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5화
엮이고 싶지 않은 위험한 위인
신강(新疆)의 패자(覇者)이자 천하마도(天下魔道)의 종주(宗主).
단일 세력으로는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는 천마신교(天魔神敎)의 지존(至尊)이었던 정광이다.
중원이 신강보다 훨씬 더 번화하고 강대한 문파와 가문이 많다 해도 전생의 집이었던 천마신궁(天魔神宮)과 비교하면 글쎄.
구대문파고 칠대세가고 간에 ‘제법 사는 집’ 정도?
무림맹도 그리 큰 차이는 없었다.
최근에 들렸던 모용세가는 일개 가문인 주제에 크기는 작으나 성을 쌓고 살았으니 ‘잘 사는 집’이라 할 수 있었지만, 천마신교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건…….’
정광은 거대한 자금성(紫禁城)을 훑어보며 감탄했다.
‘진짜 부자네. 황제의 집이라 그런가. 다르긴 다르구나.’
워낙 훔쳐갈 게 많은 곳이라 그런지 방비도 단단했다.
십오장(十五丈)쯤 되는 너비의 해자(垓字)로 둘러싸인 데다 삼장(三丈)이 훌쩍 넘는 높이의 성벽이 내부를 가리고 있었다.
거기에 수많은 위사(衛士)까지.
이런 장애물들을 넘어 자금성을 털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본능적으로 고민하는데…….
부지휘사(副指揮使)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많이 놀라셨소?”
“네?”
“이해하오.”
부지휘사의 표정이 경건해졌다.
“황상의 위엄은 천하를 비추는 법. 자금성을 직접 보니 그걸 절실히 알게 된 것 아니오? 경외심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외다.”
정광은 솔직히 말했다.
“확실히 놀랍기는 하네요.”
이렇게 많은 돈을 때려 박아서 자신의 위엄을 표현하는 위인이 있을 줄이야.
그걸 보고 경외하는 자도 있고.
‘힘이 있으면 그럴 필요 없는데.’
전생의 정광은 그랬다.
자신만의 힘으로 모두를 굴복시키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뭐 사람마다 다르니까. 존중해 주자.’
그래도 이건 너무 과했다.
정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자금성의 위용에 압도된 것이라 지레짐작한 부지휘사가 부드럽게 권했다.
“그 뜻은 마음에 품고 어서 갑시다. 여기부턴 하마(下馬) 해서 걸어야 하오.”
정광은 기가 찼다.
‘뜻을 마음에 뭐?’
황제의 녹(祿)을 받아먹고 사는 관리라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정정하기도 귀찮아 그의 말에 따랐다.
“네.”
말고삐를 쥐고 해자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어림군(御林軍) 부지휘사가 신원을 보증해 줬기에 간단한 몸수색만 받고 위사들의 검문을 통과했다.
말을 맡기고 자금성의 동문(東門)인 동화문(東華門)으로 들어가자 별천지가 펼쳐졌다.
‘진짜 돈이 썩어나네.’
뭐가 이렇게 화려하면서도 웅장한지.
은근히 정광의 안색을 살피던 부지휘사가 자랑스러운 어조로 설명했다.
“천하 곳곳에서 남목(楠木), 대리석, 금전(金甎) 등 귀한 자재를 들여와 십 년이 넘게 지었소이다. 정확히 따지면 십사 년 동안. 천하에 다시 없을 역사(役事)라 할 수 있소.”
“와아. 총 얼마예요?”
“……그것까진…….”
“인건비 빼고, 재료비만이라도 알려주시죠.”
부지휘사가 그런 걸 알 리 있나.
평소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가 재촉했다.
“서두릅시다.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그들은 한동안 걸어 황태손의 거처인 단본궁(端本宮)에 이르렀다.
그리고 크지만 수수한 방에서 황태손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빙그레 웃었다.
“이게 누구신가. 천하를 떨어 울리는 진옥룡 아니시오?”
“안녕하세요, 저하. 잘 계셨어요?”
정광이 황궁 예법을 알 리 있나.
설령 안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고.
황태손 뒤에 시립한 부지휘사가 미간을 좁혔다.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황태손이 돌아보며 웃었다.
“하하. 부지휘사. 진옥룡이외다.”
“죄송합니다, 저하. 그의 성품을 익히 알면서도 그만…….”
“오늘만큼은 예법을 벗어던지고 편하게 얘기하고 싶으니 잠시 자리를 피해주시구려.”
“저하!”
“나는 부지휘사를 믿소. 허나 다른 이도 아닌 진옥룡 아니오?”
정광이 마음먹으면 부지휘사가 있든 없든 자신은 죽을 거란 의미.
그것을 체면까지 세워주며 말하자 부지휘사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저하.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부지휘사가 물러나자 황태손은 정광을 놀렸다.
“내게 잘 있었냐고 했소? 그대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느라 잘 못 있었소만.”
“과장이 심하시네요.”
“허어. 과장이라니. 일 년 안에 찾아와 칠주야 정도 머물며 함께 술을 즐기기로 해놓고 왜 이제야 왔소? 날짜를 잘못 헤아리진 않았을 텐데?”
정광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천하가 뒤숭숭하더라고요. 괜히 황궁에 왔다가 저하께서 오해를 받으시면 어쩌나 해서 억지로 참았죠.”
황태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거야 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지라 더 놀릴 수가 없군.”
역사를 돌이켜 보면 황위(皇位)에 오르길 기다리다가 지쳐 나라가 혼란한 시기를 기회로 삼아 역모를 일으키는 황태자나 황태손도 있지 않은가.
황태손은 턱을 쓰다듬으며 작게 푸념했다.
“솔직히 상황이 안 좋긴 하오. 장성(長城) 쪽에서 달자(韃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연일 올라오고 있소.”
“저런.”
“황상께서 몇 번이나 정벌을 하시고 이간책을 펼쳤는데도 그러다니. 참 질긴 자들이외다.”
정광은 근심이 가득한 황태손에게 짐을 하나 더 지웠다.
“저하. 몽고도 문제지만 역모를 꾀하는 자들이 있어요.”
“……!”
“그중 일부는 내부를 정리해 개과천선했고요.”
“…….”
황태손은 정광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무겁게 청했다.
“그대가 그런 중요한 사안을 농으로 하지는 않을 터. 자세히 말해주시겠소? 꼭 들어야겠소이다.”
“물론이죠. 그러려고 알현을 청했는데요.”
정광은 모용세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했다.
굳은 얼굴로 가만히 듣고 있던 황태손이 나직이 탄식했다.
“오이라트가 달자들의 대칸을 속여 대명(大明)을 치려고 한다? 거기에 무림세가와 낭인 무리까지…….”
정광이 위로했다.
“모용세가는 일부 사람들이 그랬던 거고 진압됐잖아요. 낭인들도 돌아섰고.”
황태손은 쓴웃음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먼저 이 말부터 해야겠군. 정말 고맙소. 내 절대 잊지 않으리다.”
“네. 기대할게요.”
정광다운 말에 황태손이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 그래도 좋소. 정말 그럴 셈이니까.”
“모용세가와 낭인들이 충성심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데 받아주실 거죠?”
“…….”
황태손은 잠시 고민하다가 선을 확실히 그었다.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오.”
“황제 폐하를 말씀하시는 거네요.”
“그렇소.”
“저하의 생각은 어떠시죠?”
황태손의 눈이 빛났다.
거래 대상이 황제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걸 알아채서였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아까와 별 차이가 없었다.
“황군(皇軍)의 힘을 믿지만 거들고 싶어 하는 손들이 있는데 굳이 내칠 필요는 없지. 허나 이건 내 생각일 뿐, 그것을 정할 권한은 오롯이 황상께 있소이다.”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황태손은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직접 겪어본 바로도 그랬고.
황제와 황태자가 오늘내일하니 네가 약조해 주면 된다고 말해봐야 똑같은 대답을 듣게 될 게 분명했다.
‘하긴. 안 좋은 소문이라도 돌면 목숨이 위험해질 테니 몸을 사리긴 해야겠지.’
권력이란 부자간에도 나누지 못하는 것.
황가(皇家)는 오죽할까.
정광은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저하. 하나 더 말씀드릴 게 있거든요.”
“말해보시오.”
모용세가가 사치품 교역을 통해 이민족들의 힘을 조정하는 사업 방안.
그것에 대해 설명한 뒤 덧붙였다.
부지휘사에게 배운 표현으로.
“어떠세요? 저하의 사부이신 팽 어르신도 황상의 위엄이 한층 더 빛나게 될 것이라며 좋은 방안이라 칭찬하셨는데.”
“으음.”
“모용세가주가 말하길 허락해 주시기만 하면 견마지로를 다해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했어요.”
“…….”
“황상께서 이루신 태평성세에 미력한 도움이나마 되고자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의 일부를 진상하길 원한다면서요.”
잠시 침묵하던 황태손이 빙그레 웃었다.
“확실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방안이오. 그것까지 더하면 황상께서 모용세가를 용서하실지도 모르지. 허나…….”
황태손의 눈에 차가운 빛이 맺혔다.
“그들에게 요녕을 암묵적으로 맡겨왔지만 그런 안 좋은 일이 생겼소. 앞으론 조금 달라질 것이외다.”
요녕에 관(官)의 힘을 강화할 것이라는 얘기.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되도록 살살해 주시면 더 충성할 것 같네요.”
황태손이 피식 웃었다.
“천하의 누가 헛심을 쓰고 싶겠소? 나도 평탄하게 흘러가길 원하오.”
“저하께서 황상께 간언하시겠다는 말씀이죠?”
“물론이오. 밀약(密約)이라는 조직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모르는 상황. 게다가 명교(明敎)라니…….”
황태손의 눈이 어둡게 물들었다.
태조(太祖)가 대명을 건국하는 데 있어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지만, 사교로 규정하고 토사구팽했었거늘. 그 이름이 긴 세월을 지나 다시 나올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황태손은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다시 드러난 그의 눈은 담담하게 변해 있었다.
“낭인들도 쓸모 있게 써야겠지. 전하께선 와병 중이시니, 내 직접 황상을 찾아뵈리다.”
“황상보다 황태자 전하의 건강이 더 안 좋으신가 보네요.”
황태손은 씁쓸하게 웃었다.
“안 좋은 얘기는 여기까지 합시다. 부지휘사. 그만 들어오시오.”
“소리 안 나가게 내공으로 막고 있었는데 풀까요?”
“깜빡했군. 하하. 부탁하오.”
황태손은 부지휘사를 불러 이것저것 지시했다.
정광은 황태손 옆 허공을 보며 전음으로 인사했다.
-응삼(鷹三)아. 잘 있었어?
황실의 적통을 이은 자들을 은밀히 지키는 비밀수신호위, 황실수호암응(皇室守護暗鷹) 삼호가 바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말투가 바뀌었네. 네 사부, 북천호가(北天扈家)의 흑서(黑鼠) 그놈이 나에 대해 말한 건가?
-그, 그렇습니다.
-흑서 상태는 어떤데?
-진천…….
-진옥룡.
-……지, 진옥룡께서 알려주셨던 대로 하니 투명암혼마공(透明暗魂魔功)의 부작용이 거의 사라져 거동은 하실 수 있게 됐습니다.
-너는? 진기가 미세하게 새어나가던 거 어때?
-진옥룡께서 치료해 주신 뒤론 문제없었습니다.
-그거, 임시방편인 거 알지?
응삼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정광이 그렇게 경고하지 않았던가.
-약조했던 대로 완전히 고칠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흑서보고 찾아오라고 해. 너도 시간 내서 들르고.
-알겠습니다.
황태손이 황제를 만나고 올 때까지 정광은 다른 방에서 잠시 머무르게 됐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뭔가 좀 허전하기도 했고.
‘전부 놓고 와서 그런가.’
어림군 부지휘사가 보증한다 해도 외인이 병기를 지닌 채 자금성에 들어올 수는 없었다.
운룡, 소운룡, 비룡, 심지어 철혈무쌍용갑까지 팽가에 벗어놓고 온 터라 몸은 가벼웠지만 기분이 영 어색했다.
‘이번 한 번만 와서 끝날 상황도 아니고. 황태손에게 병기 허가증 같은 걸 써달라고 해야겠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황태손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드러누워 잠이나 잘까 싶은 마음이 들 무렵이 돼서야 사람이 찾아왔다.
아까 황태손과 나갔던 부지휘사였다.
“혼자 오셨어요?”
정광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부지휘사가 빠르게 답했다.
“진옥룡, 황상께서 그대를 찾으시오.”
“네? 왜요?”
부지휘사는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재촉했다.
“나도 모르오. 예법을 알려 드릴 테니 지금 바로 익히시오. 그대가 잘못되는 건 황태손 저하도, 나도 원치 않소이다.”
정광의 이마에 골이 생겼다.
‘갈까 말까.’
안 갔다간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이 모두 무산될 게 뻔했다.
그렇다고 가자니 마음이 별로 안 내켰고.
현 황제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수왕에게선 장강에 얽힌 비사(秘事)를 들었고.
이걸 떠올려도 저걸 떠올려 봐도 황제는 별로 엮이고 싶지 않은 위험한 위인이었다.
‘연왕이었던 시절만 해도 그렇지.’
조카인 주윤문이 이끄는 황군에게서 도주해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황을 뒤집고 황위에 올랐다.
‘황제가 된 뒤엔 더 그랬고.’
연경(燕京)으로 천도해 자금성을 건설했다. 대운하를 보수하고 장성을 쌓았다. 몽고를 연이어 정벌하는가 하면 환관 정화를 시켜 대항해를 하게 했다.
전부 돈을 미친 듯이 퍼부어야 하는 것들뿐이었다. 그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나 그 모든 걸 해내고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이대로 끝내긴 아까우니 어떤 인간인지 구경이나 해볼까.’
* * *
황제가 기다리고 있는 곳은 신료들과 국사를 논하는 봉천전(奉天殿) 같은 곳이 아니라 자신의 침소가 있는 건청궁(乾淸宮)이었다.
건청궁 이 층에서 황태손과 마주 앉아 있던 그는 정광이 나타나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명했다.
“황궁 예법을 지킬 필요는 없다.”
음. 이건 마음에 들었다.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이것도 시원시원했고.
황제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과 달리, 시리도록 차가운 위엄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정광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천하의 평안과 제 행복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