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41화 (340/569)

2부 70화

역시 단주십니다

“진옥룡. 친왕부(親王府)에서 이상한 행동이 감지됐습니다.”

동창(東廠)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특무 기관이다.

진화는 그런 대단한 조직의 이인자인 첩형(貼刑) 자리에 오를 만큼 눈치 빠르고 똑똑한 사내.

아니, 환관 아닌가.

그런 자가 급히 찾아와 이런 소식을 전했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정광도 급했다.

기미(氣味)라는 막중한 임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

계속 단본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진 공공. 한왕부(漢王府)와 조간왕부(趙簡王府) 중 어느 쪽이 이상한 거예요?”

“양쪽 모두입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라.

정광은 걸음을 멈추고 제대로 듣기 시작했다.

“어떻길래 그러시죠?”

“황상께 주의를 받은 뒤 자숙하고 계시던 두 분이 갑자기 상소문을 올리셨습니다.”

정광의 눈에 호기심이 맺혔다.

조간왕이야 혜진에게 들은 게 있으니 그렇다 치고.

한왕은 왜?

진화가 설명했다.

“먼저 한왕 전하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북팽가가 다른 토호들과 함께 재물과 곡식을 풀어 어려운 이들을 돕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황실의 일원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하시며 상소를 올리셨습니다.”

“전하 자신도 돈 좀 쓰게 해달라고요?”

“그렇습니다. 황상의 성은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허해주시길 주청하셨습니다.”

“음. 공공께서 의심하실 만큼 수상하긴 하네요.”

황제는 두말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시국이 어수선하니 납작 엎드려 지내라 했으면 얌전히 따를 것이지,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굳이 상소를 올리다니.

황제의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알고 머리가 나쁘지 않은 한왕이 취할 만한 행동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진화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말을 이었다.

“사실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닙니다. 그 어느 때보다 초조하실 것 아닙니까?”

“그러시겠죠.”

영락제(永樂帝)는 무서운 황제다.

자신의 죽음이 얼마 안 남은 데다 황태자까지 그런 상태. 게다가 몽고는 물론 이민족과 해적까지 날뛰는 혼란한 시국에 그가 어떻게 행동할까?

아직 어린 황태손을 위해 장차 걸림돌이 될지도 모를 친왕들을 숙청할 것이란 건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진화가 그 점을 지적했다.

“황상께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충심을 표현하고 싶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무일푼으로 쫓겨나 변방에서 밭을 갈며 살아도 좋으니 제발 살려만 달라, 이런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거죠?”

“……진옥룡,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런 건 속으로만 생각해 주십시오.”

“에이.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걸 따져요.”

“…….”

우리 사이에 뭐가 있었다고?

진화가 내심 어이없어하는데 정광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살기 위해 그러시는 것이면 상관없으나 아니면 문제네요.”

“맞습니다. 지금은 감시를 받으며 연금된 상태나 마찬가지지만 황상께서 허락하시면 운신의 폭이 늘어날 겁니다.”

“뭔가 준비하던 중에 멈춘 상태였으면 다시 이어서 할 수 있게 되겠죠. 황상께서 허락하시든 불허하시든 한번 찔러볼 만은 하네요. 황상께선 불허하셨죠?”

“그렇습니다.”

“동창에선 감시를 강화했을 거고요. 한왕께선 어떻게 나오시려나.”

“이상 상황이 감지되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조간왕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조간왕 전하께선 영평공주님의 안전을 위해 호위를 더 강화할 것을 주청하셨습니다. 지금처럼 강호의 여인 한 명에게 맡기는 건 너무 위험하다는 내용이 골자였지요. 여기까진 진옥룡께서도 불취검에게 이미 들어 잘 아시겠지만…….”

안 그래도 작은 진화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황상께서 신임하시는 진옥룡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불취검과 각응은 황궁 밖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청하셨습니다.”

“왜요?”

“황궁 무장들에 비해 특출난 고수도 아닌 외인들을 품을 이유가 없다는 명분이었습니다. 황궁 무장들의 사기 문제도 있고요.”

“아. 외인이라 못 믿겠다. 황궁 무장들도 자존심 상할 거고. 틀린 말은 아니네요.”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정광은 피식 웃었다.

황제가 아무리 두려워도 할 말은 하는 충신처럼 들리지 않는가.

“황상께선 거절하셨죠?”

“물론입니다.”

“무장들은 조간왕 전하께 호감을 느꼈을 거고요.”

“그럴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한왕 전하나 조간왕 전하나 살기 위해 그러신 건지, 다른 뜻을 품고 그러신 건지 애매하기 짝이 없네요.”

진화가 정광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래서 진옥룡께 달려온 겁니다. 불확실한 게 너무 많습니다.”

“저는 뭔가 확실히 알 것 같으세요?”

“혹시 몰라서 말입니다.”

“글쎄요. 저도 긴가민가해서. 뭔가 떠오르면 말씀드릴게요.”

“꼭 부탁드립니다.”

“눈빛이 부담스럽네요. 그럼 이만.”

정광은 진화에게 예를 표한 뒤 단본궁으로 향했다.

진화가 왜 굳이 찾아와 그런 얘기들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다른 건 이해가 가는데 하나가 비어서겠지.’

두 친왕 모두 살기 위해 그런 게 아니라 치자.

황제가 그들의 청을 허락했다 가정하면 한왕의 경우엔 얻는 게 많았다.

허나 조간왕은?

황궁 무장들의 호감을 사는 건 좋은 일이나 그래 봐야 무슨 큰 힘이 된다고.

‘왜 조간왕이 혜진과 자오를 쫓아내려고 하는지 그게 궁금하다는 거겠지.’

정광도 궁금했다.

‘가만. 이거 혹시…….’

단본궁에 거의 이르렀는데, 마침 만안궁에서 오는 혜진이 보였다.

“불취검. 무척 중요한 일이라 그러는데요, 솔직히 대답해 주실 수 있으세요?”

정광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혜진은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단주가 갑자기 왜 이러지? 이런 표정으로…….’

대체 뭘 물으려는 걸까?

애써 담담한 척하며 대답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정광의 말이 이어지자 혜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친부 되시는 분요. 혹시 조간왕 전하세요?”

“…….”

“원래 안 물으려 했는데 이젠 알아야 해서요. 소저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 대답해 주세요.”

타인의 과거 따위는 신경조차 안 쓰는 정광이 이렇게까지 알려달라고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혜진은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습니다.”

“아. 그래서였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음. 이건 말씀드려야겠네. 평생 후회하실지도 모르니. 일단 밥부터 먹죠.”

정광은 혜진을 이끌고 단본궁에 들어갔다.

그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기미와 식사를 즐겼지만 혜진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어떤 일이길래 그런 말을…….’

황태손이 정광에게 제발 사람 좀 놀라게 하지 말라고, 황상 앞에서만큼은 조심해 줄 수 없냐며 사정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광과 자오가 금의위와 벌였던 일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나 이 말만큼은 제대로 들렸다.

“저하, 잘 먹었습니다. 다른 두 사람과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그만 가도 될까요?”

황태손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정광은 자오, 혜진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갔다.

정광은 먼저 자오에게 물었다.

“혹시 조간왕 전하와 친분이 있으세요?”

자오가 두 눈을 멀뚱거렸다.

“역시 모르시는구나. 그럼 그게 맞네.”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리자 혜진이 참지 못하고 청했다.

“단주. 속 시원히 말씀해주십시오.”

“그럴게요. 무슨 일이냐면…….”

정광은 진화와 나눴던 얘기들을 들려준 뒤 자기 생각을 덧붙였다.

“조간왕 전하께서 두 분을 쫓아내려고 하시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분이 혜진 소저의 친부시면 전부 말이 되죠.”

“……!”

혜진의 친부가 황족일 거라 예상하고 있었으나 조간왕이었을지는 몰랐던 자오가 입을 떡 벌렸다.

당사자인 혜진은 다른 이유로 놀랐고.

“그가 제 정체를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동창의 진 공공이 혜진 소저가 요녕의 불취검이 아니라 아미의 교봉인 걸 아시는데 조간왕 전하라고 꼭 모르실 리는 없죠.”

“그런데 왜 저를 쫓아내려고…….”

“살리기 위해서?”

“네?”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가정일 뿐이니까 걸러 들으세요. 밀약이 황상, 황태자 전하, 황태손 저하를 시해하면 누군가 황위를 이어받겠죠?”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 혜진 대신 자오가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현재로선 한왕 전하나 조간왕 전하가 되실 공산이 커요. 저는 두 분 중 한 분이 밀약의 한 축일 거라 생각했죠.”

“……!”

너무나 엄청난 말에 자오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그, 그런! 왜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까?”

“밀약에서 기껏 일을 벌여놓고 전혀 상관없는 분께 대명을 바칠 리는 없잖아요.”

자오가 탄성을 토했다.

“아!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정말 그럴 가능성이 크군요.”

“밀약 소속이 아니라 명교도이실 수도 있고요. 뭐 그게 그거지만.”

흑서는 인효황후가 명교도였다고 말했다.

또한 그녀의 여식인 영평공주가 어미를 따라 명교를 숭배했다고 했지만 다른 자식 중에도 명교도가 있는데 흑서가 미처 몰랐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정광은 자오와 혜진을 번갈아 보며 설명했다.

“자. 조간왕 전하께서 밀약 또는 명교와 연관이 있다 쳐보죠. 사실 황궁에서 일을 벌이는 데 있어서 혜진 소저와 자오는 별다른 장애가 못 돼요.”

두 사람이 엄청난 고수인 건 아니었기에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데 굳이 내쫓으려 한다? 자오는 곁가지고 혜진 소저 때문에 그럴 것이란 생각밖에 안 드네요.”

“그 말씀은…….”

자오가 말끝을 흐리자 정광이 보충했다.

“밀약이 목적했던 암살에 성공하면 우리를 가만둘 리 없잖아요. 저야 몸을 빼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두 분은 불가능하죠.”

“맞는 말씀입니다.”

“조간왕 전하께선 과거 혜진 소저를 아미산으로 보냈듯이 이번에도 그리하고 싶으셨나 봐요.”

정광은 아직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혜진에게 물었다.

“전하께서 십여 년 전 소저를 아미산으로 보내셨던 건, 언젠가 황상께 숙청당할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러셨던 거죠?”

“…….”

혜진의 머릿속에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는 자신이 친부라 주장하며 너를 살리기 위해 왔다고 말했었다.

정광은 혜진이 대답을 안 하자 손뼉을 쳐서 주의를 끌었다.

“아셔야 할 건 다 말씀드렸고. 이제 소저 차례예요.”

무겁게 닫혀 있던 혜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단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아까 제가 평생 후회하실지도 모르니 말씀드려야겠다고 했었죠?”

“그러셨지요.”

정광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소저는 내 사람이에요.”

“…….”

평소라면 무척 기뻤겠지만 지금은 한없이 두렵기만 했다.

혜진의 느낌대로였다.

“하지만 소저의 부친께선 내 사람이 아니죠.”

“…….”

혜진은 가슴이 콱 막히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정광의 입에서 우려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지금은 전부 가정일 뿐이지만. 조간왕 전하께서 정말 밀약과 관련이 있다면 저는 그분을 죽이게 될지도 몰라요.”

“…….”

“그렇게 되도록 방조할 수도 있고요. 소저께선 그걸 지켜보실 수 있으시겠어요?”

“…….”

혜진은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정광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인 뒤 덧붙였다.

“제 생각엔 황궁을 떠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석상처럼 가만히 있던 혜진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단주. 하루만 시간을 주십시오. 만안궁으로 돌아가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아뇨. 만수절 전날까지만 정해주시면 돼요. 내일 봬요.”

혜진은 힘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자오가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단주.”

“네?”

“그…….”

“편하게 말씀하세요.”

“후우. 알겠습니다.”

자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혜진 소저에게 너무 가혹한 일 아닙니까?”

“자오의 생각은 어때요? 뾰족한 수가 있나요?”

필사적으로 생각하던 자오가 눈을 크게 떴다.

“아! 소혜 소저가 공을 세워 영평공주님을 살리려고 하듯이, 혜진 소저도 공을 세워 조간왕 전하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정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우가 다르죠. 영평공주님은 하수인이시고, 조간왕 전하는 주동자 중 한 분이신데요. 제 예상대로라면요.”

“후우우. 큰일이군요. 이를 어찌해야 하나…….”

정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자오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최악의 상황일 때를 가정한 거니까.”

“……네?”

정광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하하하. 천하에 안 되는 게 어딨어요.”

“역시 단주십니다!”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있긴 있지. 어찌 됐든 일단 해보죠.”

“……역시 단주십니다.”

자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웃었다.

그만큼 정광을 믿어서였다.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정말 많이 변하셨습니다.”

“뭐가요?”

“혜진 소저의 사정을 이렇게 헤아려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허청 진인이나 백 소협이 여기 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어찌나 감동했는지 자오의 목소리엔 물기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곧 비장하게 변했다.

“단주. 저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정광이 웃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일단 금의위 연무장으로 가죠. 경계 계획을 새로 짜고 자객 잡는 훈련을 해야 하니 잘 부탁드릴게요.”

“……네?”

정광은 어리둥절해하는 자오에게 친절히 설명했다.

“자객 역할을 할 분이 자오밖에 없잖아요. 다치실지도 모르니 갑주를 입으시는 게 좋으려나? 힘드시겠지만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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