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1화
풍전등화(風前燈火)
자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이라는 시커먼 화폭에 촘촘히 박힌 별들이 눈이 시리도록 아프게 빛났다.
하지만 정말 아픈 곳은 따로 있었으니.
눈을 제외한 온몸이었다.
‘크윽. 뼛속까지 저리는구나.’
정광의 조언대로 갑주를 입었고, 금의위 무장들이 내공 운용에 제한을 두고 있었기에 별다른 상처는 입지 않았으나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쉼 없이 매타작을 당하면서도 안 아프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전설로만 전해지는 금강불괴(金剛不壞)의 경지에 이른 괴물이지.
‘아니지. 철월이라면 괜찮을지도.’
철월은 뇌도 단단하니 이 정도 구타에는 안 아파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후우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거늘.’
자오는 고개를 내려 정면을 봤다.
수많은 화톳불로 환하게 밝혀진 연무장에 목도, 목검 등을 꼬나쥔 금의위 무장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끝에 있는 정광이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각응! 뭐 해요? 다시 시작하죠.”
“……네, 단주.”
자오는 금의위의 자랑 금의수호팔진(錦衣守護八陣) 속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정말 미치겠군.’
한 가지 가정을 세워야 한다며 사기를 치고 들어갔을 때와는 다르게 마음이 왜 이리 무거운지.
그래도 그때처럼 예를 표했으나.
금의위 무장들의 반응은 전과 완전히 달랐다.
“……실례하겠습니다.”
“이번엔 더 아플 것이오.”
“……고생이 많으십니다.”
“걱정할 필요 없소. 그대가 더 고생할 테니.”
“…….”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불루(疎而不漏)라.
하늘의 그물은 엉성해 보이지만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다고 했던가.
악을 행하면 언젠가 그 대가를 받기 마련.
지금이 바로 그랬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척비척 걷던 자오는 황제 대역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정광 앞에 이르렀다.
“단주. 왔습니다.”
“잠시만요. 조금만 조정하고 시작할게요.”
정광은 금의위 무장들 중 몇 명에게 권했다.
“장 천호님. 이성이 아니라 삼성으로 가시죠. 유 백호님은 사성으로 올리시고…….”
허옇던 자오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제, 제한을 뒀던 내공 수위를 올린다고? 지금도 죽겠는데?’
그와 반대로 무장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
“하하! 알겠소!”
“빨리합시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있소!”
자오는 아직 삼도천을 건널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다, 단주.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네?”
“지금도 간당간당한 데 제한을 올리시면 어떡합니까?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러시는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핍박하지 마시고 말씀으로 풀어주시는 게…….”
눈부신 속도로 입을 놀리던 자오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정광의 눈이 너무 무겁게 가라앉아서였다.
“각응.”
“네, 네! 단주!”
“무리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세요. 왜 스스로 한계를 정하세요?”
“죄, 죄송합니다.”
“저한테 사과하지 마세요. 자신에게 하셔야죠.”
“…….”
“각응은 반드시 할 수 있어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자오의 눈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주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죠.”
“네! 단주!”
자오가 비수로 정광의 목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정광의 옆에 서 있던 지휘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외쳤다.
“자객이다!”
동시에 자오의 신형이 사라졌다.
자객이 황제 곁까지 어떻게든 다가와 암습한 뒤 도주하는 것을 가정한 상황.
금의위 무장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자오를 찾았다.
‘여전히 잘도 숨는군!’
‘이번엔 어디냐!’
평소의 능력을 쓸 수 없는 무장들이 사방을 살피는데.
지켜보던 지휘사가 소리쳤다.
“장 천호! 전(前) 삼보(三步)!”
“충!”
호명된 장 천호가 삼보 앞에 있는 허공을 목검으로 베었다.
빠각!
“큭!”
허공이 열리며 자오가 굴러떨어졌다.
주위에 있던 무장들이 몰려와 자오를 짓밟았다.
“이 악적!”
“죽어라!”
“헉! 사라졌다!”
“저기다! 어서 잡아!”
정광은 필사의 도주를 감행하다가 두들겨 맞는 자오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무리였나.”
지휘사가 담담히 물었다.
“반드시 할 수 있을 거라더니 어찌 된 일이냐?”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점쟁이가 아닌 도사인지라.”
“도사라는 말이 더 어색하게 들리는군. 차라리 점쟁이가 낫겠어.”
“오. 다시 도주하네요. 역시 각응이라니까.”
“흠. 의지 하나는 칭찬할 만하군. 허나 너무 약해.”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죠. 금의위 분들의 내공에 제한을 뒀으니 지금의 각응은 십존 어르신들 중 웬만한 분들과 비슷하게 느껴질걸요.”
지휘사가 팔짱을 끼었다.
“진짜 십존이 와도 금의수호팔진에서 벗어날 순 없으니 하는 말이다. 너 역시 쉽진 않을 게야.”
지금의 금의수호팔진은 정광이 뚫었던 팔진(八陣) 중 일진(一陣), 그것도 약식으로 펼쳤던 진이 아니라 완전한 것이었다.
“그렇긴 하죠.”
“헌데 왜 이런 훈련을 하는 것이냐?”
“상대가 그냥 고수가 아니라 대단한 살수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접근을 막는 건 포기하고 도주할 때를 노려 잡는다?”
“네. 상대가 그런 살수면 지휘사님, 병필태감님, 어림군 지휘사님 같은 실력자도 일이 벌어지기 직전에야 눈치채실걸요.”
“저자의 위치를 수하들에게 알려주라고 한 것은 어떤 의미냐?”
“살수가 정말 강해서 황상께 해를 끼쳤다 해도 세 분 손에서 무사히 벗어날 순 없죠. 상처를 입었을 테니 지휘사님께서 기척을 느끼시고 다른 분들께 알려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지휘사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군. 허나 그렇게 가정한 상황이면 우리 셋 중 한둘만 나서도 놈을 잡을 수 있다. 굳이 이 난리를 칠 필요가 없어.”
“아뇨. 세 분은 여기에서 움직이시면 안 되죠. 또 다른 살수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지휘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상정한다고? 너무 과한 것 아니냐?”
“흔히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나, 이 경우엔 무조건 과한 게 낫죠. 대명의 정통을 지키는 건데요.”
“…….”
지휘사는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황제, 황태자, 황태손을 지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 아닌가.
“내가 실언을 했다. 네 말이 옳아. 헌데 궁금한 게 있다.”
지휘사는 정광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살수에 대해 짚이는 바라도 있는 것 같구나.”
정광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최소 암왕 정도는 잡아야겠죠. 전대의 고수일 수도 있고요.”
“…….”
지휘사가 또 물어보려고 하는데 무장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정광이 고함을 질렀다.
“그만 멈추세요!”
엄청나게 크지는 않았지만 위엄이 담긴 정광의 말에 무장들이 석상처럼 굳었다.
지휘사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정광이 처음으로 진을 멈춘 것이다.
“금의수호팔진에서 수정할 부분을 찾았느냐?”
“천하에 완벽한 진은 없죠.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해요.”
“그럼 왜?”
정광은 바닥에 엎어진 채 꿈틀거리는 자오를 가리켰다.
“각응이 죽기 직전이라서요.”
“…….”
정광은 지휘사에게서 시선을 돌려 무장들을 둘러봤다.
“어떠세요? 할 만하셨어요?”
개운하면서도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던 무장들은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얼굴을 굳혔다.
“진은 좋은데 운용이 다소 부족하네요.”
“…….”
“내일은 더 좋아질 거라 기대할게요.”
“…….”
무장들의 눈이 투지로 불탔다.
정광은 그들에게 포권한 뒤 지휘사에게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만수절 경계 계획을 수정하겠다더니. 언제 하려고 그러느냐?”
정광이 씩 웃었다.
“내일요. 아침에 입궐하시면 단본궁으로 와주시겠어요? 지휘사님과 함께 황상을 뵙고 말씀드릴게요.”
지휘사는 정광을 쏘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기대하듯 나도 기대하마.”
“하하. 실망하시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요.”
정광은 자오를 부축해서 단본궁에 돌아온 뒤, 타박상을 잔뜩 입은 자오에게 직접 만든 고약을 덕지덕지 발랐다.
“크흑. 죄, 죄송합니다. 단주께 이런 수고를 끼쳐 드리다니.”
“아뇨. 조금만 참으세요. 금방 치료해 드릴게요.”
병 주고 약 주고.
고약의 효과는 굉장했다.
거기에 추궁과혈까지 더하니 자오의 상세는 금세 좋아졌다.
정광은 자오의 어깨를 토닥이며 이를 갈았다.
“망할 암왕 어르신 같으니. 그분 때문에 자오가 무슨 고생이에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네요.”
자오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간신히 뱉었다.
“그, 그러게 말입니다.”
“이 빚은 꼭 갚는 거로 하죠. 그보다 어때요? 할 만하셨어요?”
할 만하긴 개뿔.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자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 제가 부족해서 그만…….”
“음. 그러면 곤란한데.”
정광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리자 자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단주. 금의위 무장들의 투지를 끌어 올리려고 제게 자객 역할을 맡기신 겁니까?”
정말 그런 이유라면 오체투지라도 하며 제발 살려달라고 빌려 했건만.
정광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그건 작은 이유고요. 암왕께서 혹시 도주하실 경우를 대비해 어떻게 움직이실지 자오를 통해 미리 알아보려고 그랬죠.”
어리둥절해 하던 자오가 혹시나 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 말씀은……?”
“자오는 영인문의 제자잖아요.”
자오가 펄쩍 뛰었다.
“겨우 기초만 닦았을 뿐입니다.”
“그거면 충분한데.”
“……저는 단주처럼 천재가 아닙니다.”
정광이 정색했다.
“천하의 어떤 기예도 기초 속에 진체가 녹아 있기 마련이죠.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영인문의 제자라면 금의수호팔진에 갇혔을 때 어떤 길을 택할지. 어떤 수법으로 빠져나가 어디로 향할지. 그런 것들을요.”
“아!”
“자오라면 그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실 수 있을 거예요.”
“…….”
자오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뭔가 알 듯하면서도 모르겠구나. 정말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인가?’
확신이 없어 흔들리는데.
정광이 사기를 북돋웠다.
“아까 연무장에서 드렸던 말씀은 반 농담이었지만 이번엔 진짜예요.”
“……감사합니다.”
“밤이 늦었으니 그만 팽가로 돌아가시죠. 내일 아침에 봬요.”
“네, 단주.”
자오가 떠나자 홀로 남은 정광은 생각을 정리했다.
‘밀약, 명교, 암왕이 머리가 있다면 만수절을 놓치지 않겠지.’
삼대를 한 번에 없애고 대명을 꿀꺽 삼킬 천재일우의 기회 아닌가?
‘암습을 막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흉수도 잡아야 해. 한 놈도 빼지 않고 모조리.’
허나 불확실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손도 모자랐고.
‘자오가 한몫해 줘야 하는데.’
정광은 자오를 믿었다.
* * *
다음 날 아침.
창백한 안색의 자오가 퀭한 눈을 끔뻑이며 나타났다.
“단주. 안녕하십니까.”
“……혹시 안 주무셨어요?”
“치열하게 고민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텄구나, 텄어.’
두 눈을 번뜩이고 와도 될까 말까 한데 이래서야 뭘 기대할까?
그때, 자오의 눈이 번쩍 빛났다.
“아직은 모르지만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자오. 몸이 왼쪽으로 기울고 있는데요.”
“허억! 하아압! 이, 이제 괜찮습니다.”
“……아뇨. 아침 드시고 좀 주무세요. 아니지. 그냥 지금 주무시죠. 때가 되면 깨워 드릴게요.”
정광은 자오의 수혈을 짚은 뒤 황태손에게 갔다.
“저하.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하. 그대 덕분에 잘 잤소. 헌데 오늘은 왜 혼자시오?”
그러고 보니 혜진도 오지 않은 상태.
자오보다 더 깊은 고민에 빠져 밤을 지새웠을 게 분명했다.
‘흠. 저녁에도 안 오면 만안궁에 가서 확인해 볼까.’
정광은 대충 둘러댄 뒤 임무를 시작했다.
“오. 맛있네요. 이상 없으니 드시죠, 저하.”
“하하. 오늘도 수고가 많구려. 그럼 듭시다.”
황태손은 본래 식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정광과 며칠 먹게 되자 양이 꽤 늘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보통 사람 수준.
정광은 황태손보다 배 이상 먹은 뒤 배를 두드렸다.
“좋네요. 황궁에 오길 잘했어요.”
“으하하. 이 이상으로 차릴 테니 언제라도 오시오. 쭉 눌러앉으시면 더 좋고.”
황태손의 너스레에 정광이 빙그레 웃었다.
“일단 저하 목숨부터 구하고요.”
황태손의 표정이 굳었다.
“혹시 뭔가 알아낸 것이라도 있소?”
“그런 건 아닌데. 오늘 저하와 황상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마침 금의위 지휘사가 왔다.
정광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황태손에게 청했다.
“같이 가시죠.”
“……그럽시다.”
세 사람은 건청궁(乾淸宮)으로 가 황제를 알현했다.
정광은 속으로 혀를 찼다.
‘계속 안 좋아지더니 이젠 바람 앞의 등불처럼 됐네. 이러다 만수절 전에 죽는 거 아니야?’
병필태감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도 저 모양이라니.
먼저 황태손이 문안 인사를 올리고 지휘사가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박았다.
“폐하! 진옥룡이 이겼습니다! 신을 죽여주십시오!”
황제는 당연히 지휘사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위엄 있게 위로한 뒤 정광에게 명했다.
“만수절 호위를 네게 일임한다.”
“네, 폐하.”
“그래, 어떻게 바꿀 생각이지?”
“이번 만수절은 봉천전(奉天殿)이 아니라 근신전(謹身殿)에서 간소하게 열기로 됐다던데. 맞죠?”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무장들이 눈을 부라렸으나 정광은 태연했다.
황제 역시 그랬고.
“그렇다. 복안이 있느냐?”
정광은 역으로 물었다.
“폐하. 예법 따위 무시해도 되죠?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