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29화 (328/569)

2부 58화

어디서 본 듯한

정광 일행을 안내하던 진화는 조용한 곳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 자오와 혜진에게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동창(東廠) 첩형(貼刑) 진화라고 합니다. 자금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진화의 대단한 신분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황궁으로 오는 길에 정광에게 듣긴 했으나 이렇게 목소리가 작을 줄이야.

정광이 피식 웃으며 그들을 점잖게 나무랐다.

“두 분도 인사하셔야죠. 실례잖아요.”

평상시와 달리 혜진이 먼저 말했다.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불취검이라 합니다.”

자오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아직도 그 별호를? 왜?’

의문은 순간이었다.

무림에서 오랜 시간 동안 구르며 수많은 경험을 쌓은 자오 아닌가.

총명한 혜진이 타당한 이유 없이 이럴 리 있나.

그 역시 태연한 어조로 요녕에서 쓰던 별호를 입에 올렸다.

“진 공공(公公). 저도 사과드리겠습니다. 각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진화는 만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교봉(敎鳳)과 다설범협(多舌凡俠)이셨군요.”

“……!”

“놀라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정사대전(正邪大戰)이 끝나고 진옥룡과 함께 사라진 사람은 두 분밖에 없지 않습니까.”

“…….”

“불취검과 각응은 진옥룡이 아니면 말이 되지 않는 천하유람단주라는 기인과 함께 요녕에서 불쑥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두 분일 거라 생각하는 건 당연한 결과지요.”

“…….”

가만히 듣고 있던 정광이 감탄했다.

“와. 시시콜콜한 걸 다 아시네요. 강호에 귀가 많으신가 봐요.”

진화가 빙그레 웃었다.

“강호의 일은 동창이 전담하고 있는지라 이런저런 얘기가 많이 들어오는 편이지요.”

“그렇구나. 제 평판은 어떤데요?”

진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갑자기 그런 곤란한 질문을 하시는지 궁금하군요.”

“곤란하다뇨? 왜죠?”

진화가 묘한 눈빛으로 정광을 주시하자 혜진이 입을 열었다.

“진 첩형. 요녕에서 오래 있다 보니 습관이 되어 그랬을 뿐입니다.”

정광이 덧붙였다.

“이왕 습관이 된 거, 불취검으로 계속 가죠. 그게 더 잘 어울리기도 하고. 안 그래요, 진 공공?”

“…….”

진화는 정광을 빤히 보다가 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붉은 입술을 부드럽게 휘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혜진이 아니라 정광이 두 손을 매만지며 답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허어. 무섭게 왜 그러십니까?”

“그냥 습관인데요.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죠?”

“당분간 금의위 소속으로 황궁에 계시게 됐으니 그분들과 안면을 익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네요.”

“이쪽입니다. 가시지요.”

진화는 정광 일행을 이끌고 큰 전각으로 향했다.

금의위를 상징하는 짙은 주황색 관복을 입은 사내들이 진화의 얼굴을 확인하고 들여보내 줬다.

넓은 내부에 홀로 앉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던 건장한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진화가 노인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지휘사(指揮使)를 뵙습니다.”

“오셨는가, 진 첩형.”

진화의 작은 목소리가 익숙한 걸까?

지휘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뒤 정광에게 시선을 옮겼다.

“과연. 듣던 대로군.”

“뭐가요?”

“말투도 그래.”

“누가 제 험담을 했나요?”

“칭찬도 들었지. 셋째가 널 극찬하더구나.”

“안목이 있으신 분이네요.”

지휘사의 눈에 냉랭한 빛이 맺혔다.

“글쎄. 그런 녀석이 삐끗해서 청해성 같은 변방으로 쫓겨나 십 년이 넘게 박혀 있을까? 중앙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는데도 한낱 여인 때문에 거부하고?”

“네?”

지휘사는 정광의 왼손 중지(中指)에 끼워져 있는 거무튀튀한 철환(鐵環)을 가리켰다.

“네게 그 인장(印章)을 준 녀석을 말하는 게다.”

“아. 청해성주님요? 지휘사님께서 그분 부친 되세요?”

“형이다.”

“……어쩐지. 젊어 보이시더라.”

“내용과 다르게 늦게 말하는구나.”

“통주연가(通州燕家)는 정말 명가네요. 성주에, 금의위 지휘사에. 다른 분들도 대단한 지위에 계시겠죠?”

“소문과 달리 배려라는 걸 할 줄 아는군. 너무 어색해서 안 하느니만 못하지만.”

지휘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자오와 혜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진 첩형이 부탁해서 소기(小旗) 직은 줬다만. 왜 역용을 하고 있는 것이냐?”

요녕에서 했던 것을 정광이 안 풀어줘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정광은 다르게 답했다.

“불취검은 예쁘고 각응은 흉악하게 생겨서요. 눈에 띄는 게 싫어 제가 그렇게 했죠.”

지휘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겨우 그런 이유로? 네가 제일 눈에 띄지 않느냐? 날 속이는 건 현명한 짓이 아니다.”

“사실 각응은 그렇게까지 흉악하게 생기진 않았어요.”

“…….”

“진짠데.”

지휘사는 정광을 노려보며 나직이 경고했다.

“가벼운 건 넘어가 주마. 큰 건 안 돼.”

“이제 가도 될까요?”

“아니.”

지휘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히 섰다.

그리고 절도 있게 두 손을 모았다.

“작게는 제수(弟嫂)를 치료해 주고, 크게는 요녕을 안정시켜 줘서 고맙네. 끝까지 잘 부탁하네.”

“네?”

난데없는 말에 정광이 황당해하는 사이, 지휘사는 포권을 풀고 사람을 불렀다.

금의위 무관이 나타나 정광에게 상자를 건넸다.

“이게 뭐죠?”

지휘사는 의자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며 답했다.

“금의위 관복이다. 너희들을 모르는 이들이 많으니 함께 들어 있는 검은 띠를 어깨에 매어라. 그러면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있을 게야.”

겨우 그거라고?

정광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아니, 고맙다고 하시길래 전표라도 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요.”

“제수를 치료한 건 셋째가 보답했고 요녕을 안정시킨 건 황상께서 치하하셨거늘, 내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이냐?”

정광은 속으로 탄식했다.

맞는 말이지만 사람이 정이 있어야지, 이렇게 계산적일 수 있나.

청해성에 눌러앉은 청해성주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이모의 건강 때문이 아니라 이 까탈스러운 양반 때문에 거기 있는 거구나.’

정광도 지휘사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만.”

전각을 나와 황태손의 거처인 단본궁(端本宮)으로 갔다.

지휘사에게 받은 금의위 관복으로 환복하고 어깨띠까지 매었다.

‘비단이라 입을 만하네.’

그리 나쁘지는 않아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진화가 칭찬했다.

“훌륭하십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옷맵시가 아니라 지휘사를 진옥룡처럼 편하게 상대하는 이를 본 적이 없어서 그럽니다.”

“저도 영 불편하던데요.”

“하하. 지휘사가 더 불편해하셨습니다만.”

“그럼 비긴 것으로 치죠. 또 갈 데가 있나요?”

“곧 황태손 저하께서 돌아오실 테니 쉬고 계십시오. 그리고…….”

진화는 자오와 혜진을 슬쩍 봤다.

“제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역용술이군요.”

“괜찮은 편이죠.”

“허나 황궁에는 지휘사 못지않은 고수들이 있습니다. 아까처럼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제가 잘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정광은 진화의 일머리에 만족했다.

“각응과 불취검으로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진화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덧붙였다.

“그러니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죠.”

정광은 멀어져 가는 진화의 뒷모습을 보며 내심 웃었다.

‘눈치가 빨라. 그래서 더 편하네.’

황궁과 가까워질수록 굳어져 가던 혜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소 싫어하던 불취검이라는 별호로 자신을 소개하던 건 또 어떻고.

‘출생의 비밀이 있는 것처럼 아미파 노승들이 말하더니만. 황실 쪽 사람이었구나.’

누군지 알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밀약이 어디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 혹시라도 혜진의 친부가 밀약의 일원이면 손을 쓰기 좀 그렇지 않은가.

‘못할 건 없지만 모르고 처리하는 게 찜찜함이 안 남지.’

그때, 혜진이 뭔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단주. 실은…….”

“굳이 말할 필요 없어요. 혜진 소저는 혜진 소저니까요. 자오는 어떻게 생각해요?”

자오의 머리가 눈부시게 회전했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혜진 소저는 황실에서 버림받은 사생아인가.’

정광조차 혜진을 배려해 그냥 묻어버리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과장되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혜진 소저가 설령 황상의 따님이라 해도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정광이 황당해했다.

“그건 큰 문제인데. 혜진 소저. 설마?”

“……아닙니다.”

시커멓게 죽었던 자오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것 보십시오, 단주. 아니, 어쨌든 아니라 하셨으니 다행입니다. 그보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천하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괜히 안 좋은 기억을 꺼내 봐야 마음만 상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요. 그러니 혜진 소저는 마음을 굳게 먹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혜진의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부드럽게 풀렸다.

결국 그녀는 웃음을 참으며 자오를 만류하게 됐다.

“그만하셔도 됩니다.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아닙니다. 얘기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조금만 더…….”

혜진은 정광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단주.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그보다 남장이 잘 어울리시네요.”

여인이 무관이 될 순 없기에 남장을 했는데, 머리를 틀어 올리고 검은 관모를 쓰자 안 그래도 성깔 있어 보이던 인상이 더 진해졌다.

혜진은 동경으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뒤 한숨을 쉬었다.

“왜 하필 이런 얼굴로 역용하셨던 겁니까?”

“그게 편하잖아요. 사람들이 알아서 한 수 접어주고.”

자오가 끼어들었다.

“단주. 혜진 소저. 제가 아까 못다 한 말이 있는데…….”

세 사람은 꽤 오랫동안 떠들며 웃었다.

단본궁의 주인이 올 때까지.

피곤한 얼굴로 돌아온 황태손은 정광을 가만히 보다가 손뼉을 쳤다.

“진옥룡. 관복이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소이다. 쭉 입는 게 좋을 것 같소만.”

“자꾸 그러시면 도망갈 거예요.”

“농이외다, 농. 하하. 이분들은 누구신지?”

황태손이 높임말을 쓰며 묻자 자오와 혜진이 정중히 인사했다.

황태손은 자오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빛냈다.

“허어. 각응은 새로운 별호인가 보군. 다설범협 아니시오? 얼굴이 그래서 못 알아봤소이다.”

“저하. 보잘것없는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황태손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그대가 일전에 들려준 얘기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미소를 짓게 되오. 부지휘사, 그렇지 않소이까?”

시립해 있던 부지휘사가 떨떠름한 얼굴로 동의했다.

“네, 저하. 조금 천한 부분도 있으나 쉽게 들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닙니다.”

“하하하. 그런 부분이 있어서 더 재밌는 것을. 이번에도 잘 부탁하오.”

자오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맡겨주십시오, 저하.”

“고맙소. 그리고 불취검이라 하셨소이까?”

혜진이 예를 취했다.

“그렇습니다, 저하.”

“인상만 봐도 강해 보이시는구려. 이 부족한 사람을 지켜주러 와줘서 고맙소. 잘 부탁하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충 인사가 끝나자 정광이 황태손에게 물었다.

“저녁 안 드세요?”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밖에 있느냐?”

내시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저하. 바로 올리겠습니다.”

“사람이 많으니 넉넉히 올리거라. 시중은 필요 없다.”

“하, 하오나…….”

황태손이 힘주어 명했다.

“지금은 비상시국이야.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나를 지키는 이들과 함께 먹어야 해.”

“아, 알겠습니다. 저하.”

다소 억지스러운 말이었으나 황태손의 명을 어찌 거역할까.

얼마 안 가 엄청난 요리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내시가 일일이 기미(氣味)를 보려 하는데 정광이 물었다.

“독이 있나 확인하시려는 건가요?”

“그, 그렇습니다.”

“와. 진짜 이런 걸 하는구나. 그러다 귀천하시면 어떡하려고요. 제가 할게요.”

황태손이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진옥룡이라면 확실하지. 독의 대가이다 못해 요깃거리로 먹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인데.”

“하, 하오나 저하.”

내시가 곤란해하자 황태손이 다독였다.

“진옥룡의 말이 옳다. 행여나 독이 들어있으면 네 아까운 목숨이 스러질 것 아니냐. 편하게 지켜보거라. 진옥룡, 부탁하오.”

“맡겨주세요, 저하.”

정광은 의욕 충만한 얼굴로 나섰다.

‘오길 잘했어. 궁중요리를 먹게 될 줄이야.’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 부지기수라 제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고기 요리부터 한 점 삼켰다.

정광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건!”

내시가 놀라 외쳤다.

“독입니까!”

정광은 꼭꼭 씹어 꿀꺽 삼킨 뒤 감탄했다.

“아뇨. 진짜 맛있네요.”

진심이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가히 최고의 요리라 할 정도로!

“다른 것들도 확인할게요.”

정광이 입과 손을 현란하게 움직이자 내시와 부지휘사를 제외한 모두가 크게 웃었다.

얼마 안 가 모든 요리를 기미한 정광이 진지한 얼굴로 선언했다.

“이상 없네요. 차린 것도 많은데 많이 드시죠.”

황태손이 장난스레 받아쳤다.

“다행이구려. 내 진옥룡을 믿고 최선을 다하리다. 다른 분들도 함께합시다.”

“네! 저하!”

유쾌한 식사였다.

배를 잔뜩 채운 정광은 품속에서 팽만소의 서신을 꺼내 황태손에게 건넸다.

“음? 이게 무엇이오?”

“팽 노야께서 전해 드리라고 해서요.”

“아! 사부님이!”

“저하께서 읽으신 뒤 마음에 드시면 황상께 올려주시길 바라시더라고요.”

“황상께?”

황태손은 진지한 눈으로 서신을 읽었다.

그의 눈에 기쁨의 빛이 맺혔다.

“좋소. 아주 좋은 방안이오.”

“마음에 드세요?”

“그렇다마다. 이럴 때가 아니지. 황상께 당장 올려야겠소이다.”

“가시죠 그럼.”

정광은 황태손을 밀착 경호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아. 저하, 잠시만요.”

떠나기 전, 자오와 혜진에게 할 일을 알려줬다.

“각응은 팽가로 돌아가셨다가 내일 아침에 오세요. 동방장님은 한동안 계속 주무시게 두고요.”

“알겠습니다, 단주.”

“불취검은 마음에 드시는 방을 고르고 운기조식하면서 기다리시고요. 저하, 괜찮죠?”

“물론이외다. 편히 고르시오.”

“자. 그럼 가시죠, 저하.”

정광은 황태손, 부지휘사와 함께 황제가 있는 건청궁(乾淸宮)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건청궁으로 향하던 무리와 마주쳤다.

그들의 중심엔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의 중년인이 있었다.

정광의 눈이 빛났다.

‘이것 봐라? 혜진 소저와 눈매가 똑같잖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