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66화
했군, 했어
혜진은 자오의 말을 되뇌었다.
‘오왕(五王) 중 하나인 암왕(暗王)이 자오 대협의 사부라고?’
견문이 아무리 좁아도 암왕이라는 별호를 모를 리 있나.
무림에서 천대받는 살수의 신분으로 중원 최고수 중 하나로 꼽히는 신화적인 존재 아닌가.
‘자오 대협의 능력이 신기하기 그지없더니 그래서였구나.’
장강에서 연화채(蓮花寨)의 배들에 구멍을 뚫어 네 척이나 수장시킨 것도, 요녕에서 금주호가(錦州扈家)를 홀로 불살라 버린 것도 이제야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헌데 영인문은 뭐지? 단주가 자오 대협에게 금주호가를 상대하라고 했을 때 영인(影人) 출신이니 그 정도야 할 수 있지 않냐며 꺼냈던 이름이긴 한데…….’
자오가 생각에 잠긴 정광을 슬쩍 보더니 혜진에게 설명했다.
“영인문은 첩보와 암살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문파입니다. 멸문한 지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파천방(破天幇)이라는 사파로 위장하고 맥을 이어오고 있었지요.”
이제껏 자오를 생각해 과거를 묻지 않은 혜진이었지만, 그가 이렇게 털어놓으니 호기심이 솟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비밀이 있었군요. 왜 멸문한 척한 겁니까? 불편하시면 말씀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자오가 손을 내저었다.
“불편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몇 대 전의 문주께서 원(元) 황제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셔서입니다.”
“아! 원의 추적을 피하려면 그래야 했겠군요.”
“맞습니다. 게다가 대명(大明)이 천하를 차지한 후에도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던 건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이민족의 황조지만 황제를 시해하려 했던 문파 아닙니까?”
“이해했습니다. 그런 전례가 있으니 그 어떤 황조라도 탐탁지 않아 하겠지요. 자오 대협은 아직도 영인문에 속해 계신 겁니까?”
자오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아닙니다. 대략적으로나마 사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사십삼 년 전 귀주성(貴州省) 정안현(正安縣)에서 삼남이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혜진의 눈이 커졌다.
대략적으로나마 설명하겠다고 해놓고선 사십삼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다행히 생각에 잠겨 있던 정광이 끼어들었다.
“영인문이 멸문한 척한 와중에도 암왕이라는 별호가 널리 퍼진 건, 자오의 사부께서 활발히 활동하셔서죠?”
“그렇습니다.”
“살인을 좋아하시나 봐요?”
“그것보단 성취감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런 분이면 황상을 시해하려고 할 만하네요. 선대에서 못 이룬 일을 본인이 해낸다. 그보다 구미가 당기는 일은 없겠죠.”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자오에게 물었다.
“자오가 도주했는데도 척살하지 않으신 건 왜일까요? 영인문의 비밀을 발설할 수도 있는데.”
자오가 부끄러운 얼굴로 답했다.
“어릴 때는 사마련 총단으로 도망쳐 못 쫓아오신 거라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인정이 많으신 건가.”
“……제가 대사형과 삼사형을 죽였을 때 빼고는 미소를 보여주신 적이 없는 분입니다만.”
“아예 없진 않으시네요.”
“……아마 제가 아주 멍청하지는 않으니 스스로 발설할 일은 없을 거라 믿으셨을 겁니다.”
정광도 인정했다.
“하긴. 어린 자오가 영인문 출신인 걸 드러내면 비기를 빼낸 뒤 묻어버릴 분들이 한둘이 아니었겠죠.”
“사실 배운 기간이 길지 않아 많은 걸 알지도 못합니다. 게다가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저와 그들을 죽이고 몸을 빼낼 자신이 있으셔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자오를 죽이는 게 깔끔했을 텐데. 왜 그러셨을까. 아. 오해하지 마세요. 아쉬워서 이러는 건 아니니까.”
정광은 의문을 머리 한편으로 밀어둔 뒤 자오를 똑바로 응시했다.
“자오.”
“네, 단주.”
“암왕과 싸우실 수 있으세요?”
“못합니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답했던 자오가 급히 덧붙였다.
“싸우기 싫다는 게 아니라 그럴 능력이 없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의지는 있으시다는 얘기네요.”
“물론입니다.”
“그럼 됐어요. 이제 암왕이 어떻게 나올지 얘기를…… 이런.”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황태손 저하께서 오셨는데 저를 찾으시네요. 다녀올 테니 쉬고 계세요.”
정광의 신형이 사라지자 혜진이 감탄을 토했다.
“자오 대협. 정말 대단하십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혜진은 두 눈을 멀뚱거리는 자오에게 나직이 설명했다.
“저는 아직도 과거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는데, 대협께선 당당하게 맞서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제야 이해한 자오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네? 하지만 분명…….”
혜진이 말끝을 흐리자 자오가 가슴을 폈다.
“의지는 그렇지만 그때 가봐야 알 것 같다는 얘기입니다. 허나 그러고 싶고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니 어떻게든 되겠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
혜진은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정광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얘기 아닌가!
고민만 하면 뭐 하나.
그럴 것이라 믿고 그렇게 노력하며 그때의 결과를 보고 다시 시도하면 되는 것을.
‘심지어 자오 대협은 자신의 사부와 싸우게 된 형편인데도 이렇게 의지를 불태우고 있어. 왜 나만 힘들고 괴롭다고 생각해 왔을까?’
자책감이 몰려왔으나 혜진은 곧 정신을 차렸다.
‘흔들리지 않으려 하지 말고 흔들릴 때마다 나를 믿고 바로잡아야 해.’
혜진은 깨달음을 준 자오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모르던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자오의 눈이 번쩍 빛났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했습니다만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네?”
자오의 입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제가 삼남이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말씀드렸지요? 그 후…….”
* * *
부지휘사와 함께 돌아온 황태손은 정광이 나타나자 빙그레 웃었다.
“하하. 안 그래도 그대를 찾고 있었소만, 내 목소리를 듣고 온 것이오?”
“네, 저하. 조회는 어떠셨어요?”
“어제와 크게 달라진 내용은 없었소만. 아, 그게 있군.”
“뭐죠?”
“하하. 그리 대단한 건 아니오. 친왕(親王) 전하들께서 황상께 상소를 올렸소이다.”
“뭐라고요?”
“영평공주의 병문안을 가고 싶으니 윤허해 주시라는 내용이었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은 상황이라 그런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나 보네요. 황상께선 허락하셨나요?”
황태손이 두 손바닥을 살짝 들어 올렸다.
“천륜에 들어맞는 일인데 거부할 명분이 없지 않소?”
“그렇긴 하죠.”
“태의원(太醫院)에 더 신경 쓰라고 이르신 뒤 허하셨소이다. 전하들께선 내일 아침에 입궐하실 것이오.”
정광의 눈에 흥미로운 빛이 떠올랐다.
친왕 전하들이라 함은 한왕 주고후와 조간왕 주고수를 말하는 것일 터.
‘한왕이야 한 번 봤지만 조간왕은 아직 못 봤는데. 어떤 인물인지 구경이나 해볼까.’
그렇다고 황태손에게 내일 아침에 자리 좀 비워도 되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황태손이 영평공주를 의심하게 될 게 뻔했다.
그럼 다른 식으로 물어볼 수밖에.
“저하. 내일 조회는 언제예요?”
“시국이 시국인지라 불규칙하게 열려서 말이오. 내일은 오후외다.”
이런.
자리를 비울 수 없게 되다니.
‘혜진도 문제인데.’
정광은 혜진과 똑 닮은 한왕 주고후의 미간을 떠올렸다.
‘아비를 만나고도 태연할 수 있으려나.’
그야 확인해 보면 될 일.
일단 고생하셨다고 황태손을 위로한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혜진 소저.”
기다리고 있던 혜진이 대답했다.
“네, 단주.”
“만안궁으로 가실 시간이 됐죠?”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내일 아침에 친왕 전하들께서 만안궁에 방문하신다고 하네요.”
“……!”
“제가 역용하고 가서 그분들의 됨됨이를 살피고 싶은데 움직이기 힘들 것 같아서요. 혜진 소저, 괜찮으시겠어요?”
“…….”
혜진은 총명했기에 정광의 말뜻을 알아챘다.
‘벌써 거기까지 짐작하고 있는 건가. 역시 단주구나.’
자신을 버린 아비를 보고도 괜찮겠냐는 의미.
혜진은 흔들리는 마음을 세우며 또렷이 답했다.
“물론입니다.”
“음.”
가슴 속의 의지가 눈에도 새겨진 걸까?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정광이 씩 웃었다.
“좋네요. 그럼 어떤 분들인지 살펴주세요. 혹여나 이상한 행동을 하진 않나 감시도 해주시고요.”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단주.”
혜진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만안궁으로 향했다.
정말 아비를 보고도 태연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자오가 말했던 것처럼 그러고 싶고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니 어떻게든 될 거라 믿었다.
‘생각이 너무 긴 것도 안 좋아. 할 수 있으니 한다.’
만안궁에 도착하자 마음이 답답한지 방 밖으로 나와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고 있던 소혜가 맞이했다.
“불취검. 오셨습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혜진은 예를 표하다가 소혜의 입술에 난 상처를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저, 저건! 아미산에 있을 때 속가 사매들이 얘기하곤 하던 그것!’
놀람도 잠시.
정광과 자오의 조언 덕분일까.
‘아니야. 내가 알던 단주라면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았을 거야.’
바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입술을 다치셨군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 별일 아닙니다.”
별일 아니기는 무슨.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다친 곳이 입술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나.
“저는 소저의 호위를 맡은 몸입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불취검 탓이 아니니 자책하지 마십시오.”
혜진은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커지는 기분이었지만, 대수롭지 않은 척 지나가듯 물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혹시 진옥룡과 관련된 일인지요?”
소혜는 순간 뭐라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의식적으로 정광에게 심공을 쓸 것 같아 깨문 건 맞지만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소혜가 망설이자 혜진의 오해가 깊어졌다.
‘했군, 했어. 얼마나 격렬하게 했기에 상처가…….’
부동심이고 뭐고 다 날아갔다.
이상하게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하지만 머리만큼은 놀랍게도 차가워졌다.
‘내가 화낼 일이 아닌데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바로 속을 가라앉히고 정중히 포권했다.
“캐묻는 것처럼 들리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허나 제 임무가 임무인지라 이해해주십시오.”
혜진의 감정 변화가 어찌나 빨랐는지, 소혜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예를 표했다.
“사과라니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보다 불취검께서 상처 하나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소혜는 순간 난감함을 느꼈다.
네가 진옥룡에게 불손하게 굴어 진옥룡이 너를 가만두지 않은 줄 알았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사람을 많이 대하지 않아 말을 하면 할수록 실수만 늘어나는구나. 조심해야겠어.’
소혜는 속으로 자신을 나무란 뒤 부드럽게 설명했다.
“종일 고생이 많으셨는데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라고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헌데 제가 말주변이 없어 제대로 표현을 못한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혜진은 다시 가슴이 들끓어 올랐다.
‘너는 단주 때문에 입술을 다쳤는데, 나는 멀쩡해서 다행이라는 말이냐?’
그렇다고 내색하긴 싫었다.
“아닙니다. 그래도 상처가 그리 심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바람이 찬데 그만 들어가시지요. 저는 옆방에서 지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
편히?
혜진은 한숨도 못 잤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머리가 텅 빈 느낌이었다.
‘왜 이러지? 나를 낳고 버린 사람을 만나는 게 이리도 부담되는 일이었나? 이래선 안 돼. 나는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아.’
혜진은 본능적으로 정광과 소혜에 대한 생각은 밀어내고 아비에 대한 고민만 했다.
그리고 결국 아침이 되자.
혜진의 사정 따위 알 수조차 없고 알 필요도 없던 두 사내가 호위 무장들을 이끌고 만안궁을 방문했다.
한왕 주고후와 조간왕 주고수였다.
“한왕 전하와 조간왕 전하를 뵙습니다.”
그들을 마중하러 나온 소혜의 뒤편에서, 가급적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던 혜진의 시선이 두 친왕 중 한 사람에게 꽂혔다.
두 친왕의 미간 모두 혜진과 똑 닮았으나 바로 알 수 있었다.
일전 정광이 착각한 한왕 주고후가 아니었다.
바로 조간왕 주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