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7화
무적의 병기
동창(東廠)의 정식 명칭은 동집사창(東輯事廠)으로, 황제의 명을 받들어 법과 상관없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 악명 높은 조직이었다.
심지어 필요할 땐, 역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악명이 자자한 금의위(錦衣衛)에서 인력을 차출할 권한도 있을 정도.
대놓고 말하면 대명(大明)에서 제일 막 나가는 조직이랄까.
그들은 흑색 비단옷을 입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놈은 뭐야?’
정광은 동창의 상징인 흑색 비단옷을 걸친 진화라는 환관을 빤히 바라봤다.
무공 실력은 합격점을 줄 만하다만. 무시무시한 짓을 일삼는 놈이면 성품도 그에 걸맞아야지, 몇 번이나 도전해서 간신히 목소리를 내고 얼굴을 붉히는 꼴이라니.
“진 공공(公公)이라 하셨죠?”
“편하게 진화라고 부르십시오.”
“그럴 순 없죠. 동창 소속 맞으세요?”
“맞습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전음을 하는 게 낫지.
처음 들었을 때처럼 극도로 작아진 목소리였지만, 그럴 거라 예상했기에 황당함 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직위는 어떻게 되시는데요?”
황궁이라는 복마전에서 내시로 살아오며 몸에 밴 습성일까.
훤칠한 체격의 진화가 몸을 작게 웅크리며 주인의 덕을 칭송했다.
“황상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어 얼마 전에 첩형(貼刑)이 됐습니다.”
“오. 높은 분이셨구나.”
정광이 살짝 놀랄 만큼 첩형이라는 직위는 가벼운 게 아니었다.
병필태감(秉筆太監)이 겸직하는 제독동창(提督東廠) 바로 밑의 자리인 것이다.
그래서 더 의문이 깊어졌다.
‘동창의 이인자가 목소리조차 제대로 못 내는 놈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답은 하나였다.
“작은 목소리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능력이 뛰어나신가 보네요.”
능력 얘기를 하자 진화의 표정이 달라졌다.
미소를 머금으며 여전히 작지만 당당하게 답했다.
“다행히 그런 편입니다.”
“하긴. 병필태감께서 보내셨으니 그러시겠죠. 믿고 일 얘기를 해볼까요?”
“말씀하십시오.”
“상황이 어떤가요?”
“궁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궁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궁외부터요.”
진화는 바로 입을 열었다.
“먼저 호칭부터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관직에 뜻이 없으시니 금의위 천호가 아니라 진옥룡이라 칭해도 되겠습니까?”
“세심하시구나. 네. 그게 좋아요.”
“감사합니다. 요녕은 진옥룡께서 정리해 주셔서 한시름 놓았습니다만 몽고가 걱정입니다. 곧 남하할 기세입니다.”
“혹시 요녕성도 지켜보고 계셨어요?”
진화가 빙그레 웃었다.
“호남성 장사(長沙)에서처럼 가까이 가지는 못했지만 전체적인 상황은 조사했지요. 야단났다고 생각했는데 진옥룡께서 처리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황상께서는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계셨단 얘기네요. 그래서 많이 퍼주신 건가?”
그놈의 황상이 뭔지.
안 그래도 작은 진화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황제 폐하는 공과를 확실히 나눠 다루시는 성군(聖君)이십니다. 인재를 아끼시는 마음 또한 바다처럼 넓으시기에…….”
“확실히 통은 크시죠. 몽고와는 전쟁을 벌일 테니 제가 할 일은 없고. 명교(明敎)는 어떤가요?”
진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과거 어여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신 태조(太祖)께서 천하를 어지럽히는 그들을 단죄하셨지요.”
“네? 제가 알기론 실컷 이용하시다가 토사구팽…….”
진화는 정광의 예상대로 확실히 능력 있는 자였다.
정광의 대역무도한 망언을 재빨리 자르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백방으로 쫓았습니다만. 유의미한 흔적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뿌리를 뽑은 줄 알았지요. 헌데 아직도 암약하고 있다니.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밀약(密約)의 다른 축들은요?”
“그 역시 진옥룡께서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몰랐을 겁니다. 여러 통로를 통해 알아볼 것이나, 쉽게 장담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네요.”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정광이 고개를 저었다.
“워낙 비밀스러운 자들이니 어쩔 수 없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나 짚이는 게 아예 없는 건 아닌 것이…….”
진화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정광은 인상을 쓰며 청력을 키웠다.
“진천뢰(震天雷)를 빼돌린 흉수가 밀약에 포함돼 있겠지요.”
“사마련을 이용해 천하를 혼란하게 한다. 그럴 것 같긴 해요.”
“놈들이 꼬리를 자른 지 오래라 어찌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다시 한번 제대로 파볼 생각입니다.”
“외부에선 뭐라 하죠?”
“무슨 말씀이신지?”
“황상께서 제갈세가와 남궁세가에게 흉수를 알아보라 하셨잖아요.”
진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입을 열지는 않았을 텐데 모르시는 게 없군요. 소득이 없긴 마찬가지입니다.”
“궁내는 어때요?”
“지금까지 별다른 징후는 없었습니다만 그와 상관없이 철통같은 경계에 들어갈 것입니다.”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명교가 됐든 다른 축들이 됐든. 황궁을 습격할 거라 보시는 거죠?”
“그럴 공산이 큽니다. 몽고와 모용세가로 외부에서 두드리는 것만으론 부족한 감이 있지요. 내부에서도 일을 벌일 거라 사료됩니다.”
진화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진옥룡께서도 그렇게 예상하셔서 황궁에 오신 것 아닙니까?”
“겸사겸사요. 한동안 황궁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네요.”
진화의 미소가 짙어졌다.
“황상께서 이미 허하셨습니다. 진옥룡께선 본디 도사이신 데다 황상께서 믿으시니 크게 무리는 없는 일이지요.”
정광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숙소는요? 좋은가요?”
“하하. 그렇고말고요. 황태손 저하의 침실 바로 옆 방입니다.”
“저하를 지켜 드리란 뜻이네요.”
진화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입에 담기도 두려운 말입니다만. 만약 그들이 자객을 보낸다면…….”
말끝을 흐려도 정광은 알아들었다.
황제 아니면 황태손을 노릴 거란 의미 아닌가.
‘황태손이 더 우선순위겠지.’
직접 만나본바, 황제는 삼도천을 건너기 직전이었다.
병필태감 같은 대단한 고수가 내공을 불어넣어야 말을 할 수 있는 처지인데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까?
‘황제는 곧 죽을 거고. 황태자의 상세도 엉망이니 황태손만 죽이면 끝이잖아.’
정말 그렇게 된다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나리라.
정광은 어차피 그러려던 참이었기에 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하죠. 팽가에 돌아가 필요한 걸 챙겨올게요.”
“그동안 관복을 준비하겠습니다.”
“동료 두 분을 데려오고 싶은데. 저처럼 병기를 지닐 수 있는 관직을 내려주실 수 있나요?”
“금의위 지휘사(指揮使)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소기(小旗)쯤 되는 직함은 주실 겁니다.”
“권력이란 게 꼭 나쁘진 않네요.”
“허나 황궁에서 주무시는 건 힘들 겁니다.”
“네? 황궁이 금남의 구역인 건 아는데. 한 분은 여인이고 다른 한 분은 아직 여인의 손도 못 잡아보신 것 같은 숙맥인데도요?”
“여인은 가능합니다만 사내는 안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황제가 아무리 통이 크다 해도 정광에게 내린 파격적인 혜택을 다른 이에게 또 내릴 리는 없었다.
정광이라고 별수 있나.
받아들일 수밖에.
“할 수 없죠. 자오는 팽가에서 오가야겠네.”
“불편하시겠지만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형을 돌리려다가 멈췄다.
“진 공공. 밀약이 황제 폐하나 황태손 저하를 노릴 것 같다고 하셨죠?”
“그랬습니다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대단한 건 아니고요.”
정광은 진화의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두 분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떤 분이 황위를 이으시게 되죠?”
“……!”
질문을 받고 놀라기도 잠시.
진화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정광은 팽가에 오자마자 숙소로 향했다.
철혈무쌍용갑을 입고 운룡과 소운룡을 챙기자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야 어색함이 사라졌네.’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팽만소가 들이닥쳤다.
“수고했네. 뭐라 하시던가?”
“다 같이 모여서 얘기하죠.”
소가주 팽강웅과 이공자 팽강휘, 안주인 양희인까지 모였다.
자오, 혜진, 모용수수도 함께였는데 정광의 말이 이어질수록 모두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그렇게 몇 가지를 뺀 정광의 설명이 끝나자 팽강웅이 무겁게 중얼거렸다.
“보통 일이 아니군. 몽고와의 전쟁이야 그렇다 쳐도 황궁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니.”
“확실한 건 아니고 예상이죠, 예상.”
“그럴 가능성이 크니 자네가 직접 나선 것 아닌가? 자신 있는가?”
정광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해보면 알겠죠. 하하.”
팽강웅은 정광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자네의 말이 맞아. 본가도 한 손 거들겠네. 할아버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황태손을 끔찍이 아끼는 팽만소가 가만히 있을 리 있나.
노안을 번뜩이며 찬성했다.
“네 뜻이 옳다. 전력을 다해야 해. 진옥룡, 우리가 무엇을 하면 되겠나?”
“글쎄요. 황궁 내의 방비는 더 늘려봐야 의미가 없을 거고. 몽고와의 전쟁에 참전하시면 손해가 막심할 텐데.”
정광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차라리 황제 폐하께 미리 말씀드린 후, 재물과 곡식을 풀어 하북성에 거주하는 어려운 이들을 도우시죠. 황상께서 내리시는 성은이라 하면서요.”
하북성의 대토호(大土豪)인 하북팽가의 곳간 열쇠를 쥔 양희인이 미소지었다.
“뒤숭숭한 민심을 안정시키라는 말씀이군요.”
“네.”
“일리가 있습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것 또한 중요한 일이지요. 강웅이 네 생각은 어떻느냐?”
팽강웅도 동의했다.
“어머님 말씀이 맞습니다. 돈은 많이 나가겠지만 본가의 인명 피해 없이 황실에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묘수입니다.”
팽강웅은 시선을 정광에게 돌렸다.
“다른 토호들도 설득해 보겠네. 그럼 폐하께 군자금을 진상할 수도 있을 거야. 관과 무림을 나눌 상황이 아니지 않나.”
“그렇긴 하죠.”
황군이 밀리면 다음은 무림이었다.
답신이 오려면 며칠 더 걸리겠지만 무림맹도 그렇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그럼 일단 그렇게 하고. 황궁에 변고가 생기면 지척에 있는 본가가 구원하는 것으로 하지.”
정광이 씩 웃었다.
“잘 풀리면 팽가의 반석은 더 단단해지겠네요.”
“지금의 것들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하네.”
“무림맹에 이 내용을 또 알리실 거죠?”
“물론일세.”
“황제 폐하께 드리는 서신은 연이 있는 태상가주님께서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팽만소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 나는 죄인인데 어찌…….”
“이번에 공을 세워 명예를 회복하시면 되죠. 황태손 저하께서도 그러길 바라실걸요?”
고민하던 팽만소가 얼굴을 굳히며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지. 기회를 줘서 고맙네.”
“뭘요. 저도 사마련과 장강수로연맹에 알려야 하니까 서신부터 쓰죠.”
서신 작성은 금방 끝났다.
정광은 황제에게 전할 서신을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그럼 나중에 봬요. 자오, 혜진 소저. 가시죠.”
“네! 단주!”
훌쩍 떠나려는 정광을 모용수수가 잡았다.
“단주. 나는 무엇을 해야 하오?”
정광은 내심 탄식했다.
‘팽강휘와 더 싸워서 정들어야지. 이걸 질문이라고.’
그대로 말해주려고 입을 여는데 팽강웅이 전음을 보냈다.
-내가 알아서 하지. 자네가 나서면 될 일도 안 돼.
-네? 무슨 의미죠?
-자네는 여심을 모르지 않나?
-무슨 그런 실례되는 말씀을. 제가 왜 몰라요?
팽강웅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받아쳤다.
-그렇게 잘 아는데 그 외모에 그 무공으로 그 흔한 염문 하나 없어?
-무량수불. 도사가 어찌 그런 짓을.
-육식과 음주는 즐기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잘 보게나.
팽강웅은 모용수수에게 청했다.
“모용 소저. 강휘가 일이 너무 많아 그러는데 도와주실 수 있겠소? 말들을 써야 하는 일이라 모용 소저의 도움이 절실하오.”
일이 너무 많다니?
말은 또 왜?
어리둥절한 얼굴로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던 팽강휘는 상황을 눈치챈 양희인이 매섭게 노려보자 목을 움츠렸다.
팽강웅을 보느라 그런 모습들을 보지 못한 모용수수는 정광에게 의견을 구했다.
“단주. 소가주께서 청하시는데 내가 어찌해야겠소?”
“…….”
정광은 판을 엎을까 고민하다가 받아들였다.
하북팽가와 모용세가가 이어져야 이득 아닌가.
“말씀대로 이공자를 도우시는 게 좋겠네요. 필요한 게 생기면 그때 부탁드릴게요.”
“알겠소. 그렇게 합시다.”
정광은 자오, 혜진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가죠.”
“네! 단주!”
황궁엔 금방 도착했다.
성문을 통과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금의위 북진무사 천호임을 증명하는 주황색 목패는 무적의 병기나 다름없었다.
평복을 입은 정광 일행에게 고압적으로 나오던 위사들이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헉!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이제 아셨으니 괜찮아요. 들어가도 되죠?”
“물론입니다!”
허나 자오와 혜진은 아니었다.
위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정광에게 설명했다.
“천호께서 신원을 보증하셨으니 출입에는 문제가 없지만 병기는 안 됩니다.”
이 문제도 곧 해결됐다.
어떻게 알았는지, 진화가 날듯이 달려와 자오와 혜진에게 목패를 내밀었다.
두 목패에는 똑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금의위(錦衣衛) 북진무사(北鎭撫司) 소기(小旗)]
“헉!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결국 정광 일행은 모든 병기를 지닌 채 자금성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자오는 쉼 없이 감탄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허어. 자금성, 자금성 하더니. 정말 대단하구나. 이게 사람이 만든 것이란 말인가.’
그와 달리 혜진의 마음은 복잡미묘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