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39화 (338/569)

2부 68화

명예를 아는 사내

천자의 탄생일인 만수절(萬壽節)은 대명 최대의 절일(節日) 중 하나로, 자금성의 정전(正殿)인 봉천전(奉天殿)에서 황족과 문무백관이 모두 모여 성대하게 치르는 행사였다.

허나 이번만큼은 혼란한 시국을 고려해 황족들만 참석하는 간소한 방식으로 갈 것이란 말에 정광은 눈을 빛냈다.

황제, 황태자, 황태손 삼대를 한꺼번에 대할 수 있는 기회라니.

그것도 황족들만 모인 단출한 모임에서.

이때를 놓치면 바보 아닌가?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말이 안 되는데…….’

정광이 계속 생각에 잠겨 있자 황태손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진옥룡. 무슨 생각을 그리하오?”

“궁금한 게 있어서요.”

“말해보시오. 나까지 궁금해지지 않소?”

황태손의 엄살에 정광이 웃었다.

“별것 아닌데. 황족의 범위가 어떻게 되죠?”

“부계혈통은 오대손까지. 모계혈통은 자식 중 아들만이오.”

정광이 알던 대로였다.

그래서 문제였다.

‘그럼 소혜가 참석할 수 없잖아. 만수절을 노리는 게 아닌가?’

암왕이 소혜를 이용해 일을 벌이기로 돼 있었는데…….

헛짚었나 생각하는 그때, 황태손이 말을 이었다.

“허나 만수절 같은 행사에서만큼은 조금 더 넓게 적용되오. 최대한 많은 혈족이 모여 결속을 다지는 기회로 삼기에 그렇소이다.”

“아하.”

그러면 그렇지.

그렇다면 소혜도 참석할 수 있다는 얘기.

만수절 행사를 원래대로 성대하게 하든 간소하게 하든 간에 이런 기회는 또 없을 게 분명했다.

‘이번엔 규모가 작아진 만큼 봉천전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열리려나.’

정광은 이번 만수절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좀 더 알아보고 다듬을 필요성을 느꼈다.

“저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하하. 말해보시오.”

“이따 조회 끝나고요. 황상을 뵙고 싶어요.”

“…….”

황태손이 정광을 뚫어져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만수절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황상을 뵙겠다니. 뭔가 위험을 감지한 것처럼 들리오만. 내 생각이 맞소?”

빤히 짐작하고 있는데 아니라 할 수 있나.

정광은 솔직히 답했다.

“네. 황제 폐하를 비롯한 황족들이 모두 모이는데. 명교라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원한이 많은 분들이잖아요.”

“으음. 중요한 자리인 만큼 경계가 더 삼엄할 텐데?”

“그렇기야 하겠지만 위험을 무릅쓸만한 가치가 있죠.”

“…….”

고심하던 황태손이 정광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대의 말이 옳소. 여기에서 기다리시오. 조회가 끝나면 사람을 보내리다.”

“네, 저하.”

황태손은 부지휘사와 함께 조회에 참석하러 떠났다.

정광은 바로 할 일을 했다.

“자오.”

“네, 단주.”

“어제 얘기하다가 끊겼었는데. 암왕께선 어떻게 나오실까요?”

자오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사부에게 배운 기간이 길지 않고 그분의 진신 절기를 몰라 뭐라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

“아시는 만큼만 말씀해 주세요.”

자오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음. 살행(殺行)은 정보수집, 계획 수립, 실행, 도주, 잠적 순으로 진행됩니다. 사부께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요. 이중 가장 중요한 건 정보수집과 계획 수립이라고요.”

“왜죠?”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계획을 세워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져서 그렇습니다.”

“그럴듯하네요.”

“또한 그래야 위험 여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안 되겠다 싶으면 재빨리 포기해 목숨을 건지라 하셨지요.”

“그러면 의뢰인에게 위약금을 물어야 할 텐데.”

자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돈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개죽음당하느니 돈을 토해내고 다시 벌라 당부하셨습니다.”

“암왕께서도 그러신 적이 있으세요?”

자오가 빙그레 웃었다.

“그랬으면 암왕이란 별호는 없었을 겁니다. 사부께선 어떤 의뢰도 깨끗이 성공시키셨었지요. 사람들이 모르는 건도 많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그 예를 조금이나마 알려 드리겠습니다. 먼저…….”

“암왕께선 제대로 된 정보를 토대로 확실한 계획을 세우고 계시겠네요.”

“……그럴 것입니다.”

“그분, 장기가 뭐죠?”

“역용, 은신, 잠행, 경신술…….”

“제일 잘하시는 거요.”

자오가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문파 이름이 영인문(影人門)이듯, 본문의 자랑은 은신술이라 말씀하셨었습니다.”

“자오가 허공에 숨는 그거요?”

“저는 사부께 은신의 기초만 배웠습니다. 지금 쓰는 것은 그 기초에다가 사마련에서 익힌 것을 섞은 잡탕이지요.”

“말로만 들으니까 감이 잘 안 오네요.”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마련에서 배우셔서 섞은 거 말고요. 암왕께 배우신 순수한 영인문의 무공들만 펼쳐주실래요.”

“……네, 단주.”

자오는 자신이 좋아하는 말 대신 행동으로 설명해야 했다.

정광은 자오가 펼치는 수많은 비기들을 주시하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기초 무공들이라 수준은 낮지만 사기가 안 느껴질 만큼 깨끗하네. 진짜 고수 앞에서 사기 따위를 풀풀 풍겼다간 금방 발각될 테니 당연한 일인가.’

그 어떤 신공이라도 기초에서 출발해 곁가지를 치고 꽃봉오리를 터뜨리기 마련.

정광은 헉헉거리는 자오에게 쉴 시간까지 줘가며 영인문의 무공을 머릿속에 쌓았다.

‘이걸 바탕으로 궁리하면 암왕의 수법들을 비슷하게나마 알 수 있겠지만 시간이 없어.’

아무리 정광이라도 며칠 새에 진의를 들여다보고 그 끝을 내다보는 건 무리였다.

‘역시 황제를 만나 협조를 구해야겠네.’

정광은 지친 자오에게 운기조식하라고 이른 뒤 침상에 드러누워 낮잠을 잤다.

그리고 한 시진 뒤, 건청궁(乾淸宮)에서 황제를 만나게 됐다.

* * *

황제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정광을 맞이했다.

“진옥룡. 무슨 일로 알현을 청했느냐?”

정광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폐하. 만수절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야 삼대를 한꺼번에 쓱싹…….”

옆에 있던 황태손이 대경하여 외쳤다.

“폐하! 진옥룡은 강호의 무부라 예의를 모르는 편입니다! 충심으로 말씀드리려던 것이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의를 모르는 편이 아니라 아예 없는 녀석이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니 금의위와 어림군은 화를 거둬라.”

정광을 분노한 눈초리로 노려보던 무장들이 일제히 외쳤다.

“폐하! 무능한 신들을 죽여주십시오!”

“그대들 탓이 아니다. 진옥룡 저 녀석 때문이야.”

“…….”

확실히 그렇긴 했다.

황제는 정광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수절을 노릴 만도 하지. 위험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네가 그것만 말하러 왔을 리는 없고. 무엇이 필요하냐?”

정광은 재깍 답했다.

“만수절 경계 계획과 그 계획의 수정 권한요.”

“……!”

황태손이 입을 떡 벌렸다.

무장들의 눈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황제의 명문혈에 손을 대고 내공을 불어넣고 있던 병필태감(秉筆太監)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지막으로 황제의 눈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위엄이 쏘아졌다.

“계획을 검토해 보고 마음에 안 들면 네가 직접 바꾸겠다?”

“네, 폐하.”

“짐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금의위와 어림군보다 너를 더 믿으라는 말이군.”

“아뇨.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고요. 권한만 주시면 되는데요.”

“불가(不可).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황제는 시선을 돌려 무장들을 둘러봤다.

“짐(朕)은 그대들을 믿는다.”

무장들의 눈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정광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물들었고.

‘얘들 또 이러네. 황제가 무슨 말만 하면 이래.’

어쨌든 황제가 거부한 상황.

‘그냥 신경 쓰지 말아?’

황제가 죽으면 받기로 했던 것들이 다 날아가 버리는데.

정광이 고민하는 그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진옥룡. 짐의 무장들은 강하다.”

“그렇긴 하죠.”

“그들에게 네 무례함을 사죄하라.”

정광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이것 봐라?’

자신의 성품을 황제가 모르진 않을 터.

헌데 이런 말을 했다는 건…….

‘다른 속셈이 있다는 거지. 수하들의 체면을 세워준 건가.’

아니나 다를까.

황제가 말을 이었다.

“승복하지 못하겠다면 짐의 무장들에게 능력을 증명해라. 해내면 네가 원한 걸 허락하마.”

“그게 깔끔하겠네요.”

“그리고 네가 부족하다는 게 드러나면 반드시 사죄하라.”

“그야 물론이죠.”

황제로선 이래도 저래도 얻는 게 있는 상황.

정광이 이기면 경계 계획을 보완한다.

무장들이 이기면 정광의 기를 누를 수 있다.

‘이런 능구렁이 같으니. 죽음이 코 앞인데도 이러네.’

정광이 속으로 웃는데 황제가 무장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대들이 짐의 기대에 부응할 것이라 믿는다.”

무장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리며 외쳤다.

“충(忠)!”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건 어림군이었지만 경계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총괄하는 건 금의위였다.

정광은 밖에서 기다리던 자오와 함께 금의위 무장을 따라 금의위 지휘사의 집무실로 향했다.

일전에 봤던 청해성주의 가형(家兄)이었다.

무장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정광을 노려보며 건장한 몸을 일으켰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군.”

“안녕하세요.”

“어떻게 겨루고 싶은지 말해라.”

“화 많이 나셨어요?”

지휘사가 고개를 저었다.

“황상께서 명하셨으면 따른다, 이게 금의위의 존재 이유다.”

“시원시원하셔서 좋네요.”

정광은 만수절 경계 계획부터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지휘사가 서류 뭉치를 건넸다.

“이것이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물어라.”

“네, 감사합니다.”

정광은 서류들을 휘리릭 넘기며 치밀하게 분석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천하에 완벽한 계획은 없지만 이보다 더 짜임새 있긴 힘들 만큼 잘 짜여 있었다.

정광은 서류들을 완독한 뒤 한데 모아 탁자에 탁탁 쳐서 가지런히 정리했다.

“각응이 보기엔 어때요?”

옆에 앉아 있던 자오가 허탈한 얼굴로 답했다.

“계속 휙휙 넘기셔서 제대로 못 봤습니다.”

“음. 자오는 실전에 강하니까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거예요.”

정광은 지휘사에게 청했다.

“황제 폐하를 중심으로 팔방에 걸쳐 펼칠 경계 중 하나만 약식으로 보여주실 수 있나요?”

“가능하다. 그것을 뚫어보겠단 말이냐?”

“네.”

“시험 삼아 해보는 것도 좋겠지. 연무장으로 가자.”

그들은 황궁 바로 옆에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지휘사는 수련 중이던 수하들에게 만수절에 쓰일 진형 중 하나를 펼치라고 명했다.

정예 중의 정예인 금의위답게 순식간에 철통같은 진형이 세워졌다.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구경하다가 자오에게 물었다.

“각응이 자객이라면 어떻게 뚫으실 거예요?”

자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금의위 무장들을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라면…….”

“방법이 보이긴 한다는 거죠? 말로 하면 길어지니 직접 보여주세요.”

“……알겠습니다.”

자오는 지휘사에게 다가가 예의 있게 청했다.

“한 가지 가정을 세워야 해서 그러는데. 진형 안쪽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버릇없는 정광과 비교되어 실제보다 몇 배나 더 정중하게 느껴지는 청이었다.

자연히 지휘사의 어조도 고와질 수밖에.

“그렇게 하게나.”

“감사합니다.”

자오는 진형 사이로 들어가며 무장들에게도 예를 표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아니오.”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대야말로 수고가 많소.”

금의위 무장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해 들은 터라 정광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오 역시 곱게 보지 않았지만 이렇게 예의를 지키는데 어찌 함부로 대하겠는가?

자오는 조심스레 진형 끝까지 들어간 뒤 돌아서서 외쳤다.

“단주! 뚫었습니다!”

“……!”

금의위 무장들이 눈을 부릅떴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가정을 세울 게 있다 하여 보내줬거늘,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이런 사기를 치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자오가 두 눈을 멀뚱거리며 대답했다.

“자객이 암습을 하는데 사기가 어디 있고 부끄러움이 무엇입니까?”

“그래도 이건…….”

무장들이 소리치는데 지휘사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만! 그자의 말이 옳다!”

“……!”

지휘사는 시선을 돌려 정광을 바라봤다.

“한 방 먹었군. 좋은 수야.”

“뭘요.”

“자객이 금의위나 어림군으로 역용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허나…….”

지휘사의 눈이 얼음처럼 차게 빛났다.

“역용 따위로 내 눈을 속일 수 있다고 보는 게냐?”

지휘사는 진정한 고수.

정광은 솔직히 인정했다.

“천하의 어떤 역용술로도 힘들겠죠.”

지휘사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정광을 칭찬했다.

“명예를 아는 사내였군. 네가 인정했듯 조금 전의 수는 전제 조건이 잘못되었다. 우리가 이겼어.”

정광은 명예 따윈 모르는 사내였다.

실제로 진 것도 아니었고.

“아직 아닌데.”

“또 다른 수가 있느냐?”

정광은 싱긋 웃으며 두 손을 매만졌다.

“제가 남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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