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30화 (329/569)

2부 59화

만마(萬魔)의 지존(至尊)

혜진과 똑같은 눈매가 인상적인 중년인은 황태손을 발견하자마자 두 팔을 크게 벌리며 껄껄 웃었다.

“으하하하. 이게 누구신가. 영명하신 황태손 저하를 뵈오. 그간 잘 계셨소이까?”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지 황태손은 빙그레 웃으며 예를 올렸다.

“한왕(漢王) 전하께선 여전히 농을 즐기시는군요. 불민한 질자(姪子)가 인사드립니다.”

“어허. 불민하다니. 겸양이 미덕인 건 적당할 때뿐일세. 다시는 그런 소리 말게나.”

“하하.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가르침, 명심하겠습니다. 헌데 이 야심한 시간에 어인 일이신지요?”

한왕이라 불린 중년인이 입맛을 다셨다.

“뻔하지 않나. 부황(父皇)께서 부르셔서 왔지. 음주가무를 즐기려던 참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원.”

두 사람의 대화에서 중년인의 정체를 눈치챈 정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한왕이면 황제의 차남 주고후. 생각보다 빨리 보게 됐네.’

와병 중인 황태자는 곧 죽을 목숨이라 치고.

황제와 황태손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누가 황위를 잇게 되냐고 물었을 때 진화가 알려줬던 두 사람 중 하나였다.

‘빼어난 능력이 덮일 만큼 포악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유해져 호탕하게 굳어졌다고 했지.’

그런 걸까, 그런 척하는 것일까?

그때, 한왕의 시선이 정광에게 옮겨졌다.

그의 눈을 들여다본 정광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성질을 억누르는 빛이 역력한데. 호탕한 척하는 거잖아.’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본성은 감추고 사니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본성이란 부지불식간에 불쑥 튀어나오기 마련.

정광의 미소를 비웃음으로 받아들인 걸까?

한왕의 눈썹이 역팔자(逆八字)로 휘었다.

“금의위의 규율이 예전 같지 않군. 너는 누구길래 그렇게 웃느냐?”

정광은 지체하지 않고 답했다.

“안녕하세요, 전하. 북진무사(北鎭撫司) 천호(千戶)인데요. 임시 천호요.”

아무리 본성이 포악한 자라 해도 상식 밖의 상대를 만나면 어쩔 수 있나.

법도를 완전히 무시한 자유로운 대답에 한왕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광의 눈엔 다르게 보였다.

‘과장하기는. 이런 식으로 종종 빈틈을 보이는 건가? 보기보다 똑똑한데.’

크게 벌어진 입과 달리 눈동자는 미동조차 안 하고 있었다.

‘한 번 더 긁으면 어떻게 나올까?’

정광이 입을 열기 전에 한왕을 호종하던 무장이 으르렁거렸다.

“지금 금의위의 위세를 믿고 이런 무례를 저지르는 것인가? 감히 한왕 전하께?”

“무례라뇨.”

정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왕부(漢王府)의 법도는 빡빡한 편인가 보네요. 황상께서도 별말씀 안 하셨는데.”

“……!”

무장은 물론 한왕의 눈도 조금 커졌다.

현 황제인 영락제(永樂帝)가 누구던가?

만에 하나라도 걸림돌이 될 것 같으면 누가 됐든 간에 가차 없이 숙청하고 수많은 피와 시신으로 대명(大明)의 치세를 끌어낸 철혈 황제 아닌가!

그런 그가 저따위 버릇없는 놈의 언행을 참았다고?

무장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소리치려 하는데, 지켜보고 있던 황태손이 조용히 말했다.

“사실이오.”

“……!”

황태손은 단 한 마디로 무장을 짓누른 뒤 한왕에게 사과했다.

“전하. 자세히 설명해 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황태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황상을 뵈면 자연히 알게 되실 테니 어서 가시지요. 저 때문에 발걸음을 지체하셨다가 안 좋은 말씀을 듣게 되실까 봐 두렵습니다.”

한왕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갑자기 부르셔서 의아했는데 이 자와 관계된 일인가 보군.”

“그런 부분도 있지만 아주 큰일이 일어났습니다.”

“허어. 그렇다면 이럴 때가 아니지. 그 일로 건청궁(乾淸宮)에 가시는 길인가?”

“그렇습니다만 전하처럼 황상께서 부르셔서가 아니라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 그럽니다. 그러니 먼저 가시지요.”

“챙겨줘서 고맙네. 나중에 보세나.”

한왕은 정광을 한 번 쏘아본 뒤 건청궁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그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황태손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진옥룡. 그대가 보기엔 어떻소?”

“한왕 전하요?”

황태손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광은 간단하게 답했다.

“자신을 숨길만 한 참을성과 머리가 있으신 분 같네요.”

“성품은 쉽게 변하는 게 아니지. 나도 그렇게 보오. 부지휘사도 그럴 테고.”

“…….”

곁에 있던 부지휘사가 무언으로 긍정했다.

황태손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한왕 전하는 황상께서 황위에 오르시기 전, 역도들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우셨소. 허나 전례와 다르게 번왕(藩王)이 아니라 친왕(親王)으로 책봉됐소이다.”

왕이라고 다 같은 왕이 아니었다.

번왕은 본인이 다스릴 수 있는 봉토(封土)를 하사받지만, 친왕은 왕이라는 칭호만 받는 허울뿐인 작위였다.

“황상께서 경계하시는 건가요?”

“하하.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비슷하오.”

황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 태조(太祖)에 의해 연왕(燕王)으로 봉해져 하북성의 군권을 쥐고 있다가 조카인 황태손 주윤문을 죽이고 천하를 거머쥔 게 영락제 자신 아닌가?

자신의 대에서 그런 일이 또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차남 주고후는 물론 삼남 주고수까지 조간왕(趙簡王)으로 책봉해 황궁 근처에 거처를 마련해 줬다.

미안하거나 아껴서가 아니라 가까이 두고 감시하기 위해서.

오늘 부른 것도 그런 이유인 게 분명했다.

“속내를 확인하고 차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려고 하시는 거겠네요.”

“내 생각도 그렇소.”

“한왕께선 불만이 많으시겠어요.”

“내색은 안 하시지만 그렇겠지.”

“조간왕께서도 그러실 거고요. 그분은 벌써 오신 건가?”

“한왕 전하보다 거처가 먼 곳에 있으니 나중에 오실 것이오. 들어갑시다.”

어느새 건청궁에 도착한 그들은 다른 방에서 대기하게 됐다.

황태손은 이맛살을 모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광은 아까 먹었던 산해진미들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황태손 곁에 은신해 있던 응삼이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진옥룡.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진옥룡께서 오신 걸 사부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아. 흑서(黑鼠)? 뭐래?

응삼의 전음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당장 진옥룡께 달려가 존안을 우러러보며 만세를 외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잠깐. 걔가 그런 식으로 말했어?

-그렇습니다.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어렸을 땐 나름 대가 셌던 놈인데. 나이를 먹으니까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 건가? 무슨 놈의 미사여구를 이렇게 많이 붙여?’

정광의 눈치를 보던 응삼이 전음을 이었다.

-말씀드리기 황공하오나 주위의 이목 때문에 고심하고 있습니다. 진옥룡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거동은 할 수 있게 됐지만 황궁 고수들을 속이며 움직일 정도는…….

-못나서 못 온다는 거네.

-…….

-그래서. 나보고 와달라고?

응삼의 전음이 빨라졌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시간을 조금만 더 주셨으면 합니다.

-북천호가(北天扈家)의 자칭 흑암표류살객(黑暗漂流殺客)께서 그래서야 쓰나. 알아서 오라고 해. 축시(丑時)가 지나기 전에.

-하, 하오나…….

-너도 알잖아. 그 녀석이 지금 꾀부리고 있다는 걸. 거동만 겨우 해? 투명암혼마공(透明暗魂魔功)이 언제부터 육신에만 의지했다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래. 너는 언제 손봐줄까?

-지, 진옥룡!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귀 따갑게 왜 이래. 때리는 거 말고. 불안정한 네 마공을 치료해 주는 거.

-……죄송합니다. 사부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좋아. 그럼 그때 보자고.

수작을 부린 흑서를 어떻게 단죄할까 생각하던 정광은 곧 지루함을 느꼈다.

-응삼아. 심심해서 그러는데 황궁 얘기 좀 해볼래? 황족과 관계된 것들로.

-아, 알겠습니다.

응삼은 두려움을 억누르며 자신이 아는 것들을 얘기했다.

덕분에 정광은 지루한 대기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충분히 들었다 싶었을 때, 황태손과 함께 황제를 알현하게 됐다.

‘이런.’

정광은 황제의 안색을 살피고 내심 고개를 저었다.

‘낮에 봤을 때보다 더 안 좋아졌네. 진짜 오래 못 가겠어.’

병필태감을 비롯한 노고수들에게 추궁과혈을 받고 있는데도 그랬다.

하지만 황제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위엄이 담겨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폐하. 이 서신을 보시옵소서.”

황제는 황태손이 바친 팽만소의 서신을 읽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재물을 풀어 민심을 안정시키겠다? 네 가슴에 상처를 남긴 죄로 쫓아냈던 팽만소가 기특한 생각을 했구나. 마음에 들어.”

“모두 황상의 성은 덕분입니다.”

“객쩍은 소리는 됐다. 그가 너를 아끼는 걸 짐이 모를까. 팽가가 다른 토호들을 설득할 수 있게 힘을 실어줘야겠군.”

황제의 시선이 정광에게 향했다.

“무림맹도 움직일 것 같느냐?”

“아마도요.”

“필요한 건?”

“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네요. 그냥 토사구팽만 안 하시면…….”

“됐다. 그만하거라.”

“안 하실 거죠?”

“…….”

황제는 정광을 노려보다가 무겁게 다짐했다.

“짐은 공과를 분명히 다룬다. 무림맹이 뜻을 정하면 칙명(勅命)을 내려 명문화하마. 모용 일족과 낭인 도당에게 그랬듯이.”

“감사합니다. 그분들은 어떻게 됐나요?”

“네가 말한 장소로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그곳에 있다면 짐의 명을 받들어 장성 쪽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잘됐네요.”

정광은 모용세가와 낭왕 무리를 걱정하진 않았다.

‘화살받이로 쓰거나 막 굴릴 리는 없지.’

연유야 어찌 됐든 무림칠대세가에 속하는 명가 중의 명가가 대명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그런 이들을 소모품으로 쓴다는 인상을 세상 사람들에게 줘서야 되겠는가?

낭인들이야 비교적 편하게 써먹겠지만 군부 출신인 자들이 적지 않은 데다 경험 또한 많으니 어떻게든 알아서 하리라.

정광이 아무 불만 없는 얼굴로 가만히 있자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너와 대화를 하면 이상하게 피곤하다. 그만 가거라.”

“네, 폐하. 좋은 꿈 꾸세요.”

“…….”

“그럼 이만.”

정광은 황태손, 부지휘사와 함께 단본궁(端本宮)으로 돌아왔다.

퇴궐할 시간이 된 부지휘사가 정광에게 간곡히 청했다.

“진옥룡. 피곤하겠지만 저하를 잘 부탁하오.”

“물론이죠. 내일 봬요.”

정광은 부지휘사가 떠나자마자 황태손에게 제안했다.

“술이나 한잔하시죠. 황궁에 왔는데 진미만 먹고 명주를 못 마셨네요.”

황태손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싶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지 않소. 내 몸 상태도 그렇고.”

그가 이렇게 나올 것이란 걸 알았기에 정광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이런.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저하 몫까지 마실게요.”

“음? 그러고도 나를 지킬 수 있겠소?”

“물론이죠.”

황태손은 정광을 믿었기에 쾌히 승낙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진옥룡의 방에 주안상을 넣으라 이르겠소. 즐겁게 마시고 내일 봅시다.”

황태손은 약조를 지켰다.

정광이 침상에 누워 뒹굴뒹굴하는데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엄청난 주안상이 들어왔다.

‘그래. 이래야 황궁이지.’

정광은 바로 혜진이 있는 방으로 가서 물었다.

“명주가 왔는데. 운기조식 다 끝나셨죠?”

명주라니.

안 끝났어도 끝내야 할 상황 아닌가!

“물론입니다, 단주.”

정광은 혜진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한동안 술을 들이붓던 혜진은 더 늦기 전에 할 말을 했다.

“단주. 저를 왜 데려오신 겁니까?”

“네?”

“제 능력으로 황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아 묻는 겁니다.”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후기지수 중 최강자로 꼽히는 구룡사봉의 일원이면 뭐 하는가.

여기는 엄청난 고수들이 득실거리는 황궁인 것을.

정광도 인정했다.

“그렇긴 하죠. 그래도 주량으로 겨루면 그 누구한테도 안 밀리실걸요?”

“……하아.”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죠.”

“무슨 말씀입니까?”

“아직 확실하진 않은데 때가 되면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그때까지 괜한 생각 말고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세요.”

혜진의 눈이 빛났다.

“단주께서 허언을 하실 리 없지요. 그렇게 알고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네. 그럼 나머지는 소저 방으로 들고 가서 드시죠.”

혜진은 기꺼이 그랬다.

홀로 남은 정광은 길게 기지개를 켠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선객은 보냈고. 다음 차례네.”

왼팔에 차고 있던 항마주를 풀어 내려놓고 내공을 끌어올려 실내를 감쌌다.

“뭐 해? 꽤 오래 기다렸잖아. 나와.”

“…….”

“이제 도망도 못 가게 됐는데 뭘 망설여?”

“…….”

천장에 검은 그림자가 맺히더니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늙은 노인이었다.

정광의 눈이 커졌다.

“어라? 흑서가 맞긴 한데. 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길래 그 모양이 된 거야? 왼뺨의 상처는 또 뭐고. 중원에 와서 당한 거야?”

왼뺨이 짓뭉개진 노인이 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마, 말도 안 돼. 얼굴도 목소리도 다르거늘. 어떻게 그런 걸…… 정녕 그분이란 말인가?”

정광은 피식 웃어 보인 뒤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혼(魂)을 감싸고 있던 선기(仙氣)를 거둬내고 그 속에 묻혀 있던 마혼(魔魂)을 꺼냈다.

천하마도(天下魔道)의 종주(宗主)라 할 수 있는 압도적인 마기(魔氣)가 일어나 정광의 전신을 마(魔)로 물들였다.

정광은 칠흑보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노인을 응시했다.

“아직도 내 면전에서 서 있다니. 노망이라도 났냐?”

“커헉!”

노인이 검게 죽은피를 토하며 오체투지(五體投地)했다.

“소인, 흑서. 만마(萬魔)의 지존(至尊)이신 진천마를 뵙…… 끄윽!”

정광은 노인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린 후 하얗게 웃었다.

“노망난 건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일단 맞고 시작하자. 불만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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