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32화 (331/569)

2부 61화

부동심(不動心)

정광은 고개를 들어 시린 겨울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창천(蒼天)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풍경을 봤으니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을 느껴야 하건만.

정광의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연유를 알기 위해 흑서가 고했던 내용을 다시 한번 되짚어봤다.

‘황제의 정비(正妃) 인효황후(仁孝皇后)가 신실한 명교도였고, 그녀의 자식들 중 어미를 따라 명교를 숭배하는 이가 있다고 했지.’

인효황후는 황태자, 한왕, 조간왕을 비롯해 공주 넷을 낳았는데 정광이 용무가 있는 건 공주 쪽이었다.

‘그렇다고 덜컥 그 공주를 지목해 만나야겠다고 할 순 없잖아.’

정광은 밀약의 음모를 막기 위해 황궁에 들어온 상태.

느닷없이 특정 공주를 보게 해달라고 청하면 황태손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친족이 안 좋은 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침착함을 잃기 마련.

황태손이 티를 내는 걸 방지하기 위해 공주들뿐만 아니라 군주들까지 보고 싶다고 했거늘.

그러면 정광이 황실의 여인들까지 전부 만나보고 혹시 의심스러운 자가 있는지 파악하려는구나 하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너무 얕봤나.’

황태손은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욕심도 채울 줄 아는 뛰어난 인재였다.

“하하. 진옥룡, 왜 인사만 하고 가만히 있소? 내 누이들이 묻지 않소?”

정광은 고개를 내려 눈앞에 있는 여인들…… 아니, 아이들을 바라봤다.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부터 많아 봐야 열 살 정도인 소녀까지.

일곱 명의 아이가 정광을 신기한 눈초리로 올려다보며 정신없이 떠들고 있었다.

근엄한 어조로.

“천하제일미남이라고 불릴 만하다더니 과연. 대단하오.”

“진옥룡. 그대의 드높은 명성은 익히 들었소.”

“황태손 저하께서 틈만 나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셨소이다.”

“천하를 주유하며 수많은 협행을 했다던데.”

“자세한 얘기가 궁금하오.”

“도사이면서 육식과 음주를 즐긴다고 들었소만. 혼인은 언제 누구와 올릴 예정이오?”

흐뭇하게 지켜보던 황태손이 정광에게 넌지시 물었다.

“내 누이들, 무척 의젓하고 총명하지 않소?”

“…….”

제 누이들이라 그렇게 보이겠지만 실제로도 그런 것 같긴 했다.

황궁에서 나고 자란 만큼 안하무인으로 굴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이렇게 예를 갖추고 대하는 게 어딘가.

억지로 자제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말이다.

황태손의 말에 힘이 실렸다.

“진옥룡의 제자 또한 인재라 들었소. 어린 나이에 홀로 외로울 텐데 비슷한 나이의 사저와 사매가 생기면 무척 기뻐할 것 같소만.”

“…….”

그나마 혼인 따위는 입에 안 올려 다행이긴 한데.

정광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후우우. 저하. 이건 아니죠.”

“무슨 말이오?”

“무공 수련이 얼마나 고된 일인데. 존귀한 군주(郡主)의 신분으로 그걸 어떻게 해요?”

황태손이 빙그레 웃었다.

“사부가 무공 사부만 있는 건 아니잖소?”

“네?”

황태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 경우를 생각해 보시오.”

“팽 노야요?”

“그렇소. 내 비록 사부께 권각술을 배웠소만 건강에 조금 도움이 되는 것일 뿐, 제대로 된 무공이라 할 순 없소. 내가 사부께 배운 건 마음이외다.”

정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럼 저도 군주님들께 제 마음을 전수해 드리면 되겠네요. 괜찮으시겠어요?”

“……그건 좀. 글 사부가 되시는 건 어떻소?”

“한림원(翰林院)에만 해도 학식이 뛰어난 학사가 넘쳐나잖아요.”

“겸손도 과하면 비례(非禮)인 것을. 그대만 하겠소이까?”

정광은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아직 제 필체 못 보셨죠? 보여 드릴까요?”

“하하. 안 봐도 명필이지. 그대의 무공처럼 우아하면서도 멋들어지지 않겠소?”

정광은 당장 땅바닥에 글씨를 쓰려다가 한숨을 쉬었다.

황태손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재잘거리는 군주들 때문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저하, 잠시만요. 각응.”

“네, 단주.”

“부탁드려요.”

자오는 정광이 뭘 원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아이들의 혼을 빼놓는 건 자오의 성명절기(姓名絶技) 아닌가.

“알겠습니다.”

자오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의 맥을 가늠하다가 한순간 끊었다.

“영명하신 군주님들을 뵈니 아미산의 영웅들이 생각나는군요. 구파일방의 일각을 담당하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무공과 의기를 지닌 여협들이 말입니다.”

“……!”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오에게 쏠렸다.

“아미산? 아미파?”

“우리가 그들과 닮았단 말이오?”

자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군주님들께 인사부터 올리겠습니다. 소인은 창공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각응(角鷹)이라 하옵고 사십삼 년 전 귀주성 정안현에서 삼남이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나이 열하나에…….”

웅성거리던 아이들이 점점 자오의 얘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광은 그 틈을 노려 발소리조차 안 들리게 조용히 물러났다.

황태손은 어이없는 얼굴로 지켜보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정광에게 다가갔다.

“거참. 연을 좀 더 단단히 맺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이 정도면 충분한데 왜 자꾸 그러세요.”

“혼기가 찬 누이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큰일 날 말씀을 하시네요.”

황태손이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얼굴을 굳혔다.

“그래, 그대가 보기엔 어땠소?”

“네?”

황태손이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저 어린 녀석들에게 무엇이 있겠냐 싶으면서도 물어볼 수밖에 없구려. 일전에 팽가의 잔치에서 소가주 팽강웅이 그랬던 것처럼 의심스러운 기색이 조금이라도 있소이까?”

황태손은 사술에 당한 팽강웅이 자신을 해하려고 했던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정광은 간단히 부정했다.

“전혀요.”

황태손의 경직됐던 얼굴이 대번에 풀렸다.

“후우우. 그럴 줄은 알았으나 긴장했소이다. 어쨌든 다행이오.”

“황궁에 고수가 얼마나 많은데 사술 같은 걸 걱정하세요?”

“그들을 못 믿는 건 아니나, 그대를 더 믿어서 그렇소.”

“사람 잘 다루시는 건 여전하시네요.”

정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황태손이 빙긋 웃었다.

“그래서, 제자로 삼고 싶은 아이는 누구요? 다 거둬도 좋소만.”

“지금 있는 한 명도 벅찬데요.”

황태손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흠. 다른 방법을 써야겠군.”

“자꾸 그러시면 도망간다니깐요.”

“더 손 벌리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비슷한 연배의 아이들이 친우로 지내는 건 좋은 일이잖소?”

“수빈이를 황궁으로 부르셔서 군주님들이랑 놀게 하시려고요?”

“맞소이다. 설마 그것도 안 되오?”

정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태손이 황위에 오르면 군주는 장공주(長公主)가 되겠지.’

장공주는 뚜렷한 실권이 없기에 권력 싸움에 휘말려 죽을 일은 거의 없었지만, 외명부(外命婦)의 큰 어른에 속하니만큼 황실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좋은 패였다.

정광에겐 별 의미가 없었으나 팽수빈에겐 도움이 되리라.

“제자가 친우를 사귀는 건 사부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죠.”

“하하. 내 말이 그것이오.”

“그럼 이제 공주님들을 소개해 주시겠어요?”

“한왕 전하는 이미 봤으니 그렇다 치고. 조간왕 전하나 내 아홉 아우는 그 뒤에 보려는 것이오?”

정광은 입을 떡 벌렸다.

“아홉 아우요?”

“그렇소만.”

“황태손 저하에 군주님들까지 합치면 총 열일곱 남매? 와! 황태자 전하, 정말 대단하시네요. 건강도 안 좋으신 분이 어떻게…….”

‘그쪽만 건강하신가?’라고 덧붙이려는데 황태손이 음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예전엔 지금 정도로 안 좋지는 않으셨소. 그리고 황자들, 특히 대통을 이을 막중한 책임이 있는 전하께선 되도록 많은 자손을 볼 의무가 있소. 나 또한 마찬가지고.”

“저하도 혼인하셨어요?”

“물론이오. 딸만 셋이외다.”

“오오. 갑자기 저하가 크게 보이네요.”

황태손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괜히 으쓱해지는군.”

실제로 그의 어깨는 평소보다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유치했으나 어쩌겠는가. 정광보다 뭔가 더 이룬 듯한 뿌듯함이 차오르는 것을.

“흠. 흠. 추태를 보여 미안하오. 그만 갑시다.”

군주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는 자오를 제외하고 황태손, 정광, 혜진은 발걸음을 옮겼다.

정광은 줄을 지어 따라오는 내시와 궁녀들을 돌아본 뒤 황태손에게 물었다.

“저하. 자금성 밖으로 가는 거죠? 저분들도 같이 나가는 거예요?”

출가외인이라. 혼인을 한 딸은 황궁 밖에서 사는 게 당연했기에 정광의 질문은 타당한 것이었다.

허나 황태손의 대답은 달랐다.

“다른 분들은 그렇지만 영평공주(永平公主)께선 황궁 내에 거하고 계시오. 그분께 먼저 갑시다.”

“네? 그분은 왜 여기에서 지내세요?”

“음.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고 있소?”

“당연하죠.”

“부마가 딸만 하나 남기고 요절했소. 잘 뒈졌지.”

“네?”

“험한 말을 써도 쌀 만큼 난봉꾼이었소. 그놈이 뒈진 뒤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황후께서 영평공주 모녀를 불쌍히 여기셔서 황궁 안에 거처를 마련해 주셨소이다.”

“아아.”

정광은 빤히 알면서도 처음 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흑서가 지목한 명교도가 바로 영평공주였다.

‘어떤 여인일까?’

흑서에게 들은 바로는 보통 여인이 아니었으나 직접 보고 판단해야 했다.

그녀의 거처는 만안궁(萬安宮)이였다.

‘영평(永平)에 만안(萬安)에. 팔자가 드세서 이름을 일부러 다 이렇게 지은 건가?’

궁금증이 더 커져서 기대하며 기다리는데…….

황태손이 왔다고 환관을 시켜 전갈을 넣었건만, 중년에 이르렀을 공주가 아니라 묘령이 안 되어 보이는 여인이 나타났다.

황태손이 그녀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소혜구나. 잘 있었느냐?”

“황태손 저하를 뵙습니다.”

“그래. 공주께선 안에 계시고?”

“계시긴 하오나 병세가 안 좋으셔서 저하를 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허어. 병세라니? 평소 몸이 약하셔서 걱정했거늘, 겨울 풍사(風邪)의 침습으로 감기라도 걸리신 게냐?”

“그렇습니다. 행여나 옮을까 걱정되오니 조심히 돌아가시길 비셨습니다.”

황태손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태의(太醫)는 왔다 갔고?”

“별것 아니니 소란피우지 말라고 하셔서 아직 안 불렀습니다.”

“무슨 소리. 내가 당장 부를 테니 그렇게 알거라.”

“감사합니다, 저하.”

“소혜 너도 몸조리 잘하고. 너까지 아프면 공주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저하.”

황태손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돌아가려다가 정광을 소개했다.

“강호의 기인이 황궁을 방문해 평소 적적해하시는 공주께 소개해 드리려고 왔던 참이다. 너라도 인사를 하거라. 진옥룡이라 불리는 신룡이니라.”

소혜와 정광의 시선이 마주쳤다.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윽. 뭐야 이건?’

순간적이었지만 머리가 찌잉 하고 울리는 것 아닌가!

정광은 하도 어이가 없어 소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마기도 아니고 사기도 아니고. 무슨 수법이지?’

소혜도 대경했으나 억지로 평온을 가장했다.

‘이걸 막아냈다고? 어떻게?’

한편, 황태손은 서로에게 놀란 두 사람과는 다른 이유로 놀라고 있었다.

‘이제껏 천하의 어떤 미녀에게도 관심이 없던 진옥룡이 이러다니. 미색 때문은 아닐 테고. 설마 소혜를 의심하는 건가?’

각자 생각에 빠지기도 잠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소혜는 정광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황태손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저하.”

“……그래. 잘 있거라. 다들 갑시다.”

황태손은 만안궁에서 나가 한동안 걷다가 물었다.

“진옥룡. 소혜는 영평공주의 여식이오. 그 아이에게 의심스러운 점이 있소?”

정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럴 수가. 설마 요기나 마기가 느껴지는 것이오? 그대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미약하게?”

“아뇨.”

“그렇다면 무엇이 수상쩍은 것이오?”

정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저를 한 번 봐놓고 다신 보지 않으시더라고요. 그게 말이 돼요?”

“그게 왜…… 아!”

정광은 천하제일미남 아닌가!

어린 군주들도 놀랐거늘 묘령에 가까운 나이의 여인이 한 번 보고 말아?

하지만 황태손은 얼마 안 가 피식 웃었다.

“소혜는 비구니만큼 불심이 깊은 아이오. 사내에게 관심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외다.”

정광이 부정했다.

“진짜 비구니분들도 저한테 이러진 않았는데요? 안 그래요, 불취검?”

“……맞습니다, 단주.”

혜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광이 아미산에 올랐을 때 난리가 나지 않았던가.

세상과 단절돼 있던 속가제자들이 난동을 부렸지만 비구니들이라고 담담했던 건 아니었다.

무림제일의 재녀들로 이름을 떨치는 사봉(四鳳)조차 정광의 외모엔 경탄을 금치 못하나 도저히 사람 같지 않게 느껴지는 벽 때문에 사내로 보지 않고 있는 실정 아닌가.

혜진은 소혜라는 여인을 떠올리며 짙은 의문을 느꼈다.

‘관세음보살의 부동심(不動心)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대체 어떻게?’

황태손은 농으로 넘겼고 혜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정광은 소혜의 눈을 떠올렸다.

현생에서 가장 강렬한 충격을 주었던 눈을.

‘재밌네. 한번 해보자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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