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35화 (334/569)

2부 64화

결과는 같습니다

황태손이 지금껏 겪어본바, 정광이라는 기인은 항상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지나서 돌이켜보면 그럴 만한 연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었다.

처음 내세웠던 이유가 아닌 다른 목적을 품고 그러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정광의 수하인 불취검이 영평공주를 경호할 겸 소혜에게 부동심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불취검은 실제로 의욕에 가득 차 있어 보였지만 곧이곧대로 들릴 리 있나.

황태손의 눈이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이번엔 뭘 노리는 걸까?’

생각해 봐도 그럴듯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진옥룡. 설마 소혜가 그대의 외모에 흔들리지 않았던 걸 부동심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물론이죠.”

너무 당당하게 대답하니 웃음이 나왔다.

“하하.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구려. 헌데 경호는 또 무슨 말이오? 어떤 위험이라도 느낀 것처럼 들리오만.”

“어제 저하와 황궁을 돌아보니 만안궁(萬安宮)의 방비가 다른 곳에 비해 허술하더라고요.”

“그런 면이 없진 않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인데 좀 그래서요. 불취검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고요.”

“흐음. 소혜가 부동심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침착하기로 유명한 건 사실이니…….”

황태손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저었다.

“헌데 영평공주께서 경호를 받으시는 것을 달가워하실지 모르겠소.”

“왜요?”

“상처가 많은 분이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지내고 싶어 하시지. 그래서 번초도 최소한으로 세워 드리는 것이외다.”

“아. 잘 뒈졌다고 말씀하셨던 난봉꾼 부마 때문에…….”

“흠! 흠! 소리가 안 새어나가게 하고 있는 것 맞소?”

“당연하죠.”

정광은 황태손을 안심시키고 말을 이었다.

“영평공주께선 사내를 불편해하시는 거죠?”

“확실하진 않지만 그렇게 짐작하고 있소.”

“그럼 불취검이 딱 맞네요. 같은 여인이잖아요.”

황태손은 정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틀린 말은 아니야. 게다가 이렇게까지 설득하려고 하는 걸 보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겠지.’

영평공주에게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나서는 게 맞으리라.

“낮은 몰라도 밤만큼은 안심이 안 되던 참인데 잘됐군.”

“역시 저하. 이해해 주시네요.”

“좋소. 한번 해봅시다.”

정광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 황태손이 덧붙였다.

“단, 부동심 얘기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왜요?”

“괜한 의심만 살 것 같아 그러오. 내 입으로 설명하기도 좀 그렇고.”

천하제일미남을 보고도 마음이 안 흔들리는 걸 보니 부동심을 지니고 있는 게 분명하렷다, 이런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소혜도 믿지 않을 게 분명했고 어차피 정광의 목적은 다른 것일 테니 의심 사지 않게 가자는 의미였다.

“음.”

정광은 완전히 수긍하진 않았지만 황태손이 연유를 따지지 않고 배려하는 걸 알았기에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죠. 불취검, 알아서 배우실 수 있죠?”

혜진이 눈을 빛냈다.

“여기까지만 해도 감사합니다.”

“그럼 가시죠.”

황태손과 정광 일행은 만안궁으로 갔다.

안에 기별을 넣으니 소혜가 조용히 나와 예를 올렸다.

“저하를 뵙습니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공주께 태의를 보내 드렸다만. 병환에 차도가 있으시냐?”

“저하 덕분에 한결 나아지셨습니다.”

“다행이군. 진작 찾아뵙고 이럴 것을. 태의원(太醫院)에 더 신경 쓰라 이를 테니 그리 알거라.”

“감사합니다, 저하.”

“질자(姪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인데 감사할 것까지야.”

황태손은 빙그레 웃은 뒤 말을 이었다.

“정말 고마운 마음이 있으면 오라비의 부탁을 들어다오.”

소혜의 눈이 살짝 커졌다.

황태손이라는 지고한 신분을 지닌 자가 스스로를 오라비라 칭하며 부탁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다니?

그녀가 놀라건 말건 황태손은 혜진을 가리켰다.

“잠시 금의위 소기(小旗)직을 맡아 남장을 하고 있으나 강호의 유명한 여협인 불취검이다. 요즘 분위기가 안 좋은 건 알지? 만안궁의 방비가 너무 약해 항상 걱정하던 차에 적임자가 생겼는데 내가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

소혜는 영민했기에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불취검으로 하여금 이곳을 지키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공주께서 불편해하시면 네가 설득해 드리길 바란다.”

“…….”

소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호위를 붙이겠다는 얘기인데…….’

다른 이라면 모르겠지만 정광의 수하 아닌가?

‘어머니가 받아들이실 리 없어. 저하께선 왜 저자를 붙이려고 하시는 거지? 혹시 진옥룡이 뭔가 고한 건가?’

전처럼 또 실수할까 봐 애써 외면하고 있던 정광을 흘깃 보는데.

정광이 미소 지으며 전음을 보냈다.

-저하는 모르시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알면 이렇게 나오실 분이 아니잖아요.

소혜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겨우 참았다.

헌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직 황궁을 안 떠나신 걸 보니 제가 간밤에 드렸던 제안을 받아들이신 것 같은데 뭘 고민하세요?

‘……!’

소혜는 억지로 태연한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허나 가슴이 마구 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 괴이한 문자! 진옥룡의 것이었구나!’

방바닥에 칠흑보다 더 어둡게 새겨지던 글자들을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처음엔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암어(暗語)를 쓰길래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짙은 의혹을 느꼈다.

‘내가 돌처럼 굳어 있자 또 다른 암어를 썼었지.’

그러길 수차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광은 그제야 알아볼 수 있는 글자를 써서 제안을 해왔다.

‘그리고 오늘 들어오는 청을 거절하지 말라고 했어. 이게 그것인가.’

지난밤을 돌이켜보는데 정광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거절하시는 건 아니죠? 그럼 증거가 없어도 지금 당장 황태손 저하께 말씀드릴 건데. 황상께도.

‘……!’

그랬다간 파국밖에 안 남을 터.

‘이렇게 된 이상 길은 하나야.’

소혜는 밤을 새우며 고민했던 문제에 대한 답을 냈다.

“저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한다. 네가 힘들면 내가 직접 말씀드리마.”

소혜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인 뒤 어미의 방에 들어갔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영평공주가 일부러 힘없는 목소리를 냈다.

“황태손 저하께서 무슨 일로 오신 것이냐?”

소혜는 사실대로 얘기했다.

영평공주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탁자에 글을 썼다.

[진옥룡 그 악적이 황태손에게 뭔가 말한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긴. 황태손의 성정으로 미루어보아 뭔가 알고 있다면 이렇게 돌려서 일을 꾸밀 리 없지.]

영평공주의 눈이 분노로 물들었다.

[그렇다면 진옥룡 그놈의 독단이란 얘기인데. 증거가 없으니 잡으려는 거구나. 그래서 황태손에게 호위를 핑계로 부탁한 게야.]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던 영평공주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감시인을 받을 순 없다. 나가서 거절하거라.]

만약 어제 이런 일이 있었으면 그랬겠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소혜는 어미를 설득했다.

[어머니. 황태손이 서운해할 것입니다.]

[상관없다. 내가 그놈의 위세에 짓눌릴 것 같으냐?]

황실 사람들은 모두 영평공주를 안타까워했기에 그녀가 무례를 범해도 이해하고 넘어가 주곤 했다.

자연히 오늘도 그러리라 생각했고.

더구나 웃어른들에게 항상 정성을 다하는 황태손 아닌가.

하지만 소혜의 말이 영평공주의 마음을 흔들었다.

[제가 어머니를 설득하지 못하면 황태손이 직접 말씀드리겠다 했습니다.]

[……직접?]

[그렇습니다. 평소 한번 말하면 그걸로 끝내는 위인이 그랬다는 건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그의 체면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황태손은 마음이 넓고 온유했으나 핏줄은 못 속이는지 분노할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 무서웠다.

[거절했다간 얼굴을 붉히는 걸 넘어 의심을 살 게 뻔합니다.]

[…….]

[진옥룡도 아니고 그자의 수하일 뿐이니 그냥 받아들이시지요. 우리가 더 조심하면 별문제 없을 겁니다.]

[…….]

고민하던 영평공주가 소혜를 쏘아봤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적극적으로 말하는구나. 딴마음을 품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소혜의 눈에 서글픈 빛이 떠오르자 영평공주가 사과했다.

[미안하다. 신경이 날카로워 말을 함부로 했구나. 네가 그럴 아이가 아닌 것을.]

[……괜찮습니다.]

[네 말대로 받아들이되 조심하는 게 맞아. 조금만 더 힘내자.]

영평공주는 소혜의 손을 꼭 잡아 준 뒤 입을 열었다.

“저하의 마음은 고맙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외인이 있는 건 불편하구나.”

“어머니. 요즘 황궁 분위기도 뒤숭숭한데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시지요.”

“으음.”

“저하께서 이렇게 위해주시는데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아…….”

영평공주는 마지못한 목소리로 승낙했고 소혜는 밖으로 나가 그 사실을 알렸다.

“하하하. 소혜야. 수고했다. 이제야 마음이 조금 놓이는구나.”

황태손은 혜진을 남겨놓고 정광, 자오와 함께 떠났다.

홀로 남은 혜진은 소혜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불취검이라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드릴 말씀이지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소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님은 황족이시지만 저는 아닙니다. 더구나 도움을 주려고 오신 분께 어찌 말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소혜는 어미가 있는 방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어머님께선 와병 중이신 데다 외인을 만나는 걸 불편해하시니 굳이 인사드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빈방이 많으니 마음에 드시는 곳을 골라 지내십시오.”

영평공주는 중앙의 방을, 소혜는 그 왼쪽 방을 쓰고 있었는데 혜진은 다른 방들을 확인한 뒤 모녀의 방과 제일 가까운 곳을 골랐다.

소혜는 궁녀들에게 일러 안을 한 번 더 정돈하라 한 뒤 혜진에게 권했다.

“어머니께선 육식을 즐기시지 않습니다. 식사는 다른 곳에서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말씀은 감사하나 황태손 저하의 명을 받고 왔기에 자리를 비울 순 없습니다.”

“대낮에 무슨 큰 위험이 있겠습니까? 여인이신 불취검께서 오신 건 밤을 대비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사실인지라 혜진은 황태손께 말씀드려 보겠다고 얘기했다.

“불취검. 저는 이만 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를 표하고 돌아서려는 소혜를 혜진이 잡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진옥룡을 보시고도 어찌 그리 태연하십니까?”

“……!”

소혜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이건 또 무슨 의미지? 진옥룡의 능력을 봐놓고도 두려워하지 않냐고 힐난하는 건가?’

진옥룡도 아니고 수하에게 다그침을 당하다니.

여기서 망설이면 계속 밀릴 터.

소혜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라고 할 말이 없는 줄 아십니까. 진옥룡이 간밤에 찾아와 제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건 그렇다 치지요. 헌데 다시 찾아와 놓고 불취검만 남겨놓고 가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혜진의 눈이 흔들렸다.

‘간밤에 뭐? 단주가 설마…….’

육식과 음주야 익숙해진 지 오래였지만 여색까지 탐할 줄이야.

‘지금까지 여인을 돌 보듯 하더니.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건가. 나를 비롯한 사봉은 안중에도 없었으면서 왜 이 여인에게만…….’

혜진이 굳은 얼굴로 침묵하자 가만히 지켜보던 소혜가 한숨을 쉬고 사과했다.

“불취검께 따질 일이 아닌데 제가 실수를 했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어색하게 서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건 혜진이었다.

“조금 전 일은 함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소혜도 동의했다.

진옥룡의 심복과 척을 져서 뭐하겠는가.

“제가 부탁드리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혜진이 이맛살을 모았다.

“그런데 제가 단주 앞에서 표정을 숨길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어찌 그리 자신하십니까?”

“익숙해서지요. 황궁에서 살다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욕망을 감추는 것은 물론이오, 실례를 범하면 안 되니까요.”

“익숙해서라…… 저는 힘들겠습니다.”

“아닙니다. 익숙한 것이든 억지로 하는 것이든 결과는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못 하는 걸 애석해하지 말고 인위적으로나마 비슷하게 해보십시오. 성과가 있을 겁니다.”

혜진의 눈이 커졌다.

안 풀리던 화두에 빛이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 * *

식사 시간이 되자 혜진은 황태손에게 갔다.

소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미에게 적당히 보고한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모르겠구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는데 왜 말이 없는 것이지? 불취검을 통해 전하려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돌아온 혜진이 소혜에게 청했다.

“만안궁을 지키려면 주위에 있는 전각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안내를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소혜는 어미가 있는 방을 흘깃 본 뒤 수락했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소혜는 혜진을 이끌고 걷다가 한 전각 뒤로 돌아가게 되자 물었다.

“혹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혜진이 답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말투와 목소리지만 들어본 적이 있는 것으로.

“물론이죠. 제안을 받아들이셨으니 다음 얘기를 진행해야 하지 않겠어요?”

소혜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건! 진옥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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