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34화 (333/569)

2부 63화

모녀

무공의 종류와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어느 것이 됐든 간에 정공(正攻), 마공(魔功), 사공(邪功), 이 세 가지 중 하나에 속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나누는 건 무공을 수련하는 방식과 발현 방법 등이 다르기 때문인데 마공에 불문 무공을 끼얹었다고?

놀람도 잠시.

정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가진 거나 제대로 닦지. 쓸데없는 과욕을 부리다니.’

쓸 만한 걸 받아들여 지닌 것에 접목해 발전을 꾀하는 건 아주 바람직한 자세다.

허나 그럴 만한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거늘, 무슨 자신감으로 중들의 것을 차용했단 말인가?

정광의 눈치를 보던 흑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신 나간 녀석들이지요.”

“그러게.”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왜?”

“아득히 오래전 본교에 반기를 들었다가 말살되다시피 했던 놈들 아닙니까? 그 와중에 무공의 상당 부분이 유실됐을 테니 뭐라도 해봐야 했겠지요.”

정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네?”

“어쨌든 남은 건 있었을 거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걸 수련하다 보면 자연히 이어지는 길을 깨달았을 텐데. 그 길을 편하게 걸으면 되지, 왜 더 어려운 쪽을 골라?”

자연히 뭘 깨달아?

그쪽이 더 힘들어 보이는데?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냐고 욕했겠지만 흑서는 재빨리 수긍했다.

“만세만세만만세! 교주의 말씀이 옳고도 옳습니다.”

“그놈의 만세 좀 빼라. 오랜만에 들으니까 간지럽다.”

“존명!”

“그래서. 하던 얘기 계속해 봐.”

흑서의 입이 눈부신 속도로 움직였다.

“신강(新疆)에서 도주해 중원으로 흘러들어 온 놈들은 곳곳에 흩어져 자신들의 교리를 포교했습니다. 중원의 권력자들이 보기에 얼마나 눈꼴이 시었겠습니까?”

미륵(彌勒)이 현신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중생을 구제하리라.

그 미륵이 바로 우리의 교주시니 명교에 입교해 영생을 얻어라.

이따위 교리를 퍼뜨리는 놈들을 두고 볼 권력자들이 있을 리 있나.

결국 사교(邪敎)로 규정되어 탄압을 받게 됐다.

명교는 살아남기 위해 민초들 틈으로 은밀히 스며드는 한편, 닥치는 대로 무공을 받아들여 불완전한 마공에 접목했다.

그 결과 독특한 무공들이 생겼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각 성의 지부마다 다른 것을 익힐 정도였다.

“수가 많으면 쓸 만한 것도 있기 마련이지요.”

흑서의 말에 정광은 소혜의 수법을 떠올렸다.

“그것들 중에 마기도 사기도 안 느껴지는데. 상대의 정신을 공격하는 수법도 있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흑서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짚다가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납작 엎드렸다.

“교주! 소인이 부족해 그런 것은 알지 못합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는 무슨. 모르면 모르는 거지.”

“……네?”

“됐다고. 황궁 지도나 줘.”

경악한 눈빛으로 정광을 보던 흑서가 정신을 차렸다.

“여, 여기 있습니다.”

“꽤 세세하네. 잘했어.”

“……네?”

“조금 늙었다고 귀가 먹었나. 왜 자꾸 물어?”

왜긴.

때리지도 않고 칭찬까지 하는 네가 너무 이상해서 그러지.

흑서의 속마음은 이랬지만 입은 다른 말을 뱉었다.

“교주!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황궁 애들이 번(番)을 어떻게 서는지, 어떤 진법과 기관진식이 깔려 있는지 대충은 알지?”

“많이 알고 있습니다!”

“장하다. 지도랑 같이 설명해 봐.”

“존명!”

정광은 흑서가 늘어놓는 말들을 자신이 봤던 것들과 비교하며 머릿속에 쌓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황궁은 황궁이네. 뭐가 이렇게 많고 복잡해?’

그래도 영평공주와 소혜가 거하는 만안궁에는 까다로운 것들이 없어 다행이었다.

정광은 흑서의 설명이 끝나자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

“수고했다. 그만 가서 쉬어.”

“존명! 교주, 하나만 더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제 첫째 제자와 둘째 제자가 교주의 성은을 입기 위해 당장 달려와야 마땅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황제도 황태자도 상세가 무척 안 좋은 데다 경계를 강화하고 있어서 몸을 빼기가…….”

“응. 시간 봐서 보내. 안 오면 나야 편하니까 좋고.”

흑서는 반드시 보내겠다고 다짐하며 사라졌다.

정광은 황궁 지도를 품속에 넣은 뒤 몸을 일으켰다.

‘슬슬 가볼까.’

칠야마영(漆夜魔影)을 펼치자 정광의 신형이 어둠과 동화됐다.

더구나 항마주가 마기까지 가려주고 있는 상태.

‘황제가 있는 곳이라면 모를까, 공주의 처소쯤이야.’

그렇다고 방심하진 않았다.

금의위 지휘사 같은 고수와 맞닥뜨리면 곤란하지 않은가.

발각됐을 시 어디로 도주할지, 어떻게 대응할지 다시 한번 떠올리며 조심스레 이동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만안궁에 도착한 정광은 발동돼 있는 진법을 훑어본 뒤 그에 맞는 방위로 발걸음을 움직여 지붕 위로 올라갔다.

‘여기까진 됐고.’

모든 방의 불이 꺼져 있었다.

시간이 벌써 삼경을 넘어 사경에 이르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야 있나.

잠마대법(潛魔大法)을 펼쳤다.

어둠과 동화돼 있던 정광의 몸이 삽시간에 녹아내려 기와의 틈새로 스며들었다.

‘공주는 어디에 있으려나.’

중앙에 있는 방과 그 옆방에서 사람이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 봐라.’

정광의 눈이 빛났다.

꽤 규칙적인 호흡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잘 때의 것이 아니었다.

‘자는 척한다고? 왜?’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러는 것일 터.

흥미가 솟아 가만히 기다려 보기로 했다.

운이 좋은 걸까.

얼마 안 가 중앙의 방에 누워있던 사람이 일어나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옆방에 있던 이가 조용히 일어나 중앙의 방으로 들어왔다.

정광은 방 천장에 스며들어 맺힌 뒤 아래를 내려다봤다.

두 여인이 창문마다 두꺼운 천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등잔불을 밝히자.

수척한 중년 여인과 소혜의 얼굴이 드러났다.

두 사람의 얼굴은 꽤 닮은 편이었다.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영평공주인가. 불빛도 새어나가지 않게 하고 뭘 하려고?’

대단한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은 탁자 앞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눴다.

입이 아닌, 탁자에 손가락으로 글을 써서 하는 필담(筆談)이었다.

[지금쯤이면 괜찮겠지. 소혜야, 태의가 계속 머무르다가 가서 이제야 말한다만. 왜 그런 경솔한 짓을 했느냐?]

[죄송합니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너를 믿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건 이해하나 큰일이구나. 하필이면 그 악독하다는 진옥룡에게 의심을 사다니.]

정광은 어이가 없어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대체 무슨 소문을 들었길래 저래?’

의외로 영평공주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자에 의해 사마련이 무너졌고 모용회도 실패했다. 이젠 우리에게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어. 이렇게 연이어 대업에 차질이 생길 줄이야. 마음이 복잡해지는구나. 이 일을 어이할꼬.]

정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모용회를 아는 데다 대업을 입에 올려?’

이 모녀가 밀약과 연관이 있다는 말 아닌가?

영평공주가 계속 손가락을 움직였다.

[며칠 안 남았으니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그 대마두가 아무리 제멋대로라 해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우리를 해칠 순 없을 게야.]

[네, 어머니. 그런데 그는 언제 옵니까?]

소혜가 ‘그’라는 말을 입에 올리자 영평공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내 말에 따르기만 하면 돼.]

소혜의 얼굴도 굳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알면 되었다. 당장은 방법이 없으니 바깥출입을 삼가거라. 대마두의 눈에 띄면 안 돼.]

[네, 어머니.]

[나처럼 일부러 감기 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 누가 묻거든 내 수발을 들기 위해 그런다고 둘러대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소혜야.]

영평공주는 자신의 딸을 지그시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하를 위한 일이다. 조금만 더 참아줬으면 좋겠구나.]

소혜는 어미의 눈을 묵묵히 응시하다가 글을 썼다.

[꼭 이래야만 합니까?]

[갑자기 무슨 말이냐?]

[오래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위로하기 위해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되는 건…….]

[닥치거라!]

영평공주의 눈이 분노로 물들고 손가락에는 힘이 들어갔다.

[네가 언제부터 내게 말대꾸를 하게 된 것이냐! 너는 어미의 뜻에 따라야 해! 아니, 그 전에 본교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냐! 미륵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임무를 잊었어?]

소혜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갑자기 두려워져서 그만…….]

영평공주의 얼굴이 온화하게 변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미륵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있어.]

[……알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만 가서 자거라. 너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지 않느냐?]

소혜는 조용히 일어나 예를 올린 뒤 등잔불을 끄고 창가에 내렸던 천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영평공주는 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자식을 못 미더워하는 모습이었다.

나직한 한숨을 내쉰 공주는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

더 볼 게 없어진 정광은 옆방으로 옮겨갔다.

소혜는 어미와 달리 침상에 걸터앉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광은 모녀의 표정을 비교한 뒤 결론을 내렸다.

‘공주는 적극적이고 딸은 소극적이네. 딸을 자객으로 키운 건가.’

‘그’라는 자는 또 누구일까?

며칠 안 남았다고 했는데, 언제 무슨 일을 하러 오는 걸까?

‘영평공주를 문초하면 간단히 알아낼 수 있을 텐데…….’

황족이라 문제였다.

뒷일을 생각 안 하면 못할 건 없었지만 황제에게 받아낼 게 한둘이 아닌 상황 아닌가.

철혈의 황제라 해도 딸이 고문당한 걸 좋아할 리 있나.

역모를 막기 위해서니 정상참작은 하겠지만 보상이 조금이라도 줄어들면 낭패였다.

‘더구나 ‘그’라는 놈이 공주의 변고를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고.’

공주를 감시하다가 ‘그’를 잡는 게 제일 현명한 수였다.

‘어떻게든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을 테니 그 순간을 노려볼까.’

꽤 비밀스러운 방식일 텐데.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고.

‘차라리 이러는 게 낫지.’

한편, 소혜는 낮에 봤던 정광의 눈을 떠올리며 몸서리치고 있었다.

‘그런 눈을 가진 자가 있다니.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어미가 그토록 원하는 대업이 과연 성공할까?

애초부터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정광을 겪고 나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막지 못할 텐데 왜 이렇게 마음이 흔들릴까.’

고개를 숙이고 깊은 한숨을 쉬던 소혜가 눈을 크게 떴다.

사각사각-

방바닥에 글씨가 쓰이고 있었다.

불을 밝히지 않은 상태라 아무것도 안 보여야 하거늘. 그 글씨는 어둠보다 더 짙게 가라앉아 선명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술법을 부려 안력을 키웠으나 글씨만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글씨가 문장을 완성하자.

공포에 질렸던 소혜의 눈에 복잡한 빛이 얽혔다.

* * *

정광은 푹 자고 일어나 입궐한 자오를 맞이했다.

“일찍 오셨네요.”

“하하. 당연한 일 아닙니까.”

자오의 눈은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제 입을 좀 풀었더니 기운이 넘칩니다.”

“설마 오늘도 그러려는 건 아니시죠?”

“하하. 단주께서 명하셔야 하지요. 일단 그분들껜 기다려 달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분들이란 황손들과 군주들을 이르는 것일 터.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황궁에 갇혀 사시다 보니 많이 심심했나 보네요. 자오의 말솜씨 때문에도 그렇겠지만요.”

하지만 그건 그 꼬마들 사정이고.

자오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혜진 역시 마찬가지였고.

마침 혜진이 정광의 방으로 왔다.

“단주. 일어나셨습니까.”

“네. 혜진 소저는 안색이 별로 안 좋으시네요.”

“큰일은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제 화두를 하나 잡고 종일 궁리했는데도 답이 안 나와 조금 답답할 뿐입니다.”

“부동심요?”

“그렇습니다.”

“이런. 그걸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면 되나요.”

“네?”

“마침 제가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알거든요. 일단 황태손 저하께 인사부터 드리죠.”

세 사람은 황태손을 만나 예를 취했다.

황태손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반겼다.

“하하. 오늘도 잘 부탁하오. 그대들이 있어 무척 든든하다오.”

정광이 손을 들었다.

“저하. 저도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하하. 천하의 진옥룡이 부탁이라니. 이런 영광이 있나. 무엇이든 말하시오.”

황태손이 너스레를 떨자 정광도 웃었다.

“별건 아니고요. 영평공주님의 따님요. 소혜 소저라고 해야 하나? 불취검이 그분의 부동심에 감탄했거든요. 그래서 공주님도 경호할 겸 소혜 소저에게 가르침을 청할 수 있을까 해서요.”

황태손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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