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3화
내 집처럼 편하게
정광은 자신을 안고 매달린 팽수빈 때문에 황당해하다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얘가 대체 왜 이러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으나 나름 전해져 오는 게 있어서였다.
‘못 본 사이에 키도 훌쩍 큰 데다 무게도 무거워졌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팽가의 피가 흐르는 아이이니만큼 신체적 능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질 거라 예상했지만,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힘이 부쩍 붙은 데다 무게중심도 잘 잡혀 있는 것 아닌가!
노력에는 그만한 보상이 따라야 하는 법.
팽수빈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고 밀어낸 뒤, 품속에서 전표를 꺼내 작은 손에 쥐여줬다.
“반갑다. 잘했고. 이걸로 맛있는 거라도 사 먹어.”
“……사부님?”
“왜? 적어?”
그럴 리가 있나.
적긴커녕 너무 많았다.
게다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해후상봉(邂逅相逢)한 사제(師弟)의 정을 나눠야 할 이때, 대뜸 돈을 주다니?
허나 팽수빈은 무척 영특했기에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사부셨지.’
감정 표현이 서툴러 많은 오해를 받는 사부였다.
반갑다. 잘했고.
이 두 마디의 말로 미루어보아 반가운 마음과 그간의 성취에 대한 칭찬의 의미로 건네주는 것이 분명했다.
바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심스레 받았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뭘 그런 걸 가지고.”
“항상 몸가짐을 바로 하며 사부님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더 열심히 수련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천하제이인이 되고야 말겠습니다.”
지켜보던 동방장이 경악했다.
천하제이인이 되겠다는 선언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사부의 명성이 뭐가 어째? 거기에 누를 끼치지 않게 노력하겠다고?’
악독함 그 자체인 정광과 달리 팽수빈이라는 꼬마는 의젓하기 그지없었다.
장차 어떤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도 정광과 비교해 보면 선행일 터.
오히려 칭송받을 판에 무슨 놈의 누를 끼칠 수 있겠는가!
‘그 사부에 그 제자라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가 내심 한탄하든 말든 정광은 팽수빈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칭찬했다.
“협(俠)을 행하겠다느니 어쨌느니 하는 말은 안 하게 됐구나. 아주 바르게 컸어.”
“협이란 입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사부님처럼 가슴으로 품고 행해야 하는 것. 제자 또한 그럴 것입니다.”
“이런. 아직 멀었네. 어쨌든 들어가자. 같이 온 분들 소개는 나중에 해줄게.”
“네, 사부님.”
정광은 일행을 돌아보며 손짓했다.
“가시죠. 안내해 드릴게요.”
정광은 모두를 이끌고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한번 머물렀던 곳이라 그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한동안 걷다 보니 장대한 체격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게 보였다.
팽가의 태상가주인 팽만소였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자네가 방문했다는 얘기를 듣고 급히 나왔는데 정말이군. 반갑네.”
“소가주와 이공자는 계세요?”
“강웅이는 요즘 일이 너무 많아 집무실에 박혀 있고 강휘는 잠시 밖에 나갔네만. 무슨 일인가?”
“수빈이는 일단 봤고. 어르신과 소가주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나와 강웅이에게?”
팽만소의 표정이 굳었다.
“어째 느낌이 심상치 않은데.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
“그렇긴 하죠.”
“이럴 때가 아니군. 가세나.”
“아. 제 일행, 전에 묵었던 숙소를 써도 될까요?”
“물론이지.”
팽만소가 정광 일행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네. 인사는 후에 하는 것으로 하고 푹 쉬시게. 수빈아, 네가 안내해 드리거라.”
“네, 할아버님.”
정광은 팽만소와 함께 팽강웅의 집무실로 갔다.
다소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팽강웅이 천천히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했다.
“어서 오시게. 다시 보게 되어 기쁘군.”
“잘 계셨어요?”
“덕분에. 확인해 보겠는가?”
팽강웅이 거리낌 없이 손목을 내밀었다.
정광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맥문(脈門)을 잡고 기를 흘려 넣었다.
그렇게 팽강웅의 내부를 살핀 뒤 손을 놓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간 체조법을 열심히 수련하셨나 보네요.”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사실이네.”
“상단전에 심었던 기가 두터워졌어요. 좋은데요.”
“집중력이 늘고 의지도 바로 섰어. 아까도 말했네만 전부 자네 덕분이야.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뭘요. 예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더 큰 사람이 되셔서 보답하시면 되는데요.”
“명심하고 있네. 그리고…….”
팽강웅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게 사술을 펼쳤던 놈들을 징치해 주어 고맙네.”
사마련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팽만소도 감사를 표했다.
“자네에게 너무 큰 은혜를 입었어. 뭐든 말하게나. 팽가는 자네를 도울 거야.”
“그럼 편하게 말씀드릴게요.”
정광은 팽가 조손에게 요녕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듣던 그들은 정광의 말이 끝나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으음.”
먼저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연 건 팽강웅이었다.
“할아버님. 제가 먼저 말해도 되겠습니까?”
“가주가 부재중일 때는 소가주가 본가를 이끌어야 한다. 나는 보좌할 뿐이야. 당연한 일이니 부담 없이 얘기하거라.”
팽강웅은 팽만소에게 예를 표하고 정광을 바라봤다.
“밀약(密約)이라는 조직이 천하를 전복하려고 움직이고 있다니. 자네가 말한 것이니 확실하겠지. 관과 무림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 법이지만,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어. 민초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을 걸세.”
민초들은 물론이오, 천하가 도탄에 빠질 게 뻔했다.
역사상 황조(皇朝)가 바뀔 때마다 그랬으니까.
정광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번에도 그렇겠죠. 팽가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막아야 해요.”
“그런 면도 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네. 더구나 본가는 무림뿐만 아니라 군부(軍部)와도 연이 깊지. 자네의 청이 아니더라도 나서야 할 일이야. 허나 문제가 있네.”
“모용세가야 정리했고. 몽고와 명교(明敎)를 제외한 나머지 축들이 어떤 세력인지 모르는 거요?”
“그렇지. 또 어떤 대단한 자들이 밀약에 속해 있는지 솔직히 두려울 정도야. 무림맹이야 당연하고, 다른 이들도 끌어들여야 하네.”
“장강수로연맹과 사마련을 말씀하시는 거네요.”
“자네라면 방법이 있을 것 같네만. 맞는가?”
“원래 그럴 생각이었어요.”
정광은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비책을 풀어놓았다.
팽강웅은 감탄을 숨기지 못하고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괜한 소리를 했군. 그럼 됐네. 본가는 자네를 따를 걸세. 아버님도 당연히 동의하실 거야.”
팽강웅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할아버님, 소손은 더 말할 게 없습니다.”
팽만소가 빙그레 웃었다.
“네 얘기가 전부 옳다. 나야말로 말할 게 없구나. 다만…….”
팽만소는 정광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밀약이라는 조직의 끝이 어디까지 뻗어 있을지 모르네. 손을 대려면 도중에 멈추지 말고 반드시 참초제근(斬草除根) 해야 해. 그럴 의지가 있는가?”
정광이 씩 웃었다.
“당연하죠. 천하를 유람하는 데 방해가 될뿐더러 제가 벌이고 있는 사업들을 지켜야 하거든요.”
“좋아. 바로 사람을 보내 황태손 저하께 알현을 청하겠네. 지척이니 금방 답신을 주실 게야. 그때까지 편히 쉬게나.”
“아까 말씀드렸던 모용세가와의 연계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팽만소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혼인동맹을 맺고 벌이자는 사업 말이군. 모용세가가 공을 세워 불충했던 과오를 씻기만 하면 거리낄 게 없지. 본가에도 큰 이득이 되는 사업이니까.”
“잘됐네요.”
“허나 모용수수라는 아이가 강휘에게 마음을 열어야 가능한 일 아닌가? 강휘 또한 그렇고.”
“그거야 보면 알겠죠. 여기까지라도 된 게 어디에요.”
“…….”
팽가 조손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가에서 긍정적인 의견이 오간 것만 해도 좋은 일이었다.
설사 혼인동맹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조건을 절충하다 보면 어떤 식으로라든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팽만소가 할 일을 정리했다.
“빨리 움직여야겠군. 각자 서신을 쓰세.”
팽만소는 황태손에게.
팽강웅은 무림맹에.
정광은 사마련과 장강수로연맹에 보낼 서신을 썼다.
먼저 다 써놓고 정광이 쓰는 걸 지켜보던 팽만소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기기묘묘한 암어(暗語)가 있다니. 그들과 미리 정해놓은 것인가?”
“그냥 글자 쓰는 건데요.”
“……허어. 그들이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은데.”
“글씨가 조금 옆으로 기울었을 뿐인데요 뭐.”
“……조금?”
다리를 저는 노인을 팰 수도 없고.
정광은 깨끗하게 인정했다.
“어차피 소가주의 서신과 함께 무림맹으로 같이 보내야 하잖아요. 사마련이나 장강수로연맹과 오가는 전서구는 거기에만 있으니까요.”
“무림맹엔 자네 필체를 알아보는 이가 있다는 말인가?”
“제갈 군사께선 전에 알아보셨거든요.”
“과연 신기제갈(神機諸葛)이로다.”
정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어르신. 다 쓰셨으면 그만 나가셔서 일 보시죠.”
* * *
“여기에서 쉬시면 됩니다.”
팽수빈이 큰 전각을 가리키며 말하자 자오가 부드럽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팽 소저.”
“이 목소리는…… 자오 대협이셨군요. 말씀 낮춰주십시오. 사부님의 지인께서 계속 그러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단주의 하나뿐인 고명제자(高名弟子)께 어찌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팽수빈이 항복했다.
“더 말씀드리는 것도 결례일 것 같습니다. 대협께서 편한 대로 하십시오.”
“이게 편합니다. 그간 몰라보게 자라셨군요. 한층 더 의젓해지셨습니다.”
자오는 팽수빈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그녀도 그랬던 걸까?
밝은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다시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전처럼 강호 얘기를 들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진심이었다.
강호를 동경하는 어린 소녀에게는 놀라운 내용뿐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자오가 크게 기뻐하며 기꺼이 받아들였다.
“물론이지요. 제 장기가 그것 아닙니까? 연무장으로 갈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누구신지…….”
자세히 알려줄 겨를이 있나.
마음이 급해진 자오는 눈부신 속도로 소개를 끝냈다.
그리고 팽수빈이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하자 그녀를 재촉해 자리를 옮기며 입을 놀렸다.
“오래전 한 살수문파(殺手門派)에 작은 소년이 있었습니다. 용모는 평범하나 자질만큼은 범상치 않아 사형들의 질시를 받았지요. 숨만 쉬어도 괴롭힘을 당할 지경이었습니다. 허나 소년의 심성은 무척 착했기에 그들을 원망하지 않고…….”
자오와 팽수빈이 점점 멀어져 갔다.
마침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동방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이제야 살겠네. 무슨 놈의 말이 저리 많아?”
그의 시선이 혜진에게 향했다.
“각응(角鷹)은 무슨. 다설범협(多舌凡俠)인가 뭔가 하는 떠버리였네. 주군은 역용을 풀었는데 니들은 왜 아직도 그러고 있어?”
“부끄럽지만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네 정체는 뭔데?”
혜진이 예의 있게 답했다.
“아미파 속가제자인 혜진이라 합니다.”
“아하. 나찰검(羅刹劍)이 너였군. 과연. 그렇게 불릴 만도 해.”
“……나찰검이라니요? 직접 말하긴 뭐하지만 제 별호는 교봉(敎鳳)입니다.”
“그건 옛날얘기고. 나찰검이라는 소문이 돈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래? 허. 표정 봐라. 마음에 안 들어? 불취검(不醉劍)보단 낫잖아.”
낫기는 무슨.
나찰검이나 불취검이나 난형난제 아닌가?
혜진이 황당한 표정을 짓자 동방장이 놀렸다.
“큭큭. 둘 다 싫구나. 한 건 잡았네. 앞으로 번갈아 불러야지.”
“체통을 지키십시오.”
“내가 그런 게 어딨다고. 모용 꼬마야. 안 그래?”
모용수수에게 시선이 모였다.
그녀의 고개가 크게 움직였다.
“그렇긴 하오.”
“거봐. 역시 그렇…… 잠깐. 어째 기분이 좀 나쁘네. 꼬마야. 나한테 불만 있냐?”
동방장이 계속 떠들었으나 모용수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단주가 진옥룡이라는 거야 결국엔 눈치채게 됐지만 불취검이 교봉일 줄이야.’
자신과 비슷한 연배인데도 오라비인 비룡(飛龍) 모용상현과 함께 묶여 불리는 강자 아닌가.
그녀의 대단한 무위가 이해됐다.
‘역시 중원은 넓구나. 오기를 잘했어.’
하루빨리 강자들과 겨뤄보고 싶었다.
마침 그런 존재가 앞에 있는 상황.
요녕에서는 그럴 시간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교봉. 하나 부탁드려도 되겠소?”
혜진에게 물었건만, 동방장이 끼어들었다.
“야. 내 말은 안 들리냐? 앙? 아까 주군의 반반한 얼굴을 보고 정신이라도 나간 거야?”
모용수수가 진지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그런 곱상한 얼굴엔 관심 없소. 중요한 얘기 중이니 방해하지 말아주시오.”
또 한 번 무시당한 동방장이 길길이 날뛰었다.
“미친!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한번 해볼까? 응?”
모용수수가 차갑게 노려보며 응수하려는 그때!
스으윽-
그녀의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군가 뒤에 나타난 것이다.
‘이제야 기척을 느끼다니!’
모용수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억지로 펴며 돌아섰다.
넓고 울퉁불퉁한 가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렇게 크다고?’
고개를 서서히 들어 올렸다.
한참 올리고 나서야 사내의 용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광과 전혀 다른 험악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청년이 그녀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포권하며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처음 뵙겠소. 팽강휘라 하오. 단주의 일행이라 들었소이다. 내 집처럼 편하게 지내주시오.”
표정이 영 안 좋았던 혜진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팽 소협. 오랜만입니다.”
팽강휘의 눈이 커졌다.
“이 목소리는? 혜진 소저?”
“하하. 맞습니다.”
“허어. 왜 역용을 하고 있소? 몰라보지 않았소이까.”
“사정이 있어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하하. 단주와 함께하셨으니 그럴 수도 있겠구려. 괜찮으니 개의치 마시오.”
팽강휘를 멍하니 보던 동방장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미친. 북방장 그 곰탱이가 삼십 년쯤 젊어져서 돌아온 줄 알았네.”
모용수수도 무척 놀랐다.
‘팽강휘? 단주가 소개해 준다던 그 사람 아닌가!’
동시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 집처럼 편하게 지내 달라던 팽강휘의 의례적인 말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