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36화 (335/569)

2부 65화

앞으로도 그랬으면

금의위를 상징하는 짙은 주황색 관복을 걸치고 검은 관모를 눌러 쓴 성깔 있어 보이는 미청년.

분명 남장을 한 혜진의 모습 그대로인데 말투와 목소리는 그 괴물의 것이라니.

소혜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건! 진옥룡!’

어지러운 마음 때문에 흐릿해져 있던 심안(心眼)이 트이며 정광의 사람 같지도 않은 무서운 눈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또 실수해선 안 돼!’

늦기 전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날카로운 고통과 함께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혜는 극심한 두려움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현되려던 심공(心功)을 가까스로 제어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광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하다 마시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뭐예요 그거?”

소혜는 속으로 평정을 되뇌며 입을 열었다.

“간밤에 하셨던 제안을 제가 따르기로 했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주러 오신 줄 알았습니다만. 엉뚱한 걸 물으시는군요.”

“평정을 빨리 찾으시네. 부동심까지는 아니지만 훌륭하신데요.”

피식 웃는 정광과 달리 소혜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런 방식으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불취검은 어디 계십니까?”

“단본궁(端本宮)요. 그런데 두 분이 무슨 대화를 나누신 거예요? 혹시 다투셨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원래 그런 분이 아닌데. 기분이 영 안 좋은지 쌀쌀맞게 구시더라고요.”

“…….”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대신 역용을 하고 갈 테니 쉬고 계시라고 말하니까 더 그랬고. 이해가 안 가네.”

소혜는 혜진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표정을 숨길 자신이 없다더니. 나와 잠깐 다퉜던 것을 숨기려고 일부러 차갑게 굴었구나. 억지로 감추는 건 역시 아직 어려운 건가.’

동시에 의문이 떠올랐다.

‘가만. 분명 쌀쌀맞게 굴었다고 했지. 악독한 진옥룡이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수하를 가만히 둘 리는 없는데.’

손속에 사정이 없는 것으로 악명을 떨치는 정광 아닌가.

그 사실을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불취검은 살아 있습니까?”

“네?”

“황궁에서 피를 보면 안 됩니다. 어떻게 덮으려고 그러셨습니까?”

정광이 황당한 얼굴로 대꾸했다.

“저기요. 소저 입술에서 나오는 피나 닦으시죠.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런 말씀을.”

“…….”

어쨌든 죽이지 않았다는 얘기.

소혜는 피를 닦아낸 뒤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알고 있던 것과는 많이 다르시군요.”

“하도 많이 들은 얘기라 이젠 감흥도 없네요.”

“황태손 저하의 호위는 어찌하고 오셨는지요?”

“부지휘사께서 입궐하신 데다 조회에 가실 때는 따라갈 필요가 없어서요. 영평공주께 의심받기 싫으니 일 얘기부터 빨리 끝내죠.”

소혜의 머릿속에 방바닥에 새겨졌던 글이 떠올랐다.

[내게 협조해라. 너와 어미가 살길을 열어주마. 날이 밝으면 누군가 네게 한 가지 청을 할 테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밤을 새우며 고민하다가 정광의 전음을 듣고 마음을 거의 정한 상태.

마지막으로 확답이 필요했다.

“저와 어머님이 정녕 살 수 있는 겁니까?”

“아마도요.”

“무슨 말씀입니까? 약조가 다르지 않습니까?”

“다르다뇨.”

정광은 찬찬히 설명했다.

“저는 살길을 열어드리는 것까지만 할 거예요. 그 길을 제대로 걷는 건 두 분 몫이죠.”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상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역모를 꾀한 죄인이시잖아요. 그 죄는 제게 협조하는 공으로 상쇄시켜드릴 수 있는데, 그 뒤에 또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하시거나 하면 저로서도 도리가 없다는 거죠.”

“아…….”

“황상이야 곧 가실 테니 상관없지만 황태손 저하의 성격도 보통은 아니니 납작 엎드려서 살아가셔야 할 거예요.”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더 믿음이 가는 얘기였다.

정광이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저는 이제껏 약조를 어긴 적이 없어요. 그러니 믿으시든가 말든가. 이제 됐죠?”

“…….”

정광의 말대로였다.

소혜로선 믿어야 할 수밖에.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일단 궁금한 것부터 여쭐게요. ‘그’가 누구죠?”

“교(敎)에서 보내기로 한 자객입니다만 정체는 모릅니다.”

“황상을 노리는 건가요, 황태손 저하를 노리는 건가요?”

“두 분 모두입니다.”

정광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배짱도 좋네. 혼자서 그게 되나? 소저의 역할은 뭐죠?”

“그가 지정하는 자의 움직임을 일순간이나마 저지하는 것입니다.”

“아. 저한테 썼던 그 수법을 말씀하시는 거구나. 그거, 연달아 쓸 수 있는 거예요?”

“무리하면 두 번까진 가능합니다.”

“흐음.”

정광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황제와 황태손을 지키는 고수들 중 제일 방해되는 놈들을 잠시나마 묶어 두고 그사이에 친다, 이건가. 나쁘지 않네.’

소혜의 능력은 정광조차 놀라게 할 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더구나 원래부터 황궁에 있는 존재였기에 들여오느라 고생을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확실한 신분이 있으니 의심을 사지 않고 표적에 접근하기도 쉬웠고.

이보다 좋은 병기가 또 있을까.

‘하지만 이런 병기가 필요하다는 건…….’

자객이 압도적인 무위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

황궁에 몰래 들어와 소혜와 함께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역용술이나 은신술에 자신 있는 살수(殺手)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자오에게 물어보면 그럴 만한 살수가 누군지 알 수 있겠지.’

정광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며칠 안 남았다고 들었는데. 정확히 언제 일을 일으키는 거예요?”

“저도 모릅니다.”

“명교와 어떻게 연락을 주고받으시죠?”

“어머님만 아십니다.”

“황궁에 명교도가 또 있나요?”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지금껏 다른 명교도를 보신 적은 있으신지?”

“황궁에 들어와서 살기 전에 봤습니다. 제 사부입니다.”

정광이 손뼉을 쳤다.

“오. 오랜만에 아시는 게 나왔네요. 어떻게 모시게 됐는데요?”

소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어느 날 갑자기 오셔서 아버님을 죽이고 저를 거두셨습니다.”

정광이 혀를 찼다.

“저런. 공주님께서 화내셨겠네.”

“반대입니다. 기뻐하셨지요. 그때부터 미륵을 더 깊게 믿게 되셨습니다.”

“아. 부마께선 난봉꾼이셨지. 그럴 만도 하네요.”

정광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소혜의 눈에 어이없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그러든 말든 정광은 질문을 이었다.

“소저의 사부님요. 어떤 분인지 설명 좀 해주세요.”

“들르실 때마다 얼굴이 바뀌어 진짜 모습은 알지 못합니다.”

“그분께 그 이상한 눈을 배우신 거죠? 그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소혜가 입을 여는데 정광이 인상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참을성이 적으시네. 공주님께서 궁녀 한 분을 불러서 소저를 모셔오라고 하셨어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따라야죠. 일단 걷는 척 좀 하죠.”

정광은 소혜와 전각들 사이를 거닐며 말을 이었다.

“공주님께선 감시인이 생겼으니 마음이 조급해지셨을 거예요. 황궁에서 유일한 아군인 소저께 더 의지하며 이것저것 상의하려고 하시겠죠.”

“그걸 노리고 불취검을 붙이신 겁니까?”

“네. 그러니 무리해서 정보를 캐내려 하지 마시고 신뢰부터 더 다지세요. 그리고 쓸 만한 걸 알아내시면 저나 불취검 소저에게 알려주시면 돼요. 쉽죠?”

“…….”

전혀 쉽지 않았지만 별수 있나.

“알겠습니다.”

당장 필요한 얘기들을 끝내자 궁녀가 다가와 소혜에게 말했다.

“공주께서 찾으십니다. 가시지요.”

* * *

“하아아.”

정광은 침상에 누워 뒹굴뒹굴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옆방에 있는 영평공주가 소혜를 계속 들볶아서였다.

의심했다가, 사과했다가.

털어놓다가, 캐묻다가.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못해 변화무쌍한 경지 아닌가.

‘쉽진 않고 살짝 어려울지도. 뭐 알아서 하겠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마자 일어나 황태손의 거처인 단본궁(端本宮)으로 향했다.

먼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역용을 풀었다.

그리고 혜진의 방에 가보니 그녀는 명상 중이었다.

“소저. 그만하시고 밥 먹죠.”

혜진은 대답 없이 용맹정진했다.

“안 드실 거예요? 오랜만에 술도 한잔할까 하는데.”

혜진이 눈을 감은 채 쌀쌀하게 거절했다.

“명상 중이라 죄송합니다. 단주 홀로 드십시오.”

정광이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술을 거부하신 거예요? 진짜 화나셨나 보네. 소혜 소저와 칼부림이라도 하신 건가.”

정광이 소혜를 입에 올리자 혜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대체 이 인간은…… 후우. 원래 이런 인간이었지.’

상대가 정광이라는 걸 상기하자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가만.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딱히 화낼 이유도 없는데.’

뭔가 알 듯 말 듯 한데 알고 싶지가 않은 묘한 기분이었다.

혜진은 속으로 탄식했다.

‘부동심을 닦으면서 무슨 잡생각을 이리도 많이 하는지…….’

다시 정신을 집중하여 소혜의 조언을 떠올렸다.

‘익숙한 것이든 억지로 하는 것이든 결과는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못 하는 걸 애석해하지 말고 인위적으로나마 비슷하게 해보십시오. 성과가 있을 겁니다.’

애초에 못 가지고 태어난 것을 부러워해서 뭐 하는가.

결국엔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을.

‘지름길은 없어. 우직하게 가야 해.’

그때, 혜진을 가만히 보고 있던 정광이 입을 열었다.

“그 부동심. 있으면 좋겠지만 꼭 가져야 하는 거예요?”

“……?”

“십존도 팔사도 오왕도 부동심은커녕 정상이 아닌 분들이 더 많으신데 왜 가지려고 하시는 거예요? 혹시 부처가 되시려고?”

혜진은 저도 모르게 자신을 낳고 버린 이를 떠올렸다.

“무공도 부처 때문도 아닙니다. 그저 흔들리기 싫어서입니다.”

“취향이 특이하시네. 그럼 그런 식으로 하시면 안 되죠.”

“네?”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계속 흔들리시는 게 빤히 보이는데요.”

“……!”

혜진은 눈을 뜨고 정광을 바라봤다.

정광은 혜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방바닥에 검지를 댔다.

그리고 살짝 누른 뒤 쭉 긋자 반듯한 선이 파였다.

정광은 선의 끝 중 하나를 가리켰다.

“이게 혜진 소저의 위치.”

다른 끝을 가리켰다.

“이게 부동심이에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정광은 양 끝을 잇고 있는 직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이렇게 제일 빠른 길로 가고 싶으신 거죠?”

사람인 이상 그럴 수밖에.

혜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광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면 총명한 혜진 소저가 고생할 리가 없죠.”

순간 혜진의 눈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지만 정광은 직선 옆에 곡선을 그리느라 볼 수 없었다.

“이런 길도 있고.”

다른 곡선을 또 그렸다.

“이런 길도 있어요.”

정광은 그것들 외에도 몇 개의 곡선을 더 긋고 나서 말을 이었다.

“보세요. 출발점과 도착점은 같더라도 길은 하나가 아니죠? 이 길들 중 하나로 간다고 직선으로만 가길 원하시는 지금보다 늦을까요?”

“곡선이 직선보다 돌아가는 건 사실 아닙니까?”

“그건 직선에 장애물이 없을 경우죠. 발걸음을 떼기도 어려울 만큼 턱턱 걸리는데 직선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정광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 장애물은 억지로 하려는 욕망, 또는 빨리 가고 싶은 조급함이에요.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걸 털어내긴 힘들고. 그럴 바엔 차라리 돌아가시라는 거죠.”

혜진은 현기가 담긴 듯한 설명에 빠져들었다.

“돌아가는 건 어떻게 가는 것입니까?”

정광의 답은 간단했다.

“궁리하되 매몰되지 말라.”

“……네?”

“음. 좀 풀어 말하자면. 안 흔들려야겠다 종일 애쓰시지 말고, 흔들렸을 때만 바로 서려고 노력해 보시라는 얘기죠. 그게 익숙해지면 똑바로 서는 시간도 빨라질 거고, 그러다 보면 언젠간 안 흔들리시는 날이 올 거예요.”

“아! 그런 방법이…….”

“단. 막상 해보면 혜진 소저에겐 안 맞을 수도 있어요.”

“……그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글쎄요. 그때 가서 같이 생각해 보죠. 어떻게든, 언젠가는 되지 않을까요?”

“…….”

혜진은 정광을 한동안 보다가 웃었다.

‘그때 가서 같이 생각해 보죠’라는 말에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든든해져서였다.

“하하. 알겠습니다.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깨달음을 얻으셨으니 축하주나 한잔하죠. 아. 마침 자오도 오셨네.”

팽가에 갔던 자오가 돌아와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단주.”

“수고하셨어요. 일 얘기는 나중에 하고. 식사부터 하죠.”

세 사람은 가볍게 한 잔씩 하며 요리를 즐겼다.

정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배를 두드린 뒤, 영평공주 모녀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얘기가 끝나자 혜진과 자오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정광은 먼저 혜진에게 당부했다.

“소혜 소저와 싸우지 마세요.”

“……싸운 적 없습니다만.”

“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정광은 시선을 자오에게 돌렸다.

“황궁에 숨어들어 와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살수가 천하에 몇이나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단 한 명뿐입니다. 암왕(暗王). 오왕(五王) 중 하나인 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대의 살수일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황궁에 와보니 진짜 고수들이 꽤 많은데 암왕이 그럴 능력이 돼요? 수왕도 낭왕도 절대 안 될 텐데.”

“살수는 무공으로만 승부하는 게 아닙니다.”

“흐음. 그래도 그게 되려나.”

자오가 잠시 망설이다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단주. 그동안 묻지 않으셨던 배려, 정말 감사했습니다. 숨겨왔던 제 이야기를 들려 드릴 때가 됐군요. 사실은…….”

“본론만요.”

“……암왕은 영인문(影人門)의 문주인 제 사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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