으면서까지 허락을 받으려고 하다니. 이쯤 되니 궁금해지는군.”

“그렇죠?”

황제가 다시 옥좌에 앉자 병필태감이 급히 내공을 불어넣었다.

“폐하. 무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장암. 무리는 네가 하고 있다.”

“하오나…….”

“그만.”

안색이 한결 나아진 황제가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번 말해보거라.”

정광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황태손 저하를 모두 지키려면 고수들이 많이 필요해요. 하지만 고수들의 수는 정해져 있죠.”

“그래서?”

정광의 눈이 빛났다.

“호위를 담당할 고수가 적으면 지켜야 할 분들이라도 한곳에 모아야죠. 세 분 모두 어차피 한 식구신데 나란히 붙어 앉으셔도 되죠?”

무장들의 눈이 툭 불거졌다.

어차피 한 식구?

나란히 붙어 앉아?

황태자, 황태손이 황제와 맞먹게 되는 것 아닌가!

다른 이들이 뭐라 하기 전에 황태손이 재빨리 외쳤다.

“폐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고로 권력이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

황실의 경우엔 얼마나 더 그러랴.

당황한 황태손과 달리 황제는 침착했다.

“무림인이라 그런지 생각하는 방향이 많이 다르군. 정말 파격적이긴 하다만…….”

이번엔 정광이 놀랐다.

‘화 안 내? 달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황제의 시선이 정광을 향했다.

정말 그것뿐이냐는 듯 묻는 눈빛. 당연히 이유가 더 있던 정광은 황제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를 빠르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였다.

-페하. 이건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전음한 거 티 내면 안 되는 거 아시죠?

“…….”

황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말꼬리를 늘어뜨리던 것을 이어 말하듯 입을 열었다.

“네 도움을 받기로 했으니 끝까지 믿어야겠지. 뜻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짐의 믿음에 꼭 부응해야 할 것이다.”

“물론이죠.”

황제가 모두에게 명했다.

“이만 쉴 테니 금의위, 어림군, 동창은 진옥룡의 계획에 따라 만수절을 준비하라. 황태손은 잠시 남고.”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황태손의 발치에 은신한 응삼에게 전음을 보냈다.

-흑서한테 오늘 밤 내 방으로 오라고 전해.

-존명!

* * *

정광은 황제의 거처인 건청궁(乾淸宮)에서 떠나지 않았다.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겨 금의위 지휘사, 어림군 지휘사, 병필태감과 마주 앉았다.

“제 계획을 말씀드릴게요.”

대단한 계획은 아니었다.

황제, 황태자, 황태손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지키되 자객을 발견하면 수장들은 움직이지 말고 수하들이 잡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위맹한 인상에 체격이 큰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항상 황제의 곁에 있어 정광도 아는 자였다.

황실의 주요 인사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어림군의 지휘사였다.

“후우우. 다들 진옥룡, 진옥룡 하길래 신기묘산이라도 부릴 줄 알았거늘…….”

정광이 부정했다.

“단순한 게 제일 효과적이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나 아쉬워서 그러네. 뭔가 더 있을 줄 알았건만, 이게 다일 줄이야.”

“세 분 다음가는 고수가 어림군의 두 부지휘사님과 금의위의 두 부지휘사님이죠?”

“그렇네.”

“황제 폐하와 황태손 저하껜 비밀수신호위가 있고요. 아마 황태자 전하께도 있겠죠.”

응삼을 비롯한 황실수호암응(皇室守護暗鷹)을 말한 것이었다.

어림군 지휘사가 혀를 찼다.

“이거야 원. 부정할 수도 없고.”

“그분들도 나쁘진 않지만 세 분과 비교하면 수준 차이가 너무 나요. 고수의 수가 많으면 뭐라도 더 해볼 텐데. 아니니 어쩔 수 없죠.”

어림군 지휘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현실을 봐야겠지. 연 지휘사께선 어찌 생각하시오?”

금의위 지휘사가 짧게 답했다.

“진옥룡이 다듬은 계획이 최선이라 생각하오.”

어림군 지휘사가 병필태감에게 물었다.

“병필태감께선?”

“두 지휘사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지켜보던 정광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지휘사님이 두 분이니까 헷갈리네요. 어림군 지휘사님. 별호가 어떻게 되시죠?”

“호도무적(豪刀無敵)이네만. 왜 묻는가?”

정광이 입을 떡 벌렸다.

“호도야 그렇다 치고. 무적? 진심이세요?”

어림군 지휘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스스로 정한 게 아니라 그렇게 불리는 것일세.”

“음. 그래도 좀…… 호도님이라 부를게요. 괜찮으시죠?”

“……!”

어림군 지휘사의 눈썹이 천장을 향해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폐하께서도 참으시는데 내가 화낼 수는 없지. 편할 대로 하게나.”

정광은 내심 웃었다.

‘호방한 척하기는. 그래도 마음을 제법 다스릴 줄 아는데.’

느낌상 야망이 많은 자였다.

금의위 지휘사도 그런 편이었으나 고지식한 그와 달리 호도무적은 교활한 향기가 은은히 풍겼다.

‘그렇다고 확신할 순 없지. 이 정도 수준의 고수는 속내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힘드니까.’

금의위 지휘사도, 병필태감도 마찬가지였다.

정광은 황제의 충신이라 할 수 있는 세 사람 중 아무도 믿지 않았다.

‘셋 중에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어.’

황제 삼대를 한 자리에 묶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세 고수도 한 곳에 있게 되지 않는가.

그들 중 하나가 배신하면 다른 둘이 대응할 수 있을 터.

‘배신자가 있어도 둘 이상은 아니겠지.’

설령 그렇다 해도 황제에게 전음으로 설명했듯이 막을 방법이 있었다.

“자. 모두 바쁘신데 빨리 끝내죠.”

정광은 누가 어느 방위에서 황제 삼대를 지켜야 하는지 간략히 설명했다.

“이해하셨죠?”

이렇게 간단한 것을 이해 못 할 리 있나.

세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광이 나직이 덧붙였다.

“우리끼리 얘긴데. 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황태손 저하를 모두 지킬 수 있으면 좋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를 대비해 우선순위를 두어야 해요.”

“……!”

“세 분 생각은 어떠세요? 황태자 전하는 빼고요. 추천 좀 부탁드려요.”

호도가 노호성을 터뜨렸다.

“갈! 감히 그런 말을 내뱉다니!”

금의위 지휘사도 냉랭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다.”

병필태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번 건 못 들은 것으로 하겠네. 허나 앞으로도 그러진 않을 테니 주의하게나.”

웬만한 이라면 세 노고수의 기세에 오줌을 지렸겠지만.

정광은 태연했다.

“밀약. 보통 조직이 아니에요.”

“…….”

“명교도 거기에 속하죠. 명교가 황실에 얼마나 큰 원한을 품고 있는지 아시죠?”

“…….”

“제가 봤을 때. 세 분은 밀약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어요. 아니, 대명을 생각하고 말씀드렸던 건데 이렇게 반응하시는 걸 보면 대명의 명운 또한 가볍게 여기시는지도 모르겠네요.”

정광은 세 사람이 뭐라 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다시 여쭈죠. 그때는 답을 주시길. 아니면 일이 터졌을 때 허둥대다가 모든 걸 잃게 될 거예요.”

세 노고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 * *

정광은 건청궁 밖에서 황태손을 기다리다가 하품을 했다.

‘왜 이리 늦어? 대충 좀 하고 끝내지.’

마치 마음의 목소리를 들은 듯 황태손이 건청궁에서 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소?”

“네.”

“하하. 이럴 땐 좀 아니라고 해주면 안 돼요? 실망이외다.”

웃음 섞인 투정과 달리 황태손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하. 황상께 꾸지람이라도 들으셨어요?”

“거참. 속일 수가 없구려. 그렇소.”

“왜요?”

“걸으면서 얘기합시다.”

황태손은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황상께서 일의 경중을 판단할 줄 모른다며 나무라셨소이다.”

“저하께서 뭐라 말씀하셨길래 그러셨죠?”

“나로선 당연한 간언이었소.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나를 맡은 호위가 황상을 지켜야 한다고 주청했소이다.”

“네? 진심이세요?”

“물론이오. 태조께서 터를 닦으셨으나 반석을 쌓아 대명을 단단히 세운 건 황상이시오. 헌데 그런 분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되겠소? 이제껏 복종하던 이들이 칼을 거꾸로 쥐게 될지도 모르오.”

“거인이 사라지면 고개를 조아리던 아이들이 날뛸 거란 말씀이네요. 하지만 그 거인이 어차피 오래 못 살 상황이면 소용없는 얘기잖아요.”

“…….”

“저하. 솔직해지시죠. 대명을 다스리고 싶지 않으세요?”

“……다스리고 싶소.”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황태손이 걸음을 멈추고 정광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겐 진옥룡 그대가 있지 않소이까? 그대가 나를 지켜줄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소이다.”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운이 나쁘면 못 지켜 드릴지도 모르는데. 그땐 이해해 주실 거죠?”

“…….”

황태손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정광이 피식 웃었다.

“제가 운이 좋은 편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빨리 가서 점심이나 먹죠.”

단본궁에 도착하니 혜진이 와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단주.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마음을 정하셨어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요?”

혜진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영평공주가 외부와 어떻게 연락을 취하는지 알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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